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의 꿈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외부 세계가 중요하게 느껴져야 한다.

 

현대 공동체 생활에서 손꼽히는 기묘한 특징은 풍요의 문제가 혁명의 구분선을 가로지른다는 점이다....욕구로부터 자유로워지면 공동체 생활로 무엇을 할까? 혁명으로 부는 재분배되었지만, 혁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혁명의 결과물인 풍요를 삶에 어떻게 도입할지, 이제 먹을거리가 충분해 싸울 필요가 없어졌을 때 사람들은 무엇에 전념할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17

 

혁명의 길이 사회에서 폭군을 제거하는 것을 넘어서는 정서적인 경험이어야 한다고 프란츠 파농이나 마르쿠제 같은 사람은 믿는다. 이 길은 지배권력이 없는 상태, 즉 아나키와 일정한 삶의 무질서를 받아들이도록 사람을 길들이는 교육이어야 한다. 사회가 감당할 무질서의 양을 바꾸지 않은 채 사회 지도자만 바꾼다면 완전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도 1844년 수고에서 경제적 풍요 자체 때문에 질서에 대한 사회의 구조적 요구가 사라질 것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18 

 

파농은 도시가 관료제와 익명성으로 인간의 감정이 파괴될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것처럼 조밀한 장소에서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서 당황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안전하고 틀에 박힌 삶만을 찾는다. 사람들은 결국 개인적으로 안전한 범위 안으로 쪼그라들어 혁명가로 성장하지 못한다. 19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조밀한 도시 정주지에서 함께 살아갈 때 나타나는 사회적인 다양성에 재갈을 물려야 하는 것이다. 틀에 박힌 생활을 피하려는 요구는 아이러니하게도 삶의 사회적인 경계를 폐소공포증으로써 충족할 수 있다. 20

 

풍요의 공동체는 인간에게 자유뿐만 아니라 자발적인 폭정의 새로운 가능성도 열어준다. 결핍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공동체 생활을 이해하려면 인간의 어두운 욕망, 즉 사람들이 사회관계에서 받아들이는 안전하고 확실한 노예 상태에 대한 욕망을 측정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 스스로 인정하기를 혐오하는 이런 종류의 감정을 조사해야만 자유에 대한 욕망의 특징과 풍요로운 현대라는 조건 아래서 자유를 달성하는 수단을 제대로 밝힐 수 있다. ....이 책의 주제는 청소년기에 일련의 힘과 욕망이 형성되어 자발적인 노예 상태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현존하는 도시 공동체의 조직은 사람들에게 청소년 같은 방식으로 스스로 노예가 되도록 부추긴다는 것, 무질서와 고통스러운 어긋남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유의 본질로 삼는 성인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틀을 깨뜨리는 게 가능하다는 것, 청소년기에서 이와 같이 새롭고 충분히 가능한 성인기로 옮겨가는 이행은 조밀하고 통제 불가능한 인간 정주지, 즉 도시에서만 벌어질 수 있는 경험의 구조에 좌우된다는 것 등이다. 21

 

..도시라는 정글, 도시의 광막함과 고독에 긍정적인 인간적인 가치가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22


순수한 정체성


첫발을 내딛는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스스로를 작은 신으로 여기는 한편 재판관처럼 환자를 판결하고 환자를 약간 경멸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전능욕망"이라고 지칭한 이런 태도는 환자들이 가진 문제에 연루됨으로써 자신이 상처 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때문에 생긴다고 결론지었다. 환자의 문제에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깊숙이 연루되면 자신들의 자기 인식이 약해질까봐 염려한다는 것이다. 31-32

 

젊은 의사들의 경우, 엄격한 자아상을 통한 이런 혼동에 대한 방어가 환자들의 거대한 고통에 휩쓸리는 사태를 막아준다. 이 고통이라는 병은 환자가 그것을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에 있다. 혁명가와 의사 모두 어려운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압도당할 수 있다는 위협에 대비해 미리 자아상을 고정하는 식으로 대응한다. 사회 상황에 따라 움직이기 쉬운 열린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고정된 사물이 되는 것이다 33

 

