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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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는 강제의 반대 형상입니다. 자기가 강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그 강제를 자유로 느낀다면, 그건 자유의 종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위기에 처해 있는 겁니다. 자유의 위기는 우리가 강제를 자유로 인지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는 저항이 불가능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에서 나를 지켜줘” jenny holzer 19

 

생각하기도 만들기입니다. 생각하기도 폭발로 이어질 수 있어요. 생각은 가장 위험한 행위입니다. 아마 원자폭탄보다 더 위험할 겁니다. 생각은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래서 레닌이 말했죠. “배우고 배우고 또 배워라!” 26

 

 


 

 

자유는 근본적으로 관계의 어휘다. 사람들은 좋은 관계 속에서, 타인과의 행복한 공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초래하는 개개인의 전면적 고립 상태는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자유를 새롭게 정의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새롭게 창안해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에 직면해 있다. 자유를 강제로 전복시키는 숙명적인 자유의 변증법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말이다. 12

 

흥미롭게도 마르크스 역시 자유를 타자와의 좋은 관계라는 면에서 정의한다.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의 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소질을 모든 방향으로 온전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단을 획득한다. 그러니까 공동체 안에서 비로소 개인의 자유가 가능해진다.” 따라서 자유롭다는 것은 타인과 함께 자아를 실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유는 성공적인 공동체와 동의어다. 12...“자유 경쟁 속에서 자유롭게 해방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자본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그리하여 자유로운 개인은 자본의 성기로 전락한다. 개인의 자유는 자본에 자동적인주체성을 부여하며 이로써 자본의 능동적인 번식을 추동한다. 13

 

나는 푸코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무엇보다도 유럽과 관련하여 대단히 설득력 있게 기술한 생권력이 우리 시대를 규정하는 권력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다.” bernard stiegler에 따르면 생권력의 자리를 물려받은 것은 심리 권력의 심리 기술이다 42

 

신자유주의 체제의 권력 기술은 섬세한 형식을 취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 개인을 예속시키지 않는다. 개인이 자발적인 자기 제어를 통해 지배 관계를 자신의 내면에 전사하도록 유도한다. 개개인은 이렇게 내면에 전사된 지배 관계를 자유로 해석하게 된다. 여기서 자아의 최적화와 복종, 자유와 착취는 하나가 된다. 자기 착취라는 형식으로 자유와 착취를 결합시키는 이러한 권력 기술은 푸코의 시야 너머에 있다. 45

 

사람의 인격을 긍정성의 강제 속에 완전히 묶어두는 것은 불가능하다. 부정성이 없다면 삶은 죽은 존재로 쭈그러들 것이다. 부정성이 삶을 생동하게 한다. 고통은 경험의 본질적 부분을 이룬다. 삶이 순전히 긍정적 감정과 플로우(몰입) 경험만으로 이루어진다면, 그것은 인간적 삶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영혼에 깊은 긴장을 선사하는 것은 바로 부정성이다. 저 불행에 빠진 영혼의 긴장, 그 긴장이 영혼에 심어주는 강인함...불행을 견디고, 버티고, 해석하고, 이용하는 영혼의 창의성과 용기, 그리고 예로부터 비밀, 가면, 정신, 계략, 위대함으로부터 영혼에 선사된 것 그것을 영혼은 괴로움 속에서, 엄청난 괴로움의 훈육 속에서 선사받지 않았던가?” 48

 

긍정성의 폭력은 부정성의 폭력만큼이나 파괴적이다.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는 의식 意識 산업을 활성화하며 이로써 결코 긍정 기계일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파괴한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주체는 자아 최적화의 명령, 즉 더 큰 성과를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강제 속에서 몰락해간다. 힐링은 킬링으로 귀결된다. 50

 

