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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모든 형태의 합리성 위에 경제학적 합리성이 지배하게 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그냥 내버려두면 자본주의는 삶의 절멸에까지 이르게 되며, 그리하여 자본주의 자신도 절멸하게 된다. 46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우리의 기술들로 인해 생물학적 사이클뿐만 아니라 원초적인 화학고리마저도 교란된다. 그 응답으로 사람들은 이를 통제하는 여러 기술을 발전시키는데 그 기술은, 원인은 계속 조장하면서 그것이 낳는 해악의 결과만을 강조한다."라고 에드가 모랭이 [삶의 삶]94-5쪽에 썼다. 48
생태주의 운동은 환경의 쇠퇴와 삶의 질이 인류의 생존에 문제를 제기할 무렵보다 훨씬 앞서 탄생했다....이 운동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연'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연주의자들의 자연도 아니요, 과학적 생태학에서 말하는 자연도 아니다.....'자연 수호'는 원래 '체험된 세계'의 수호로 이해되어야 한다. 체험된 세계란 특히, 활동의 결과가 그것을 받쳐주는 의도에 상응한다는 사실로써 규정된다. 달리 말하자면, 사회적 개개인이 그 세계에서 자신의 행위의 귀결을 보고, 이해하고 통제한다는 사실로써 규정된다. 53
[무능화하는 직업들] - 원자력에서도 전문가의 장벽을 쳐 일반민중을 개인지도를 받는 학생 같은 상태로 만들었다. 이와 똑같은 부류의 '학생 만들기' 현상이 전문화, 법적인 형식화와 그것이 이끌어내는 특수화가 기존의 고유 지식을 부신하고 개개인이 스스로를 책임질 능력을 파괴하는 모든 분야에서 더욱 분산된 방법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이반 일리히가 폭로한 "무능화하는 직업들"이다. 57
체험된 세계를 수호하는 이이 단지 분과적, 국지적인 열망으로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을 갖추지 못한 일이 아니라, 인류와 생명세계 전체의 일반적 이익에 들어맞는 일이다. 하지만 그 반대는 진실이 아니다. 인류의 생태적 이익을 고려한다고 해서 그런 고려가 반드시 체험된 세계의 수호라거나 한걸음 더 나아가 재정복 같은 형태를 띠는 것은 아니다. 그런 형태가 개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는 바람직하겠지만 말이다...만약 과학적 독재가 에코시스템의 요구사항들을 주장하고 나선다면 그것이 변증법적 물질주의 법칙을 주장하고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전체주의적이다. 그러므로 정치적 생태학에 제기되는 문제는 에코시스템의 요구사항을 고려하게끔 허용하는 실천적 양태들의 문제이다. 그것은 필요성과 규범성 사이의 퇴행적 결합의 문제이다. 혹은 객관적 필요성을 체험된 요구사항에 상응하는 규범적 행동으로 바꾸어 전달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바로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문제인 것이다. 58
경제적 합리성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는 결코 자신의 본질에 맞게 표현될 수가 없었다. 막스베버가 썼듯이, 노동자는 "내가 가능한 최대한 노동을 투입한다면 하루에 얼마를 벌 수 있을까를 자문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받았던, 그리고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을 충당해줄 2.5마르크를 벌려면 얼마나 일해야 하나를 자문했다" 61-2
자본에 의해 매개되는 실존 외에는 어떠한 사회적, 공적 실존도 없었다. 비노동의 시간은 사적인 실존의 시간, 오락과 휴식과 휴가의 시간으로 남아야만 했다. 휴가는 그 어느 것보다도, 활동하는 삶이 계획하에 중단되는 것이며, 순수한 소비의 시간으로서, 나날의 일상생활에 통합되지 않고, 새로운 차원을 더해주어 삶을 풍부하게 만들지도 않기 때문이다 67
활동에 바칠 수 있는 시간을 '부의 진정한 척도'로 삼앗다. 71 경제활동은 그 활동 이외의 다른 것에 봉사할 때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1. 대중의 자동차 만능주의는 일상적 실천의 차원에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절대적 승리를 물화하고 있다. 즉, 사람들의 자동차만능주의는 개개인이 '남들을 누르고' 남보다 나아져서 자기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의 토대가 되며 그 믿음을 키워준다. 2. 실제적 평가절하는 아직 이념적 평가절하로 이어지지 않았다...이 악순환을 깨려면 이념적('문화적')혁명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런 혁명은 지배계층(좌파이든 우파이든)에게 기대해서는 당연히 안 된다. 3. 자동차 주인은 형식상으로는 자기 소유인 차에 대해 소유자 즉 주인으로서 관계가 아니라 사용자, 소비자로서 관계를 갖게된다.
