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체제이후 민주화를 왜 다시 보아야 하는가


 

민주화는 사회란 무엇인가를 규정하려는 갈등과 투쟁의 과정, 다시 말해 국가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대표될 수 있는 사회, 더 효과적이고 이롭게 관리되는 사회, 더 투명하고 충실하게 매개되는 사회, 바로 그 사회란 것의 정체를 규정하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을까 감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민주화가 단순히 권리를 신장하고 확장하는 것이라는, 주권적이면서도 사법적인 관점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바로 그 민주화되어야 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그 사회에서 펼쳐지는 삶을 규제하고 조정하는 형식은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또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20


"민주화가 됐다. 과연, 국가의 억압과 통제, 제한으로부터 벗어난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를 대표하고, 중재하며, 실현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얻은 민주주의를 과연 어떻게 풍부하고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낼 것인가?" 21


이 책에서 나는 각각 서로 다른 사회적인 삶의 장에서 행위주체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객관화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체험하게 됐는지 분석함으로써, 그리고 그것들을 묶어주는 일반적인 사고양식을 추출해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자기계발하는 주체 라고 요약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상으로부터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4

 

 

 

서구 이론의 문제점들


 

단순화하자면 '사회구성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에 전반적으로 존재하는 맹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구성론적인 관점은 주체성이 본성이나 운명, 이미 주어진 초월적, 보편적인 정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사회적 실천에 따라 제조되는 산물이라는 생각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사회구성론적 관점은 구성하는 주체와 구성되는 주체 사이의 관계 자체를 마치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인 양 등치시킨다. 26


이런 점들로 인해 기존의 사회이론은 자기정체성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성의 형성, 주체화의 실천의 결정적 계기인 노동 혹은 일과 분리시켜버린다. 비록 노동이 일차적인 계기가 아니라고 인정한다 치더라도, 일의 세계에서 형성되는 정체성과 다른 삶의 장에서 작용하는 정체성 사이에 어떤 상관이 있는지 밝혀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에서는 일터에서의 주체성의 생산과 자기정체성 사이의 연관이 전혀 설명되지 않거나, 설사 설명되더라도 개인주의적 문화(벡)나 소비주의적 문화(바우만)라는 추상적인 문화적 가치의 변화를 통해 언급될 뿐이다. 28


(리프킨, 네그리, 하트) 그들 모두 노동 혹은 생산이라는 사회적 실천과 '노동하는 주체의 인간학'에 근거해 세계를 재현하는 근대적인 사회적 인식론을 거부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그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이란 대상을 어떻게 상징화하는가를 분석하지만 노동과 노동주체가 맺는 관계에 관한 분석은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다. 28


생산하는 삶에서 주체성의 관리와 지배는, 다른 사회적 삶의 장에서 주체성을 형성하는 사회적 실천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렇게 볼 때 일터에서 노동자를 주체화하는 방식과 더불어 노동자들이 자기를 관리하는 방식을, 다른 사회적 삶에서 자기의 주체화와 잇는 고리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보이지 않는 고리를 만들어내는 권력이 무엇인지 분석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를 단순히 노동주체의 경제적 지위의 변화나 노동주체에 대한 기술적 사회적 관리 방식의 변화로 환원하거나, 이를 단순히 협소한 뜻에서 이데올로기적 변화, 문화적 가정의 변화로 환원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31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를 일러 "개인의 자유의 소망 아래 세워진 이 경제질서의 궁극적 토대는 사실상 실업, 불안정취업, 해고 위협에 의한 공포 등의 구조적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때 그가 고발하는 것은 실업, 불안정, 해고라는 객관적인 현실이 아닐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자유'의 소망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구조적 폭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4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

 


노동주체를 지배의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중적이다. 직접적인 노동과정에서 노동주체를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가시화하는 담론은 노동주체가 '자기'를 지배할 수 있도록 가시화하는 담론, 즉 '자기-통치'의 담론과 함께 출현한다. 노동주체를 둘러싼 이런 이중적인 담론은 각기 자율적이면서도 서로를 상호 규정하고 또한 강화하게 된다. 40


