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성육체를 부여받은 나, 그리하여 그와 반대로 정신이나 이성만 또는 이념만붙잡으려다 초라하게 뒤를 돌아다보며 한숨짓는 우리를 뒤돌아보게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우리고 하여금 인간의 성숙과 사회의 성숙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이와 관련해 누스바움의 연민과 상상력의 정치학존재초인’, ‘탈주등의 등정의 철학이나 온갖 논리와 달리 우리 삶속으로 하강하면서 훌륭한 삶’, ‘살 만한 세상이라는 고전 철학의 문제를 되묻는다.

그렇게 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우연인지 필연인지 인정과 욕망’, ‘연민’, ‘사랑의 등정 3부로 구성된 이 책이 구조상 감정에 대한 일종의 순수 이론’, ‘실천 이론그리고 판단력 비판으로 칸트의 3부작과 너무나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독자들도 그렇게 칸트에 빗대 보면 이 책의 위상과 논지의 핵심 줄거리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물구나무 선 칸트이다. 즉 칸트의 감성을 누스바움의 감정으로 바꾼 다음 칸트의 주장을 거꾸로 세우면 이 책의 구조가 얼추 드러날 것이다. ‘The Intelligence of Emotions’라는 부제만 보아도 금방 확인할 수 있듯이 감정의 지력이니 말이다.

누스바움은 마치 칸트가 중세에 신학의 시녀이던 철학을 만학의 여왕으로 복권시키듯 철학천덕꾸러기였던 감정을 우리 세대의 민주주의와 정치를 위한 만학의 토대로 복권시키려고 한다.

조금 단순화하자면, ‘감정적 동물인 인간의 감정은 일체의 관심을 가진 인지, ‘목적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합목적성이다. 그리하여 예를 들어 최근 한국에서도 큰 관심을 끌고 있는 스피노자를 그녀의 독법에 넣어 읽어보면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을 궁극적 목표로 하는 그의 철학 같은 지성중심주의의 한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지성에 대한 그의 규정에 따르면 동물과 유아, 즉 대표적인 인간적사회적 약자들은 지성은 물론 감정또한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신에 대한 사랑과도 무관하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스바움의 논지를 빌어 이렇게 되물을 수 있지 않을까? 왜 신을 꼭 지적으로만 사랑해야 하냐고.

감정을 이런 식으로, 즉 소중함[가치]의 지각에 대한 지적 반응으로 보려는 결정에 따라 많은 것이 좌우된다. 감정이 지력과 분별력으로 가득 차 있다고, 자체 안에 가치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보자. 그러면 예컨대 윤리적 판단에 대한 설명에서 쉽게 감정을 도외시할 수 없을 것이다. 철학사에서는 너무 자주 그렇게 해왔지만 말이다. 그리고 감정을 윤리를 추론하기 위한 체계의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해야 할 것이다. 도덕은 공평무사한 지력에 의해[서만] 파악되어야 할 원리의 체계로 그리고 감정은 원리에 따라 행동하려는 선택을 지지하거나 뒤집어엎는 동기부여로 보는 대신에 말이다. 일단 감정이 내용안에 참/거짓인 판단, 그리고 윤리적 선택으로 이끄는 좋은/나쁜 지침을 포함하고 있다고 인정해보자. 그러면 아마 앞의 추론 체계에서 감정을 뺄 수는 없을 것이다.

감정 속에는 우리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외적 대상이 나의 행복에 아주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는 판단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그렇게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이 불안하게 외적 대상들의 세계로 투영된다고 해보자. 그럴 경우 사랑, 두려움, 분노 등에 대해 제대로 말할 수 있으려면 그러한 애착에 대해 상상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즉 그러한 애착의 즐거움과 공포에 대해, 대상에 강렬하고 심지어 강박적으로 몰입하는 이유에 대해 말이다.

