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아가 된 성적 동물: 사람 사귀기는 목적인가 수단인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종속된 상태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제한의, 되물릴 수도 없으며 '다음 통보가 있을 때까지'라는 단서조항도 붙어 있지 않는 헌신에 몰두하게 됨을 의미한다. 그러한 의무를 지는 것은 오늘날의 유동적인 사회의 처세술에는 맞지 않는 것이며, 대부분의 사람이 대개는 삶을 다른 식으로 표출하며 열심히 피하려는 것이다. 그러한 헌신에 눈을 뜨는 것은 트라우마적 경험이 될 수 있다. 산후 우울증이나 출산 후의 부부관계의 위기는 거식증이나 폭식증, 무수한 변종 알레르기와 마찬가지로 특히 '유동적인 현대'에 고유한 질병처럼 보인다. 116


가볍게 하늘을 나는 것은 환희지만 방향타 없이 나는 것은 스트레스이다. 변화는 축복이지만 변덕은 짜증스럽다. 섹스의 해방. '섹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라고나  할까  122


요즘 유행 중인 모든 형태의 친밀한 관계는 한때 부부간의 사랑 그리고 나중에는 자유연애가 했던 것과 똑같은 거짓 행복의 가면을 쓰고 있다....그러한 가면을 벗기고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충족되지 못한 열망, 녹초가 된 신경, 실망한 사랑, 상처, 공포, 외로움, 위선, 자기중심주의, 반복강박증 등을 발견할 수 있다.....연기가 환희를 대신했으며 몸과 돈 등 물질적인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고 정신적인 것은 퇴물 취급된다.  금욕과 일부일처제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난잡한 성행위 모두 똑같이 관능의 자유로운 삶으로 부터 저 멀리 유리되어 있다. 123


기교에 대한 관심은 감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성행위를 하는 데만 집중하느라 환희를 맛볼 시간이나 여지를 갖지 못한다. 육체는 정신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섹스의 매력이 흘러나왔던 것은 감정과 환희와 정신으로부터였다. - 지금도 그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신비는 사라졌으며, 따라서 열망은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다.... 123


유동적 현대의 이성은 공간적인 것이든 시간적인 것이든 어떠한 구속과 속박의 권리도 부정한다. 억압당하고 의존하고 속박될 필요도 또 그렇게 해서 좋을 아무런 이유도 없으며, 현대의 유동적 소비자들의 합리성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정당화시킬 수 없다. 속박과 구속은 인간관계를 '불순'하게 만든다 125


"합리성의 통제 범위를 벗어난 바람과 욕구들"이 곧 복귀해 복수할 것이며,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자연적 본능과 영원한 가치 등 지금까지 역사적, 정치적으로 핵심까지 썩어들어간 개념들을 사용하는 것에 의지하지 않고는" 대응할 수 없을 것으로 믿고 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단지 섹스나 성행위에 적법하게 투자될 수 있는 기대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 이상의 것이 요구될 것이다. 즉 다름 아니라 소비자의 합리성이라는 주권으로부터 섹스를 제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 아마 그것 말고도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126

 

섹스와 관계

 

 

생산자의 삶이라는 모델 내부에서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의 사랑이나 영원으로 가는 다리를 놓는 것 또는 '운명의 포로'가 되는 데 동의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헌신을 약속하는 것 등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었다 - 그것을 구속적이거나 억압적인 것으로 느꼈든 그렇지 않든 말이다. 그와 반대로 그것들은 호모 파베르에게는 '자연적 본능' 같은 것이었다. ..사랑하고 아이를 갖기를 원하는 것은 호모 파베르의 섹스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였다 127


과거와 현재의 고통을 서로 견주어 어느 쪽이 더 견딜 만한지를 가늠해보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다. 시대가 다른 만큼 각각이 겪는 고통과 괴로움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으 오늘날 고뇌는 소비하는 인간의 고뇌이다. 양자는 함께 태어났다. 만약 그것들이 사라진다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없어질 것이다. 128


어떤 육체적 결합이든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사회적으로 틀 지워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으며, 사회적 존재의 다른 측면들과의 연관성을 모두 제거할 수는 없다. 이전의 사회적 지위와 사회적으로 승인된 의미를 박탈당한 섹스는 유동적인 현대적 삶의 주요한 골칫거리가 되고 있는 끔찍한, 무시무시한 불확실성을 하나로 압축하고 있다. 133


부부스와핑 - 그곳에서 친밀함과 기쁨, 부드러움, 애정이나 자부심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을까? 물론, 방문자는 아무 거리낌 없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바보야, 이건 섹스야! -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런저런 세상사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 그러나 만약 그의 말이 맞는다면 도대체 섹스가 왜 중요할까? 또는 오히려 지구쉬의 말을 반복하자면, 만약 성행위의 본질이 순간적 쾌락을 끌어내는 데 있다고 할 경우 "그렇다면 우리가 (의도를 갖고) 행하는 일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단지 그것이 일어난다는 것만 중요해지는 것"이 아닐까? 138


'성적 선호'가 '자연적으로 주어진 것'이냐 아니면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이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수의 성 정체성 중 어떤 것이 자신에게 가장 맞느냐를 결정하는 것(발견 또는 발명하는 것)이 성적 인간에게 달려 있는 것이냐, 아니면 '출생 공동체'의 경우의 호모 사피엔스처럼 그러한 운명을 받아들여 그처럼 바꿀 수 없는 운명을 개인의 소명으로 개주해 삶을 살아가야 하느냐이다. 140


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영원히 불완전하고 충족되지 않은 채로 있도록 운명 지어져 있다. - 과거라면 성의 불길이 곧 잦아들었을테지만 지금은 경이로운 신체 단련 체제와 특효약의 공동 협력에 의해 불길이 되살아나는 그런 나이에도 말이다. 이 여행은 결코 끝나지 않으며, 여정은 각 역에 도착할 때마다 재조정된다. 그리고 최종 목적지는 여행 내내 미지의 것으로 남는다. 141


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하나의 상태가 아니다.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상태는 더더구나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으로 무수한 시행착오, 위험천만한 발견 여행, 우발적인 발견들로 가득 차 있으며, 도처에 수많은 실수가 끼어들며, 놓친 기회들 때문에 슬픔에 잠길 때가 많지만 때로는 즐거운 일이 서서히 떠오르는 기쁨도 맛볼 수 있다.143


성적 본능의 승화와 억압(프로이트는 이것은 사회의 어떠한 질서있는 배치에서도 필수불가결한 조건으로 간주했다) 간의 연관성은 무너진 것 같다. 유동적인 현대 사회는 성적 본능을 억압하지 않고도 또는 근본적으로 그것의 한도를 제한하지 않고도 그것을 승화시키려는 인류의 성향/순종성을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 것은 승화 과정에 대한 규제가 점차 해체된 덕분인데, 이제 그것은 널리 확산되고 만연된 채 어떤 강제적 압력이 아니라 얼마든지 돈만 있으면 살 수 있는 성적 욕망의 대상들이 이끄는 대로 계속해서 바뀌고 있다. 146

 

네트워크와 관계


당신은 휴대폰 없이는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 동시에 일단 휴대폰이 있다면 당신은 결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 수 없다. 항상 안에 있는 것이다. - 다만 한 장소에 갇혀 있지 않는다. 150


끊임없이 움직이는 집합으로, 이동하는 각각의 단위들은 똑같은 것을 하지만 함께하지는 않는다. 단위들은 규정을 따르지 않고 발을 맞추어 나간다. 통상적인 군중이라면 무리를 벗어나 있는 단위는 쫓아내거나 그대로 밟고 지나간다. - 하지만 우리의 떼가 용인하는 것은 오직 그러한 단위들뿐이다......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휴대폰들이 무슨 소용이겠는각/ 152


휴대폰은 서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접촉할 수 있도록 해준다. 휴대폰은 접촉하고 있는 사람들이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있도록 해준다. 153


가상적 인접성의 도래로 인해 인간들 간의 접속이 보다 빈번해진 동시에 보다 얕아지고, 보다 집중적으로 된 동시에 보다 짧아졌다. 유대 관계로 발전하기에는 접속들이 너무 얕아졌고 너무 짧아지는 경향이 있다. 목전의 일에 초점을 맞추느라 주고받는 메시지의 범위를 넘어서거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간 외로 관계를 확장시키지 못한다. 155


인간관계란 본래 다방면에 걸치고 또 많은 공을 들여야 발전하는 것이다.  이제 계약을 맺는 데 필요한 시간과 노력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으며, 그것은 깨는 데서도 마찬가지이다. 거리는 더 이상 접촉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 그러나 접촉하고 있다는 것도 따로 떨어져 있는 것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 ....'접속되어 있는 것'이 '관계를 맺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든다 - 하지만 또한 유대를 형성하고 유지한다는 측면에서는 훨씬 덜 생산적이다. 156