감정은 이야기를 허용한다. 감정은 서사적 길이와 폭을 지닌다. 흥분이나 기분은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연극이 직면하고 있는 감정의 위기는 이야기의 위기이기도 하다. 오늘날 감정을 이야기하는 연극은 소란스러운 흥분의 극장에 밀려나고 있다. 이러한 연극에서는 이야기가 없는 까닭에 거대한 흥분의 덩어리가 무대 위로 방출될 뿐이다. 감정과 달리 흥분은 어떤 공간도 열어주지 않는다. 흥분은 일정한 선로를 찾아 스스로를 분출시키면 그만이다. 디지털 매체 역시 흥분의 매체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흥분의 즉각적 배설을 용이하게 해분다. 디지컬 커뮤니케이션은 그 시간적 특성만으로도 감정보다는 흥분을 더 많이 전달한다. 악플은 흥분의 물결이다....감정은 서술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세계가 어떠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가 어떠하다는 기분이 될 수 없다. 기분은 서술적이지 않고 수행적이다. 기분은 행동과 연관되어 있다. 더 나아가 기분은 지향적 성격을 지니며 일정한 목표를 겨냥한다...기분도 흥분도 감정을 특징짓는 이러한 광대함을 따라가지 못한다. 기분이나 흥분은 모두 주관성의 표현일 뿐이다. 63

 

게임은 특별한 시간 구조를 지닌다. 즉각적인 성공과 보상이 게임 시간의 특징이다. 숙성을 위해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들은 게임화되지 않는다. 오래 걸리는 것, 느린 것은 게임의 시간 구조와 양립할 수 없다. 72

 

마르크스의 가정과는 달리 생산력과 생산 관계의 변증법은 자유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를 새로운 착취 관계 속에 얽어맨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와 함께 마르크스를 넘어서 사유해야 할 것이다. 자유를, 자유로운 시간을 정말 우리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말이다. 자유로운 시간은 오직 노동의 타자만이, 생산력이 아닌 다른 힘, 어떤 노동력으로도 전환되지 않을 어떤 힘만이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이다. 즉 생산형식이 아닌 어떤 삶의 형식, 완전히 비생산적인 어떤 것.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생산의 피안에서 쓸모없는 것의 쓸모를 찾아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74

 

정신은 하나의 결론, 즉 부분들이 지양되어 의미 있게 담겨있는 전체다. 전체는 결론의 형식이다. 정신이 없다면 세계는 단순히 덧붙여진 것들의 더미로 해체되도 말 것이다. 정신의 자기 안에 모든 것을 모아들이는 세계의 내면, 세계의 총화를 이룬다. 이론 역시 부분들을 자기 안에 포함하고 거두어들이는 하나의 결론이다. 크리스 앤더슨이 선포한 이론의 종말은 결국 정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빅데이터는 정신을 완전히 불구로 만든다. 순수하게 데이터의 힘으로 추진되는 인문과학은 더 이상 인문과학이 아니다. 총체적인 데이터 지식은 정신의 원점에 놓여 있는 절대적 무지에 지나지 않는다. 100

 

니체에게 통계 수치는 그저 인간이 무리 짓는 짐승이라는 것, “점점 더 인간이 똑같아진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이러한 획일화는 오늘의 투명사회, 정보사회의 특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즉시 드러난다면, 일탈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투명성으로부터 타자, 낯선 것, 불일치를 제거하는 순응의 압력이 발생한다. 빅데이터는 무엇보다도 집단적 행동 패턴을 가시화한다. 다타이즘 자체가 동일화의 증대 경향을 강화시킨다. 데이터 마이닝은 기본적으로 통계학과 다르지 않다. 데이터 마이닝이 드러내는 상관관계는 통계적 개연성의 표현이다. 그것은 통계적인 평균치를 계산해낸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유일무이한 것에 접근하지 못한다. 빅데이터는 사건을 보지 못한다. 역사를, 인류의 미래를 규정하는 것은 통계적 개연성이 아니라 개연적이지 않은 것, 유일한 것, 사건이다. 따라서 빅데이터는 미래도 보지 못한다. 106-107

 

푸코는 니체를 따라서 유일무이한 결정적 사건을 부각시키는역사의 이념을 고수한다. 푸코가 말하는 사건이란 세력 관계의 역전” “권력의 몰락, 언어의 기능 변환, 기존 언어 사용자의 의지에 반하는 언어 사용을 의미한다. 사건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갑자기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한다. 사건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의 구도를 탄생시킴으로써 기존의 확실성을 파괴해버린다. 사건은 전환이다. 전환을 통해서 전도,지배 권력의 전복이 이루어진다. 사건은 이전 상태에는 전혀 없던 무언가가 일어나게 한다. 108-109