기업이 구조조정을 할 때 그것은 기업의 경제적인 활동을 새롭게 표상하는 담론들을 동시에 생산한다. 이를 단순화시켜 표현하자면 이럴 것이다. 고객이 중심이 되고, 글로벌한 경쟁이 이뤄지며, 정보통신기술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새로운 경제적 현실에서, 기업은 이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며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고 성공을 이룰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서 이미 기업은 자신의 활동이 이뤄지는 경제적 실재를 새롭게 가시화하고 분절하고 있는 것이며 그에 관련된 지식들과 테크닉들을 활용할 태세를 갖춘 것이다. 42


이제 각 구성원들은 스스로가 개인 비전을 세우고, 창조적으로 활동해 창출가치가 존재비용을 능가하는 자기책임의 구현자로 변화되고 있다. 이런 구성원들이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조직은 투명하고, 지배구조의 진화를 통해 신뢰와 개방적인 경영을 정착시켜야 하고, 개인 비전과 조직 비전을 동시에 제시하고 통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창조적 긴장감 속에 가치를 창출하는 측정과 평가보상시스템이 실천되고 종국적으로 국가적으로 학습과 성장의 조직문화가 정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81


신교육체제의 지배란 그것의 이념의 효과가 아니라 그것이 고안하는 대상과 영역 그리고 그 대상과 관련된 주체에 작용하는 세부적인 테크놀로지를 통해 실현된다. 이를테면 교육 노동의 정체성과 교육 재정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먼저 쟁점이 되는 것은 교사 노동과 노동주체로서 교사의 정체성, 즉 교사란 무엇을 하는가, 교사의 활동은 어떤 책임과 의무를 가지는가, 교사의 활동은 어떻게 평가, 측정, 보상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이다. 교육체제 재편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바로 교사 노동의 정체성을 둘러싼 변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8


한국 자본주의가 변형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에 속한다는 것은 인적자원 담론이 등장하고 난 뒤에야 사후적으로 자각한 일이었다. 즉 교육체제 개편은 마치 전반적 사회체제의 변화와 무관한 교육 내부의 일인 것처럼 여겨졌던 셈이다. 결국 새로운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언표들은 매우 이질적인 공간에서 다른 반응과 언어들을 동원하면서 자신의 궤적을 밟았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103


'국민교육헌장'의 후속이라 할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이 재현하는 국민은 어떤 모습일까. 물론 그것은 더 이상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인 국민이 아니다.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이란 언표가 만들어내는 국민주체의 모습은 더 이상 국가가 돌보는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장받고 발전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경쟁력 있는 국민", 다시 말해 자기주도적으로 삶의 능력을 계발하고 실현하는 국민이다.......이 때의 국민은 자기의 삶의 목표와 사명을 스스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계발'하고 '혁신'하는 새로운 윤리적 주체이다. 117


국가는 개인화란 형태를 통해, 즉 개인적 주체가 자기책임, 자기계발, 자기조직, 자기존중의 형태로 주체화하도록 고취하고 유인함으로써 더 셈세하고 강력하게 작동한다. 개인적 주체의 정체성과 지식기반경제류의 경제적 가상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정체성을 결합하면서 국가 통치 역시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국가의 유연화 혹은 탈규제화라 부를 수 있는 이런 현상은, 국가의 약화나 쇠락이기는커녕 국가와 사회가 연결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 및 집합체의 삶을 주체화하는 방식에서 변화가 이뤄진 것에 불과하다. 118


'인적자원'이란 용어는 기업과 일터에서의 '인적자원관리' 혹은 '인적자원개발'이라는 용어와 연결되고, 다시 학교에서 '인재 양성'이란 언표와 연결된다. 일터에서의 '우수성' 혹은 '베스트 프랙티스', '인재' 등의 개념은 국가에서의 '핵심역량', '혁신능력' 등의 개념으로 다시 복제되고, 이는 다시 학교에서의 '수월성' 등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119


인적자원이란 언표는 "주체들의 가능한 자리를 정의하는 하나의 익명적인 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인적자원은 '어떤 누구'인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 속한 모든 주체들에게 자신의 삶을 표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따라서 인적자원이란 언표는 국가의 통치든, 아니면 일터에서 노동과 그를 관리하는 경영이든, 다양한 사회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교육이든, 아니면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 관련된 다양한 행위이든, 무한히 다양한 행위와 체험을 조직하는 가능성을 담지한다. 청소년으로서의 삶, 학생으로서의 삶, 직장인으로서의 삶, 국민으로서의 삶부터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종적인 삶들은 이제 인적자원이라는 담론구성체 안에 모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각각의 주체에 관한 언표들은 동일한 언표 값을 가지게 된다. 120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 독립해 있으며, 스스로를 존중하는" 국민, 즉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장 안에 존재하는 주체이다. 122

