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체제이후 민주화를 왜 다시 보아야 하는가


 

민주화는 사회란 무엇인가를 규정하려는 갈등과 투쟁의 과정, 다시 말해 국가의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대표될 수 있는 사회, 더 효과적이고 이롭게 관리되는 사회, 더 투명하고 충실하게 매개되는 사회, 바로 그 사회란 것의 정체를 규정하기 위한 과정은 아니었을까 감히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런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민주화가 단순히 권리를 신장하고 확장하는 것이라는, 주권적이면서도 사법적인 관점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바로 그 민주화되어야 하는 사회란 무엇인가, 그 사회에서 펼쳐지는 삶을 규제하고 조정하는 형식은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또 헤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20


"민주화가 됐다. 과연, 국가의 억압과 통제, 제한으로부터 벗어난 지금 우리는 '어떤' 사회를 대표하고, 중재하며, 실현할 것인가?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지금 얻은 민주주의를 과연 어떻게 풍부하고 실질적인 것으로 만들어낼 것인가?" 21


이 책에서 나는 각각 서로 다른 사회적인 삶의 장에서 행위주체들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객관화하고 자신의 삶을 어떻게 체험하게 됐는지 분석함으로써, 그리고 그것들을 묶어주는 일반적인 사고양식을 추출해봄으로써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어떤 것인지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자기계발하는 주체 라고 요약할 수 있는 새로운 주체성의 형상으로부터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24

 

 

 

서구 이론의 문제점들


 

단순화하자면 '사회구성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관점에 전반적으로 존재하는 맹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회구성론적인 관점은 주체성이 본성이나 운명, 이미 주어진 초월적, 보편적인 정체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우연적인 사회적 실천에 따라 제조되는 산물이라는 생각이라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사회구성론적 관점은 구성하는 주체와 구성되는 주체 사이의 관계 자체를 마치 사회와 개인 사이의 관계인 양 등치시킨다. 26


이런 점들로 인해 기존의 사회이론은 자기정체성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주체성의 형성, 주체화의 실천의 결정적 계기인 노동 혹은 일과 분리시켜버린다. 비록 노동이 일차적인 계기가 아니라고 인정한다 치더라도, 일의 세계에서 형성되는 정체성과 다른 삶의 장에서 작용하는 정체성 사이에 어떤 상관이 있는지 밝혀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이들의 주장에서는 일터에서의 주체성의 생산과 자기정체성 사이의 연관이 전혀 설명되지 않거나, 설사 설명되더라도 개인주의적 문화(벡)나 소비주의적 문화(바우만)라는 추상적인 문화적 가치의 변화를 통해 언급될 뿐이다. 28


(리프킨, 네그리, 하트) 그들 모두 노동 혹은 생산이라는 사회적 실천과 '노동하는 주체의 인간학'에 근거해 세계를 재현하는 근대적인 사회적 인식론을 거부할 필요가 있음을 역설한다. ....그들은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이란 대상을 어떻게 상징화하는가를 분석하지만 노동과 노동주체가 맺는 관계에 관한 분석은 소홀히 하거나 무시한다. 28


생산하는 삶에서 주체성의 관리와 지배는, 다른 사회적 삶의 장에서 주체성을 형성하는 사회적 실천과 떼어놓을 수 없다. 그렇게 볼 때 일터에서 노동자를 주체화하는 방식과 더불어 노동자들이 자기를 관리하는 방식을, 다른 사회적 삶에서 자기의 주체화와 잇는 고리를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보이지 않는 고리를 만들어내는 권력이 무엇인지 분석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의 변화를 단순히 노동주체의 경제적 지위의 변화나 노동주체에 대한 기술적 사회적 관리 방식의 변화로 환원하거나, 이를 단순히 협소한 뜻에서 이데올로기적 변화, 문화적 가정의 변화로 환원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31


부르디외는 신자유주의를 일러 "개인의 자유의 소망 아래 세워진 이 경제질서의 궁극적 토대는 사실상 실업, 불안정취업, 해고 위협에 의한 공포 등의 구조적 폭력"이라고 말한다. 이때 그가 고발하는 것은 실업, 불안정, 해고라는 객관적인 현실이 아닐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자유'의 소망 위에 세워진다는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역설적으로 '구조적 폭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34


 

지식기반경제라는 경제적 가상

 


노동주체를 지배의 대상으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중적이다. 직접적인 노동과정에서 노동주체를 지배할 수 있는 대상으로 가시화하는 담론은 노동주체가 '자기'를 지배할 수 있도록 가시화하는 담론, 즉 '자기-통치'의 담론과 함께 출현한다. 노동주체를 둘러싼 이런 이중적인 담론은 각기 자율적이면서도 서로를 상호 규정하고 또한 강화하게 된다. 40