 

체험과 반대로 경험은 비연속성을 바탕으로 한다. 경험은 변신을 의미한다. 어느 대담에서 푸코는 니체, 블랑쇼, 바타유가 말하는 경험이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떼어내어 주체가 더 이상 주체 자신이 아니게 되거나, 주체가 자신의 파괴 또는 해체로 내몰릴 지경에 이르게하는 어떤 것이라고 지적한다. 주체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예속되어 있다는 것을 amlal한다. 경험은 주체를 예속 상태에서 벗어나게 한다. 경험은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가 주체를 예속 상태 속에 더 깊이 빠뜨리기 위해 이용하는 체험 또는 기분과 정반대다.109

 

푸코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완전히 다른 삶의 형식을 낳는 자유의 실천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탈심리화의 과정 속에서 완성된다. “삶의 기술이란 심리학을 죽이는 것, 자발적으로, 또한 다른 개체들과 어울리며, 아무 이름도 없는 존재, 관계, 특성 들을 생성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이 삶은 살 가치가 없다.” 110

 

들뢰즈는 마지막 글인 내재성: 하나의 삶....에서 내재성을 행복의 공식으로 끌어올린다. “우리는 순수한 내재성이란 하나의 삶이며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은 삶 속의 내재성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 어떤 것 속에도 있지 않은 내재적인 것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삶이다. 하나의 삶은 내재성의 내재성, 절대적 내재성이다. 즉 그것은 완전한 능력, 완전한 행복이다.” 117

 

바보는 그 누구와도 혼동되지 않지만 더 이상 이름이 없는 호모탄툼, 특성없는 인간을 닮았다. 바보가 들어갈 수 있는 내재성이 층위는 탈예속화와 탈심리화의 매트릭스다. 그것은 주체를 그 자신에게서 해방시켜 저 측량할 수 없는 텅 빈 시간 속으로보내는 부정성이다. 바보는 주체가 아니다. ”차라리 꽃의 실존, 빛을 향한 단순한 트임“ 118

 

 

볕뉘.  조금 더 큰 캔버스가 생각나 문구에 들르고, 2층 서점에 들러 책들을 챙기다. 주말 오고 가는 길, 머무르는  한 밤에 읽다.  저자의 이야기는 매력적이다. 00사회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거침이 없고 끊임이 없다. 대담을 보니 지금은 매끈함, 아름다움을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일련의 흐름으로 분석과 이야기는 시리즈로 이어진다. 증상과 징후에 대한 진단의 속도는 빠르다. 그렇지만 명백해지고 단순해지는 귀결 속으로 아쉬움이 남는다. 무엇일까 생각을 해보니  자본주의 자장에서 사는 인간 역시 뭉뚱그리고 균질화시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부르조아와 중산층이나 중간계층, 실업자의 삶의 출렁거림이나 근거를 바탕으로 한 구체적인 대유가 아쉬운 것은 아닐까. 복원해내고자 하는 삶의 형식 역시 추상에 아직 잡혀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維夏, 여름의 초입이다. 시집의 한편의 시제목이 올라오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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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5-05-18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울님의 볕뉘 진단과 비슷한 생각을 했습니다. 유려한 사유의 물결이, 게임 등등을 바위처럼 거칠게 스쳐간다고나 할까요. 하나의 추상이 다른 추상을 대적할 때 무시와 비슷한 단순화 하려는 그런 역동성..

여울 2015-05-18 14:48   좋아요 1 | URL

네, 분석과 진단으로 그치면 안되겠죠. 그런 면에서 절반의 사유이자, 추상결론은 아닐까요. 어떻게 삶의 결들이 달라지고 달라져갈 구체성이 드러날 때, 온전해가는 사유는 아닐까. 삶의 결들을 나눠 확장하면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심미적, 아름다움으로 귀결도 동일한 진단일 수 있어 안타깝습니다. 강신주의 개인에 대한 과도한 주장도 사유를 넓힐 수 있지만 , 그것 역시 사회경제적 맥락과 함께 사유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비슷하다고 여깁니다.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 역시 눈앞에 고민이지만... 아쉽습니다.
 