 

뱀발 

 

1. [변증법의 낮잠]을 읽다가 서동진이 궁금해서 [속물과 잉여]의 논문 한편을 챙기다. 그리고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읽게 된다. 논문집인 줄 알고 실망할까 싶었는데 온전한 책이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조한혜정님께 지도를 받은 박사논문이다. 그의 통찰이 남다르다 싶었는데 관련 연구의 심도가 깊었고 그 뿌리에서 나온 생각들이다. 왜 관심을 두지 못했는지, 읽기에서 피해갔는지 모르겠다. 아마 자기계발서의 하나는 아닐까 싶었던 것 같다. 무척이나 중요한 저작인 것 같다. 한국에 대한 연구도 드문데, 교육, 조직문화 전반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의 맥락을 이을 수 있는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진보가 과연 관심이 있다고 하면, 87년체제, 97년체제, 2013년체제 등등 체제 논쟁을 많이 하였지만 그리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이처럼 현실에 발닿고 있지 못한 연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87년 이후 민주화에 사로잡혀있는 진보의 망상과 퇴행을 되짚을 수 있는 요긴한 재료?이기도 할 것 같다.

 

2. 일터의 지금까지 모습과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잡혀 부담은 없다. 허우적대기도 하고, 그렇게 신민처럼 바뀌기도 하고, 자신을 채근하여 그렇게 나아가기도 하는 모습들은 대부분이 경험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정상의 정상만을 요구하며, 점점 그들만의 컨베이어 벨트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이다. 늙지도 않으며 아프지도 않으며 점점 더 젊어지고 강해지는 자만 생존할 수 있는 자기발전충전소 같은 '자기기만'을 동력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들고, 아프고, 사회적 약자는 애초에 대상과 사고의 바탕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는 국민교육헌장 속의 인물상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한데 문제는 넋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일터와 시민활동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읽고 나누면 좋을 것 같다.)

 

3. 읽다보니 조직의 생리를 지적한 우석훈의 [조직의 재발견], 그리고 구조적 폭력을 다루지만 지극히 읽기 어려운 [고요함의 폭력]이 겹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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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생을 미생으로 끝나지 않게하는 책 한권를 건네드리면서 (2)
    from 木筆 2014-12-23 15:56 
    유연한 노동주체 자본의 변증법은 노동과 노동주체를 분석함에 있어 두 가지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먼저 노동을 자본의 운동법칙에 종속된 경제적 실재로 환원함으로써(경제주의), 노동주체를 노동력, 그것도 직접적인 고용관계에 종속된 노동자로 한정한다. 따라서 오직 경제적인 삶, 그것도 노동력이라는 범주의 매개를 통해서만 노동 현실을 표상한다. 125 그 탓에 노동 분석은 임금, 고용관계 등 노동력의 경제적 삶을 분석하는데 머물러버리고, 노
  2.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계보학적 분석과 자유의 재의미 (완)
    from 木筆 2014-12-23 21:58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정치학 ‘어린이 비즈니스 스쿨’에서 창의와 도전정신 그리고 자율과 책임의 주체가 되기 위한 다양한 놀이, 토론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린이부터 고령화 시대에 대비해 ‘인생 2모작’, ‘인생 3모작’을 경영하기 위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연회에 참석하는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모습은 끊임없이 펼쳐지고, 모든 ‘주민’을 아우르며, 모든 삶의 공간을 흡수한
 
 
 

 

 

 

일들은 담을 넘을 궁리를 하다가 이때가 기회다 싶어 우르르 몰려오는 듯싶다. 몸이란 녀석은 제 싫어하는 것을 어떻게 눈치를 채는 것인지 감당할 일들에 앞서 끙끙 앓아데니 말이다. 때마침 먹구름이 끼고 눈발이 잔뜩 흩날린다. 겨울은 이렇게 몰려온다. 미리 몸을 내어주고 준비를 시켰으면 덜 하련만, 꽁꽁 감싸고 안은 몸은 달라지지 않은 채로 낯설어 한다.  실선인 몸의 빈곤이다. '어떻게'와 '만일'을 늘 열어둔다면 상심은 그리 크지 않고 몸도 상하지 않을텐데. 몸도 가라앉아 어쩌지 못하고 있다. 마음도 몸도 검은구름이 잔뜩이다. 어쩌면 그렇게 앓는 사이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는지도. 마음만 저기에 머물러있는지도 .