인간적 관심과 학습 노력이 가상적 종류의 인접성에 흡수될수록 다른, 즉 비-가상적 종류의 인접성이 요구하는 기술을 습득하고 행사하는 데 쓸 시간은 적어진다. 그러한 기술들은 이제 더 이상 사용되고 있지 않다. - 잊히거나 무엇보다 배우지를 않으며, 그나마 사용하는 경우도 마지못해 그렇게 할 뿐이다. 부득이 그러한 기술을 사용할 것이 요청되는 경우에도 어색하기 짝이 없고, 심지어는 쉽게 극복할 수 없는 도전이 되고 만다. 그래서 가상적 인접성이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된다. 가속화되면서 걷잡지 못한다. 160


"네트 net의 젖을 뗀 세대가 막 테이트를 시작할 나이가 되자 인터넷 데이트도 대인기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최후 순이 아니다. 그것은 여가 활동이다. 오락이다." 161

 

시장과 사회

 

시장 사회에서는 온갖 경우에 돈의 주인이 바뀐다. 로우가 수집한 신랄한 사례 몇 가지만 언급해보자면, 어떤 사람이 환자가 될 때 도는 교통사고로 자동차가 수선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었을 때 돈의 주인이 바뀐다. 또는 이혼 소송에 대한 변호사 수임료가 인상되었을 때도 그렇고, 수돗물이 음용 기준에 미달되어 사람들이 필터를 사서 설치하거나 생수를 구입해 마시기로 작정했을 때도 그렇다. 이 모든 또는 이와 비슷한 경우에 GNP는 증가한다.  165 그리고 이를 보고 여당 정치인들이나 그들의 브레인 역할을 하는 경제학자들은 함께 박수를 치며 기뻐한다.


시장 경제 이론가들이 '경제를 계속 굴러가게 하고', 경제 성장의 수레바퀴에 기름을 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주목할 만한 유일한 인간 유형은 '경제적 인간'이다. - 즉 외롭고, 병적으로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지며, 자기중심적인 경제적 행위자로 '합리적 선택'에 의지해 최고의 거래를 추구하며, 금전적 이익으로 옮길 수 없는 종류의 감정의 먹이가 되지 않도록 조심하고, 그러한 덕성들을 공유하는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것은 아무것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찬 생활세게 속에서 살아간다.  시장 경제의 실천가들이 기꺼이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그리고 그렇게 하려는 유일한 인간 유형은 '소비하는 인간'이다.- 즉 좋은 물건을 싸게 사는 것을 외로움에 대한 치유책으로 선택하고 그 밖의 다른 치료법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외롭고 병적으로 자기에게만 관심을 가지는 자기중심적인 쇼핑객이 그들이다.....현대 초기의 특성 없는 인간은 이제 유대 없는 인간으로 성숙했다. (또는 밀려났다.) 169


시장에 의한 정복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회색지대'로 보이는 것은 그처럼 정복당한, 또는 부분적으로 정복되고 정복당한 주민들이라고 지정된 사람들에게는 공동체이고 이웃이고 친구들 집단이고 삶의 동반자들이다. 이 세계에서는 연대와 공감과 나눔과 상부상조와 상호 연민이 합리적 선택이나 사리의 추구를 정지시키거나 밀어낸다. 이 세계에서 거주자들은 경쟁자도 또 사용하고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함께 만들어나가고 함께하는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함께 노력하는 동반자들이다.  172

 

사회와 변화


사유능력과 반역능력 - 코뮤니타스는 좋든 나쁘든 모든 소시에타스라는 구름의 안감이다. - 만약 코뮤니타스가 없다면  그러한 구름은 사라질 것이다. 소시에타스는 이음매가 풀어지면서 흩어져버릴 것이다. 통상적인 순서와 방법을 따르는 소시에타스와 무정부적인 코뮤니타스가 마지못해 그리고 갈등에 시달리면서도 함께 협력할 때에야 비로소 질서와 무질서는 구분될 수 있다.  177


코뮤니타스(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소시에타스도 마찬가지지만)의 생존과 번영은 인간의 상상력과 발명심 그리고 상투적인 일상성을 깨부시고 시도되지 않은 방법들을 시도해보려는 용기에 의존한다. 다시 말해 리스크를 안고 살아갈 수 있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떠안을 수 있는 인간으 능력에 의존한다. 바로 그러한 능력들이 '도덕 경제', 즉 서로 돕고 보살피며, 타자를 위해 살고, 상호 헌신의 조직을 짜내며, 인간들 간의 유대를 단단히 하고 수리하며, 권리를 의무로 해석하고 모두의 운명과 행복에 대한 책임을 함께 나누는 것 - 즉 뚫린 구멍을 막고, 영원히 끝나지 않는 구조화 작업이 방출한 홍수를 막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이런 것들을 지탱해준다  178


시장의 주된 공격 대상은 생산자로서의 인간이다. 완전히 정복되고 식민지화된 곳에서는 오직 소비자로서의 인간만이 영주권을 부여 받는다. 삶의 조건을 공유하며 여기저기 흩어져 존재하는 가내공업은 쇠락하고 해체될 것이다. 삶의 형식들 그리고 그것들의 토대를 이루는 파트너십들은 오직 상품 형태로만 성립하고 존속 가능하다. 질서에 집착하는 국가는 무정부 상태(이것이 코뮤니타스의 등록상표이다.)와 (자신이 위험을 감수하고)싸웠다. 그것이 권력이 지지하는 틀에 박힌 일상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윤에 집착하는 소비 시장 역시 그러한 무정부 상태와 싸우고 있는데, 그것이 감당하기 어려운 정도의 생산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로부터 자급자족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자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79

 

 

3. '내 이웃을 사랑하기'는 왜 그렇게 어려울까?


어떤 고통의 울부짖음도 한 사람의 울부짖음보다 더 클 수 없다. 또한 어던 고통도 한 인간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클 수 없다. 지구 전체라도 한 영혼이 혼자 겪어야 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193


인간의 삶에서 가치 있는 것이란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단 한 가지 가치를 살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상이한 교환권일 뿐이다. 다른 인간 존재 속에 들어 있는 인간성을 죽이고 생존하려는 사람은 바로 자신의 인간성을 죽이고 살아남으려는 것이다. 195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러한 부정을 통해 내세우려는 어떠한 명분의 가치도 신뢰성을 잃게 만든다. 그리고 단 한 명의 어린아이가 고통을 겪는 것은 수백만 명이 고통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한 가치의 신뢰성을 철저하고 완벽하게 불신하도록 만든다.


삶이란 살아남는 것에 관한 것이다. 강자가 살아남는다. 먼저 공격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강자인 한 약자에게 무슨 짓을 했든 처벌받지 않고 빠져나갈 것이다. 희생자의 비인간화는 희생시키는 자도 비인간화시킨다 - 도덕적으로 황폐하게 된다. - 는 사실은 별로 문제될 것이 없는 일로 치부된다. 즉 조용희 넘어가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중요한 것은 정상에 오르고, 정상에 머무는 것이다. 생존 - 살아남는 것 -은 분명히 생존에 몰두하는 삶의 비인간성에 의해 손상당하거나 오염되지 않는 가치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서 추구할 만한 것이다. - 홀로코스트의 교훈 200


이런 식으로 저지르는 잔혹 행위의 목록이 늘어나면서 희생자들이 목소리를 내는 것뿐만 아니라 아예 그것을 듣지도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점점 더 단호하게 그것을 적용할 필요도 늘어난다. 그리고 오래된 수법들은 상투적인 것이 되고, 그것들이 목표물에 심어놓은 공포가 잦아들게 되면 새롭고 훨씬 더 고통스럽고 무시무시한 방책들을 열렬히 찾게 된다. 201


티브이 메시지는 삶이란 냉정한 사람들을 위한 냉정한 게임이라는 식으로 계속된다. 게임은 늘 맨 처음부터 시작되며, 과거의 장점들은 중요치 않으며, 마지막 싸움의 결과에 모든 게 걸려 있다. 선수들은 매 순간 철저히 혼자이며, 정상에 오르거나 일단 전진하려면, 살아남아 성공하려고 열망하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을 배제하기 위해 먼저 협력해야 한다. 205..타자란 최우선적으로 경쟁자들이다.


