멈추자, 살피자, 생각하자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좌파는 아직 철저하게 바닥까지 떨어지는 위기를 맞지 않았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는 제 친구 알랭 바디우의 입장에 동의합니다. 바디우가 레닌의 말을 인용하며 말했죠.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이 말은 20세기 이래 지속되어온 좌파가 비록 영광스러운 순간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와는 절연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중략) 문제는 경제적 필요에 의해 사회민주주의 체제가 종말을 향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중략) 1990년도가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은 모든 사회적 모델들, 즉 공산주의 국가형태, 조금 완화된 사회민주주의 형태, 직접 민주주의 모델 등은 모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진정 모든 것을 새롭게 사유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변하는, 완전히 새로운 자본주의를 생각해야한 합니다...(중략) 오늘날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란 다소간의 불교적 색체가 깃든 쾌락주의입니다. "너 자신을 실현하라. 실험하라. 만족하라. 삶을 만끽하라" 등의 것들은 오늘날 일반화된 쾌락주의입니다. ...고정된 정체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131-133


정치적 올바름과 나르시시즘적 경제논리

 

섹스는 할 수 있지만 사랑은 하지 않는다. 열정적인 애정은 없으니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 등. 우리는 마치 3-4세기에 쇠퇴해가던 로마 제국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이것은 매우 슬픈 것이죠. 윌리엄 예이츠의 유명한 시구가 생각납니다. 자신의 시 the second coming에서 그는 "가장 선한 자들은 모든 신념을 잃고, 반면 가장 악한 자들은 격정에 차있다"고 말했지요. 오늘날 정치에 있어 우리는 어디서 열정을 찾을 수 있습니까?  138

 

이방인의 시선

 

"내가 어렸을 때, 나는 외국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았다. 얼마나 어리석은 의식을 갖고 있느냐며 말이다. 그러고는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만약 우리의 오래된 사회규범 또한 외국인의 눈으로 보게 되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지요.  "보편적 선을 향한 유일하게 훌륭한 길은 우리 모두가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는 것이다"라는 문장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볼 때, 이방인의 시선으로 스스로를 보고 또 상상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이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사유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197

 

당대의 이론적 문제

 

오늘날 '인간됨'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유전자 조작이나 생태계 파괴 등은 인간됨에 대한 근본 개념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인간됨에 대한 정의를 다시 내리게 할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의 물리적 정신적 속성을 변화시키고 조작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죠. 이렇게 되면 우리는 한계를 넘어서 큰 힘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보다 더 종속적인 존재가 되고, 더 취약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라 할 수 있죠. 이러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우리는 이에 대한 그 어떠한 윤리적 규준 혹은 지침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206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구분에는 아주 분명한 문제가 놓여 있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 측면을 하나의 추상적인 문제로 합칠 수 있다면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인간 사유의 궁극적 과제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한계를 새로운 방식으로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207

 

불/가능한 것의 경계흐리기

 

냉소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이렇습니다. "맞아. 30년마다 혁명적 봉기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사람들은 우리가 무엇도 바꿀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어. 그러니 우리는 결국 다시 돌아가야돼"라고 말이죠. 예를 들어, 오늘날 프랑스의 어느 보수주의자도 "나도 68혁명 현장에 있었어. 나 또한 물론 시위를 했지. 하지만 후에 나는 현실주의자가 되었어"라고 솔직하게 고백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한 것'은 여전히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분명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경계를 흐려버리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방식으로 이를 재정의해야 합니다. 사유의 방식을 재정의하는 것, 그리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재사유하는 것 말입니다. 209


 

"공동선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궁극적 선은 무엇인가? 이는 물론 배제된 자들의 정치-사회적 침입과 복원이다. 지젝의 어법을 빌려 말하자면, 급진적 좌파는 이 세계에 배제된 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윤리적 결단을 이미 내린 상태이다. 자본주의적 삶에서 최상의 선은 물질적 삶의 안정이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표면적인 정치적 담론은 자본주의 체제의 근본은 손대지도 못하고 문화적 차이를 존중하는 투쟁 정도로 '정치적 올바름'을 어설프게 소비할 뿐이라고 지젝은 비판한다. 그렇기에 지젝은 자본주의 체제의 전복을 통해서 진정한 정치적 올바름을 실천할 수 있으며, 그것을 시도하는 정치-사회적 행위야말로 새로운 선의 범주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젝은 1990년 이후의 모든 것은 새롭게 사유되어야 하며, 대의를 잃어버린 세계 속에서 새로운 선, 다시 말해 새로운 대의를 찾는 것이 오늘날의 우리의 과업이라고 말한다. 선악의 초월이 아니라 도덕적 다수를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 이론 작업과 실천 행위야말로 오늘날의 좌파가 당면한 과제라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선은 해답이 아니라 "문제의 또 다른 이름"이 된다. 1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