청소년 후반기에 일어나는 정체성의 위기는 개인의 자아상과 그 자아 바깥에 있는 삶에 대한 상 사이의 관계를 평가하는 문제이다. 이처럼 정체성의 위기는 단순히 '나의 성격이 어떤지'를 말하는 위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 위기는 자라나는 인간이 처음으로 자아상과 자아 바깥의 세계상 사이에서 생기는 관계의 규칙이나 양상을 명확하게 밝히려는 의식적인 시도이다. 46

 

자기순수화의 동력으로부터 압도적이면서도 본질적으로 편안한 죄의식이 나올 수 있다. 이 죄의식은 세계의 구체성을 다루는 인간의 능력을 파괴한다. 이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타인이 행동한 결과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할 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상황과 문제에 직면해서도 수동적인 태도를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병적인 상태다. 이 사람은 어떤 해악을 유발하든 편안하게 용인할 수 있다. 스스로를 끔찍한 죄인이라고 가정하기 때문이다. 54


순수한 공동체라는 신화


특정한 종교운동과 나중에 일어난 경제 운동이 유사한 이유야말로 베버가 찾고자 한 것이었다. 두 운동 모두 불안을 바탕으로 세워졌고, 둘 다 부덕한 행동에 대한 자기부정과 공동체의 억압으로 이어졌다. 베버가 추구한 방향은 매우 분명했다. 그는 종교를 내팽개친 시대에 어떻게 해서 순수한 자아를 향한 어떤 충동이 하나의 사회적 가치로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 61

 

공동체의 감정은 형제애이며, 여기에는 사람들이 서로를 물질적으로 필요로 한다는 인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수반된다. 공동체의 유대는 공동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 즉 '우리'와 '우리가 누구인가'를 인정하는 데 따르는 기쁨이다. 63

 

청교도 공동체 생활이나 분투하는 기업가들의 공동체 생활에서는 갈등을 배제하지 않았다. 사실 고결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종종 갈등을 부추기기도 했다.뉴욕 주 북부의 작은 마을이나 '해로운' 흑인 가족을 배제한 교외는 갈등을 두려워했다....공동체 유대의 신화는 의지를 드러낸 행동을 통해, 어떤 경우에는 거짓말을 통해 현대인들에게 겁쟁이가 되어 서로로부터 숨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68

 

일관된 공동체 이미지를 순수화하면 사람들의 '다름'에 대한 사랑보다는 두려움이 승리를 거둔다. 이런 두려움이 경험의 위조를 낳는다. 비슷해지려는 욕망을 표현하는 '우리'라는 감정은 사람들이 서로를 깊이 들여다볼 필요를 피하기 위한 방편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대신 서로에 관해 모든 걸 안다고 상상하며, 사람들의 지식은 그들이 어떻게 서로 똑같아져야 하는지에 관한 환상이 된다. 72

 

이렇게 해서 현실에서 전혀 다른 것 같은 외부인을 공격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라는 감정이 자라날 수 있다. 사실, 이들은 서로가 거의 공유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이없다. 가짜 공동체 의식이다. 73

 

공동체 유대를 통한 존엄이라는 신화는 세가지 뚜렷한 사회적인 결과를 낳는다. 첫째, 공동체 생황에 실제로 참여하는 것이 줄어든다. 두번째 결과는 일탈한 사람들에 대한 억압이 그것이다. 공통적인 정체성의 표현과 일탈에 대한 억압은 둘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측면이다. 세번째 결과는 욕망과 폭력과의 관계에 존재한다...그들 자신의 삶에서 무질서를 조금도 용인하지 않고 또한 무질서를 경험하지 않으려고 자신을 차단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긴장이 분출하는 상황이 되면 공격과 폭력적인 힘, 보복 등의 최종적인 방법이 정당화될 뿐만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데에도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76-79

 

풍요는 공동체의 정체성을 향한 욕망을 형성하는 데서 더 미묘하고 어쩌면 더 위험한 역할을 한다. 가난한 공동체에서나 결핍의 시기에는 개인과 가족 사이의 공유가 생존에 필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이런 공유의 필요성이 사라진 것이야말로 풍요의 증거이다...공유하는 게 훨씬 적어야 하는 경우 각 개인이 서로의 성격을 평가하기 위해 의존할 수 있는 경험의 축적이 한결 적어진다. 공동체 유대감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서로와의 관계에서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자신들이 동일한가를 상상하려는 성향이 훨씬 강하다. 83