사회학과 철학적 개념

 

철학적 개념 또한 그것이 무엇을 배제했는가 또는 무엇을 말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징후로서 분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사회학자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점은 그들이 이런 작업을 사전에 충분히 행하지도 않고는 좀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 - 사회 자체나 자유, 관료제, 지배 같은 을 사유의 종착역 내지 해석을 위한 궁극적인 틀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들 개념은 반대로 가장 절박하게 변증법적 분석을 요구하는 것들로서, 사회적인 것이 사회에 대한 사유에 부과하고 있는 궁극적인 족쇄를 폭로하는 것은 분쇄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러한 형식적인 의사보편성이나 과학적인추상을 파헤칠 때 가능할 것이다. 111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관점이 갖는 특징은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상호교차시켜 양자를 모순된 긴장관계 속에 함께 묶는 것인데, 이러한 특징은 경험적인 것을 임의적 연구과제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경우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사회적인 총체성은 직접적으로 포착될 수도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단호히 입증될 수도 없다.”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메타비평적 성격을 띠게 마련인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이론화 작업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사회학적 개념들이 이 개념들이 해석하려는 재료로부터 분리해내서 이것들을 사회학자들이 수집했다고 생각하는 자료들과 똑같이 사회적 역사적 징후들의 드러남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112-113

 

아도르노가 가끔씩은, 독자들에게 색다른 지적 실천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이 그런 배리 paralogism에 부딪치도록 만들 때 매개를 구축하는 작업을 포함하여 변증법적 과정을 끝까지 밟아나감으로써 자신의 사회학적 임무를 더 잘 수행하고 있다고 느꼈음은 분명하다. 사실 딜레마나 모순이 있기 때문에 매개라는 것도 존재하며 그 때문에 심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런 예고 없이 사회적 자료로 변화할 수 있고, 반면에 사회적 사실은 끊임없이 상상력의 결과로 용해될 수 있는 것이다. 115

 

사회학과 심리학의 분리는 허위면서 또한 동시에 진실이다. 허위인 까닭은 그러한 분리가 전문가들로 하여금 둘이 분리된다는 사실에 의해서조차 요구되는 총체성에 대한 인식의 포기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진실인 이유는 그러한 분리가 개념을 통한 성급한 통일을 꾀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균열을 비타협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116

 

형이상학과 경험주의는 동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루어진 동전의 변증법적인 두면을 이룬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자신의 사회학적 사명이라고 생각한, 실증주의에 대해 벌인 화해 불가능한 전쟁인 소위 실증주의논쟁을 비판의 양쪽 가닥을 요약함으로써 끝맺는다. 118

 

문화비판의 이해득실

 

이데올로기라는 낡고 진부한 개념을 담론, 실천, 에피스테메와 같은 일련의 새로운 용어나 관념으로 대체하려는 시도 또한 비슷한 처지에 있음을 본다. 나 자신의 입장은 항상, 사람들이 하부구조/상부구조의 관념을 독자적인 이론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어떤 한 문제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그 해결은 항상 개인적이고 특수한 이해방식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파악할 때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보통 집과 집의 기초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철도 분야에서 쓰여온 전문용어인 듯하다. 여기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각각 수송수단과 선로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러한 관계는 우리를 갑자기 전혀 다른 그림, 즉 이데올로기와 그의 효과가 그려져 있는 그림 속으로 밀어넣는다. 127

 

물질적인 현실을 교환가치의 세계라고 부르는 데 반해 이러한 교환가치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을 문화라고 부른다면 기존의 상태가 존속되는 한 그러한 거부가 가상에 불과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러한 문화의 허위가 상품세계의 허위를 고발하는 교정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화가 지금까지 실패해왔다는 사실이 그러한 실패를 부추기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130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결론 - ‘문화비판뿐 아니라 사유 일반에 해당되는 을 내린다면 우리는 문화(이념으로서나 현상형식으로서나)를 죽이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문화를 가차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둘 중 어느 한 쪽에 결정적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화뿐 아니라 철학에도 해당된다. 130

 

 

볕뉘. 

