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 자산이라고 흔히 불리는 것들은 생산의 여러 과정들을 자본화하는 반면, 무형 자산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취득의 여러 과정들과 그 취득 과정에 관련된 여러 편의적 발명품들을 자본화하는 것으로서, 부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분배에 영향을 미칠 뿐이라고 할 수도 있다. 69
무형자산의 가장 일반적이고도 전형적인 종류가 '굿윌'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용어는 오늘날 대단히 다양한 종류의 차등적인 영업상의 유리함을 지칭하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이 말이 사업의 용어로 처음 쓰이게 된 것은 단골 고객이 그의 굿윌을 가지게 된 사업체에 관습적으로 의존한다는 뜻에서였다. 원래 신뢰와 상찬 같은 호의적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그런 의미는 사라지고 기업이 독점적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얻는 특별이익을 칭하는 것으로 확장되었다. 66-67
산업적 사업과 달리 영리사업적인 거래들 자체는 시간 소요의 문제가 아니다. 이 경우에 시간은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이 금전적 거래의 크기는 그 거래를 성사시키는 데에 들어간 시간과 어던 함수 관계도 없으며 거기에 생기는 이득도 그러하다. 87 이러한 종류의 거래에서 나오는 특수 이득이란 이미 투자된 부가 낳고 있는 수익 위에 덧붙여서 주어지는 일종의 보너스와 같은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건 마치 길바닥의 돈을 줍는 것과 같다.' 89
옛날 식 자본가-고용주가 산업 공동체의 기술적 효율성을 독점해버렸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현대의 금전적 거물들은 영리사업 공동체의 자본주의적 효율성을 독점해버린다. 이 자본주의 효율성이란 자본가-고용주가 그 물질적 장비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힘으로 삼아 산업 공동체를 꼬드겨서 그것의 생계유지에 필요한 만큼을 넘는 잉여 생산물을 물질적 장비의 소유자에게 넘겨주도록 이끌어내는 능력에 있다. 하지만 금전적 거물은 재화를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의 국면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고 또 망쳐버릴 수도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91 구식의 자본가-고용주는 공동체 전체의 수입을 거두어들여 그 금전적 거물에게 전달해주는 수탈과 이전의 도구, 즉 단순한 중개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상적인 경우라면 이 금전적 거물은 그 총수익 가운데에서 그 자본가-고용주가 계속 영업을 할 유인이 될 만큼만 그에게 수당으로 주어지도록 하고 나머지를 모두 가져가버리게 된다. 92
가장 공공 정신이 투철하며 가장 모범적인 신사들이 정력을 바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지만, 그들의 주장은 병아리들이 모두 알을 까고 나온 둥지에다가 계속 암탉을 눌러앉혀두려는 시대착오적인 시도에 불과하다. 현대의 공동체는 영리 활동의 원리들로 푹 젖어 들어 있지만, 그 원칙들이란 이제 구약의 율법과 같은 옛날 것에 불과하게 된 것이다. 93
(짬생각 1. - 보수-수구지향. 조선-동아일보를 좋아하는 분께 드리는 메모: 머리의 언어에 설득당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이미 단단히 몸의 기억에 매여있다는 것을, 향수에 대한 추억같은 가슴의 언어만 남아있다는 것을. 몸의 언어, 가슴의 언어가 당신을 흔들고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행여 당신이 믿는 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라는 합리가 조금이라도 스며든다면, 당신은 바뀔 수 있으리라. 지난 기억의 사진첩 속에 현실을 추려낼 수 있다면, 당신의 존재가 위태롭다는 것을 한번 더 느낄 수 있다면, 어쩌면 몸의 언어가 아니라 가슴의 언어나 몸의 언어라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조선-동아-중앙은 볼일볼 때 시간밖에 채워주지 못한다. 그 미망에서 화장실용이 아니라 이미 끙끙대며 보고 있는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간절한지? 쇼윈도우처럼 그렇게 보인다는 것을 한번이라도 그 시선을 의식해보면 어떨런지?)