그런데 만약 인지적/가치평가적 감정 이론이 맞다면 그러한 주장은 특별한 비중을 갖게 된다. 즉 그러한 주장은 만약 감정을 빼면 단지 감정적 사유에 부수된 심리적 부속물이 아니라 윤리적 사유 자체의 일부가 빠져나갈 것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감정은 단지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는 생명체의 심리적 메커니즘을 작동시키는 연료가 아니라 이 생명체의 생각 자체의 일부, 고도로 복합적이며 복잡한 일부이다.

우리 주장대로 감정을 단지 지성의 버팀목이나 지주보다는 인간 지성의 본질적 요소로 생각해보자. 그러면 정치 문화에서 감정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조건을 촉진해야 할 특히 강력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견해안에는 감정의 발달이 없으면 우리가 정치적 생명체로 제대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일부가 사라지리라는 것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 논의와 관련해 또한 이 지점에서 감정적 삶의 지형학을 한층 더 자세하게 그려 보이는 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중요한 구분에 대해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과 욕구, 감정과 기분, 감정과 행동의 동기의 구분이 그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오류였음을 알 수 있다. –감정에 대한 성인의 경험을 구성하는 상념의 지형학적 융기는 삶에서 훨씬 더 이전에 놓인 토대들을, 즉 애정, 욕구, 기쁨, 분노의 경험을 포함하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대상에 대한 후일의 지각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성년의 애착 관계는 유아기의 애증의 흔적을 담는다.

실제로 나의 설명은 음악적 경험에 대한 분석을 괴롭혀온 딜레마를 헤치고 나갈 수 있도록 해준다. 여기서는 말러의 음악 및 자신의 음악에 대한 정곡을 콕 찌르는 말러의 진술이 나의 주장을 인도한다. 내가 제시하는 견해가 슬픔, 사랑, 죄의식, 무력감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려는 복잡한 사례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말러의 <죽은 아이를 기리는 노래>에 들어 있는 두 곡에 대한 해석을 제시해보았다.

먼저 감정은 우리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며 자족성을 결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감정은 우리가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사건에 취약함을 드러낸다. 따라서 훌륭한 삶에 대한 개념 속에 이처럼 인간의 삶에서 벌어지는 온갖 사건에 대한 대규모의 통제 불가능성을 포함시키면 인간의 주체성 자체를 너무 깊이 손상시킨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감정은 나 자신의 목표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세상을 철저하게 불편부당한 관점보다는 내가 세운 목표와 계획이라는 관점에서 표상한다. 더 나아가 감정은 극히 긴밀하고 친밀한 애착 관계 속에서 발전한다. 따라서 나의 역사적[내력적] 설명은 어린 시절의, 아주 특수한 애착이 후일의 대상관계에 그림자를 드리움을 암시한다.

세 번째로, 감정은 대상에 대한 애증병존적 태도ambivalence에 의해 특징지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4장에서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즉 어린 시절의 대상관계의 본성 자체 속에는 사랑과 분노가 도덕을 전복하는 방식으로 결합된 채 숨어 있으며, 그것은 생존하고 훌륭한 삶을 사려면 타자가 필요하지만 그의 움직임을 나로서는 전혀 어쩌지 못한다는 생각에서 직접 솟아난다.

따라서 감정은 실제로는 내가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며 자족성을 결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다.

인지심리학 분야에서는 무력감과 제어력에 대한 연구, 감정을 생명체의 번영과 관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가늠으로 바라보는 연구 등이 그렇다. 인류학에서는 감정을 가치평가적인 사회적 구성물로 바라보는 연구가 있다. 그리고 정신분석에서는 어린 시절의 대상관계에 대한 연구 그리고 그러한 관계가 가진 가치평가적 차원들에 대한 연구가 있다.