 

1. 변증법적 글쓰기라는 것이 있다면 서로 부딪치는 딜레마와 모순을 바닥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드러내보이는 것이자 그 구도가 보여주지 못한 이면의 통찰을 확인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의 편린같은 것이 섬찟하게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구멍에 걸린 가시같이 삶과 기존 관념은 찔려 어쩌지도 못하는 상태로 존재에 대한 물음이자, 다른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와 실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존엄에 대해서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세가지 질문을 하고 따진다고 하자. 필연적으로 삶의 디테일을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드러낸다고 객관적인 사실로 끝날 수 있을까?

 

존재의 격차를 두게되자마자 그 존엄은 흔들린다. 빠져나오더라도 다시 사회경제적맥락으로 잠입해들어가야 한다. '나'는 균질하지도 균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질문은 다시 다른 차원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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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증법과 외래적인 것

 

우리가 이제 요청받고 있는 것은, 달의 뒷면처럼 직접 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개념의 다른 측면, 즉 개념의 바깥 면을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념이 그러한 다른 얼굴을 잠시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옛날 방식대로 개념의 내부에 머물면서 개념을 계속 사용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 국면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무의식의 관념이 끼여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관념은 궁극적인 철학적 해결이 될 수 없는 미흡한 것으로 여겨진다...사유하는 정신에 극단적인 타자의 차원을 부과하려는 비슷비슷한 수많은 상징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프로이트의 범주들은 일종의 보충적 사회심리학으로 이용했지 중심적인 개념이나 조직원리로 만들지는 않아야 한다. 91

 

동일성에 관해서는 이 개념이 사실은 교환관계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대체하는 아도르노의 용어다. 이 문제에서 아도르노가 거둔 업적은 그가 좀더 높은 철학적 인식을 위해 교환가치 이론에 함축된 의미나 반향을 마르크스주의나 변증법 전통에 속해 있는 어떤 다른 사상가들보다도 철저히 일반화시켜 세세한 국면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총체성에 관해서는...개념이 앞에서 제기한 문제, 즉 개념을 수단으로 개념에 반대되게 사유한다는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개념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념을 물화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한 근본 작업은 개념을 총체성이나 체계 속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다. 92

 

아도르노의 가장 강력한 철학적 내지 미학적 간섭행위는 우리가 체계 내부에 사로잡혀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체계의 사슬은 망각이나 억압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동일성의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출구가 막혀버린 체계와 비슷한 것으로서 잊혀지고 억압될수록 좀더 효율적으로 체계의 기능을 수행하는 총체성이다. 동일성이라는 폐쇄회로를 뚫고나오기 위해 체계나 총체성을 의식적으로 다시 도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95

 

체계는 정확하게 개념의 바깥 면, 즉 우리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바깥 면이다. 그러나 왜 체계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체계와 총체성이라는 이 쌍둥이 개념이 내적 변형이나 변증법적 다의성에 대해, 동일성 개념이 어떤 것들을 가리켰던가를 보았을 때와 같은 실험 정신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철학적 체계의 이상이란 이성이나 보편성 또는 추상화에 대한 요구와 다른 것이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개념 속에서 체계화를 일구어내는가의 문제는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수단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다. ...모든 것 속으로 삼투해들어가는 체계의 현존은 개념의 형식, 즉 그 안에 포함된 내용이 어떠하든 이와 무관하게 항상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형식 속에서 감지될 수 있다. 95-96

 

순수하지 못한 외래적인 언급의 기능은 해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해석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 위한 것으로서, 체계로부터 빠져 달아나버리면서 다시 체계를 항구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체계의 어쩔 수 없는 결과 이러한 사정은 사유가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포착한 요소에 흠뻑 젖어 이와 맞설 때, 그리고 이러한 요소가 자신이 해명하고자 하는 대상들만큼이나 주관적인 과정에도 완전히 침투하여 이 과정을 결정할 때조차 일어난다 라는 회상을 다시 사유의 내부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100

 