 

 다시말해, 풍요는 공동체 접촉에서 고립을 만들어내는 힘을 증가시키는 동시에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관계성을 서로에 대한 필요보다 유사성이라는 측면에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다. 이러한 것들이 공동체 유대라는 신화의 특징들이다. 84


도시는 어떻게 신화를 되살리는가


가족 구조와 도시 발전, 새로운 풍요의 조건 등이 한 흐름으로 합류하는 지점을 보면서, 이전엔 사람들이 도시라는 넓은 무대에서 추구하던 사회적 기능과 접촉을 지난 수십 년 사이에 가족이 전유하게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정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던 사회적인 '공간들'이 가족에게 전유되면서 도시 지역에 남은 사람들의 공동체 관계와 가족 자체에 왜곡을 부추겼다. 이런 왜곡은 복잡성과 무질서가 야기할 수 있는 유대와 경험의 두려움을 추구한다. 89. 사람들이 도시에서 상상하는 가족과 가족형 관계가 중요해짐에 따라 청소년기의 순수화 양상이 공동체와 가족 구성원들 개인적인 삶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89

 

지독하게 가난한 사람들은 도시의 사회적 관계 속에 먹고 살기 위해 자기 삶에서 "접촉점의 다양성"을 만들어야 했다. 그들이 속한 제도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족은 정치적인 '호의'나 커피숍과 술집이라는 안전판, 유대교 회당과 교회의 가르침 등의 지원에 계속 의존했다. 93

 

작은 마을 생활의 두드러진 특징은 마을 공동체에 속한 모든 구성원이 마을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마을 문화는 널리 퍼져 있었다. 분리되거나 고립된 사회 영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 분업과 지위 구분은 존재했지만, 모든 사람이 분리된 활동의 성격이 있었다. 94

 

개인들은 일상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사회영역에 침투할 자격과 필요가 있었다. 이 영역들이 조화롭게 조직되지 않고 심지어 적대적인 관계일지라도 말이다...도시에서 사라진 것은 바로 이런 접촉점의 다양성이다. 그 대신에 더욱 일관된 형태의 사회 활동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95

 

순수한 도시를 계획하기


현대의 비평가들은 분업이 적었던 산업화 이전의 목가적인 질서로 회귀하자는 꿈을 여전히 부여잡고 있다. 기술적인 문제와 경직성에 대한 해답으로 도시생활의 의도적인 단순성을 주장하는 경우는 너무나도 많았다. 마치 사람들이 자신의 창조 능력을 망각하는 것처럼 말이다. 루이스 멈퍼드와 마찬가지로 인간적이기 위해 도구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인간적인 방식으로 도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129

 

전체가 효율을 극대화하게끔 기능하는 것이 부품들의 수명을 위해 최선의 방법이란 사실은 기계 설계에는 타당하지만, 어떻게 인간사에서도 이런 원리를 정당화할 수 있는가? 사람들의 경우에는 오히려 서로를 상대하는 가장 편한 방법에서 벗어나도록 장려해야 한다. 전에 존재한 것과는 다른 양상과 방향의 관계를 만들도록 장려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 현상을 보면, 인간은 이런 점에서 다른 동물들과 구별된다. 139

 

인문학자들은 종종 정복할 수 없는 기술적인 힘들의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것 앞에서 절망한다. 하지만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서 성장하는 것들이 대개 그렇듯 기술의 양상은 자신의 성장과 관련이 있는 힘들에 대해서만 통제권을 가진다. 기계 기술은 도시의 사회 구조와 직접 관련된 사회적인 힘들에 의해 성장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성장한 기술을 도시에 다시 적용하면 기술적인 상징은 실용적이지 않고 효과가 없다. 145

 

도시계획 공동체는 조화와 예정된 질서로 이루어진 꿈의 세계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사회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여야 한다...사람들이 스스로 자기 미래를 기획하지 않는 한, 자신들의 사회 생활을 구성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성숙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147

 