 

 

볕뉘. 들뜬 모습으로 새생각을 내려 안달하는 모습들. 설레임과 기대감으로 충만한 세미나 자리들. 귀쫑긋 하나라도 더 담아두려하던 뒤풀이들. 시집 한권에 시 한편을 골라 왁자지껄한 장소의 시 낭독들. 강연자의 마음을 더 읽으려고 책의 숨결을 살피는 일들. 그리고 둥근 달들. 또는 온기들. 봄 바람에 꽃들. 한 여름 밤 시원한 이야기들. 문득 잊어버린 풍경들과 그 속을 거닐지 못하는 몸결들이 안스럽다. 책 속으로 난 몇 갈래의 길들도 궁금하다. 바다라도 보고 올 일이다. 포말이라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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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민주주의를 함께 말하는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1)

 

말머리. 최선과 최악을 가정하고 긋는 그 선은 대부분 상식에 머물러 있다. '설마'와 '만일'을 가정하지 않기에 그 사고는 좁다. '만약'과 '설마'를 너머 서 있는 것이 현실이다. 끊임없이 재단하고 자르고, 아는 것으로 유혹은 길고 길다. 자신을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것, 나의 시선이 좁고 편협하고 찌그러질 수밖에 없다고 인정하는 것. 이것은 습관이자 힘이다. 주체도 존재도 단체도 야적 감수성의 물꼬를 터주지 않는 한 시야는 늘 좁을 수밖에 없다. 인권과 시민권은 당위로 전락한다. 프랑스혁명에 사로잡힌 존엄을 우리는 아직도 우려먹고 있다.

 

시민권과 인권은 변한다. 진리처럼, 별처럼 박혀 있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 인민의 인권이 그러하듯, 인도의 시민권이 그러하듯, 유럽 한나라의 노동권이 그러하듯 주식시세처럼 변한다. 삶을 살피지 않는 인권, 삶의 실뿌리를 건들지 않는 인권은 숨쉬기 어렵다. 사실을 직시하지 않고, 사실을 살피지 않으려는 관성으로 노동은 둥실 떠내려가고 있다. 추상에 잡혀 있는 국민과 시민의 권리라는 것에 머무르는 것은 아귀와 같은 먹고사는 노동을 함께 저울질 하려 하지 않아서는 아닌가.

 

주식의 시세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이들이 먹고사는 일에 벌벌 떨고 있는가가 분초처럼 보여야 한다. 주식종목이 그러한 것처럼 매주 시간근로의 인구가 종목처럼 잡혀야 한다. 부끄러운 일도 창피한 일도 아니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직시조차 못하는 우리가 부끄러울 뿐이다. 두눈으로 똑똑히 쳐다보고 느끼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삶을 절벽으로 떨어지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인권을 말할 수 없다. 일자리가 있는 삶의 출입문에 들어온 사람들만의 권리이자 시민권이다. 국가는 베풀 아량도 능력도 없다. 국가는 힘조차 없다.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는다. 일자리는 없다. 실업은 노동이다. 실업자도 국민이다.

 


 

국가의 쇠퇴나 몰락은 자유주의의 시점 속에 이미 예정되어 있다. 국가는 정의라는 윤리적 시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냉소적인 사실의 지평 위에서 자신의 무능과 실패를 가늠하고 조정한다. 박근혜 정권의 국가개조론이 말하는 국가장치의 비효율, 비능률이란 발언을 허튼 기만이라고 조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진지하고 계산된 것이며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것이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작동하는지 현실에 비추어 통치를 개선하고 개량하는 것이 자유주의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퇴각과 축소는 사실의 편에서는 옳은 선택이고 바람직한 선택이다. 그러므로 자유주의를 비판하지 않고 신자유주의의 폐해만을 비판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호락호락하게 여기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자유주의의 타락한 버전이 아니라 개선된 판본이다. 212