젊은 이들은 뭔가 수긍이 가는 것에 대해서는 '쿨하다'고 말한다. 인간의 행동과 상호작용이 이와 다른 어떤 특징을 가졌든 상호작용이 관계를 데우거나, 특히 따듯한 상태로 남아 있도록 해서는 안 된다. 쿨한 상태로 남아 있는 한에서만 OK이다. 또 쿨라다는 말은  OK란 의미다. 어느 순간이든 상대방이 당신이 동의하든 말든 둘 사이의 관계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안다면 감정을 모두 현재의 관계에 투자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짓이다. 파트너 관계에 강력한 감정을 투자하거나 그러한 관계에 충실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을 떠안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당신을 상대에 종속시킨다. 209


도덕이란 선천적으로 유발되는 인간성의 발현일 뿐이다. - 그것은 어떤 '목적'에도 '봉사'하지 않으며 이익, 안락, 영광 또는 자기 지위의 향상에 대한 기대에 의해 인도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객관적으로 선한 행위들이 종종 이득에 대한 행위자의 계산속에서 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들은 다름 아니라 바로 그런 식의 동기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진정한 도덕적 행위로 분류될 수 없다. 214


우리 조상들에게는 멀리 떨어져서도 효과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가 별로 없었다 - 또 손에 쥐고 있는 도구로는 가닿을 수 없는 먼 곳에서 벌어지는 인간이 고통당하는 장면에 노출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우리 조상들이 직면했던 도덕적 선택 전체는 직접성, 즉 얼굴과 얼굴을 맞댄 만남과 상호작용이라는 좁은 공간에 거의 완전히 갇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은 - 그러한 것에 부딪힐 때마다 - '삶의 주권적 표현'에 의해 고무되고, 영향받고, 원리상으로는 심지어 통제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윤리적 명령의 침묵은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숨이 막힐 듯하다. 220


새로운 글로벌 엘리트가 과거에는 이런저런 일로 얽혔던 지역 사람들로부터 분리되고, 그렇게 분리된 사람들의 주거 공간과 체험 공간 그리고 뒤에 남겨진 사람들 사이의 간격이 점점 더 벌어지는 것, 익서이 아마 분명히 현대가 '부동적' 단계에서 '유동적' 단계로 이행하는 것과 관련된 가장 획기적인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벗어남의 출발점일 것이다. 225


오늘날 글로벌화하는 세계에서 정치는 점점 더, 열렬히, 자기 의식적으로 지역적인 것이 되는 경향이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 쫓겨나자 또는 접근이 막히자 정치는 뒤로 몰러나 지역 문제나 이웃과의 관계처럼 '손에 닿는' 문제로 되돌아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리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러한 문제들만이 우리가 '뭔가를 할 수 있고', 영향력을 미치고, 고치고, 개선하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쟁점들처럼 보인다. 오직 지역적인 문제들에서만 우리의 행동이나 비-행동은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는' 반면 다른, 소위 초지역적 문제에 대해서는 '대안'이 없다. 그리하여 결국 유감스럽게도 동원할 수 있는 수단과 자원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하든 또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무엇을 하든 또는 아무리 합리적으로 무엇을 할지를 심사숙고해도 세상일은 원래 그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의심하게 된다. 229


도시는 글로벌하게 배태된 문제들을 쏟아 붓는 쓰레기 매립장이 되었다. 도시의 거주민들이나 그들의 선출된 대표들은 점점 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도저히 풀 수 없는 과제에 직면하고 있다. 글로벌한 모순들에 대한 해결책을 지역에서 찾는 일이 그것이다. 그리하여 카스텔스가 지적한 역설이, 즉 "점점 더 글로벌한 과정들에 의해 구조화되는 세계 속에서 정치는 점점 더 지역적인 것"이 되는 역설이 나타난다. "과거에는 의미와 정체성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즉 내 이웃, 내 공동체, 내 도시, 내 학교, 내 나무, 내강, 내 해변, 내 교회, 내 평화, 내 환경." "전 지구적인 회오리에 속수무책인 사람들은 자신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점점 더 자신에게 집착할수록 전 지구적인 회오리에 점점 더 속수무책으로 되는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적인 - 표면상으로 자기 자신 - 의미와 정체성을 결정하는 데서도 그만큼 더 무기력해진다는 점을 지적하기로 하자 - 글로벌한 조작자들은 너무나 기쁘게도 말이다. 그들이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두려워할 이유는 전혀 없을테니 말이다. 230


제이콥스는 도시의 특징인 부산함의 기본적인 원인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의 순수한 밀도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도시 거주자들이 반드시 다른 인간들보다 영리한 것은 아니다. = 그러나 공간 점유의 밀도는 욕망의 집중을 가져온다. 그리하여 다른 곳에서 제기되어본 적이 없는 질문들이 도시에서는 제기되고, 다른 조건에서는 처리해볼 기회조차 없던 문제들이 나타난다. 문제에 직면하고 질문하는 것은 하나의 도전이며, 인간의 창의성을 전례 없는 길이까지 늘인다. 237


이방인과 가까이 사는 것은 운명으로, 그러한 동거가 마음에 들고 삶을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실험되고 시도되고 검증되고, 발견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필요는 '주어진 것'으로, 협상 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도시 거주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착수할지는 선택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매일 행해진다.-일부로든 아니면 깜박해서든, 고의로든 약속의 불이행에 의해서든 말이다. 241


'미끈거리는 공간'은 "접근로를 일그러뜨리거나 길게 늘이거나 아예 없애버려 접근할 수 없는 공간"이다. '꺼끌꺼끌한 공간'은 "벽에 설치한 스프링클러가 작동해 배회하는 사람을 몰아내고, 않지 못하게 튀어나온 바위 등으로 철저하게 지킴으로써 쉽게 엉덩이를 붙일 수 없게 만든 공간"을 말한다. '조마조마한 공간'은 "사방을 돌아다니는 순찰과 또는 보안관제소의 원격 기술로 적극 모니터링하기때문에 감시당하지 않고는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다. 이와 그 밖의 다른 종류의 '금제 공간'들은 복합적이지만 그 목적은 오직하나이다.....지역에 기반해 모두가 공유하는 공동체적 삶의 해체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었다. 247


혼재공포증의 뿌리들은 평범하다. - 어디 있는지 찾기가 어려운 것도 전혀 아니다. 용인하기는 쉽지 않지만 이해하기는 쉽다. 세넷이 말하는 대로 "끼리끼리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는 '우리'라는 느끼은 서로를 좀 더 깊이 들여다 볼 필요성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 이것은 어던 정신적 위안을 준다. 즉 함께 어울려, 차이와 함께 살 때 요구되는 이해하고, 협상하고, 타협하는 노력을 없애버림으로써 함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훨씬 더 견디기 쉽게 해줄 수 있다.  249


세넷은 혼재공포증의 유해한 결과가 왜 그런지, 아니 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20년 동안 미국의 도시들은 인종별로 지역이 상대적으로 동질화되는 방식으로 성장해왔다. 그리하여 이러한 인종별 공동체들이 서로 격리되는 것과 같은 정도로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단일한 환경 속에 - 아무렇게나, 있는 그대로 즉 오해라는 위험을 초래할 필요없이 그리고 안전하게 구분되는 의미의 세계들 사이를 번역하느라 귀찮게 애쓸 필요없이 '사귈 수' 있는,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과 무리를 이루어 - 오래 머물러 있을수록 공유하는 의미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협상하는 기술을 그만큼 더 '배우지 않게 '되는 것 같다. 250


혼재애착증은 혼재공포증과 마찬가지로 자가 추진적이고, 자가 선전적이며, 자가 활력적인 것처럼 보인다. 두 가지 모두 도시 재건이나 도시 공간의 재건축과정에서 소진되거나 활력을 잃을 것 같지는 않다. 혼재공포증과 혼재애착증은 모든 도시에 공존하며 모든 도시 거주자 내부에도 공존한다. 잘 알려진 대로 그것은 불편한, 소음과 분노로 가득한 공존이다. (도시의 스펙터클에 흡입) 253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지적해 유명해진 대로 상호이해란 '지평들', 즉 인식 지평들의 '융합'으로 촉발된다. - 이 지평은 삶의 경험이 축적되는 과정에서 생겨나고 확장된다. 상호이해가 요구하는 '융합'은 공유된 경험의 소산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은 공간의 공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가다머의 가설에 대해 마치 다량의 경험적 증거를 제공하기라도 하듯 사업상 여행을 자주하는 사람들이나 지금 막 등장 중인 전 세계를 누리는 엘리트 또는 '글로벌 지배 계급'들이 직접 얼굴을 마주 보고 만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 또는 같은 식당에서 식사를 하거나 같은 바에서 한잔 하는 것처럼  단순히 공간을 함께 이용하거나, '어울리거나', '함께 지내거나' 하기 위해 만약 그러한 공간들이 아니라면 이들은 서로 갈라졌을 것이며, '우리는 하나'라는 정서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256