볕뉘. 다시 읽다.  4장까지 저자의 목차에 따라 옮긴다. 나머지 책날개는 조금 미루다가 이어 달려고 한다.   이 책 속에 소개된 앙드레 말로 책을 읽고 난 뒤다.  68 혁명의 시대적 맥락에 이어 개인사에 말끔하지 않았던 부분을 반추하면서 쓴 것이다. 왜 뜻대로 되지 않는가? 그 이유에 대해 되물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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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8세에 보수적인 청년은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마흔에도 보수적인 사람은 변명에 여지가 없다.(2)
    from 木筆 2014-09-05 13:11 
    풍요를 적절하게 활용하려면, 사람이 성숙함에 따라 통제된 순수한 경험에 대한 욕망이 약해질 수 있는 사회 상황을 조성해야 한다. ...공동체에서 발생하는 폐단의 기원은 오늘날 대다수 사람들이 성장하는 동안 청소년기의 문제들에 묶이거나 사로잡힌 데서 비롯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런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참는 법을 배우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삶인 성인기의 조건은 이미 분명한지도 모른다. 순수한 정체성을 넘어서 성장하기 성인기를 거치면서
 
 
 

1. 독서 모임을 어떻게 할 것인가? 발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발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 텍스트를 통해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다른 것들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 공유한 고민이나 씨드, 씨앗을 어떻게 건사할 것인가? 책을 읽고 나누는 전후의 과정을 통해 좀더 '모임의 양'뿐만이 아니라 '모임의 질'을 높이는 방법은 없을까? 이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나누는 토론회를 할 필요가 있을까? 할 수 있을까? 해야만 하지 않는가? 초빙강연을 통해 얻고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인가? 시간이 지나면 느낌까지 바래는 것은 아닌가? 그저 소비되는 것은 아닌가?  좀더 색다른 계기나 열정을 줄 수 없었는가? 여운들을 살피지 않아 공부의 때를 놓친 이들은 없는가? 강독을 하고 낭독을 하고, 분담을 하는 과정에서 준비과정이 미흡한 것은 아닐까? 분량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학생들도 아닌데 텍스트나 줄거리에 접근하는 방법이나 저자를 집중탐구하는 방법이 천편일률이지는 않은가? 


2. 독서 모임 진행사항을 사무적으로 기계적으로 녹취하고 회의같은 분위기로 남기는 것이 합당한가? 질문을 남길 수는 없을까? 몇가지 경로와 사유, 토론을 통해 남겨보는 질문? 질문들이 저자에게 피드백이 될 수 있다면? 강도높은 고민이나 격정, 의식전환에 밑거름이 되는 일들이 일어났다면 그것을 남기고 보듬을 수 있는 틀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3. 독특한 학습습관이나 테마에 따른 색다른 접근법, 대상에 따라 좀더 색다른 과정을 발견하는 맛을 보는 것이 어떤가?


4. 윤*샘 텍스트 논문 두가지로 강독모임을 갖은 적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돌아간 뒤에 텍스트에 대한 여운이 남는 모임이었다. 키워드와 생각의 맥락이 여러차례 반복되어 논의되기에 강독모임 자체로 복습이 많이 되는 체험이었다.  뒤풀이 겸 얘기를 나누다가 독자마다 읽는 패턴이 다르지만 저자, 비평가, 연구자, 번역자가 되어 여러 시선으로 다시 살피는 것을 직접 체험한 셈이다. 아니면 저자의 책을 여러권을 반복해서 읽고 나누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사회인으로서 공부를 위한 공부가 아니라, 사회적 의미를 갖고, 그 지평을 넓히는 작업을 한다는 점이다. 텍스트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좀더 출렁거리는 읽기를 통해 그 파장이 번져나갈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 하겠다.


5. 모임과 모임사이 겹침이 없다. 한 모임이 관성을 갖게 되면서 오는 정체감을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도 문제로 삼을 수 있겠다. 

 

 

볕뉘.

 

1. 독서모임은 물론 사교의 속성을 갖는다. 친교만큼 좋은 것도 없으리라.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도 한달이나 한주가 기다려지고 설레인다.  지난 모임 뒤 한**샘이 이야기를 건넨다. 공감하고 미리 나눠주는 이가 있으면 좋겠다고 여기고 있는 터라 반가웠다. 토론회를 만들고 나눠보면 어떻겠느냐는 것이 요지다.  성인 대상은 쉽지만 않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진도만을 고려하고 고집할 수도 있다. 모임 역시 여건이 되지 않아 오래가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또한 텍스트나 책을 미쳐 살피지 않아 핵심이 아니라 변죽이 논의되기도 쉽상이다. 분야별로 책읽는 방법도 기술도 바꿔야 한다는 팁과 책을 최근에서야 접한다. 잔기술이나 과정과 방법에 대한 논의도 활발했으면 한다.