이 책 전체에 걸쳐 우리는 슬픔, 두려움, 기쁨, 희망, 분노, 감사, 미움, 질투, 질시, 동정, 죄의식을 몇몇 종으로 하는 유를 우리의 설명 대상으로 삼을 생각이다. 이 군에 속한 것들은 이 점은 2장에서 논의될 것이다굶주림이나 갈증 같은 육체적 욕구나 짜증과 내인성 울병처럼 대상 없는 기분과는 철저하게 구분된다.

무엇보다 감정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다. 대상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의 두려움, 희망, 나의 궁극적 슬픔은 모두 엄마에 관한 것으로, 당신과 당신의 삶을 대상으로 한다. 바람도 무엇인가에 부딪히고 혈류 또한 무엇인가를 마구 두드릴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 아니다. 두려움으로서의 나의 두려움 자체의 정체성은 어떤 대상을 갖고 있는 것에 의존한다.

두 번째로, 대상은 지향적 대상이다. 즉 대상은 그것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가진 사람이 바라보거나 해석하는 바대로 감정 속에 나타난다. 감정은 과녁을 향해 화살을 쏠 때처럼 단지 겨냥한 다음 줄을 놓아버린다는 의미에서 대상에 관한 것이 아니다.

세 번째로, 감정은 대상을 보는 방식뿐만 아니라 대상에 대한 종종 아주 복잡한믿음을 구현한다. 두려움을 가지려면 이미 아리스토텔레스가 간파한 대로나쁜 일이 임박했다고 믿어야 한다.

하지만 감정이 이 특수한 엄마에게 중점을 두도록 만드는 것은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놀라운 사람과 엄마들 중에서도 당신이 나의 엄마, 나의 삶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감정은 국소화된다. 즉 감정은 내 삶 속에 자리를 잡고 앉아, 우주 전체에서의 빛과 어둠의 일반적 분배보다는 내 맘속에서 빛과 어둠이 왔다 갔다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다른 한편 그것들은 다른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나의 행위로서, 나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으로서 소중하게 평가된다.

신스토아학파는 슬픔은 가치평가적이고 행복주의적인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하다고 주장한다. 즉 당사자가 세우고 있는 목표와 목적 중의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것과 관련된다고. 우리는 아직 이 명제()를 감정과 등치시키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로 미루어볼 때 그러한 판단 자체가 감정의 격동일 수 있는 것은 얼마든지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이 지점에서 앞서 묘사한 것과 같은 종류의 판단은 감정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충분한 구성요소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판단 자체도 완전히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함 직하다고 주장해왔기 때문이다. 앞절에서의 논의는 그러한 충분조건을 내적인 것으로 바라보아야 함을 암시한다. 즉 자체가 다른 부분이 존재할 수 있도록 확실히 해주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구성요소로 말이다.

인지하는 것과 마음의 격동은 나의 하나의 동일한 부분에, 내가 세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부분에 속한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지속적으로 그러한 명제를 받아들이거나 그에 동의하는 것이다. 감정은 정확히 이러한 이중적 성격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즉 우리는 처음에는 어떤 명제에 동의하거나 인정하며, 그런 다음 우리의 인지적 구성의 일부로 그것이 존재하게 된다. 슬픔의 경우 이미 일어난 일로부터 거리를 두거나 부정하려는 것이 인간의 성향인 이상 해당되는 명제가 확실하게 자리 잡기 전에 여러 차례 받아들이는 행위를 거쳐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감정의 삶의 일부이다. 마치 먼저 수용한 다음 뒤이어 유지해 가는 것이 모든 판단의 삶의 일부이듯이 말이다.

이 때문에 크리시포스의 슬픔은 (다른 감정과 함께) 나의 삶의 중요한 일부가 사라졌다는 판단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속상해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판단을 포함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슬픔은 자신의 가치평가가 참임을 주장하는 셈이다. 그것은 대상이 진정한 가치가 있음을 주장하며, 속상해하는 것은 단순한 변덕이 아니라 진정 소중한 어떤 것에 대한 반응이라고 말한다. 감정은 또한 그러한 의미에서도 참 또는 틀린 것이 될 수 있다.

