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쓸고없기를

 

...사과 쪼개듯 시간을 반토막 낼 줄 아는

유일한 칼날이 실은 돌이었다

필요할 땐 주먹처럼 쥐라던 돌이었다....

 

...돌의 쓰임을 두고 머리를 맞대던 순간이

그러고 보면 사랑이었다....

 

엊그제 곡우

 

....뼈가 내는 아작 소리를 아삭하게 묘사해야...

 

들고나는 사랑의 패턴

...피동형

사랑도 일종의 달리자는 이야기

스타트가 있고 라스트가 있다는 이야기

혼자 뛸 때도 있고 둘이 뛸 때도 있는데

셋이 뛸 때 더 박진감이 넘친다는 이야기.....

 

....같은 팀인 우리

팀워크를 자랑해야 하는 우리

나 받아서 너 주고

너 받아서 쟤 줘야 하는 룰

내가 쟤 좋다고

너 제치고 쟤한테 달려가면

그야말로 코미디

실격이야 당연한 수순이라 치더라도......

 

시집 세계의 파편들

 

..문제는 솔직함이 아니라 유치함 같았다

...나는 병신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병신이라고 내가 골백번도 더 말하지 않았수 달린 입으로 말은 바로 하랬다고 제발 그 같은좀 빼시구랴

..병신 같은 년이란 욕을 먹었다 그보다 더 정확할 수는 없어서 배시시 웃었다

..보도블록 틈새에 낀 그것이 그렇게 반짝일 줄은 몰랐다.

 

시를 재는 열두 시간

 

..매트리스 광고나 돌려 보는 밤 이밤에

..때로는 탁자 밑에 눌린 코딱지를 소재로 시를 쓰는 새벽 이 새벽에

..여성지용 권두에세이에나 실릴 법한 시를 쓰는 아침 이 아침에

..짜고도 다니까 매운불닭맛 삼각김밥 사러 편의점 기어나가는 정오 이 정오에

 

냄새란 유행에 뒤떨어지는 것

 

..노랗게 쩌들어 있었다

노랑이 쩌들면 누런 더러움인데

쪄들어 깨끗해지는 건 노란 옥수수라

 

..레모나 빈 껍데기 그 끄트머리에

뾰족한 압침처럼 박혀 있을 냄새여

 

밤에 뜨는 여인들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

가족은 탄생할 수 없다

 

..남의 가정은 다 안락해 보이고

창문 저 안

나의 가정은 다 안락사로 보이듯

 

..몹시 문란한지 않으면

사랑은 탄생할 수 없다

 

..몹시 문란하지 않아면

이해는 탄생할 수 없다

 

..몹시 문란하지 않으면

국군 장교의 아내가 될 수 없었던

 

..쌍방울 모시메리를 단돈

천원에 파는

할머니가 있었다

꼭 엄마 같은 그림자다

 

보기가 아니라 비기가 싫다는 말

 

..이는 포즈를 나도 한 방 먹어본 적이 있어서 좀 아는데 치욕은 역사책만의 고유명사가 아닌 게 분명하고 여기까지 읽고도 누가 더 밉상인지 분간할 줄 모른다면 있지, 그게 나는 우리가 헤어진 이유라고 봐.

 

삼합

 

..누가 시켜서 하는 아낌이 아니니

이것이 화두인가 하였다

 

대서 데서

 

이 여름에 물이

이 얼음으로 얼어붙기까지

얼마나 이를 악물었을지

얼음을 깨물어보면 안다

 

이 여름에 얼음이

이 맹물로 짠맛을 낸다면

얼마나 땀을 삼켰을지

얼음에 혀를 대보면 안다...

 

자기는 너를 읽는다

 

..우리 서로 모르면서도 실은 척 보면 또 알잖아요

덜 익었으니 좀 두고 보자는 식은 그러니까...

 

상강

 

..생강

모든 열매 중에

가장 착하게 똑 부러져버릴 줄 아는

생각

 

근데 그녀는 했다

 

양망이라 쓰고 망양으로 읽기까지

메마르고 매도될 수밖에 없는 그것

사랑이라

오월의 바람이 있어 사랑은

사랑이 멀리 있어 슬픈 그것

 

 

 

 

 

 

 

 

 

 

 

 

 

 

 

볕뉘. 시집의 행간을 다시 들여다본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것들이 스며든다. 눈치채지 못한 일상들이 복리이자로 가끔 덥치는 것처럼 말이다. 이동하는 중에 최승자시집을 본다. 삶의 끝, 아니 삶의 끗을 숨기듯 너울질하는 모습은 무당의 요령소리를 너머선다. 보다나니 우울도 가시고 선명하게 눈을 찌른다. 전율에 가깝거나 신기에 가깝다. 시의 줄타기도 일상의 춤사위도.  이미 다 죽어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시 편, 깨진 파편들이 걸린다. 미처 읽지 못한 김소연시집도 챙겨본다. 다양하고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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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꽃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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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가 되는 고통