그러나 놀라운 점은 이것이 국가인가라고 말하며 경악하는 이들에게서 국가가 사회적 총체성을 직접적으로 대의할 수 있으며 또 그러해야 한다는 환상을 발견한다는 데 있다....사회란 것이 국가가 관리하고 통치해야 할 주어진 사실의 세계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정치와 사회의 관계를 표상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리고 국가는 사회적 총체성을 대의하는 공공선으로 상상된다. 이는 놀라운 퇴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국가는 정의, 공공선, 안녕의 윤리적 이상을 떠맡는 주체로 격상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직면한 갈등적인 사태를 국가 비판이라는 형식 속으로 운반한다. 이는 실은 어처구니 없는 역설을 보여준다....우리는 재산, 참사, 외상적 위기를 겪게 하는 사태들에 매혹당하고 열중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이 겪은 분노와 우울, 고통을 호소한다. 마치 모두가 현상학자인 것처럼......자유의 대가로서 세계의 무의미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유를, 세계의 원인을 확정하고 그것을 지배하는 자유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214

 

우리는 수동적인 불행, 피해자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불행, 심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고발, 비난, 규탄, 호소, 투쟁의 흔적은 말끔히 표백된 불행, 잠시의 감상적인 연민을 통해 쾌적하게 소비되고 곧 휘발되어버려야 하는 불행을 매일 한 꾸러미씩 선물 받고 태연자약 즐긴다. 이러한 불행의 경연은 진보적 저널리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르포르타주와 같은 장르는 더 이상 위선적인 세계가 은폐하고 있던 거짓의 증거로서 불행을 폭로하지 않는다. 폭로는 한 번으로 족한 것이다. 그다음에 일어나야 할 것은 바로 그러한 폭로를 통해 깨닫게 된 세계를 향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 토론하고 투쟁을 조직하는 일이다. 그러나 진보적인 체하는 언론 역시 불행을 폭로하는 일에 분주하다. 그리고 그를 듣고 읽는 독자로서의 우리는 천연덕스럽게 마치 다음 순서를 기다리며 대기하고 있는 불행을 기다리며 연민을 준비한다. 이는 피해자는 있었지만 투사는 없는 세계가 보여주는 도착적인 초상일 것이다. 218


스스로를 단체로서 조직화한다는 것은 이미 세계의 모순을 다른 방식으로 주관화하면서 동시에 객관화하는 것이다. 조직화된 노동자계급이 서있을 때, 그것은 단순히 주체의 편에서의 전환이 아니라 객관적 현실에서의 전환을 초래한다. 노동자계급이 조직화되어 자신을 새롭게 주체화할 때 자본은 전과 같은 방식으로 생산방식을 조직할 수 없고, 이윤을 착취할 수 없으며, 국가를 지배할 수 없으며....., 등등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더 이상 전과 같은 방식으로 굴러가지 않는다. 주체의 편에서 단체로 조직된 주체로의 전환이 이뤄지자마자 나타나는 일은 주체의 각성이 아니라 현실 자체가 새로운 세계로 바뀌는 것이다. 224-225


이는 세계는 결국 보는 이의 관점에 달려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력한 낭만적 부정을 가리킬 따름이다. 느낌의 공동체니 기억, 애도의 공동체니 하는 말들은 우리 시대의 윤리-정치적 유행어구들일 것이다. 그런 몸짓은 '세계 없는' 주체의 편에서 이뤄지는 낭만적인 부정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것은 현실적 부정을 회피한다. 현실적 부정 혹은 변증법적 부정이란 객관적인 세계를 주관적인 의지와 계획에 따라 변화시키는 일이 아니다. 변증법적 부정이란 객관적인 것에 항상 주관적인 것이 연루되어 있고 또 그 역이기도 하다는 점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킨다. 225

 

애도와 기억, 느낌 등의 아름다운 개념으로 조직된 공동에는 부정의 정치를 조직하는 힘을 갖지 못한다. 부정이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만드는 세계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나에게 왜 그러한 방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반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자들이 회심이나 개종이라고 부르는 절차와 같은 어떤 것을 감행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그렇게 굴러갔다는 것은 내가 세계를 그런 식으로 응시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모순적으로 사고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원망하고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드는 세계를 탐색하고 추궁하는 것이다. 227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세상의 모순 때문이다. 모든 일과 사물과 사람에는 그것들을 지금의 상태로 무언가가 있고, 동시에 다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왜냐면 그것들은 발전해나가고 머물러 있지 않으며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다. 지금 있는 것들 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다른 것, 그 이전의 것, 현재에 적대적인 것들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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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사랑한 것이 아니라 '찾아온 목소리'를 들었을뿐이다. 