도시에만 국한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적 모순들과 기능 부전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지금까지 우리는 어디서고 통제해야 할 힘들의 규모와 잠재력에 걸맞은 민주적 통제 수단을 적절히 활용하는 것은 고사하고 고안해내는 것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지역적 훈련이후 상호 적대성도 더 이상 얼핏 보기보다는 그리 다루기 힘든 문제로 여겨지지 않으며, 무력 충돌만이 상호갈등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가다머의 '지평들의 융합'이 만약 도시의 거리들에서 추구된다면 한층 더 현실주즤적인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새로운 글로벌한 상황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고, 특히 여기에 효과적으로 맞서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 인간의 조건이 실로 심대하고 분수령 같은 변형을 겪을 때는 항상 그랬듯이 말이다.....드라마는 두 개의 공간에서 무대에 올려지고 플롯이 짜일 것이다. - 글로벌한 장면과 로컬한 장면이 그서이다. 두 무대의 작품의 대단원은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고, 또한 성공 여부는 각 작품의 대본 집필자와 배우들이 그러한 연계성을 얼마나 깊이 인식하고 있느냐 그리고 얼마나 능숙하게 그리고 단호하게 다른 작품의 성공에 기여하느냐에 긴밀하게 달려 있다.261-263

 

 

 

 

 

 

 

 

 

볕뉘

 

표지와 뒷표지를 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궁금했는데 부제 "현대의 우울과 고통의 원천"에 가깝다. 리차드 세넷의 도시의 삶의 시각을 넓혀주면서 가다머의 지평들의 융합이라는 해석학적 실천론까지 결합시키고 있다. 삶은 점점 비참에 가까워질 수밖에 없지만 21세기는 저자의 말대로 휴머니즘의 시대가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노장은 사랑과 섹스, 도덕, 네트워크, 경제, 인간, 삶에 대한 암시를 무척 다양하고 풍부하게 준다. 절망을 이야기하고 있을지라도... ... 꼼꼼히 읽어보시면 지금 여기에 사는 사람들이 정작 중요한 어떤 기술을 놓치고 있는지 살피게 될 것 같다. 두서없이 정리해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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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 황해문화 편집장의 이야기를 듣다. 한마당 열소리부터 글쓴이들의 발굴과 관리,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노력들을 건네듣는다. 편집위원, 편집주간, 기획위원 관리 등 이야기를 들을수록 일의 밀도와 정해진 원칙, 독립적인 권한을 행사하기위한 흔적, 글쓴이와 밀당 과정이 생생해져 보기 좋다.  학술지와 저널의 사이를 목표로 해온 일들을 평가하면서 다른 것을 보는 찌르는 창이기보다는 여러가지를 담을 수 있는 그릇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자평도 듣다.

 

황해문화가 자리잡는 과정은 오히려 새얼문화재단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자연스럽게 일을 주고받는 과정이나 행사진행과 후원자를 챙기는 과정, 나름대로 틀이 잡힌 모습이 조금씩 잡힌다 싶다. 전날의 취기로 몹시 힘든 하루이기도 했지만 바람구두로서 알라딘서재의 활동이나 풍소헌의 친구로 있던 고선생님 덕분에 또 다른 인연을 나누게 된다.

 

시민운동은 죽었다. 사회운동은 명멸했다. 새정련이 사회운동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당보다 정치인의 앞가림을 위해 자기 살길에만 급급한 현실을 확인하면서 말이다. 확인시키는 것이 도리일까? 아니면 고양이 목에 방울다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인가?

 

여기는 섬이다. 고립되어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아카데미에서도 많이 회자되던 이야기를 그가 다시 짚는다.  섬사람들이나 반도에 있는 사람들의 잔혹한, 잔인한, 끝까지 밟고 살아나야만 산 것으로 치는 현실 말이다.

 

황해란 황해도의 황해가 아니라 지중해와 같은 개념이라한다. 서울도 지역의 하나일 뿐이다. 여기저기 모두 지역이란 개념도 비슷한 문제의식을 함유하고 있기도 하다. 블로그 수준의 글들을 또 다시 잡지로 만든다는 것이 의미있는 일인가. 이북이나 다른 형태로 가고 있기도 한데 광고수주나 운영에 걸려 오프지를 추구하는 것이 합당한가. 한번 만든다면 사람들을 바짝 긴장시킬 또 다른 형태의 펑크, 위압을 담아버리는 잡지정도여야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도 피력한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프로,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원칙에 따라 어제 먹으나 오늘 먹으나 나중에 먹으로 유사한 품질을 보유하는 능력과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철저히 질 또한 자본의 논리에 따르는 것이 아니냐고 되묻는다.  관리할 수 있는 순간에 권력이 생기는 것이며 상대는 의식하게 된다. 문화권력의 출현과 시작은 되었다. 하지만 양과 질을 담보하기에는 이것저것 보듬을 일들이 많은 것 같다. 참고지점을 이렇게 둔다. 어떻게 다른 분들은 받아들였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덧붙임 

 

만부정도 발행부수, 계간지로는 창비 다음으로 부수가 많다. 회원 3천부 플러스 천부정도 소화하고 판매가 9천원으로 재단 회원가입을 유도하는 편이다. 년 2억정도 예산이 들고 있으며  4천여명되는 회원구조, 광고수입등으로 부족하지만 충당하고 있다.  회비의 구조는 파레토법칙과 마찬가지로 회비8:2가 2:8의 구조를 갖고 있다. 그것에 걸맞게 음악회, 역사기행 등은 행사에 VIP 회원은 별도로 관리를 한다.

 

편집 마감일은 꼭 지키는 편이고, 편집방향이 맞지 않을 경우에는 원고료는 지불하고 싣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편집은 편집장과 편집부장 2인이 하고 있다. 사무국과 관계는 회사 홍부일을 한 경험을 바탕으로 도와주면서 거꾸로 황해문화의 실무적인 일을 도와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편집위원과 편집주간, 별도의 기획의 경우 상대적으로 월정액, 플러스 알파를 주면서 도움을 받고 있다. 편집주간의 성격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현 현 주간은 무림학림 학생운동 출신으로 방향과 운영측면에서 잘 맞는 편인 것 같다. 원고료는 원고지 한매당 8천원, 정해진 매수를 넘길 경우 한계를 두고 정하고 있다. 각주도 가급적 달지 않고 현학적으로 보이지 않도록 편집원칙을 두고 있다.

 

매월 조찬강연도 역사기행과 마찬가지로 정해진 시각에 시작하며 자리를 잡아 년초에는 시장이 하는 것으로 관례화되어 있다.(강연책자 참고) 지역 유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선을 긋고 만나지는 않는다. 행사의 내빈 소개는 사무국에서 일일이 꿰고 있을 정도로 잘하는 측면이 많다. 역사기행도 기장, 시관계자와 자연스런 자리를 마련해서 도움이 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서비스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공연의 경우도 별도의 자리를 만들어 신경쓰고 대우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공유하면서 관리하고 있다.

 

 

펼친 부분 접기 ▲

 

2. 같이 일하면서 - 늘 우리는 주변에 있음을 느낀다. 어둠과 밝음, 차거움과 뜨거움의 경계. 부잣집에서 아무 문제없이 착하게 큰 아이들이기보다는 변두리에서 삐둘어지기 직전의 기질이 남아있는, 보기좋게 야생성이라 불러주자. 제대로된 일터에서 부대끼면서 근무한 경험도 없다. 후줄근한 틀이 잡히지 않는 일상과 습속의 경계에서 막 사회로 복귀한 사람들처럼. 순간 무너지거나 불안을 안으면서, 예의도 없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지지리 못난 양아치 비슷한 구리구리한 것들이 풍기기도 한다.

 

중심이 되어보지 못한, 피해의식은 한바가지씩 갖고 있고, 그래도 중심이 되지 않으면 불안한 인간들. 발굴한 것인지 발굴당한 것인지. 그 틈바구니에 밀리고 부딪치고 뒤돌아서면 또 원점들인 그런 감정들의 숲과 일사이를 거닐었던 것 같다.

 

아웃사이더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높게 값을 불러주는 것이고, 지지리 궁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값을 낮게 부르는 것이어서 참 적절하게 부른다는 것이 어렵다. 왜 그들에게는 성인기가 사라져버린 것일까? 표현의 총합이 모임이나 조직에 늘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내가 관두거나 네가 나가거나 극단의 표현과 무시가 감정의 온도가 끓으면 되풀이 되는 것일까? 왕년의 한자리가 기억과 몸을 정신 못차리게 해버린 것일까? 너무도 자주 쉽게 우울과 습자지 같은 현실의 벽에 닿는다. 비가 오면 쉽게 습기를 머금는다. 우울이 배인다. 도모하기보다 도모의 선순환으로 다가서기보다 일일 날품팔이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진폭이 크다.