해석의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것이나 텍스트 또는 현상을 향한 체계적 관심 이를 위한 해석의 척도는 시야의 바깥에 있는 사전전제된 총체성이다. -이 발견하는 것은, 텍스트 속에서 말해진 것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총체성 자체에 관계하며 이를 변경시키려 드는 것이지 개별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별자란 단순한 핑계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단순한 사례나 삽화로 만들면서 총체성을 주제화하는 것(예를들면 독점자본주의) 또한, 충격이나 새로움을 통해 또는 개별 사례라는 이름을 내세워 해석을 기도하는 충격요법에 대한 핑계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난다. 105

 

에세이에게 문화란 존재 위에 떠도는 부수현상으로서 제거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에세이가 제기하는 비판의 대상은 오히려 문화 밑에 있는 것, 즉 잘못된 사회이다. 그 때문에 에세이에서 원천은 상부구조만큼이나 별 의미를 갖지 않는다. 에세이의 자유는 대상선택의 자유이며, 사실이나 이론의 어떤 우위에 대해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에세이의 절대적 주권은, 어떤 의미로 볼 때 에세이에서 모든 객체는 동등하게 중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즉 모든 것은 마법에 걸려 있다는 원칙으로부터 나온다. (문학노트) 106

 

 

볕뉘. 사유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술의 하나로는 반복이기도 하다. 희석되려는 것을 거듭 재고함으로써 흐릿하지 않고 돋을 새김이 되도록 멈추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뿌옇게 되는 순간이 희망이자 다른 시야를 보여주는 계기일런지도 모른다.  짙은 안개 속에 태양은 또렷이 드러나듯이... .. 방법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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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조류 속에서 본 아도르노

 

역사논쟁은 지금까지 암묵적으로 통용되어 오던 시대구분 자체를 문제삼을 때 진정으로 생산적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시대구분의 문제는, 스스로를 지극히 역사와 무관한 것으로 이해하면서도 온갖 종류의 역사적인 서사와 서사적인 재해석을 열망하는 시대에는 중심적인 이론적 이슈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심은 어느 정도 최근의 역사학을 포함한 포스트구조주의적인 왈가왈부에 대한 흥미로서 이러한 흥미는 역사의 무게로부터 새털처럼 가벼운 일탈을 기도하는 흐름에 대한 일종의 보상이 될 것이다. 52

 

그의 철학적 저서나 미학적 저서가 갖는 독창성은 후기자본주의를 총체성-우리의 개념들이나 예술작품 자체의 형식적 속성에 있어서-으로 파악하는 기발함에 있다. 다른 어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도 보편과 특수, 전체와 부분의 관계를 아도르노처럼 치밀하면서도 포괄적으로 분석하지는 못했다. 극소수의 당대 사상가들만이 복잡한 철학 개념을 다룰 수 있는 세련된 능력을 적절한 심미적 감수성과 결합시킬 수 있었다. 그러한 사람으로서 크로체나 사르트르를 떠올릴 수 있을 터인데, 반면 루카치는 여러 면에서 훨씬 큰 역사적 인물이겠지만, 이런 면에서는 희극배우에 가깝다. 63

 

아도르노의 개념 중 자연, 또는 소위 비동일적인 것이라는 개념으로 보면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취하고 있는 태도에 관한 우리의 진부한 상식을 바로잡아줄 것이며, 또한 지배의 모티브를 강조하는 푸코와 깊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착각도 없애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사의 관념 자체가 푸코의 권력개념이 지니고 있는 인류학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 모두를 제거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65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도 여타의 문화현상들처럼 사회경제적 문맥에 따라 변화한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부각시킬 것이기 때문에 유용할 것이다. ..아도르노의 마르크스주의나, 지금 우리의 독특한 후기자본주의 또는 제3단계에 들어선 자본주의를 해석할 수 있는 그의 독특한 능력이 갖는 각별한 중요성을 다루고자 한다. 여기에 담긴 의미로서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나중에라도 better late than never라는 여전히 항상 타탕한 모토보다 더 극적인 것은 없을 것이다. 68

 

개념의 곤혹스러운 매력

 

동일성과 반동일성

 