기업이 구조조정을 할 때 그것은 기업의 경제적인 활동을 새롭게 표상하는 담론들을 동시에 생산한다. 이를 단순화시켜 표현하자면 이럴 것이다. 고객이 중심이 되고, 글로벌한 경쟁이 이뤄지며, 정보통신기술이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새로운 경제적 현실에서, 기업은 이제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으며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고 성공을 이룰 수 있는가. 이런 물음에서 이미 기업은 자신의 활동이 이뤄지는 경제적 실재를 새롭게 가시화하고 분절하고 있는 것이며 그에 관련된 지식들과 테크닉들을 활용할 태세를 갖춘 것이다. 42


이제 각 구성원들은 스스로가 개인 비전을 세우고, 창조적으로 활동해 창출가치가 존재비용을 능가하는 자기책임의 구현자로 변화되고 있다. 이런 구성원들이 제대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조직은 투명하고, 지배구조의 진화를 통해 신뢰와 개방적인 경영을 정착시켜야 하고, 개인 비전과 조직 비전을 동시에 제시하고 통합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창조적 긴장감 속에 가치를 창출하는 측정과 평가보상시스템이 실천되고 종국적으로 국가적으로 학습과 성장의 조직문화가 정착될 것이기 때문이다. 81


신교육체제의 지배란 그것의 이념의 효과가 아니라 그것이 고안하는 대상과 영역 그리고 그 대상과 관련된 주체에 작용하는 세부적인 테크놀로지를 통해 실현된다. 이를테면 교육 노동의 정체성과 교육 재정을 살펴보자. 여기에서 먼저 쟁점이 되는 것은 교사 노동과 노동주체로서 교사의 정체성, 즉 교사란 무엇을 하는가, 교사의 활동은 어떤 책임과 의무를 가지는가, 교사의 활동은 어떻게 평가, 측정, 보상되어야 하는가 등의 문제이다. 교육체제 재편에서 가장 극적인 변화는 바로 교사 노동의 정체성을 둘러싼 변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8


한국 자본주의가 변형되면서 나타난 새로운 주체성을 생산하는 과정에 속한다는 것은 인적자원 담론이 등장하고 난 뒤에야 사후적으로 자각한 일이었다. 즉 교육체제 개편은 마치 전반적 사회체제의 변화와 무관한 교육 내부의 일인 것처럼 여겨졌던 셈이다. 결국 새로운 자본주의적 주체성을 구성하는 언표들은 매우 이질적인 공간에서 다른 반응과 언어들을 동원하면서 자신의 궤적을 밟았던 것이라 말할 수 있다. 103


'국민교육헌장'의 후속이라 할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이 재현하는 국민은 어떤 모습일까. 물론 그것은 더 이상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인 국민이 아니다. 국가인적자원개발기본계획이란 언표가 만들어내는 국민주체의 모습은 더 이상 국가가 돌보는 삶을 통해 자신의 삶을 보장받고 발전시키는 주체가 아니라 "경쟁력 있는 국민", 다시 말해 자기주도적으로 삶의 능력을 계발하고 실현하는 국민이다.......이 때의 국민은 자기의 삶의 목표와 사명을 스스로 설정하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계발'하고 '혁신'하는 새로운 윤리적 주체이다. 117


국가는 개인화란 형태를 통해, 즉 개인적 주체가 자기책임, 자기계발, 자기조직, 자기존중의 형태로 주체화하도록 고취하고 유인함으로써 더 셈세하고 강력하게 작동한다. 개인적 주체의 정체성과 지식기반경제류의 경제적 가상이 만들어내는 사회적 정체성을 결합하면서 국가 통치 역시 새로운 형태로 바뀌는 것일 뿐이다. 따라서 국가의 유연화 혹은 탈규제화라 부를 수 있는 이런 현상은, 국가의 약화나 쇠락이기는커녕 국가와 사회가 연결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 및 집합체의 삶을 주체화하는 방식에서 변화가 이뤄진 것에 불과하다. 118


'인적자원'이란 용어는 기업과 일터에서의 '인적자원관리' 혹은 '인적자원개발'이라는 용어와 연결되고, 다시 학교에서 '인재 양성'이란 언표와 연결된다. 일터에서의 '우수성' 혹은 '베스트 프랙티스', '인재' 등의 개념은 국가에서의 '핵심역량', '혁신능력' 등의 개념으로 다시 복제되고, 이는 다시 학교에서의 '수월성' 등의 개념으로 이어진다. 119