 

왜 하필 벌레는

여기를 갉아 먹었을까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들고 네가

질문을 만든다

 

나뭇잎 구멍에 눈을 대고

나는 하늘을 바라본다

나뭇잎 한 장에서 격투의 내력이 읽힌다

 

벌레에겐 그게 긍지였겠지

거긴 나뭇잎의 궁지였으니까

서로의 흉터에서 사는 우리처럼

 

그래서 우리는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준다

 

물조리개를 들 때에는 어김없이

산타클로스의 표정을 짓는다

 

보여요? 벌레들이 전부 선물이었으면 좋겠어요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시간이 여위어간다

아픔이 유순해진다

내가 알던 흉터들이 짙어진다

 

초록 옆에 파랑이 있다면

무지개,라고 말하듯이

 

파랑 옆에 보라가 있다면

,이라고 말해야 한다

 

행복보다 더 행복한 걸 궁지라고 부르는 시간

신비보다 더 신비한 걸 흉터라고 부르는 시간

벌레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나뭇잎 하나를 주워 든 네게서

새잎이 나고 새잎이 난다

 

 

생일

 

흰쌀이 익어 밥이 되는 기적을 기다린다

식기를 가지런히 엎어 두고

물기를 마르길 기다리듯이

 

푸릇한 것들의 꼭지를 따서 찬물에 헹군다

비릿한 것들의 상처를 벌려 내장을 꺼낸다

 

이 방은 대합실의 구조를 갖고 있다

한 정거장 한 정거장 파리함과 피곤함을 지나쳐 온 사람이

기다란 의자에 기다랗게 누워 구조를 완성한다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안식과 평화를 냉장고에서 꺼내 아침상을 차린다

 

나쁜 일들을 쓰다듬어주던

크나큰 두 손이 지붕 위에서 퍼드덕거릴 때

햇살이 집안을 만건곤하게 비출 때

 

미역이 제 몸을 부풀려 국물을 만드는 기적을

간장 냄새와 참기름 냄새가 돕고 있다

 

살점을 떼어낸 듯한 묵상이

눈물처럼 밥상에 뚝뚝 떨어진다

쪼그리고 앉아 무릎을 모은다

 

 

누군가 곁에서 자꾸 질문을 던진다

 

살구나무 아래 농익은 살구가 떨어져 뒹굴 듯이

내가 서 있는 자리에 너무 많은 질문들이

도착해 있다

 

다른 꽃이 피었던 자리에서 피는 꽃

다른 사람이 죽었던 자리에서 사는 한가족

몇 사람을 더 견디려고 몇 사람이 되어 살아간다

 

우리는 같은 사람을 나누어 가진 적이 있다

같은 슬픔을 자주 그리워한다

 

내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마다

나를 당신이라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지난 연인들이 자꾸 나타나

자기 이야기를 겹쳐 쓰려 할 때마다

우리는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

 

당신은 알라의 얼굴에서

예수의 표정이 묻어 나는 걸 보았다고 했다

내 걸음걸이에서 이제는

당신이 묻어 나오는 걸 아느냐고

당신에게 물어보았다

 

우리는

두 개의 바다가 만나는 해안에

도착해 있다

 

늙은 아기가 햇볕에 나와 앉아 바다를 보고 있다

바다가 질문들을 한없이 밀어내고 있다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장소뿐이었지만

어느새 우리들 기억이 달라져 있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강과 나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

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

, 햇볕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

줄게,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

서 네가 존경하던 큰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

었다고 말해줄게,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게,

나는 밥을 끊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 끊어버렸다고 말

해줄게,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

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

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

에 담그고, 퍼덕이는 커다란 물고기가 할아버지의 낚

시 항아리에서 쉴 새 없이 퍼덕이고, 이 커다란 물고

기를 굽기 위해 조금 후엔 장작을 피울 거라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이 나 있는 이

곳에서, 구불구불한 길에 사는 구불구불한 사람들과

하루 종일 산책을 했다고 말해줄게, 큰 나무 그늘 아

래 작은 나무, 가느다란 나무다리 아래 가느다란 나

무 교각들이 간신히 쉬고 있다고,

 

멀리서 한 사람이 반찬을 담은 쟁반을 들고 살금살

금 걸어오고 있다고 말해줄게, 물고기는 바삭바삭하

다고, 근사한 냄새가 난다고, 풍겨 온다고, 출렁인다

, 통증처럼 배가 고프다고, 준비가 다 됐다고, 지금

이라고, 말해줄게

 