사유는 자신의 고유한 법칙성 속에 머물러 있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사유는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도 자신을 거역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변증법에 대한 정의가 만약 가능하다면 이러한 식으로 정의해보는 것은 해볼 만하다. 76

 

초점은 한편으로, 겉보기에는 태양계처럼 중심을 싸고도는 안정된 단자같은 문장들을 텍스트 내의 좀더 큰 구문이나 시간관계에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비자율적 접사나 연결사에 맞추어지며, 다른 한편으로는 분리된 문장들을 필사적으로 좀더 큰 시간성 속으로 묶어주는 역할을 하는 요소들, 즉 앞에 나온 것들을 환기시키거나 주제를 반복하는 요소들에 집중된. 아도르노의 텍스트 독해는 그리고와 같은 그러한 연결사들의 평정한 논리보다는 문장에 굴레를 씌우는 폭력 또는 그러나’, ‘그렇지만’, 휠덜린의 말하자면과 같은, 보통 같으면 단순한 기능어에 머물 만한 단어들의 의미가 갖는 서사적 비논리에 주목한다....79

 

동일성의 기능은 지배와 억압의 계기를 통해 특징지워진다는 상황에 의해, 동일성이라는 개념 자체로부터 동일성에서 배제된 것들을 소극적으로 암시하는 대안적 내지 보충적 묘사가 생겨난다. 고전적 변증법조차-여전히 동일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기 때문에-“의심할 여지없이 경험의 질적 다양성을 희생한다는 쓰디쓴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헤겔은 여전히 낡은 동일성철학의 전통 위에서 플라톤 이래 무상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폐기처분당하고 헤겔 자신 게으른 존재라는 딱지를 붙인, 개념 없고 개별적이고 특수한 것에 대해 무관심하다. 이 인용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개념성에 들어 있는 금욕적 자체나 체념 그리고 바로 이러한 체념에 대한 원한감정으로서, 이러한 태도는 아도르노의-동일성의 억압적 기능에 국한되지 않는-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언어의 육체를 죄악시하는전통철학자들의 수사학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욕망과 억압의 언어가 가느다란 고음으로 새어나오듯, ‘비동일성의 특징을 통해 동일성의 본질에 접근하는 이러한 계기를 갖는다. 85

 

교환관계는 아도르노의 저서 전반에 걸친 또 다른 중심동기로서 지금까지 추적해온 동일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철학적 중심동기와 엄격한 의미에서 동일한것이다. 동일화하는 개념에 내재된 지배의 의지를 철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환기시키는 것은 동일성의 모든 표현형식 속에 감추어져 있는 경제적 체계(상품 생산 돈 노동력)의 제약성에 대한 예민한 촉수에 자리를 양보하며, 다른 한편 경제적 제약성이라는 동일성 개념의 하부구조는 왜 자신의 효과가 더 나은 사상이나 새로운 방식의 철학함이나 좀더 적절한(좀더 유토피아) 개념에 의해 가볍게 극복될 수 없는가를 인식시켜준다. 역사는 이미 사유하는 주체를 생각하고 있으며 우리의 사유가 벗어날 수 없는 사유의 틀 속에 이미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88

 

사회는 주체보다 선행한다는 명제에서 보듯 사유의 범주들은 집합적이며 사회적이다. 동일성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운명이다. 이성이나 이성의 범주들은 문명이나 자본주의의 발생과 하나이며, 후자가 변화되지 않는 한 거의 변화될 수 없는 것들이다....그러나 오성에 대한 비타협적인 비판도 비합리주의에 떨어질 위험이 있다. 88

 

볕뉘. 최근의 아도르노 책들을 함께 구입했지만 겉넘을 것 같아 입문서 겸 흡인력있는 제임슨의 책을 보고 있다. 온전하게 보지 못하면 아도르노로 들어가는 길, 그의 시선을 편취하고 말 것 같은 느낌때문이다.  마음이 온통 책 속에 가 있지만 책만 펼쳐놓고 한자도 읽지 않는다. 메타비평이라기 보다는 자신을 바꾸어내지 않으면 읽을 수 없는, 본질적인 의도는 무엇일까, 겉넘으면서 읽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걸려있기도 한 것 같다. 제일 중요한 모두를 다시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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