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과 철학적 개념

 

철학적 개념 또한 그것이 무엇을 배제했는가 또는 무엇을 말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징후로서 분석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아도르노가 사회학자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는 점은 그들이 이런 작업을 사전에 충분히 행하지도 않고는 좀더 포괄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 - 사회 자체나 자유, 관료제, 지배 같은 을 사유의 종착역 내지 해석을 위한 궁극적인 틀로 여긴다는 것이다. 이들 개념은 반대로 가장 절박하게 변증법적 분석을 요구하는 것들로서, 사회적인 것이 사회에 대한 사유에 부과하고 있는 궁극적인 족쇄를 폭로하는 것은 분쇄하는 것은 어렵겠지만 이러한 형식적인 의사보편성이나 과학적인추상을 파헤칠 때 가능할 것이다. 111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관점이 갖는 특징은 개별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을 상호교차시켜 양자를 모순된 긴장관계 속에 함께 묶는 것인데, 이러한 특징은 경험적인 것을 임의적 연구과제의 수준으로 떨어뜨릴 경우 사라져버리고 말 것이다....사회적인 총체성은 직접적으로 포착될 수도 자연과학의 법칙처럼 단호히 입증될 수도 없다.” 실제로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언제나 메타비평적 성격을 띠게 마련인 아도르노의 사회학적 이론화 작업이, 필연적으로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사회학적 개념들이 이 개념들이 해석하려는 재료로부터 분리해내서 이것들을 사회학자들이 수집했다고 생각하는 자료들과 똑같이 사회적 역사적 징후들의 드러남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112-113

 

아도르노가 가끔씩은, 독자들에게 색다른 지적 실천을 보여주기보다는 그들이 그런 배리 paralogism에 부딪치도록 만들 때 매개를 구축하는 작업을 포함하여 변증법적 과정을 끝까지 밟아나감으로써 자신의 사회학적 임무를 더 잘 수행하고 있다고 느꼈음은 분명하다. 사실 딜레마나 모순이 있기 때문에 매개라는 것도 존재하며 그 때문에 심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은 아무런 예고 없이 사회적 자료로 변화할 수 있고, 반면에 사회적 사실은 끊임없이 상상력의 결과로 용해될 수 있는 것이다. 115

 

사회학과 심리학의 분리는 허위면서 또한 동시에 진실이다. 허위인 까닭은 그러한 분리가 전문가들로 하여금 둘이 분리된다는 사실에 의해서조차 요구되는 총체성에 대한 인식의 포기를 부추기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이 진실인 이유는 그러한 분리가 개념을 통한 성급한 통일을 꾀하기보다는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난 균열을 비타협적으로 기록하기 때문이다. 116

 

형이상학과 경험주의는 동일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루어진 동전의 변증법적인 두면을 이룬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자신의 사회학적 사명이라고 생각한, 실증주의에 대해 벌인 화해 불가능한 전쟁인 소위 실증주의논쟁을 비판의 양쪽 가닥을 요약함으로써 끝맺는다. 118

 

문화비판의 이해득실

 

이데올로기라는 낡고 진부한 개념을 담론, 실천, 에피스테메와 같은 일련의 새로운 용어나 관념으로 대체하려는 시도 또한 비슷한 처지에 있음을 본다. 나 자신의 입장은 항상, 사람들이 하부구조/상부구조의 관념을 독자적인 이론으로 파악하기보다는 어떤 한 문제에 붙여진 이름으로서 그 해결은 항상 개인적이고 특수한 이해방식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파악할 때 모든 상황은 완전히 달라지리라는 것이다.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보통 집과 집의 기초를 연상시키지만 사실은 철도 분야에서 쓰여온 전문용어인 듯하다. 여기서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각각 수송수단과 선로를 가리키는 것 같은데 이러한 관계는 우리를 갑자기 전혀 다른 그림, 즉 이데올로기와 그의 효과가 그려져 있는 그림 속으로 밀어넣는다. 127

 

물질적인 현실을 교환가치의 세계라고 부르는 데 반해 이러한 교환가치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을 문화라고 부른다면 기존의 상태가 존속되는 한 그러한 거부가 가상에 불과한 것은 틀림없지만, 이러한 문화의 허위가 상품세계의 허위를 고발하는 교정역할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문화가 지금까지 실패해왔다는 사실이 그러한 실패를 부추기는 것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130

 

방법론적인 측면에서 결론 - ‘문화비판뿐 아니라 사유 일반에 해당되는 을 내린다면 우리는 문화(이념으로서나 현상형식으로서나)를 죽이지 않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문화를 가차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둘 중 어느 한 쪽에 결정적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문화뿐 아니라 철학에도 해당된다. 130

 

 

볕뉘. 

 

1. 변증법적 글쓰기라는 것이 있다면 서로 부딪치는 딜레마와 모순을 바닥까지 치열하고 치밀하게 드러내보이는 것이자 그 구도가 보여주지 못한 이면의 통찰을 확인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삶의 편린같은 것이 섬찟하게 스며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목구멍에 걸린 가시같이 삶과 기존 관념은 찔려 어쩌지도 못하는 상태로 존재에 대한 물음이자, 다른 길로 접어들 수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와 실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끊임없이 새로워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2. 존엄에 대해서 남이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는가?의 세가지 질문을 하고 따진다고 하자. 필연적으로 삶의 디테일을 살펴보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드러낸다고 객관적인 사실로 끝날 수 있을까?

 

존재의 격차를 두게되자마자 그 존엄은 흔들린다. 빠져나오더라도 다시 사회경제적맥락으로 잠입해들어가야 한다. '나'는 균질하지도 균일하지도 않는다. 그러면 질문은 다시 다른 차원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