종종 좋음에 대한 생각과 내가 함께 살아온 것들에 대한 생각은 무수한 방식으로 얼기설기 얽히며, 이 둘을 분리시키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들 것이다. 고대의 행복주의는 이러한 복잡한 사태에 대해 아무 한 말도 없다.

감정은 세상을 나의 관점에서 본다. 이 분이 내 엄마라는 사실은 단지 세상에 대한 다른 어떤 사실과 같은 게 아니다. 바로 그것이 전체 상황의 지형학의 구조를 결정하며, 이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는 감정을 포착할 수 없다.

그러한 경험 자체는 그러한 내용 주변에 떼 지어 몰려드는 기억의 폭풍과 구체적인 지각을 포함한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 안에 존재하는 것 이상을 덧붙인다. 따라서 어떤 감정의 경험은 인지적 내용으로 가득하게 되거나 빽빽하게 채워진다. 명제적 태도를 가진 견해로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리고 아마 그렇게 빽빽하게 채워지는 것이 항상은 아니지만 통상은 슬픔 같은 감정의 경험에 필수적 특징이라는 생각은 정확하다.

이리하여 내가 겪은 슬픔의 많은 측면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국소화된 성격을 가지며, 강렬하며, 상상을 통해 대상에 머문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일단 내가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것에 대한 애착을 형성하고 나면, 일단 내가 잘 사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개념과 관련해 이러한 부분을 만들고 나면 그것에 대한 배경적인 종류의 감정 내 견해에 따르면 그것의 어마어마한 소중함을 인정하는 판단을 갖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삶을 일종의 직조물로 짜는 가운데서도 지속되며, 행위에 대한 설명에 핵심적이다.

실제로 배경적 감정의 핵심적 형태는 내가 잘 사는 것에 아주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는 어떤 것이나 사람에 대한 사랑 또는 애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어떤 것이나 사람의 안녕이 완전히 나의 통제 하에 있지 않다는 요지의 어떤 일반적 믿음과 관련해서 말이다.

배경적 감정은 상처이며, 상황적 감정은 상처 속에 파고든 세상의 칼이다.

감정의 지향성이 나타내는 정교함과 명백함의 수준은 상이하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일부 감정은 심지어 성인에게서도 대상에 대한 언어 이전의 유아의 아주 오래된 본능적 견해를 간직하고 있을 수 있다. 따라서 모든 감정이 언어적으로 정식화 가능한 내용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데, 프루스트는 그것을 감동적으로 논한다. 상실 이후에 우리는 삶의 직조물을 다시 짜고, 우리 목표와 열망을 중심적으로 규정했던 생각들의 시제가 바뀔 때 그만큼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변동 자체가 투쟁 없이는 일어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것은 자아의 상실이며, 자아는 망각과 진정을 자신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상상()은 자체가 고도로 구분적인 지향적/인지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명제적 내용에 외재적인 인지적 활동은 감정의 변화에서 역동적 역할을 하며 명제적 내용이 변동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임을 암시한다.

그럴 때는 삶의 우발적 사건 자체가 어떤 대상에 대한 애착과 결합해 애착을 가진 사람을 이렇게 만들 것이다. 즉 사랑하는 대상을 손에 넣게 될 때는 강렬한 즐거움 속으로, 그것이 위협받을 때는 두려움 속으로, 그러한 대상에 파국이 밀어닥칠 때는 슬픔 속으로 내몰 것이다. 타인이 대상에게 어떤 좋은 일을 해준다면(또는 다른 식으로 표현해, 해당되는 사람이 좋게 되는 것을 막는 취약한 측면을 바꿔준다면) 고마움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해를 끼치면 분노를 느낄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처럼 소중한 대상을 갖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면 질투를 느낄 것이다. 이 대상과 관련해 경쟁자가 된다면 질투를 느낄 것이다. 일단 장차 문제의 빌미가 될지도 모르는 것을 갖게 된다면 모든 범위의 감정을 짊어지게 될 것이다. 또는 그렇게 보인다.