 

 

말이 포말처럼 밀려온다. 그 아픈 말 한 점도 가려 건지지 못했다.

나는 말을 찾아가는 존재였으므로. 찾아가기만 하는 존재이므로ᆞᆞᆞ

 

찾아온 목소리는 길을 잃고 여기저기 노숙이다.

상처입은 말들이 흥건하다. 듣고싶은 말만 고를 줄 알기에 ᆞᆞᆞ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수만 말들이 한마리 말이 되어 오는 시간은 있을까.


'길을 그리기 위해선 마음의 지평선을 먼저 생각해야한다'는 시인의 말이 맴돈다.

 

ㅡ나희덕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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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두 가지의 유혹을 피해야 한다. 행복의 정치라는 긍정의 정치와 진리의 정치라는 순수한 부정의 정치, 두 가지 유혹 말이다. 이 두 가지의 유혹은 오늘날 우리가 도처에서 목격할 수 있는 정치에 관한 이론 그리고 실천을 통해 끊임없이 출현한다. 그리고 여기에 실린 글에서 나는 이 두 가지 유혹에 맞서 싸우며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정치와 그것을 궁리하기 위한 물음들을 제시하고 답하려 애쓴 시도를 기록하고자 한다. 017

 

우리는 민주주의를 말할 때,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주체를 모두 마주하게 된다. 먼저 하나는 보편적인 주권적 주체로서의 인민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인 여러 가지 사회적 집단의 총체로서 인민일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우리는 99%이다라는, 얼핏 듣기엔 호소력 있는 목소리가, 왜 정치적으로는 불임의 외침일 수밖에 없는지를 설명해준다. 99%라는 숫자는 대표되기 위해 헤아려져야 할 현실만을 알 뿐이다. 그것은 누가 얼마나 많이 대표되어야 하는가에 골몰할 따름, 그 현실을 창설하는 행위와 인물을 고려에 놓지 않는다. 031

 

푸코는 자유주의라는 통치성은 주권을 가진 시민들의 연합으로서의 공화국이 아니라 행복, 장수, 안녕 등을 추구하는 개인과 그 개인들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를 발명했다고 주장한다. 033

 

우리가 말한 민주주의의 역설, 보편적인 주체로서의 인민과 동일시에 따라 조직된 사회적 개인들의 모임으로서의 인민의 동일성이라는 역설은 이제 해결될 것이다. 누구보다 그 문제에 관하여 잘 안다고 자처하는 전문가들이 대리하는 인민, 자신의 문제를 굳이 대표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자신의 문제를 고백하고 증언하는 측은한 피해자로서의 인민, 정치는 소통의 문제라고 분통을 터뜨리며 방청석에 앉아 정치평론가의 토론을 청취하는 인민, 그런 인민에게 새로운 세계는 없을 것이다. 046

 

“xx사회라는 것이 사회라는 대상을 경험적이고 실제적으로 서술하거나 묘사한다고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나 혹은 우리의 눈에 비친 혹은 의식에 나타나는 사회의 이미지를 고백할 뿐이다. 그렇기에 너무나 많은 사회의 이미지들은 실은 사회란 것에 관한 일관된 이미지를 가지기 어렵다는 것을 알려주는 조짐일 뿐이다....그것은 그를 통해 사회라는 유기적 전체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성을 제거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사회에 관한 지식을 통해 사회에 관한 의심을 침묵시킨다. 062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의 모습을 향해 나아가는 듯이 보인다. 사회국가가 기대었던 연대와 집합적인 책임이 원리는 점차 탈국민화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런 탈국민적인 연대는 사회적인 것을 특정한 유대로 조직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대신 신자유주의의 온전한 파트너로 이바지하면서 분할되고 시장화된 연대의 섬들이 국민연대의 빈자리를 성기게 채우고 있다....더 이상 국민이란 이름으로 제공되는 집합적인 연대가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안전에 따라 시장이 제공하는 사이비 연대를 구입하는 산산이 흩어진 개인들의 연대이다. 065-066