모르겠다. 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답인지. 또 누가 드나들다 지쳐버리는 것인지. 애초 각이 잡히고 폼이나고 든든함을 바탕으로 좀더 길고 멀게보면서 가는 일은 또 다른 이의 몫이었는지. 몫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감정의 기울기와 진폭, 모임의 하늘에 구름들이 자주 배회해서 편치 못하다. 그래도 해내고, 해왔고, 포복으로 기기도 하고, 기게하고 그런 것이지만 배가 부르니 눕고 싶다. 피해자 의식은 너무도 많은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아우라가 다른 일상이나 일의 경험이 없어 그러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끼리끼리, 모둠의 틀에서 깨어나지 못해 그것에 오랜 기간동안 갇혀 있었다는 것을 벗어난 뒤에서야 알았으니 그리 탓할 일도 아니다.  그런데 참 여운이 많다. 지금까지. 관계도 일도, 여러 매듭도, 관계의 유지도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


3. 숙부 납골함을 조부모 산소에 이장하다. 숙모가 몸을 많이 회복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다. 오랜만에 사촌동생들 식구를 본다. 이런저런 소소한 일로 인해 부부싸움도 하시고 어르신들이 언쟁도 벌이신다. 도토리로 다듬고 방앗간에 빻고 나르고 잘 맞지 않아 내년에도 이러면 이혼장을 쓰겠다는 팔순 부친. 그래도 좋아 보인다. 마음 놓고 내려오는 길 내내 달빛이 따라다닌다. 밤도 익어 경주 가로의 단풍도 출렁거려 좋다.

 

 

볕뉘. 87년체제, 97체제, 2013년체제. 어쩌면 다 소용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분류하고 모으고 이름을 부르고, 그런데 그것이 담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왜소해 보인다. 여전히 또 다른 모습으로 이름은 불리우지 않았지만 체제로 존재하고 흐른다. 어쩌면 앎과 이념의 하위자로 상정하는 자체가 문제였는지도 모른다. 활동하는 사람들의 일상이나 삶이 이야기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의 목적, 해야할 일에 먼저 방점이 찍히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운동은 조직의 명분과 일이 먼저였지 삶을 놓고 삶으로 더 다가가려 구체적으로 노력한 적도 없다. 조직의 심장은 언제부턴가 뛰지 않았다. 관성대로 그저 갈뿐, 심장이 뛰지 않는 이유에 대해 되묻지 않았다.  들숨만 있을뿐 아주 작은 날숨의 소리가 줄어드는 것을 확인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존재의 위치가 정해졌다는 사실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우고 때론 목소리를 강하게 높인다. 숙부 유골함속의 뼈가루가 습기를 머금고 있다. 소나무로 서서히 스며들 것이다. 누군가, 나도 어느 순간 머무르지 못할 것이다. 장담할 수 없다. 삶은 계속되어 왔던 것처럼 또 누군가 삶을 이어갈 것이지만, 아무도 삶을 건드리지 않는다. 아무도 삶을 건네지 못한다. 아무도 삶을 건네려 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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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17:4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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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17: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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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18: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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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야하는 것들, 해야만하는 것들, 일들 사이에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 일부스러기도 일들 사이 부딪치면서 생기기도 하고, 일의 기세에 눌려 숨으려하는 것들도 있을테고, 해야할 것들에 눌려 식은 땀 흘리는 감정도 있을테고,  혼자가 아니라 같이 템포도 패턴도 맞추지 못해 서걱거리는 것도 있을테고, 일의 성취감에 뿌듯함도 어깨를 들썩이기도 할 것이고...잘한 것 빼고, 잘한 것 나누고...행간과 사이 사이, 소소하거나 미쳐 눈치채지 못한 것들, 보지 못했던 것들, 아마 일의 즙같은 것들, 사이사이 생기는 화나 울화, 미쳐 따라가지 못하는 마음들, 조바심, 안타까움들, 이런 것들을 묶어 감성이나 감정이라고 하자. 일의 그림자나 하고싶은 것들의 여운들이라고 하자.

 

그리고 시간의 그릇에, 시간의 용기에 총량과 느낌이 일정하다고 하면 그 느낌의 성질이나 느낌의 정서를 다루지 못한다는 것은 크나큰 아둔함은 아닐까. 그 화가 거꾸로 일을 불사르려하거나 하고싶은 것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거나....일과 해야할 것, 하고싶은 것 하고마는 것의 용기의 팔할은 이렇게 쓸데없거나 쓸모없거나 한 것은 아닐까. 일을 잘하는 능력 하고싶은 것을 잘 해내는 것의 하나는 그림자들을 잘 모아 잘 쓰고, 잘 풀고 잘 다루는 것에 있지는 않을까... ...

 

덧붙여 보는 마음들! (콕)

 

어젠 보름달은 아니지만 노아란 은행단풍처럼 얇고 은은하다. 언제부터인가 꿈을 기억해내고 기록하고 미처 다다르지 못한 느낌들을 살피고 있다. 사람들은 지식과 지혜를 얻고 넓히는 만큼 잔학무도함, 잔인함, 악날함, 공포심들을 같은 높이와 넓이로 키워왔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고 한다. 불쑥 불쑥 비집고 나오는 꿈들은 무엇일까, 감정의 켜, 발산을 하지 못한 응어리들, 말로 표현되지 못한 형상들... 일정시간의 용기에 들어있는 앎과함, 그리고 담겨져 있는 감정들. 그 감정들은 발산이나 앎과 함과 잘 어울려지고 풀어졌는가 궁금해졌다.

 

하루에도 몇번씩 꿈꾸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은 불쑥불쑥 생기고 욕망하는 감정들은 발산되거나 발랄하게 소화되는 것일까? 음악도 체육도 미술도 없는 앎밖에 없는 그들이 꾸는 꿈은 무엇일까? 그렇게 쌓인 감성과 감정의 켜들은 얼마나 몸을 비틀고 있을까? 일터에 회의만 있고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닌듯 폐기처분되는 일상에 얼마나 신음할까? 변태의 길을 걷지 않으면 살거나 풀 수 없는 몸틀, 일틀의 왜곡은 어찌하여야 되는 것일까?

 

모임은 하고싶은 것만, 해야되는 일만 챙긴다. 아무도 감성과 감정의 결을 살피지 않는다. 불쑥 소모적이고 파괴적인 그만두면 되는 것 아니냐고, 감정과 감성을 소화해내는 틀이나 방식도 없어 헤매고 치이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것은 아닐까? 지식과 지혜는 파괴 본능과 일소해버리는 함으로 구태를 반복해왔다고 한다. 배회하는 감성과 감정이 궁금해진다.

 

되는 곳과 되지 않는 곳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바람은 나는걸까? 하게하는 것일까? 풀게하는 것일까? 그런면에서 보면 농사를 짓고 축제를 하고, 디오니소스 찬가를 부르는 것은 정말 사려깊고 현명함에서 출발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해야할 일에만 목매여서 고삐를 틀어쥘 감정과 감성에 맥없이 끌려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시간의 총량, 몸이란 용기의 총량에서 감성이나 감정의 온도를 잴 수 있을까? 모임이란 용기에 온도계를 넣어볼 수는 없는 것일까? 관심은 있는 것일까? 감정이 어깨걸고 뿔이 나서 황량한 겨울바람처럼 씽씽 나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꿀 수 있는 꿈이 궁금하다. 꾸어지는 꿈이 궁금하다. 나누는 일상이 달라질 틈은 없을까. 어쩌면 우리는 이성을 다루는 데 익숙하다고 착각하면서 시간에 누적되는 감정들을 다루는데 어색해하거나 곤란해하거나 그냥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 다루려고 조차 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래서 가끔은 눌린 감정들의 이빨에 물려 서로 꼼짝달싹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은 절름발이 이성만 써서 절뚝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 오버겠지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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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 과정에서 가족주의가 해체되지 않고 오히려 강화되었다. 한국의 위로부터의 근대화 전략은 경제성장 최우선 정책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왔다. 이로 인해 국가는 자원을 개인의 사회적 안전망을 확보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경제개발에 투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국가의 개인 보호 의무를 가족에게 떠넘겨왔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은 생존을 위해 가족을 중심으로 스스로를 보호할 장치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즉 한국의 가족은 사회복지 기능 대부분을 떠안아야만 했다. 이 과정에서 전통적인 가족주의는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되면서 가족 내에서 전통적인 가치가 선별적으로 재구조화되었다.  320


서구에서는 사적 영역으로 간주되어왔던 가족이 한국에서는 국가 존립과 국가 기능의 최소 단위로서 작동되면서 준공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이는 유교적 국가와 가족의 관계가 근대적 상황에서 재구조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은 전통과 근대의 분리와 중첩 상황을 보여주는 전형 중의 하나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혈연,지연,학연은 말할 것도 없고 재벌 등의 사기업과 종교단체까지 사회 전반적으로 자식 대물림과 배타적, 폐쇄적 공동체 및 공동체주의 등이 지속되고 있는 근저에도 한국 근대의 가족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 근현대의 가족이 사회철학의 대상으로 중요하게 분석되어야 할 이유가 바로 이처럼 한국의 가족이 한국 근현대의 변화상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320