 

2. 일일 회계 결산처럼 게정과목에 따라 넣고 다른 사람, 모임, 조직과 거래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지만  친구의 동의를 더 곰삭여서 올 가을이 가기 전 토론회를 한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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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강과 노랑 

 


그의 작품에는 빨강과 노랑, 연붉음과 연노랑의 선명하게 때론 희미하게 흔적이 남아있다. 가족사진에서 처럼 선명하기도 하지만 그를 둘러싼 특유의 애절함과 강렬함이 배여있다. 홍군과 인민복이기도 하며 칼과 손에 남겨진 노랑은 단절과 명상이기도 하다. 붉은 아기의 탯줄에 이어져 있는 책과 화면과 천안문, 그리고 윗편 희미하게 박혀있는 악보의 숫자는 또 다른 이명으로 들리게도 하는 것 같다.  회한과 기억, 망각을 번갈아 표현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비치는 것 같다.

 

 

 

2. 책과  전등  그리고 전통

 

 

 


처음 소비에트 교과서와 같은 판본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졸업시험도 통과하지 못해 그림을 캔버스에도 그릴 수 없어 종이에 그렸다고 한다. 전시회 출품에서도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두점 가운데 작은 작품만 출품하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표현기법이 맞는 전시회를 찾아가거나 별도의 전시회를 마음이 맞는 친구와 기획했는데 이런 교류로 다른 기법이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한 전시회에서는 행위예술이나 파괴를 모방한 전시가 있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6.4 전시관 총기사건이후로 과연 그것이 작품일까라는 고민을 했다고 하며, 작품성을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술사에 대한 공부는 대부분 책 속에서 이루어졌는데 한 계기로 과연 중국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되물음으로 빨강과 노랑의 색조만 남겨두고 일년동안 아무런 작품 활동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계기가 되어 독일, 유럽의 여러 미술사조를 경험할 수 있었다하며 독일에서 장예모 감독의 영화를 보다 도저히 그것을 보고 독일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한다. 중국의 상업적인 것만 골라서 그런 모습을 보인 것은 아닌가하고 중국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재삼 고민하게 되었다고 한다.

 

 

 

 

 

3. 표현과 기법


혁명적? 리얼리즘과 같이 판에 박힌 미술수업은 아무것도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이 없었다고 한다. 수업시간에 멀뚱멀뚱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습, 그리고 유럽의 표현주의 기법을 받아들이면서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밀레, 고흐, 달리, 피카소, 마그리트를 배우면서 습작하고 스스로 자신들의 그룹을 남서부 예술이라 칭하는데 북부예술을 접하면서 많이 익히고, 독일 등의 경험을 통해 그동안 책으로 공부해두었던 예술사조에 대해 특별하게 배웠다고 한다.

 

 

 

 

 

 

2007년 서울 가을 그는 41년전 마오저뚱의 사상집을 곁에 두고 읽고 있다.  "바른 사랑은 어디서 오는 걸까?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걸까? 아니다. 그럼 개인의 머릿속에서 가지고 있는 것? 아니다. 바른 사상이란, 사회 실천에서 오는 것이다. 사회에서 생산투쟁, 계급투쟁, 그리고 과학실험 이렇게 세 가지를 실천함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란, 그 사람의 사상으로 결정지어진다."를 되새기고 있다.