소스타인 베블런의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를 읽다가
사회자체만큼이나 오래된 분업은 성, 지리, 개인적 재능 등에 내재한 차이로부터 생기는 것이고, 이른바 교역, 거래, 교환하려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은 전혀 그 근거가 의심스러운 것이다. 애덤스미스, 19세기 후반의 허버트 스펜서도 분업의 원리를 교역이나 교환과 동일시했으며, 그보다 50년 뒤 폰 미제스와 윌터 리프먼은 이 같은 오류를 되풀이했다. 정치경제학, 사회사, 정치철학 및 일반 사회학의 수많은 저술가들이 스미스의 전철을 밟아, 교환하는 미개인이라는 패러다임을 각자의 과학에서 공리로 확정했다. 62-3
사회공동체는 재난에 의해 그 자체가 붕괴되지 않는 한, 그 구성원들이 굶어죽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 같은 재난이 있을 때라도 경제적 이익은 개별적으로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위협받는다. 그래서 개인의 경제적 이익이 최고의 중요성을 갖지 않는다. 65 (흔적 2. - 당연하다고 생가하는 공리를 뒤집지 않는 이상, 종언이라는 말이 그 기원을 문제삼는 것처럼 지당한 것을 다시볼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생산과 분배에서 질서가 보증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주로 경제학과는 본래 무관한, 두가지 행위 원칙에 의해 주어진다. 그것은 호혜와 재분배이다. 이 원칙은 이윤동기의 결여 -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의 원칙 결여, 최소노력의 원리 결여, 특히 경제적 동기에 기초해서 분리된 명확한 제도의 결여라는 논점 위에 서 있다. 67 (흔적 3. - 혹 칼 폴라니도 수입을 하여 또다른 칼라니 교조주의가 되는 이가 없을까? 말한 것을 되풀이하며 맥락을 살피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긴밀한 관계에 조명을 비추이지 못하고, 그래야한다는 당위로만 말하는 것에 그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유행처럼 그 뿌리를 헤아리지 못해 써먹고 마는 것으로 끝나지는 않을까? 해석과 현실을 보는 눈이 부족하더라도 고구마 줄기처럼 이어이어 결실을 맺도록 뻗어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폴라니의 눈에 지금을 대입하는 것이 아니라 폴라니의 눈으로 지금을 연구하고 관찰하고 긴박하는 것이 어떨까? 조급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는가? 관점이 닳아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관점으로만 현실이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좀더 많고 다른 눈이 현실의 바다를 풍부히 볼 수 있는 것처럼 폴라니로 인해 지금을 달리 품어나갈 우리가 많이 생기는 것이 좋지 않은가? 그래서 폴라니를 다르게 볼 필요가 있지 않는가? 다르게 봤다면 오히려 칭찬하고 격려할 일은 아닌가? )
그러나 이러한 행위원리는 실제로 작용시키는 제도 없이는 효력을 가질 수 없다. 호혜와 재분배가 문서라든가 복잡한 행정조직 없이도 경제체계의 작동을 보증할 수 있는 것은 대칭성과 중심성이 있기 때문이다. 호혜에 있어 각 개인은 각각 다른 섬에 자기의 파트너를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 호혜의 관계는 눈에 띄게 인격화되어 있는 것이다. 부족의 분파들 사이나 거주지역 사이에도, 부족간의 관계에서도 대칭성의 패턴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인 주고받기에 의존하는 광범위한 호혜가 실현될 수 없을 것이다. 중심성도 재화와 용역의 징발, 저장 및 재분배에 길을 내준다. 사회조직이 상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어떠한 개인적인 경제적 동기도 작용할 필요가 없고, 개개인의 나태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68-9 ( 생각흔적 4.- 1. 증여, 포틀란치...어쩌면 우리가 모든 것을 이익을 중심에 넣고, 공기마시듯 당연히 생각하지만, 이것을 이익에 치환해서 그렇게 치밀하게 사유해본 적도 없다. 그저 선물의 개념으로만 환원하여 생각할 뿐, 치환된 호혜가 인간의 관계, 질 사회적, 정치적 행위를 맺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생각의 진도를 나가본 적도 없는 것이다. 돈 생각하듯 그렇게 치밀하게 해본다면 좀더 나은 관계-현실의 적응력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돈과 호혜로 저울질만한 생각질이 나올 것인가? 의무를 지우게 하려고 선물을 준다. 사회적 관계를 낚는 방법. 벌써 몸에 배인 것들이 주변에 있나?!! 어쩌면 대부분의 관계가 그러하지 않을 수도.... 2. 지나치다보니 짝을 짓는다는 말에 혹하여 돌아온다. 사회단체 회원간에 주기적은 순환은 어떨까? 각기 다른 책선물, 그리고 또 다른 회원에게 시간방향이든 어떻든 또 다른 부채와 환경을 생각하는 선물...그리고 또 다른 방향으로 건네는 방법의 순환....?? 3. 재래시장의 활용??)
요약
자기자신 또는 자기가족을 위하여 식량을 채집하고 수렵하는 개인주의적인 미개인은 결코 존재한 적이 없다. 가족, 마을, 혹은 장원 등 자급자족단위를 형성하고 있는 것들의 실체는 완전히 다를지라도 원리는 항상 같다. 즉, 집단구성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생산과 저장이라는 원리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본래 집안살림의 본질은 이익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사용을 위한 생산이라고 강조한다. 사용원리와 이윤원리를 구별하는 것이야말로 완전히 다른 문명을 이해하는 관건이다. 74-5 서유럽에서 봉건제가 증언을 고하기까지의 이미 알려진 경제체계는 호혜, 재분배,가정(집안살림) 내지는 그 2,3가지 원리의 다양한 조합에 기초하여 조직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는 특히 대칭성, 중심성 및 자급자족이라는 패턴을 이용하는 사회조직의 도움을 빌어 제도화되어 있었다. 관습이나 법, 주수리나 종교가 함께 작용하여 경제체계에 있어서의 각자의 기능을 궁극적으로 보증하는 행위법칙에 개개인이 따르도록 했던 것이다.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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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혜, 재분배, 집안살림 중 어느 것도 사회적으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 채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교역원리도 다른 원리들이 우월한 사회에서는 종속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이다. 77
시장은 주로 경제의 내부에서 기능하는 제도가 아니고 제도 밖에서 기능하는 제도이다. 시장은 원격지교역의 회동장소이다. 본래의 국지시장은 거의 중요성이 없다. 더구나 원격지시장도 국지시장도 본질적으로 비경쟁적이어서, 어떤 경우에도 지역적 교역, 이른바 국내시장을 창출시키는 압력은 거의 없다 79 (흔적 5. - 시장에 대해 길들여진 앎이 덕지덕지하다. 끝까지 읽고 나서야 납득을 한다.) 수렵 또는 분업의 확장, 이의 연역이 교역의 필연성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격지 교역이 재화가 치우쳐 편재하는 분업의 결과이고, 시장을 발생시키고, 화폐나 흥정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