대부분 서구철학과 전통철학이 가족을 철학함의 핵심문제로 다뤘지만, 근대 이후 서구 철학 수용사에서는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질 수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가족이 왜 철학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철학적 중심 의제로 다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크게 보면 근대 이후 철학 전문가들은 현실에 기반을 둔 철학적 사유를 확장하는 걸 대신해서, 서구 철학 이론을 그들의 사유와 기호에 의거해서 소개하고 해석하는 데 집중해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특정 서구 이론에서 제기된 가족 관련 이론을 정리하려는 시도가 간간이 있었지만,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적 논의를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생소한 영역이었다. 가족뿐만 아니라, 개인, 사회, 국가, 시민 등 한국 근현대에 진행되어온 사회적인 문제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도 사정은 유사하다.  322


첫째, 한국 근대 가족에 대한 논의를 위해 '복합 성찰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한국 근대의 가족은 서구 가족의 역사에서처럼 전통 가족에서 근대, 현대 가족으로 단선적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한국 근대의 가족에서는 압축적 근대화,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전통과 근대 그리고 현대적 요소들의 중층적 현존과 이들의 상호 영향 주고받기를 통한 변용과 중첩화, 그리고 이로 인한 다양하고 이질적인 가족 형태의 혼성화'라는 특유의 복합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323


산업화사회, 지식정보사회로의 사회의 역동적 변화에 적응해온 한국의 근대 가족이 농촌형 직계가족 유형이나 농촌형 핵가족 유형에서 도시형 핵가족 유형이나 일인가족 유형으로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주도적인 가치관을 역동성에 맞추어 변화시킴으로써 특정한 가치관을 절대화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상대화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325


서로 다른 가치관들이 주도권을 넘기고 받는 데 익숙해 있음을 의미하며, 이러한 편차 큰 가치관의 변동이 현실적으로 진행됨으로써 사회 자체가 역동적인 모습을 띠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한국 사회는 이처럼 빠른 변화와 역동성으로 인해 각 세대의 가치관도 사회의 역동적 변화와 함께 변화함으로써 각 세대 혹은 가족 구성원이 특정 가치관을 상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적 헤게모니의 변화에 대해서도 하나의 입장만을 고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정한 사회적 헤게모니와 주도적 가치들을 성찰적으로 상대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된다. 325


둘째, 서구 사회철학 이론에서 사용되고 있는 자유주의/공동체주의, 사적 영역/공적 영역 등의 양자택일적 이분법을, 한국 근대 가족의 복합적 구조를 고려해, 최소한 오분법으로 세분화할 것을 제안한다. 326


근대화, 산업화 이후에도 국가가 복지를 가족에게 전가함으로써 가족은 삶을 위해 가족주의를 강화해왔는데, 가족 구성원 사이의 희생과 헌신, 사랑과 친밀성은 강화된 반면, 가족 이외의 타인과 타 가족에 대한 고려나 배려는 찾아볼 수 없는 반사회적 가족이 양산되었다. 1990년대 이후 국가가 사회복지 투자를 하고 가족 구성원에 대해 최소한의 사회보장을 함으로써 공과 사 개념이 변화하면서 개인과 가족공동체 그리고 국가의 관계를 재정립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327


해결책은 가족주의가 지니고 있는 긍정성을 시대에 맞게 재구조화하고 부정성을 효과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공동체의 문제에 국한해서 보자면 한국 가족의 문제는 강한 폐쇄적, 위계적 가족공동체를 개방적, 수평적인 민주적 공동체로 변경하는 것이다. 이는 기존의 자기 가족만의 폐쇄적 사랑과 친밀성을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사랑과 친밀성으로 재해석하고 재구조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328


한국 가족을 분석할 경우, 자유주의 대 공동체주의는 1) 자유주의, 2) 공동체주의적 자유주의, 3)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4) 자유주의적 공동체주의, 5) 공동체주의로 세분하고 그 분석의 중심축을 1)과 5)로 보지 않고, 이를 대신해서 2)와 3) 그리고 4)로 두는 시각의 전환을 제안한다. 한국 가족에서는 1)과 5)는 이념형인데, 현실에서 작동되고 있지 않는 1)은 이론적으로 유입된 서구적인 이념이었으며 5)는 근대 이전에 작동되었던 전통적인 유교 가족주의 이념과 한국 근대화 과정에서 탄생된 폐쇄적 가족주의의 특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329


1) 개인, 2) 개인 중심 공동체, 3) 개인과 공동체, 4) 공동체 중심 개인, 5) 공동체/ 1) 사적영역, 2) 사적 영역 위주에 공적 영역이 혼합된 영역, 3) 사적영역과 공적영역, 4) 공적 영역 위주에 사적 여역이 혼합된 영역, 5) 공적 영역  330


셋째, 한국 근대 가족에 대한 철학적 제안은 세계적으로도 타당한 하나의 모델로서 채택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 근대의 산물이기도 한 한국 근대 가족이 지니고 있는 특징들을 세계사적으로 주변부의 특수한 사례로서 평가절하할 필요가 없다. ...서구 근대는 한국 근대에 비해 훨씬 단선적이거나 복잡성이 덜한 상태로 전개되어 왔으며, 이에 따라 이론적 맥락도 훨씬 더 단순 논리적 양자택일의 방식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전통적으로 존재해온 체계 및 가치와 자의적으로 단절하고 서구 근대성을 근대화를 위한 전략으로 선택, 수용해왔던 한국의 혹은 더 넓혀서 비서구의 근대화의 길은 그만큼 복합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331


한국의 근대적 유산들에 대한 분석과 성찰에 의거한 해석은, 서구적 맥락에서 유래하는 현실에 대한 이론 해석 작업과는 변별력이 있는, 또 다른 현실과 이론의 어울림이나 결합 형태를 보여주고 있음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이 축적될 때, 그리고 새로운 결합 체계가 완전한 형태로 그 이론적 모습을 갖출 때 우리는 서구 이론에 대한 적확한 자리매김을 시도할 수 있을 것이다. 332


철학이 현실과 사유 주체와의 끊임없는 대화의 소산이라면, 사회철학은 사회 현실과 그것을 사유의 대상으로 삼는 자와의 부단한 대화의 소산일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근대 내내 이러한 상식적인 철학함에 너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너무도 오랫동안 오직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이라는 구도 속에 전문 용어들을 해석해왔기에, 철학에 고유한 영역에 대한 감각을 상실해온 것이다. 특히 대학의 강단 철학에서의 가르침과 사유 방식은 현실과 연동된 문제 중심의 철학함을 너무나 도외시 해온 결과 철학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시민의 삶과 유리된 채 오로지 죽은 철학자들의 텍스트 안으로 들어간 지 오래되었다. ....한국의 근대 이래 지속되어온 이 구도가 지속된다면, 우리 앞 세대와 우리 세대가 겪어야만 했던 정신적 망명객 생활이, 학문적 종속성과 악순환이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33 사회 현실 분석을 위해 우수한 트레이너를 만나 열심히 사사받는 것은 권장할 일이다. 그러나 청춘을 트레이닝 기간에 다 고갈시켜버리면 그저 자기가 배운 것을 무기 삼아 호구지책을 마련하는 트레이너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가족의 역사적 진행이나 근대화 과정에 대해서는 서구보다는 오히려 한중일 3국의 경험을 비교 분석하는 것이 유사성과 차이성을 더 실체적으로 보여준다. 336 한국의 가족주의가 갖는 폐쇄성과 이기주의는 3국 비교에서도 가장 높게 나타난다....한국의 가족주의가 가족 이기주의를 벗어나지못해 이것이 타인과 다른 가족에 대한 무관심이나 무시로 이어지는 반사회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는 점도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근대화 시기의 폐쇄적, 이기적 가족주의의 강화와 가족에 대한 배려, 헌신, 친밀성, 이타적 사랑 등의 동시 강화가 한국 가족의 양면적인 모습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양면적인 가족주의의 가치가 아직도 한국 가족 내에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337


넷째, 서구의 개인주의에 내포된 자기중심성이 지닌 난점을 지적하고 실체적 규범만을 옹호하는 실체적 공동체주의의 한계를 넘어서서 철학적으로 논증할 수 있는 논점으로서 이상적인 의사소통 공동체 이론을 한국 가족 분석에 도입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한국 가족의 미래상을 구상하기 위해 서구적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의 상호 보완적 구조화를 제안한다. 338