이불의 불면증

 

너는 마치

이불을 재워주기 위해 잠이 드는 사람 같아

 

네 품에 안겨서

초록색 이불이 조금씩 몸을 뒤척이네

 

품었던 것의

품고 있던 독을 고스란히

자기 육체로 옮겨오는 사람처럼

먼 곳을 생각하는 자의 표정을 짓지

 

독충처럼

꼬리 끝이나 대가리를 곧추세우는 대신

언제고 입꼬리를 올리지

 

이불을 재우는 사람처럼

너의 잠은 동그랗네

크고 작은 동그라미들이 비눗방울처럼

네 언저리에 둥둥 떠오르네

 

너는 모로 누워

부탁해요, 제발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모으고

곤히 잠들어 있네

 

이것은 꿈이 아니지

말하지 않을 땐 마지막 남은 너의 고백 같아서

부탁으로 나는 그걸 알아듣지

 

이불은 에메랄드 사원의 와불처럼 누워

네 살결을 만지고 있네

네 살결이 먼저 선잠에서 깨어나고 있네

 

걸리버

 

창문 모서리에

은빛 서리가 끼는 아침과

목련이 녹아 흐르는 따사로운 오후

사이를

 

도무지 묶이지 않는

너무 먼 차이를

 

맨 처음

일교차라 이름 붙인 사람을

사랑한다

 

빈 빨랫줄에

대롱대롱 매달린 빗방울의 마음으로

 

+

커피를 따는 케냐 아가씨의 검은 손과

모닝커피를 내리는 나의 검은 그림자

사이를

 

다다를 수 없는 너무 먼 대륙을 건넜던

아랍 상인의 검은 슬리퍼를

사랑한다

 

세계지도를 맨 처음 들여다보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

적어놓은 채로 죽은 어떤 시인의 문장과

오래 살아 이런 꼴을 겪는다는 늙은 아버지의 푸념

사이를

 

달리기 선수처럼

아침저녁으로 왕복하는 한 사람을

사랑한다

 

내가 부친 편지가 돌아와

내 손에서 다시 읽히는

마음으로

 

+

 

출구 없는 삶에

문을 그려 넣는 마음이었을

도처의 소리 소문 없는 죽음들을

 

사랑한다

 

계절을 잃어버린 계절에 피는

느닷없는 꽃망울을 바라보는 마음으로

 

여행자

 

아무도 살지 않던 땅으로 간 사람이 있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비둘기를 키우던 사람이 있었다

 

그 창문으로 나는 지금 바깥을 내다본다

이토록 난해한 지형을 가장 쉽게 이해한 사람이

가장 오래 서 있었을 자리에 서서

 

우주 어딘가

사람이 살 수 없는 별에서 시를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가축을 도살하고 고기를 굽는 생활처럼 태연하게

 

잘 지냅니까,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할 줄 아는 말이 거의 없는 낯선 땅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건 잠깐의 반가움과

오랜 두려움뿐이다

 

두려움에 집중하다 보면

지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지배하고 싶었던 사람이

실은 자신의 피폐를 통역하려 했다는 것을

파리처럼 기웃거리는 낙관을 내쫓으면서

나는 알게 된다

 

아파요, 살고 싶어요, 감기약이 필요해요.

살고 싶어서 더러워진 사람이 나는 되기로 한다

 

더러워진 채로 잠드는 발과

더려워진 채로 악수를 하는 손만을

돌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했던 사람이

불구가 되어간 곳을 유적지라 부른다

커다란 석상에 표정을 새기던 노예들은

무언가를 알아도 안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 누구도

조롱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내기로 한다

위험해, 조심해, 괜찮아,

하루에 한가지씩만 다독이는 사람이 되기로 한다

아무도 살아남지 않은 땅에서 사는 사람이 있다

살 수 없는 장소에서도 살 수 있게 된 사람이 있다

집을 짓고 창을 내고 청포도를 키우는 사람이 있다

 

 

볕뉘. 시집을 읽고나니, 비행기표가 숨어있다. 0207, 1955기 이름, 탑승구, 탑승위치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다. 시집을 아껴두다 이제사 이렇게 동그라미를 쳐둔다.  지난 해 흐릿한 기억이 선명하게 이륙한다. 찬연한 슬픔을 가득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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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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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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맘빚

맘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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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소리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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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힘들여
절반을
툭 자른 사과 반쪽


꿀꺽
삼켜버린
쓴 한약 한 사발


숙취로
토하다 토하다
올라오는 노란 생목


차고 차
이젠
흘려보내야 하는 장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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