인적자원이란 언표는 "주체들의 가능한 자리를 정의하는 하나의 익명적인 장"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인적자원은 '어떤 누구'인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 속한 모든 주체들에게 자신의 삶을 표상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준다. 따라서 인적자원이란 언표는 국가의 통치든, 아니면 일터에서 노동과 그를 관리하는 경영이든, 다양한 사회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교육이든, 아니면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 관련된 다양한 행위이든, 무한히 다양한 행위와 체험을 조직하는 가능성을 담지한다. 청소년으로서의 삶, 학생으로서의 삶, 직장인으로서의 삶, 국민으로서의 삶부터 자기 자신을 돌보는 삶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종적인 삶들은 이제 인적자원이라는 담론구성체 안에 모아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안에서 각각의 주체에 관한 언표들은 동일한 언표 값을 가지게 된다. 120


"스스로 책임지고, 스스로 독립해 있으며, 스스로를 존중하는" 국민, 즉 자기 자신과의 관계의 장 안에 존재하는 주체이다. 122

 

뱀발 

 

1. [변증법의 낮잠]을 읽다가 서동진이 궁금해서 [속물과 잉여]의 논문 한편을 챙기다. 그리고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를 읽게 된다. 논문집인 줄 알고 실망할까 싶었는데 온전한 책이다. 서론에서 밝혔듯이 조한혜정님께 지도를 받은 박사논문이다. 그의 통찰이 남다르다 싶었는데 관련 연구의 심도가 깊었고 그 뿌리에서 나온 생각들이다. 왜 관심을 두지 못했는지, 읽기에서 피해갔는지 모르겠다. 아마 자기계발서의 하나는 아닐까 싶었던 것 같다. 무척이나 중요한 저작인 것 같다. 한국에 대한 연구도 드문데, 교육, 조직문화 전반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의 맥락을 이을 수 있는 연구서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진보가 과연 관심이 있다고 하면, 87년체제, 97년체제, 2013년체제 등등 체제 논쟁을 많이 하였지만 그리 성과를 얻지 못한 것은 이처럼 현실에 발닿고 있지 못한 연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87년 이후 민주화에 사로잡혀있는 진보의 망상과 퇴행을 되짚을 수 있는 요긴한 재료?이기도 할 것 같다.

 

2. 일터의 지금까지 모습과 흐름이 일목요연하게 잡혀 부담은 없다. 허우적대기도 하고, 그렇게 신민처럼 바뀌기도 하고, 자신을 채근하여 그렇게 나아가기도 하는 모습들은 대부분이 경험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문제는 정상의 정상만을 요구하며, 점점 그들만의 컨베이어 벨트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이다. 늙지도 않으며 아프지도 않으며 점점 더 젊어지고 강해지는 자만 생존할 수 있는 자기발전충전소 같은 '자기기만'을 동력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이들고, 아프고, 사회적 약자는 애초에 대상과 사고의 바탕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는 국민교육헌장 속의 인물상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 시대의 자화상이기도 한데 문제는 넋을 놓고 있다는 점이다. (일터와 시민활동의 경계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읽고 나누면 좋을 것 같다.)

 

3. 읽다보니 조직의 생리를 지적한 우석훈의 [조직의 재발견], 그리고 구조적 폭력을 다루지만 지극히 읽기 어려운 [고요함의 폭력]이 겹친다.

 

 


댓글(0) 먼댓글(2)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미생을 미생으로 끝나지 않게하는 책 한권를 건네드리면서 (2)
    from 木筆 2014-12-23 15:56 
    유연한 노동주체 자본의 변증법은 노동과 노동주체를 분석함에 있어 두 가지의 근본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먼저 노동을 자본의 운동법칙에 종속된 경제적 실재로 환원함으로써(경제주의), 노동주체를 노동력, 그것도 직접적인 고용관계에 종속된 노동자로 한정한다. 따라서 오직 경제적인 삶, 그것도 노동력이라는 범주의 매개를 통해서만 노동 현실을 표상한다. 125 그 탓에 노동 분석은 임금, 고용관계 등 노동력의 경제적 삶을 분석하는데 머물러버리고, 노
  2.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계보학적 분석과 자유의 재의미 (완)
    from 木筆 2014-12-23 21:58 
    자기 계발하는 주체의 정치학 ‘어린이 비즈니스 스쿨’에서 창의와 도전정신 그리고 자율과 책임의 주체가 되기 위한 다양한 놀이, 토론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어린이부터 고령화 시대에 대비해 ‘인생 2모작’, ‘인생 3모작’을 경영하기 위한 노하우를 알려주는 강연회에 참석하는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자기계발하는 주체라는 울타리 속으로 들어왔다. 따라서 자기계발하는 주체의 모습은 끊임없이 펼쳐지고, 모든 ‘주민’을 아우르며, 모든 삶의 공간을 흡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