국가는 개인과 가족을 더 이상 방기해서는 안 된다. 국가는 개인이 최소한 국가으 시민으로서 살 수 있도록 정책적 지원을 강화해야 하며 가족을 근간으로서 육성하고 지원해야 한다. 개인과 가족이 바로서지 않는 국가는 더 이상 긍정적인 미래상을 만들어가지 못할 것이기때문에 그렇다. 339


폐쇄적인 가족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체적 공동체의 한계를 넘어서서 이상적인 형태의 공동체를 성찰적으로 구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체적 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한국 근대 가족과 근대적 개인과 이를 바탕으로 한 개인주의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는 전망이 없어 보인다. 그것은 한국 근대 가족이 내포하고 있는 복합적 사태를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폄으로는 근대 내내 발달하지 못했던 개인과 개인주의를 일정 부분 강화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명에 근대 가족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가족 구성원 간의 헌신과 배려, 사랑과 친밀성 등의 공동체적 덕목들을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으로 해체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이것 또한 근대 가족의 유산이기 때문이다. 340-341


다섯째, 지식 기반 사회와 지구화의 확장이라는 달라진 사회 환경 속에서 변화하고 있는 인간관계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342

 

 

한국인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보인다....한국의 문화는 현세주의, 인생주의, 허무주의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46


현세구복적이란 현세만을 유일한 세계로 인정한다는 것과 현세에서 초월이 아닌 세속적 복을 염원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현세구복적이란 말을 내세도 인정하는 것으로 보아, 현세에서는 복을 내세에서는 영생을 염원하는 것이라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한국에서의 함의는 그런 것 같지 않다. 그럼 지금 이 세계가 유일한 세계라는 믿음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죽은 후의 세계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 다시 말해서 내세를 믿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사고는 한국인에게는 심대한 영향을 끼치는 세계관이다. 여기에는 현세가 내세를 위한 준비단계라든가 내세가 참된 세계이고 이 세계는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다.  49-50


신약은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유대인에게 부활, 즉 내세는 없다. 죽어서 부활하여 심판을 받는다는 사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에서는 부활절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유대교는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예수도 유대교에서는 선지자 중의 한명일 뿐이다. 유대인들은 여호와를 믿으면서도 내세를 인정하지 않는 독특한 믿음체계를 갖고 있기에 확고한 믿음 속에서 현실세계를 꿈꾸며, 그들의 눈부신 성공과 생존력은 이런 믿음체계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내세를 신봉하는 인도의 경우 가난에서 벗어나기 힘들어 보인다.  50


주자는 "제사의 이치는 역시 자손의 정성이 있으면 조상의 신이 있고(이르고), 정성이 없으면 신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귀신의 이치는 바로 이 마음의 이치이다"(어류)라고 말하고 있다. 55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깨달음에 의해 윤회의 사슬을 끊어야만 한다. 그런데 깨달음을 얻은 자인 불타는 생애를 마치면 영원히 사라져버린다. 즉 윤회에 속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은 자에게는 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58


기독교는 불교와 마찬가지로 타력구제 신앙이다. 한국에서 기독교문화는 기본적으로 예수를 거쳐 하느님이 신자의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즉 불교에서 아미타불을 거쳐 부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는 구조와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기독교 역시 스스로를 수양하거나 선행을 하는 것보다 예수를 믿는 일이 더 중요하다.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에 갈 수는 없다. 예수를 통하거나 성당을 통하거나 중개자를 통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타력구제 신앙인 것이다. 한국에 기독교가 비교적 짧은 기간에 뿌리를 내리는 데 성공한 이유 중 하나는 불교와 기본적 구조가 다르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즉 믿는 대상이 부처에서 하느님으로, 아미타불에서 예수로 바뀌는 것뿐이다. 63


일본인들이 큰소리로 싸운다면 그것은 다시는 보지 않겠다는 결심이 선 후에나 있는 일이라고 한다. 한국인은 열심히 큰소리로 싸운다. 하지만 돌아서면 이 세상이 다이고 시간에 갇혀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67


나름 합리적이다 - 구조가 바뀌어 일하는 대로 자신에게 이익이 된다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의 모습이 바로 이런 합리적 선택의 결과이다. 북한에도 이런 모습이 있는 것 같다. 사회주의를 표방하고 일을 열심히하면 모두가 평등하게 잘살 수 있다는 믿음이 효과가 있을 때에는 열심히 일했고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사회주의와 폐쇄정책이 더이상 인민들에게 식량을 줄 수 없는 것이 증명된 후에는 모두가 자신의 식량을 구하기 위해 눈물겹게 노력하고 있다. 73


빨리빨리 현상은 나름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생존이 문제가 되었던 시대에는 남보다 한발이라도 빨리 움직여야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빨리빨리하는 것은 합리적인 대응이었다. 생존을 해결한 후의 생활의 시대까지 빨리빠리는 남아 있었지만, 행복과 의미으 시대에 빨리빨리는 일반적인 현상이 아니다. 75


저승이 이승의 일부로 존재하거나 저승이 이승보다 더 진실된 세계라면 한국인들의 스트레스는 상당 부분 감소할 것이다. 흔히 홧병이라고 불리는 한국적 현상은 조급성이 가져다준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해결되어야 하는데 해결이 안되면 마음이 급해지고 마음의 병이 홧병으로 도진다. 홧병을 한국 특유의 병이라고 하는 것은 한국의 정신세계, 한국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다. 짧은 인생에서 할 일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은데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억울하고 기막힌 일들이 생긴다면 홧병이 안 생길 수는 없다. 즉 조급성이란 특정한 행동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 것이다. 마음의 상태를 일컫는 말이다. 76


신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는 결코 인간중심 사회가 될 수 없고, 인간중심이 아니라면 인생주의도 생겨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중심주의라고 해서 인생주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제도나 인간이 만든 작품에 삶 자체보다 더 큰 가치를 두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국문화는 자연이나 인간의 제도나 작품이 아닌 인생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인생주의다. 78

 

 

볕뉘.  점심에 잠깐 도서를 반납하러 갔다. 한권을 깜박하여 반납을 하지 못하여도 오늘까지 대출을 할 수 있다한다. 검색란에 동학이라고 치고 도서번호를 옮겨적고 찾는다. 생각보다 원하는 책들이 보이지 않아  분류번호 200대로 옮겨 고르다 보니,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고르게 된 책이 세권이다. 동경대전과 한국가족, 한국인이다.  보름으로 가는 가을달이 참 이쁘다. 도서관 한자리에서 주섬주섬 책을 본다.

 

돌아와 손길을 끄는 문학의 아토포스 책 1장을 펼쳐든다.  저자는 랑시에르의 감성의 분할이란 책을 설레이면 읽었다고 한다. 2000년대 시인들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있기나 한 것인지라고 말한다. 예술과 정치, 그리고 삶. 랑시에르는 정치적인 가장자리를 넓히려고 애쓰는 학자로 알고 있다. 시인들에게 되묻고 있다. 랑시에르의 입을 빌려서 말한다.

 

위의 저자 권용혁은 강단 철학에 대해 말한다.  서구철학, 동양철학 우리 몸과 삶에 맞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고 반문한다. 그런 의문에서 시작하여 10여년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듯하다. 한중일 가족연구도 그 연구 결과물이라고 한다.  지금 여기의 음악의 변천사도 그러하지만 딱 무엇이라고 규정짓기가 쉽지 않다. 다른 입을 빌려서 이야기하기도 그렇다. 우리 몸말, 현실과 생각의 차이, 아 맞다 무릎치는 이론이 있다면 더욱 서로 나아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탁석산은 조선과 한국은 지층의 단절처럼 전혀 다르다고 가정하면서 이야기를 출발한다. 절과 성당과 교회를 아무렇지도 않게 옮겨다니는 현실은 서구에서 용납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복을 구한다는 의미에서 장려되기도 하는 곳이 여기라고 한다.