 

지금 우리가 바라보게 된 새로운 연대를 연대의 해체인지 아니면 새로운 형태의 연대의 조직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이는 열려있고 또한 논쟁 중인 쟁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것이 무엇일지 지레짐작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 아닐 수 없다. 067(068질문들 참고)

 

실업은 자본의 운동의 법칙의 일부이자 그것의 필연적인 효과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노동을 흡수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것을 뱉어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실헙은 자본의 외부에 놓여있는 노동을 가리키는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어떤 자본주의라 해도 그러한 실업을 배제한 채 노동을 말할 수 없다.....자본은 실업을 만들어낸다. 실업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상수인 것이다. 103

 

자본은 영속적인 실업과 빈곤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결국 자본이 존속하려면 노동권은 제거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노동권은 인권과 시민권이 적용된 이차적인 하위 권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 시민이라는 추상적인 이름의 권리에 구체적인 낯을 부여한다. 노동의 자기영유, 자기 자신의 소유라는 것을 통해 형성된 인간-시민이야말로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시민이기 때문이다. 노동권은 거꾸로 인권과 시민권의 초석이라 할 수 있다. 109

 

부즈주아적 테제의 승리 - 노동은 권리의 기초가 아니라 노동자가 되어 고용된 자가 누릴 권리의 작은 부분으로 축소된다. 즉 인간-시민의 권리가 아니라 직업을 가진 자들의 권리로 제한되고 만다. 결국 노동은 사적 소유의 문제로 귀착된다. 노동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소유한 노동자들, 그러한 사적 개인들이 누릴 권리가 되는 셈이다. 112

 

필라델피아 선언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와 결사의 자유는 부단한 진보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 결핍과의 투쟁은 각국에서 불굴의 의지로, 그리고 노동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가 정부 대표와 동등한 지위에서 공동선의 증진을 위한 자유로운 토론과 민주적인 결정에 함께 참여하는 지속적이고도 협조적인 국제적 노력에 의해 수행돼야 한다./헌법 제321모든 국민은 근로의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사회적·경제적 방법으로 근로자의 고용의 증진과 적정임금의 보장에 노력해야 하며,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최저임금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못박고 있다. 133-134

 

자본주의적 사회관계에 의해 매개된 그리고 그것의 내재적인 귀결로서 노동의 규정을 부정하는 것, ‘규정적 부정에 이르지 않는 한, 그러한 비판은 신종 감정 사회학에 그치고 말 것이다. 울분과 비판의 파토스로 자본주의를 저주라는 것은 부정이 될 수 없다. 노동의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새로운 권리의 세계를 조망하는 것이다. 138

 

노동 없이 인권과 시민권의 정치를 상상할 수 없다. 그렇지만 또한 실업을 배제한 노동의 정치 역시 절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대개 우리는 오직 노동만을 말하며 민주주의를 말하지 않거나 오직 민주주의만을 말하며 노동은 말하지 않거나 한다....그런 세계는 언제나 터무니없는 불평등과 착취에 시달리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사라지고 있는 사회국가가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 그것이었다. 그것은 연대의 다른 이름인 사회를 통해 고용된 노동자는 물론 실업자, 여성, 아동, 노년, 질병에 걸리거나 재해를 입은 자 등의 삶을 보호하였다. 140

 

우리는 오직 시장에 입장할 수 있을 때, 즉 고용될 수 있을 때에만 그런 보호와 안전을 제공받는다는 데 익숙해져 가고 있다. 권리의 토대는 오직 시장을 통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인권과 시민권을 쇠퇴시키고 민주주의를 타락시키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업은 사회문제도 아니고 노동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자체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다시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민주주의로서의 정치가 돌아오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140-141

 

두 제곱된 사고란 프레드릭 제임슨이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사유를 가리키려 만들어낸 표현이다. 그는 변증법적 사유란 두 제곱된 사고, 즉 사유 자체에 대한 사고로서, 정신은 대상이 되는 자료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사고 과정도사유의 대상으로 취해야 한다고 말한다.....경제가 정치를 결정한다는 것은 결국 경제가 정치의 궁극적 대상이라는 말이 아니다. 정치는 사고된경제, ‘반영된경제가 아니다. 제임슨의 표현을 빌자면 그것은 한 번만 제곱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또 한 번 제곱해야 한다. 경제는 직접 정치를 결정하지 않는다. 외려 정치가 스스로의 대상을 갖도록 함으로써 정치를 결정한다. 158-159