 

 

"우리의 도시는 더욱 화려해진다. 우리의 밤은 더욱 밝아진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더욱 단순해진다. 우리의 사고는 더욱 즉각적이 된다. 우리의 감정은 훨씬 복잡해진다. 우리의 의사소통은 더욱 획일화된다. 우리의 기술은 더욱 명료해진다. 우리의 상상은 더욱 합리적이 된다. 우리의 소망은 더욱 통합적이 된다. 우리의 지식은 더욱 우스꽝스러워 진다. 우리의 고통은 더욱 개인적이 된다. 우리의 기억은 더욱 짧아진다. 우리의 과거는 더욱 멀어진다. 우리의 얼굴은 더욱 젊어진다. 우리의 음악은 더욱 아름다워진다. 우리의 감각은 더욱 심각해진다. 우리의 영화는 더욱 발전한다. 우리의 옷은 더욱 낡아진다. 우리의 작업실은 더욱 커진다. 우리의 전시는 더욱 빈번해진다. 우리의 저녁모임은 더욱 화려해진다. 우리는 더욱 모이기 어려워진다. 우리의 생각은 더욱 피상적이게 된다. 우리의 대화는 더욱 느긋해진다. 우리는 더욱 쉽게 운다. 우리의 잊고자 하는 욕구는 더욱 강렬해진다. 우리의 친분은 더욱 단순해진다. 우리의 가슴은 더욱 차가워진다. 우리의 의지는 더욱 확고해진다. 우리의 외로움은 더욱 깊어진다. 우리의 판단은 더욱 모호해진다."

 

그림의 이력(콕)▼

 

 

 

 

 

 

 

 

 

 

 

 

 

 

펼친 부분 접기 ▲

 

 

볕뉘. 

 

1. 일짬 잠깐 들러본다는 것이 사뭇 긴장하게 한다. 빨강과 노랑 그리고 그 흔적이 무엇일까? 돌아서 나오는 길 몇부의 복사본을 손에 쥔다. 출입구 위편에 장샤오강의 인터뷰가 끌려본다. 이력과 추구하는 것과 삶의 질곡이 읽힌다. 백년의 급진 원텐진의 논문이 겹친다. 자신의 대지에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자각이 겹친다. 대지에 뿌리내리는 것은 고사하고 썪지 않는 거름을 퍼다가 나르는 것이 지금-여기의 현실은 아닐까 싶은 느낌이 스민다. 반시간의 공유에 들떠있고, 어쩌면 충격이 내내 가시지 않을 것 같다. 당분간은 ... ..

 

2. 싸가지 진보로 지식인?들이 시끄럽다.  그런데 의심스럽다. 완독을 해보기나 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물어뜯고 컹컹거리는 것이 분간이 가지 않는다.  지식인은 에티켓은 없는가? 뜬다 싶으면 취할 것을 가려내고 짚을 것은 짚지 않고  씹는 만큼 나의 이름도 영양가도 높아질 것이라고 여겨서 그런가? 만약 그렇다면 심각한 습속이 아닐 수 없다.  뭐가 어떻다고 하면 다들 몰려들어 썩은 살점하나씩 물고 거봐 그랬잖아를 외친다.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비판정신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날카로운 비난습속이 무섭다.  한점 틀린 점이 없는 신의 경지에 오른 지식인들의 문화적 굴레가 안타깝다.  아무도 진지하게 자신과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다른 지식인의 생각과 고민을 접목하려 하지 않는 것 같다.  한번이 아니라 질리도록 반복되는 퇴행이다 싶다.  잘못본 것이길 바란다. 지식인들이 너무나 확신에 가득차 있다. 자신의 오류를 돌보지 않는다.  이런 지식인의 문화에서는 아마 큰 인물이 나올 수 없는 듯싶다. 아마 죽은 뒤에나 알아주면 다행이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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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뉘.  이른 아침 기운이 좋아 마실을 나선다. 먹구름이 가리긴 하지만 나팔꽃으로 지천인 강변이 조금 다른 맛이다.  나팔꽃밭을 담으려 하지만 느낌이 올라오지 않는다. 햇살도 가을내음도 맡으면서 기운차려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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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사람, 좋은 모임의 성원이길 부정하다

 

좋은 모임을 찾거나 기대(하)는 사람들 - 하지만 그렇게 느끼게 되는 소속감은 온전할까? 따듯한가? 그렇게 생긴 구심력과 응집력은 끼리끼리의 천동설론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인맥이라는 것, 지연이라는 것, 계파라는 것, 좋은 사람과 모임을 구하는 것이 맞는가?  관계를 만드는 것, 고민을 섞는 것, 꿈틀을 씨앗을 뿌리는 것,  할 수 있는 일들이라는 것이 의도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 그래도 더 낫게 만드는 것이 활동이라고 한다면 위의 되질문은 어떠한가? 당신은 좋은소비를 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좋은사람인가? 당신은 좋은 모임에 소속되어 있는가? 애정을 느끼는가? 그래서 좋은사람인가?


