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자, 살피자, 생각하자

사색의 삶

 

깊은심심함 - 향기를 시각화하는 데는 깊은 주의가 필요하다.

 

사색의 능력이 반드시 영원한 존재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니다. 떠다니는 것,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금세 사라져버리는 것이야말로 오직 깊은 사색적 주의 앞에서만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긴 것, 느린 것에 대한 접근 역시 오랫동안 머무를 줄 아는 사색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속의 형식 또는 지속의 상태는 과잉활동성 속에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34


 

컴퓨터는 긍정기계이다.

 

천재백치가 보통은 계산기밖에 해낼 수 없는 과제를 척척 해내는 것은 바로 부정성의 부재와 자폐적 자기 관련성 덕택이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사회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52


 

성과사회의 피로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분열적인 피로"라고 부른 바 있는 바로 그 피로다. "둘은 벌써 끝없이 서로에게서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각자 자기에게 가장 고유한 피로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것은 그러니까 우리의 피로가 아니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저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었다." 이런 분열적인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그토록 심한 피로 때문에 우리에게서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모든 공동의 삶, 모든 친밀함을,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66

 

눈 밝은 피로, 근본적 피로, 우리-피로

 

근본적 피로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 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영감을 준다. 그것은 정신이 태어나게 한다. ..짧고 빠른 과잉 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는 저 길고 느린 형식의 주의 말이다...."매일 저녁 여기 리나레스에서 나는 많은 꼬마 녀석들이 노곤해져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더 이상 탐욕도 없고 손에 움켜쥔 것도 없고 그저 놀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깊은 피로는 정체성의 조임쇠를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사물들은 반짝이고 어른거리면 가장자리가 흔들린다. 사물들은 더 불분명해지고 더 개방적으로 되면서 확고한 성질을 다소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런 특별한 무차별성으로 인해 우애의 분위기를 띠기 시작한다. 타자들과의 사이를 가르는 경직된 경계선은 거두어진다...."그렇게 우리는 - 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 앉아 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피로의 구름이, 에테를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 주고 있었다."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일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날은 피로의 날이다. 막간의 시간은 일이 없는 시간, 놀이의 시간으로 평화의 시간이다.

 

피로는 무장을 해제한다. 피로한 자의 길고 느린 시선 속에서 단호함은 태평함에 자리를 내준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우울증의 메카니즘

 

오늘난 성과주체가 앓는 우울증 등의 질환은 이렇게 내면화된 타자와의 갈등관계 또는 양가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우울증에는 아예 타자의 차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소진은 자주 우울증으로 귀결되거니와 이때 우울증을 유발하는 원인으로는 오히려 과도한 긴장과 과부하로 파괴적 특성까지 나타내는 과잉 자기 관계를 들 수 있는 것이다. 탈진과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간다.94

 

 

결코 저항적일 수 없는 가상공간,SNS

 

새로운 미디어와 커뮤니케이션 기술도 타자를 향한 존재의 두께를 더욱 줄여놓는다. 가상공간에서는 타자성과 타자의 저항성이 부족해진다. 가상공간에서 자아는 사실상 "현실원리"없이, 다시 말해 타자의 원리와 저항의 원리에 구애받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 가상현실 속의 상상적 공간에서 나르시스적 주체가 마주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다. 실재가 무엇보다도 그 저항성을 통해 존재감을 가진다면, 가상화와 디지털화의 과정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그러한 실재를 지워나간다. 실재는 두 가지 의미에서 우리를 붙잡는다. 즉 일을 중단시키고 저항하여 우리의 발목을 잡을 뿐만 아니다 기댈 수 있는 받침대로서 우리를 잡아주는 것이다.95

 

유대란 중력이 없는 우울증

 

과도한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강력한 유대의 능력을 잃어버린다. 우울증은 모든 유대를 끊어버린다. 슬픔은 대상과의 강력한 리비도적 유대관계에서 나오며 무엇보다도 그 점에서 우울증과 구별된다. 반면 우울증은 대상이 없고 따라서 지향점도 없다. 우울증은 멜랑콜리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다. 멜랑콜리는 어떤 상실의 체험 뒤에 온다. 따라서 멜랑콜리는 그나마 어떤 관계 속에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울증은 모든 관계와 유대에서 잘려나간 상태이다. 우울증에는 아무런 중력도 없다.96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

 