 

참 할말이 많으면서도 말을 잇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방법의 문제도 여전히 잠복하는 있는 것이 현실인 듯하다.  어쩌면 다 없는 것으로 여기는 파격까지 포함해서... ... 여러 생각이 많이 스미는 따듯한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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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사람들은 헌신, 특히 장기적인 헌신은 '관계를 맺으려는' 노력과 관련해 다른 어떤 위험보다 더 먼저 피해야 할 덫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한 전문 상담가는 독자들에게 "썩 내키지 않는데도 누군가에게 헌신하려 할 때는 훨씬 더 만족스럽고 성취감도 더 클 수 있는 다른 로맨틱한 가능성을 향한 문을 닫아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조언하고 있다. 또 다른 전문가의 말은 훨씬 더 퉁명스럽다. "헌신에 대한 약속은 장기적으로는 별 의미가 없다......다른 투자들과 마찬가지로 부침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 맺기'를 바란다면 거리를 유지하라. 함께함에서 뭔가를 이루려 한다면 헌신하지도 헌신을 요구하지도 마라. 언제든 모든 문을 열어 두라. 22


'가벼운 외투처럼 어깨에 걸쳤다가' 언제든지 '벗어던질 수 있는' 그런 관계 말이다. 23


관계들이 믿을 만한 것이 못 되고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려워 보이고 '헌신이 무의미해진다면' 파트너 관계를 네트워크로 바꾸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하면 이전보다 안착하기가 훨씬 더 어려워질(그래서 더욱 달갑지 않을)뿐이다 - 그러면 그나마 과거에는 통한 또는 통할 수 있던 기술이 그리워질 것이다. 계속 움직이는 것 - 이것은 한때 특권이자 성취의 상징이었다 -이 이젠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속도를 유지하는 것은 한때는 아주 신나는 모험이었으나 이젠 사람의 진을 빼는 따분한 일이 되었다. 26


대체로 사람들은 사랑에 대한 기준을 높이기보다는 낮추어왔다. 그 결과 '사랑'이라는 말로 언급되는 경험의 범위는 엄청나게 확대되었다. '원 나잇 스탠드'도 '사랑을 나눈다'는 암호명의 하나가 되었다. 37


사랑이 돈 조반니의 지칠 줄 모르는 탐색과 실험의 목적이었다면 '다시 한번 해봐야지'라는 강박관념이 그러한 목적을 좌절시켰다. 사랑의 '기술'의 표피적인  '습득'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사랑에 대해 전혀 무지하게 만든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즉 돈 조반니의 경우에서처럼 사랑에 대한 '훈련된 무능'이 나타나는 것이다. 38


겸손과 용기 없이는 사랑도 없다. 누구든 전인미답의 미지의 땅에 들어갈 때는 언제나 이 두가지가 요구되며, 게다가 끊임없이 엄청나게 새로 공급되어야 한다. 그리고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 사이에 사랑이 생길 때 그것은 그들을 그러한 영역으로 안내할 것이다. 42


욕망이 구심성인 데 비해 사랑은 원심성이다. '거기 존재하는' 것에까지 관계를 확대하고, 넘어가고, 손을 뻗으려는 충동이다. 그것은 대상 속의 주체를 삼키고 흡수해서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욕망과는 정반대이다. 사랑은 세상에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에 관한 것이다. - 매번 이처럼 무엇인가를 덧붙이는 것이 사랑하는 자아의 살아 있는 자취가 된다. 사랑에서 자아는 조금씩, 조금씩 세상에 옮겨 심어진다. 사랑하는 자아는 사랑의 대상에게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확대된다. 47


욕망이 소비를 원한다면 사랑은 소유를 원한다. 욕망의 충족은 대상의 소멸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 반면 사랑은 대상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커지고, 오래 지속될수록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욕망이 자기-파괴적이라면 사랑은 자기-영속적이다. 48


이중 최악의 것은 욕망의 충족이 지연되는 것으로, 분명 속도와 가속을 중시하는 우리 세계에서 가장 혐오하는 희생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은 점점 더 근본적인 것이 되고, 줄어들고, 무엇보다 간결해진 바람으로 체화되면서 그처럼 사람을 당황하게 하는 속성을 대부분 잃어버린 반면 좀 더 철저하게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마음 가는 대로, 그러나 기다릴 필요없이' 53


아무리 보아도 이처럼 사업적 거래로 바라본 관계는 불면에 대한 치유책이 아니다. 관계에 대한 투자는 안전하지 못하며, 아무리 달리 희망하더라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두통거리이지 약이 아니다. 관계를 이익을 가져다줄 투자나 안전의 보장책 또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으로 바라보는 한 어떤 결과에서도 모두 지게 될 것처럼 보인다. 외로움은 불안을 낳는다. - 관계들은 단지 그런 것 밖에는 하지 않는 것 같다. 58


"불안감을 느낄 때 연인들은 비위를 맞추거나 아니면 통제하려 들거나 심지어는 물리적으로 몰아세우려는 등 비건설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행위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게 만들기 쉽다." 일단 불안감이 스며들면 항해는 결코 자신감 있고 사려 깊고 안정될 수 없다. 방향타를 잃은 인간관계의 허약한 뗏목은 수많은 인간관계들이 좌초한 것으로 악명이 높은 두 암초 사이에서, 즉 전면적인 복종과 완전한 권력행사 또는 양같이 온순한 수용과 오만한 정복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자기 자신의 자율성을 없애버리고 파트너의 자율성을 질식시켜버린다. 이 두 암초 중의 하나와 부딪치기만 해도 노련한 승무원이 모는 배도 난파되기 쉽상이다. 59


감정에 압도당하도록, 그래서 붕 뜨도록 하면 안 된다. 또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무엇을 위한 것이어서는 안 되는지에 대해서도,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편의성이다. 편의성은 냉정한 머리의 일이지 따듯한 가슴의 일이 아니다. 72


본래 위치인 윗주머니에서 빠져나오도록 놔두어서는 안된다. 항상 정신 차려야 한다. 경계심이 낮잠을 자도록 방치해서는 안 된다. 자비가 '감정의 저류'라고 부르는 것에서 생기는 아무리 작은 변화라도 면밀히 감시하라.(분명히, 계산에 포함되지 않게 되자마자 감정은 '저류로 흐르는' 경향을 띠게 된다.) 예상하지 못하거나 신경을 쓸 용의가 없는 어떤 것이 간파되었을 때는 바로 "기왕의 관계를 청산하고 다른 파트너를 찾아나서야 할 때"임을 명심하라. 72


70년대에 세넷은 '정치적 범주들을 심리적 범주들로 바꾸어버리는' '친밀성의 이데올로기'의 도래를 지적한 바 있다.  90


'버디-버디'류의 관계에서는 메시지 자체가 아니라 메시지가 오고가는 것, 즉 메시지의 유통자체가 메시지이다....오늘날 마치 강박증에 걸린 듯 고백하지 않고는 넘어가지 못하는 것과 30년 전에 세넷이 우려한 바 있는 신뢰의 남발을 혼동하지 말라. 무슨 말을 하고 메시지를 보내는 목적은 더 이상 영혼의 내면을 상대방이 가만히 살펴보고 동의하게 하려는 데 있지 않다. 말이나 문자로 보내는 단어들은 더 이상 정신적 발견의 여정을 전달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지 않다...말을 끝내면 당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침묵은 배제와 동의어다.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95-96

 

 

 

 

 

 

 

 

 

"칠 조심" ---

 

내 마음이 조심하지 않는 바람에

내 기억은 종아리와 뺨과

팔과, 입술과, 눈에 온통 얼룩져 버렸다.

 

내가 너를

그 모든 성공과 실패보다 더 사랑한 것은,

너와 함께 있으면

누르스름한 흰 빛이 하얗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 어둠 또한

친구야, 맹세하건대, 어떻게든 하얗게 되리,

헛소리보다 전등갓보다도

이마에 감은 흰 붕대보다도 더 하얗게!

_보리스 파스테르나트, [칠 조심] 전문

 

볕뉘.

 

1. 제목처럼 책은 사랑에 대해 희망을 비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액체근대, 리퀴드러브, 액상인 사랑은 뿌리내지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관계'라는 말도 부담스러워 네트워크로 회피하고 욕망처럼 소비해내지 못하면 숱한 상처들로 일상도 어려울 것이니 말이다.  1장을 읽고 덮는다. 될수록 있는 그대로 드러내놓고 싶어하는 책으로 읽고 있다. 답이 있거나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2. 전봉준의 공주전투 장면을 읽으면서 그 우금티를 떠올렸다.  날짜로는 11월 8일부터 그러니 3-4일 뒤다. 그때는 발목까지 눈이 내렸다고 한다. 만명이나 되는 농민군이 500명으로 줄면서 퇴각하기까지, 그리고 순창에서 밀고로 잡히기까지 따라가본다. 전봉준 훈장을 하는 아버지 밑에서 정약용에 영향을 많이 받은 듯하다. 서당을 차리기도 하고...아직 정확한 사료가 부족하거나 신화화된 것에서 이이화선생님은 좀더 친근하고 다가갈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한다.

 

3. 진은영 책이 걸려 구해본다. 실망시키지 않을 듯싶다.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없지만 그래도 꼼지락거리는 됨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을 것 같기도 하다. 서문의 끝부분은 칠조심이란 시로 시작하고 있다.  너에 대한 마음들은 늘 그러하지만 나도 너도 이 세상에 흘러가기만 해 어쩌지 못하고 있다.

 

4. 책이 우르르 몰려와 어떻게 할지 궁리하느라 가을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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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5 10: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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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06 07: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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