이런 되질문을 씹으면서 보면 모임과 조직의 성숙을 위해 긴장하고 반추할 수 있도록 자체 문화적인 근력을 유지하는 곳을 찾아보기 어렵다. 모임을 유지하기에 급급하고, 모임의 유지도 엇비슷한 단체를 의식하고 경쟁하는 제로섬을 통해서 살려나간다면 말이다. 너에게는 고민의 속살도 속내도 앞으로의 전략도 함께 나눌 수 없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않다  나-너가 힘을 합쳐도 한줌밖에 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합당한가? 그것이 아니다 우리는 정계와 연줄도 닿아있고 힘도 있어서 그렇지 정권만 바뀌면 큰일을 해낼 수 있다. 정말 그럴까? 지나친 낙관을 통해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인가? 대안세력인가? 대안인력이라도 있단 말인가? 실력을 보여줬다고 자부하는가?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 만약 너라는 걱정거리가 있다면 너로 조금은 설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긍정할 수가 없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자각이 있다면, 또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관에서 제도안에서 하는 일들의 맥락과 사람의 흐름을 최소한 읽고 있어야 하며, 여러 방향으로 시도하고 실험하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제도안의 흐름을 읽고 분석, 비평해내는 동시에 제도밖의 교류와 소통의 문화, 근력을 키워가는 일들이 기획되고 시도되어야 한다. 어쩌면 유사한 비중으로, 색다른 갈래길을 갖고 서로 섞으며 분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좋은사람들 끼리 모여살면 좋겠다'는 관념은 로망도 아니고 현실에서도 가능하지 않은 유아적인 발상이다. 시간과 이념, 정해진 목표라는 것이 있다면 그 시간의 함수에 아니다*아니다*아니다의 결과가 점철되어  더 이상 만나지도 않는 관계들로 부식되어 있는 것이 현 상황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보니 설득해내는 방법, 끌고 오는 과정, 새로운 시도나 실험도 공유될 필요도 없고 노력도 점선으로 끝이나고 만다. 유행하는 것에 따라서 이리저리 휩쓸리는 것도 비슷하고 닮아있다. 사람들의 관계라는 것도 그저 좋은 사람, 왕년에 활동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고민이 있는지 생각이 있는지 서로 묻지 못한다. 좋은사람, 좋은모임에 기대서는 이런 악순환만 반복될 뿐은 아니었는가? 

 

좋은사람, 좋은모임, 좋은조직은 애초에 없다.


어쩌면 지금을 아우르는 키워드를 삼는다면, 우리를 칭칭 동여매고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환원주의와 지나친 낙관, 세상은 나, 내모임 위주로 돌아야한다는 천동설주의자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렇게 알아주길 바라고 보아주길 바라는 자중심성에 갇혀 우리는 실험적인 의제를 발굴하지 못하며, 발굴할 여력도 없는 것이 현수준이다.  그런 연유로 다른 시각과 비판을 품어내지 못하며, 늘 이론에 지친 지식만을 구하며, 그것도 멀리 서울로 우회해서 여기로 가져와 주입하게 되는 것이다.


제도안의 흐름도 이런 일색의 개조를 원하기에 다양한 흐름을 포착하지 못한다. 의제를 키워가지 못한다. 청춘과 청년을 다가서지 못하게 한다. 다가서는 방법도 모를 것이다. 제도안의 변화와 제도밖의 흐름을 만든다는 것, 그리고 지금-여기의 독특함과 세련됨이 깃든 공간과 시공간을 만들어내는 일 역시 서울의 머리를 빌리고 해석과 비판을 서울의 입을 통해 들으려고만 하는지도 모른다. 활동의 포트폴리오 역시 없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섞어나가며 어떻게 끊임없이 제도안밖을 넘나들고 넘쳐나게 하는지도 관심은 없다. 나는 답이고 나의 흐름이 정답이기때문이다. 너를 걱정하지 않는다. 걱정되지 않는다. 남이기에 관심도 없고 잘되면 시기심이 이는 것이다. 너를 돌보지 못하는 것이다. 돌봐야 될 곳이 어딘지도 모른다. 아는 것이 없기때문이다. 관심있는 것이 없기때문이다.