투쟁이 집단, 이데올로기, 계급 사이에서가 아니라 개인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은 성과주체의 위기에 그렇게 결정적인 요인은 아니다. 문제는 개인 사이의 경쟁 자체가 아니고 경쟁의 자기 관계적 성격이다. 그로 인해 경쟁은 절대적 경쟁으로 첨예화된다. 즉 성과주체는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 자기 자신의 그림자를 추월해야 한다는 파괴적인 강박 속에 빠지는 것이다. 자유를 가장한 이러한 자기 강요는 파국으로 끝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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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학으로 이상자아

 

복종적 주체가 초자아에게 예속된다면, 성과주체는 자신을 이상 자아에게 기투한다. 예속과 기투는 상이한 두 가지 존재 양식이다. 초자아에게서는 부정적 강제가 발생한다. 반면 이상 자아는 긍정적 강제력을 발휘한다. 초자아의 부정성은 자아의 자유를 제한하지만, 이상 자아를 향한 기투는 자유의 행위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아는 일단 도달 불가능한 이상 자아의 덫에 걸려들면 이상 자아로 인해 완전히 녹초가 되고 만다. 이때 현실의 자아와 이상 자아의 간극은 자학으로 이어진다.102

 

 

 

성과사회의 폭력성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그는 더 이상 어떤 예속적 본성을 지닌 주체가 아니다. 그는 자신을 긍정화하고 해방시켜 프로젝트가 된다. 하지만 주체(예속)에서 프로젝트 전환으로 폭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자에 의한 강제가 자유를 가장한 자기 강제로 대체될 따름이다. 이러한 발전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가 일정한 생산수준에 이르면,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그것은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성과사회는 자기 착취의 사회다. 성과주체는 완전히 타버릴 때까지 자기를 착취한다. 여기서 자학성이 생겨나며 그것은 드물지 않게 자살로까지 치닫는다. 프로젝트는 성과주체가 자기 자신에게 날리는 탄환임이 드러난다.103

 

아감벤의 호모사케르와 비교

 

성과사회의 한복판에서 아감벤은 주권사회를 기술하고 있다. 아감벤 사상의 시대착오적 성격은 여기서 기원한다. 그가 추적하고 폭로하는 폭력은 오로지 배제와 금지를 바탕으로 하는 부정성의 폭력에 국한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에 특징적인 긍정성의 폭력, 고갈과 포섭으로 표출되는 폭력은 아감벤의 시야를 벗어난다. 그는 이미 낡게 느껴지는 부정성의 세속화된 형식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는 까닭에 긍정성의 극단적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 오늘날의 폭력은 적대적인 이견에서보다는 순응적 합의에서 나온다....자기 착취는 기만적인 자유의 느낌을 동반하는 한에서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효율적이다. 착취자는 동시에 피착취자이기도 한다. 착취는 지배 없이 관철된다. 여기에서 자기 착취의 효율성이 생겨난다....이러한 역설적 자유로 인해 성과주체는 가해자이자 희생자이며 주인이자 노예가 된다. 자유와 폭력이 하나가 된다. 자기 자신의 주권자, 호모 리베를 자처하는 성과주체는 호모 사케르임이 밝혀진다. 성과사회의 주권자는 자기 자신의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109

 

활동과잉 인간에 대하여

 

니체라면 활동과잉의 인간을 역겨워했을 것이다. "거친 노동을 좋아하고 빠른 자, 새로운 자, 낯선 자에게 마음이 가는 모든 이들아. 너희는 참을성이 부족하구나. 너희의 부지런함은 자기 자신을 망가하려는 의지이며 도피다. 너희가 삶을 더 믿는다면 순간에 몸을 던지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하지만 너희는 내실이 부족해서 기다리지도 못한다-심지어 게으름을 부리지도 못하는구나!"112

 

 

벌거벗은 건강

 

 

건강에 대한 열광은 삶이 돈쪼가리처럼 벌거벗겨지고 어떤 서사적 내용도 어떤 가치도 갖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사회가 원자화되고 사회성이 마모되어감에 따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존해야 할 것은 오직 자아의 몸밖에 없다. 이상적 가치의 상실 이후에 남은 것은 자아의 전시가치와 더불어 건강가치뿐이다. 벌거벗은 생명은 모든 목적론, 건강해야 하는 이유를 제공하는 모든 목표 의식을 지워버린다. 건강은 자기 관계적으로 되며 목적 없는 공허한 합목적성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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