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과 외래적인 것

 

우리가 이제 요청받고 있는 것은, 달의 뒷면처럼 직접 볼 수도 접근할 수도 없는 개념의 다른 측면, 즉 개념의 바깥 면을 사유하는 것이다. 우리는 개념이 그러한 다른 얼굴을 잠시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옛날 방식대로 개념의 내부에 머물면서 개념을 계속 사용하고 생각해야 한다. 이 국면에서 경우에 따라서는 무의식의 관념이 끼여드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관념은 궁극적인 철학적 해결이 될 수 없는 미흡한 것으로 여겨진다...사유하는 정신에 극단적인 타자의 차원을 부과하려는 비슷비슷한 수많은 상징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프로이트의 범주들은 일종의 보충적 사회심리학으로 이용했지 중심적인 개념이나 조직원리로 만들지는 않아야 한다. 91

 

동일성에 관해서는 이 개념이 사실은 교환관계라는 마르크스의 개념을 대체하는 아도르노의 용어다. 이 문제에서 아도르노가 거둔 업적은 그가 좀더 높은 철학적 인식을 위해 교환가치 이론에 함축된 의미나 반향을 마르크스주의나 변증법 전통에 속해 있는 어떤 다른 사상가들보다도 철저히 일반화시켜 세세한 국면에 이르기까지 풍부하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총체성에 관해서는...개념이 앞에서 제기한 문제, 즉 개념을 수단으로 개념에 반대되게 사유한다는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책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개념을 폐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개념을 물화로부터 회복시키기 위한 근본 작업은 개념을 총체성이나 체계 속에 다시 집어넣는 것이다. 92

 

아도르노의 가장 강력한 철학적 내지 미학적 간섭행위는 우리가 체계 내부에 사로잡혀 있음을 경고하는 것이다. 체계의 사슬은 망각이나 억압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을 뿐만 아니라, 동일성의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출구가 막혀버린 체계와 비슷한 것으로서 잊혀지고 억압될수록 좀더 효율적으로 체계의 기능을 수행하는 총체성이다. 동일성이라는 폐쇄회로를 뚫고나오기 위해 체계나 총체성을 의식적으로 다시 도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이다. 95

 

체계는 정확하게 개념의 바깥 면, 즉 우리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바깥 면이다. 그러나 왜 체계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체계와 총체성이라는 이 쌍둥이 개념이 내적 변형이나 변증법적 다의성에 대해, 동일성 개념이 어떤 것들을 가리켰던가를 보았을 때와 같은 실험 정신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철학적 체계의 이상이란 이성이나 보편성 또는 추상화에 대한 요구와 다른 것이 아님이 드러날 것이다. 이런 것들이 어떻게 개념 속에서 체계화를 일구어내는가의 문제는 내용과 형식의 변증법을 수단으로 파악하는 것이 적절하다. ...모든 것 속으로 삼투해들어가는 체계의 현존은 개념의 형식, 즉 그 안에 포함된 내용이 어떠하든 이와 무관하게 항상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형식 속에서 감지될 수 있다. 95-96

 

순수하지 못한 외래적인 언급의 기능은 해석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해석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 위한 것으로서, 체계로부터 빠져 달아나버리면서 다시 체계를 항구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체계의 어쩔 수 없는 결과 이러한 사정은 사유가 급진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포착한 요소에 흠뻑 젖어 이와 맞설 때, 그리고 이러한 요소가 자신이 해명하고자 하는 대상들만큼이나 주관적인 과정에도 완전히 침투하여 이 과정을 결정할 때조차 일어난다 라는 회상을 다시 사유의 내부에 끌어들이는 것이다. 100

 

해석의 대상이 되는 개별적인 것이나 텍스트 또는 현상을 향한 체계적 관심 이를 위한 해석의 척도는 시야의 바깥에 있는 사전전제된 총체성이다. -이 발견하는 것은, 텍스트 속에서 말해진 것이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총체성 자체에 관계하며 이를 변경시키려 드는 것이지 개별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별자란 단순한 핑계나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을 단순한 사례나 삽화로 만들면서 총체성을 주제화하는 것(예를들면 독점자본주의) 또한, 충격이나 새로움을 통해 또는 개별 사례라는 이름을 내세워 해석을 기도하는 충격요법에 대한 핑계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난다. 105

 

에세이에게 문화란 존재 위에 떠도는 부수현상으로서 제거해야 할 무엇이 아니다. 에세이가 제기하는 비판의 대상은 오히려 문화 밑에 있는 것, 즉 잘못된 사회이다. 그 때문에 에세이에서 원천은 상부구조만큼이나 별 의미를 갖지 않는다. 에세이의 자유는 대상선택의 자유이며, 사실이나 이론의 어떤 우위에 대해서도 굴하지 않을 수 있는 에세이의 절대적 주권은, 어떤 의미로 볼 때 에세이에서 모든 객체는 동등하게 중심 주변을 맴돌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즉 모든 것은 마법에 걸려 있다는 원칙으로부터 나온다. (문학노트) 106

 

 

볕뉘. 사유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술의 하나로는 반복이기도 하다. 희석되려는 것을 거듭 재고함으로써 흐릿하지 않고 돋을 새김이 되도록 멈추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뿌옇게 되는 순간이 희망이자 다른 시야를 보여주는 계기일런지도 모른다.  짙은 안개 속에 태양은 또렷이 드러나듯이... .. 방법을 비교적 소상히 기록한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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