사용자들이 자기들이 늘 지나다니는 순환(교통)의 작은 섬을 다시 영토로서 사랑하게 될 때, 그리고 너무 자주 그곳에서 멀어지는 것을 두려워하게 될 때, 그들은 초권능 운송체인을 깨부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자기 영토'를 사랑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영토가 '살 만한' 곳이 되어야지 '지나다닐 만한' 곳이 되어서는 안 된다...혁명이후 자본주의적 낭비가 철폐되고 난 뒤에 사람들이 여유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물었을 때 마르쿠제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는 대도시들을 파괴하고 새로운 도시들을 다시 세울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만큼은 소일거리가 되겠지요" 90-91..언제나 교통문제를 도시문제, 노동의 사회적 분할 문제, 그리고 노동의 사회적 분할이 존재의 다양한 차원에 도입한 구회솨의 문제와 연결시켜야 한다.
신체 건강하여 의료비용이 나가지 않고, 우리가 구매한 물건들이 근 반평생 쓸 수 있고, 구식으로 전락하지도 않으며, 낡지도 않고, 수리도 되고, 심지어 쉽게 다른 것으로 전환된다고 해보자. 그러면 국민총생산은 물론 내려갈 것이다. 우리가 노동을 덜 하고, 소비를 덜 하고, 필요도 덜 갖게 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더 좋은'을 추구하지 않고 경제 외적이며 상품과 무관한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자본주의 사회와는 무관한 것이다. 반면에 그러한 생각은 공산주의에는 본질적인 것이며, 자율적 제한, 안정화, 공평함, 무상성이라는 생각들의 구체적 예시가 있어야만 공산주의는 지배적 시스템의 긍정적 부정으로서 구현될 것이다. 그러니까 노동을 덜 하고, 소비를 덜 하면서 보다 잘 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제부터 이렇게 욕국의 영역을 의지적으로, 집단적으로 제한함으로써, 그럼으로써만이 자율의 영역을 , 즉 자유를 확장할 수 있어야만 한다. 106
[사회적 실험]..보다 적게 들여 보다 많이, 보다 잘 할 수 있게 해주는 대체기술이 중요하며, 또한 이러한 기술들이 기초공동체와 지방자치단체에 의해, 혹은 공권력의 주도하에 개발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저마다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노동시간대를 조절하고, 노동을 연속적인 방식으로 혹은 불연속적인 방식으로 할지 자유롭게 정하고, 하나의 활동영역에서만 노동을 할지 혹은 여러 활동영역에서 노동을 할지를 자유롭게 정하여 사회적으로 유용한 노동을 2만시간하는 대신에 평생 사회수당을 보장받는 것, 이 모든 것의 조절과 '전반적 균형'을 담당하는 중앙기구, 즉 국가가 존재해야만 가능하다.
자본주의 체제를 반박한다는 것이 가구 단위나 마을 단위의 자급자족 경제로의 회귀도, 경제활동 전반에 대한 통합적이며 계획적인 사회화를 지향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삶에 있어서 그 일이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해야만 하는 것을 '최소로 줄이기 위해서', 그리고 자유의 영역을, 그러니까 집단의 활동이든 개인의 활동이든 간에 그 자체로 목적인 독자적 활동들의 영역을 '최대로 확장하기 위해서', 필요의 영역만을 사회화하는 것이다. 110
공동협력자율생산이라는 유토피아가 대규모로 즉각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구상의 어느 지점에선가부터 실천되는 즉시, 사회적 실험의 본보기로서의 가치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유토피아는 언제라도 실현할 수 있는 한심스런 미봉책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세상의 가능성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우리에게 목표를 제시할 것이다.
우리의 욕구를 스스로 결정하려면, 그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과 방식에 대해 논의할 수 있으려면, 노동수단과 생산 선택권을 장악해야 한다.