 

잉여가치는 사물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관계 그 자체이다. 다시 말해 잉여가치는 계급적인 착취, 혹은 계급투쟁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잉여가치는 어떤 추가적인 크기의 양이 아니다. 그것은 공장 안팎에서 노동자의 일하는 방식을 결정하고 전반적인 생활양식을 조정하는 원인이다. 이것은 성이란 것이 이러저러한 신체의 생리적인 활동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제아무리 성을 무엇이라 구체적인 실정적인 대상으로 환원하려 해도 성은 그런 사실적 실체를 초과한다. 169

 

신이 사라진 이후에 자유를 떠맡은 주체, 자유의 심연으로서의 주체라는 널리 알려진 주장을 떠올리며, 주체의 자유와 정치가 동일한 것일 수 있겠다는 정도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그리고 이와 더불어 주체의 자유를 어떻게 원인을 발견하고 제어하는 행위와 결합시킬 수 있냐는 물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덧붙이도록 하자. 200

 

존재가 주체에 의해 매개된 것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말은 주체의 능동성이 아니라 대상의 능동성이란 역설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쳐 읽어볼 수 있다. 지젝이 어느 글에서 간지럼을 타는 주체라고 말한 바처럼 주체는 대상에 의해 간지헙혀진다. 주체의 전환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렇게 부정 즉 규정을 통해 재인식된 대상은 주체로 하여금 전과 같은 방식으로 대하지 못하게끔 이끈다...주체는 짐작과 달리 지극히 수동적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는 세계를 괄호친 채 적극적으로 윤리적 주체가 되어 세계의 바깥으로 달아나는 능동성을 연기한다. 206

 

참여하라, 참여하라, 그것이 너의 윤리적인 의무이다” ‘촛불 시위이후 우리는 조직 없는 다중으로서 어떤 위계와 권위적인 지침 없는 자유로운 윤리적 주체로서, 모든 사태에 적극적으로 윤리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받아왔다....그러나 그 자리에 모이는 다중은 추상적인 세계를 상대할 뿐이다...그리고 각각의 사태는 모두 동등한 보편적 대의를 위해 헌신해야 할 무엇으로서 상징화된다. 게다가 그런 사태는 너무나 많고 무엇 하나 해결되지 않은 채 다음에 오는 화려한 사태에 자리를 넘겨준다. 이는 실은 너무 퇴폐적으로 보이지 않는가...그러한 하나하나의 사태들은 지극히 추상적인 주관적 윤리를 요청할 뿐이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사태의 총체 속에 등록되지 않는다....쌍용자동차 사태를 비롯한 중요한 사태에 개입하는 담론이 외상후증후군과 같은 것으로 나타나는 것에 놀라곤 한다. 그것은 고통을 겪는 심리적인 개인을 전면에 내세울 뿐 그들을 투쟁 속에 있던 집단적인 사회적 주체 혹은 계급으로서 재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불쾌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실망스러운 것은 그것이 정치와 윤리의 관계를 왜곡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정치의 윤리란 부정 혹은 투쟁을 주체화하는 것이 곧 부정/투쟁의 대상을 규정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정치를 도덕화한다는 것은 정치를 도덕적인 규범의 문제로 환원하고,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계에 어떤 책임이 있으며 어떻게 그것을 감당할 것인가로 묻는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즉 그것은 세계 없는 주체의 자폐적인 반성을 가리킬 뿐이다. 208-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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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노동과 민주주의를 같이 말하는 노동의 정치가 돌아와야 한다 (2)
    from 木筆 2014-12-15 09:35 
    국가의 쇠퇴나 몰락은 자유주의의 시점 속에 이미 예정되어 있다. 국가는 정의라는 윤리적 시좌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냉소적인 사실의 지평 위에서 자신의 무능과 실패를 가늠하고 조정한다. 박근혜 정권의 국가개조론이 말하는 국가장치의 비효율, 비능률이란 발언을 허튼 기만이라고 조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말은 진지하고 계산된 것이며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것이다. 얼마나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작동하는지 현실에 비추어 통치를 개선하고 개량하는 것이 자유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