 

 


 

나의 밖에 나-너가 있다.

 

-1. 중심성, 순수하다는 것은 여러 관계로 이루어진 일들을 순수에만 맞추고 연결시킨다. 합리화에 맞지 않는 일들 또한 이유를 달아놓고 관계에서 떼어놓는다. 잘못은 합리화되고 다른 관계들은 어긋나서 끊어져버리고 만다. 조금씩 붙어 있던 일들도 사라져버린다. 나는 혼자다. 순수를 향한 여정은 시작된다.

 

-2. 아이에 대한 교육, 세상의 문제를 똟고 살아가려는 열정은 쉽게 데인다. 그 화상도 심하고 실망도 그에 못지 않게 크다. 아이가 큰다는 것. 아프다거나 장애를 얻을 수 있다는 가정은 하지 않는다. 조손가정이나 불우한 가정의 아이와 내아이는 늘 다르고 걱정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이에 대한 아픔이나 불우함, 장애로 인한 아무런 혜택조차 누릴 수 없다는 사실이 곁에 있어서야 건강한 바램이나 대리교육시키는 이전된 삶을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최악과 절망을 가정하지 않는 삶에는 늘 희망이 없다. 한 줄기 희망을 지금여기가 아니라 저기로 손벌리게 되는 것이다. 떠나야하고, 보내야 하고, 어느 새 공유되는 삶과 일상은 없다.

 

-3. 잘못된 것은 없다. 솔직함에서야 다른 것을 느꼈을 뿐이다. 다른 것에는 우열이 없다. 좀더 다른 생각, 생각들을 인정하고 나눌 수 있다면, 그 와중에 욕망이 좀더 분산될 수 있다면 어떨까?

 

-4. 엔엘인가 피디인가 꼬리표는 지문처럼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없다라고 하는 것 역시 부질없다. 지문을 없앨 수 있을까? 밥을 먹고 고민을 나누고 노선을 구걸하지 않고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까? 겪어보지 못해 그렇지 이렇게 움직이고 용인하는 것이 바로 낭만주의라고 되받을 것이다. 비민주주의의 관행이 하루이틀이 아니라 몸에 베인 습속이라 행태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어쩌면 전쟁의 상흔과 과피해의식이 넘쳐나 같이-함께해본 경험도, 그 경험을 살리고 축적하는 방법도 잊고, 의도대로 되지 않으면 떠나겠다는 극단적인 행위가 양면처럼 맞닿아있는 것 같다. 독립군이거나 아무것도 아니거나 이다. 나 곁에 너가 없다는 것이 식민과 전쟁의 뼈아픈 체험이기에 이렇게 돌출된다고 여기도 싶다.

 

볕뉘. 

 

1. 중언부언한 이야기를 다시 옮겨놓는다. 주말 서로 이곳에 와서 지낸 이력을 나누다보니 상처처럼 다시 올라와 남긴다. 좀더 장황하고 따로따로 분리해서 써야되는데 경황이 없다. 다시금 고민을 나눌 이들이 있다면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2. 지금-여기 활동하는 분들이 밀려서 하는 일이 아니라 꿈틀거리는 일과 그림도 같이 그리고, 섞고 색다른 목소리로 제도안밖을 다른 색으로 점점 흩뿌려 바꾸어냈으면 한다. 어떤 일들도 나가 아니라 꿈틀을 함께 공유하는 일로 바꿔내는 재주를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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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금 여기를 걱정해보면서... ...
    from 木筆 2014-09-15 13:33 
    1 저기가 아니라 여기가 더 가깝다면 여기의 실패에 천착해봐야 한다. 서울이 아니라 지방이 더 가능성이 있다하자. 그렇다면 내려오는 글이나 사람이 아니라 여기에서 내려는 목소리나 몸짓을 살펴야 한다. DJ이 아니라 YS이 더 흔적이 있다하자. 그렇다면 아쉽거나 안타깝거나 하려고 했던 것들을 손꼽아봐야 한다. 실패를 보듬어보려 한다면 아직 식지 않았다는 증거다. 징글징글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을까? 세상이 나로 도는 것이 아니라 알아서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