무상의 경제는 반反경제이다. 통화주의에서 벗어난 경제로서, 더 이상 기업경제의 수익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생산의 '유용성', '경제적 효용'을 중시한다. 우리는 경제주의에 대한 이러한 투쟁을 세르주 라투슈 serge latouche의 글에서, 무상 소프트웨어를 둘러싼 움직임에서,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로랑스 바랑스카 laurence baranski와 자크 로뱅 jacques robin이 쓴 [변모의 절박함],2006 85-93쪽 삶의 기술과 무상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24
우선 우리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떤 종류의 성장인가?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가? 성장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져다줄까? 경제학자, 정부, 실업가는 '성장' 자체를 요구하지 그 궁극적인 목적을 정하는 법이 없습니다. 정책결정자들은 성장의 내용에 관심이 없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성장은 우선 자본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이지 주민의 필요에 부응하는 것은 아닙니다. 132
주민이 가장 빈번하게 필요로 하는 부와 자원은 무엇이지요? 우선, 건강에 좋은 균형 잡힌 먹을거리입니다. 그리고 양질의 식수, 오염되지 않은 공기, 햇빛과 공간을 누리는 것이며, 위생적이 쾌적한 주거환경을 갖추는 것입니다. 하지만 국내 총생산의 변동에는 이러한 것이 전혀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마을 공동으로 우물을 파면 국내총생산이 증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어떤 사기업이 우물을 파서 점유한 뒤 주민에게 돈을 내고 물을 사가라고 하면 사용료고 국내총생산이 증가하게 됩니다. 당신이 십만 가구에 미경작지를 나누어줘서 식량이 나온다고 해도 국내총생산은 변함이 없습니다. 반면 1백명의 지주가 자신들의 땅에서 십만 가구를 쫓아내고 그 땅에 수출할 농작물을 심는다면, 국내총생산은 그 수출로 벌어들이는 액수만큼 증가하게 됩니다. 133-4
노동과 자본은 '돈벌기'가 그들의 궁극적 목적인 한 서로의 대립을 통해 완벽한 공범이 됩니다. 자본의 눈으로 보면 생산의 성격은 그 수익률보다 덜 중요하지요. 노동자의 눈으로 보면, 생산은 그로인해 창출되는 일자리와 그로 인해 받게 되는 임금에 비해 덜 중요하고요. 양쪽 모두 의식적이든 아니든 간에 자본의 가치증식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노동운동과 노조는 임금수준과 노동조건만이 아니라 생산의 궁극적 목적, 생산을 실현하는 노동의 상품 형태를 문제 삼을 때에만 반자본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144
이 생산인구의 55퍼센트는 판매원, 종업원, 청소부, 가사도우미, 정원사, 육아도우미, 경비원으로 일하고, 그들 중 절반은 저임금의 불안정한 직업에 종사하며 1/4이상이 워킹 푸어들로서, 동시에 두세 개의 일자리에서 일해도 그 수입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한다.
...일자리들은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며, 창출된 가치를 소비하는 것이죠.
사람이 기업이 된다. 가족도 민족도 버텨내지 못하리라....생계수당의 요구는 인간의 활동을 고용의 독재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입니다. 강요당해서 하는 활동들보다는 훨씬 더 정신의 풍요를 안겨줄 활동들을 할 수 있는 수단을(생계수당) 우리에게 주어야만한다. ...이러한 활동들은 어떤 기업도 제조할 수 없고, 월급으로 살 수 없으며, 돈으로는 그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내재적 부 또한 창출합니다...삶의 질과 삶의 의미, 어떤 사회나 문명의 질은 바로 이러한 내재적 부에 달린 것입니다.
정치경제학의 세 가지 기본범주, 즉 노동, 가치, 자본이 더는 공통의 척도로 측정될 수 없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자본주의는 지식과 체험을 자본화함으로써 포드주의 체제가 닥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어요. 그럼으로써 시스템 내에서는 해결되지 않는 새로운 문제들을 만들어내고 말았습니다. 왜냐하면 체험을 '인적 자본'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형식화되고 형식화할 수 있는 지식은 소프트웨어로 변환될 수 있으므로 하찮은 비용으로 무한대로 재생산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것은 잠재적으로 풍부한 재화며, 그러한 풍부함으로 인해 교환가치는 제로를 향해 내려갈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지식경제는 무상의 경제가 될 것이고 지식을 인류의 공동 재화로 취급하는 공유의 경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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