간단히 말해 감정을 기준으로 바라본 세계의 지형학은 두 가지 두드러진 특징을 갖고 있다. 통제 불가능한 움직임, 그리고 높이와 깊이의 차이들이 그것이다. 다시 한 번 샤를뤼스에 대한 프루스트의 묘사를 생각해보라. 사랑에 빠진 샤를뤼스의 세계는 산악과 계곡으로 가득 찬 풍경에 비교되는데, 마치 상념의 지형학적 융기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차이가 나게 된 풍경은 아무런 애착도 갖지 않았던 이전의 삶의 평탄한 벌판과 대조를 이룬다. 거기서는 어떤 생각도 급박하거나 중요한 것으로 우뚝 솟거나 어떤 가치평가도 다른 모든 것 위로 돌출하지 않았다.

감정과 욕구, 감정과 분위기, 감정과 행동 욕구 사이의 구분이 그것이다.

즉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믿음은 인간, , 쥐 등 온갖 다양한 동물 사이에서 우울증적 감정을 낳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우울증적 감정은 복잡한 가치평가를 포함해 인지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학습 능력부터 급사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고 위험천만한 행동적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셀리그먼의 이론은 인지적/가치평가적 관점을 옹호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무력감 및 상실과 관련된 특수한 내용 때문에도 인간과 동물 사이의 연속성에 대한 우리 설명에 중요하다.

1) 시간적 참조 사태 또는 사건 또는 행동과 관련해 과거, 현재, 미래라는 방향 설정에 의해. 2) 자야-타자 구분에 의해. –우리는 사건을 자신에게 좋은 것/나쁜 것, 따라서 타자에게 좋은 것/나쁜 것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먼저 3) 좋은 것-나쁜 것이라는 구분에 의해. 따라서 예를 들어 타자들의 현재의 운과 관련된 감정으로는 주요한 네 점주를 구분할 수 있다. a) 타자에게 좋은 사건을 좋은 것으로 보는 감정. –축하하고 공감하며 즐거워하는 감정이 그것이다. b) 타자에게 좋은 사건을 나쁜 것으로 보는 감정. –질투하고 앙갚음하려는 감정. c) 타자에게 나쁜 사건을 나쁜 것으로 보는 감정. –측은지심 또는 연민. d) 타자에게 나쁜 것을 좋은 것으로 보는 감정. –앙심을 품고 고소해하기.

인지는 생각하고 있는 것에 최소한의 자기-연루 또는 적은 판돈만 걸려 있을 때는 상대적으로 차가운 것일 수 있다. 인지는 또한 뜨겁거나 감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

오틀리는 맨들러가 선구적으로 제시한 생각을 수정하고 발달시키는데, 그에 따르면 –‘가늠뿐만 아니라– ‘갈등방해가 감정에 대한 분석에 핵심적이다. 감정은 행위 주체의 중요한 목표와 관련된 환경에 대한 가늠이라는 라자루스의 기본적 생각에 오틀리는 인지는 그러한 목표의 지위에서의 일정한 변화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요구를 덧붙인다. “감정은 어떤 심리적 경향이 정지되거나 부드럽게 흘러가던 행위가 방해받을 때 발생한다.” 종종 그는 가늠에서의 변화를 촉발하려면 세계로부터 무엇인가가 개입해야 한다는 말로 그의 입장을 요약한다. 그는 종종 가늠에서의 변화는 생명체 자체에 의해 어떤 순간에든 개시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러한 견해는 최종적으로 이렇게 진술될 수 있다. 즉 감정은 어떤 중요한 목표를 향한 진전 가능성의 변화에 대한 인식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설명은 인간이 아닌 동물의 감정에 대해서는 불완전하지만 분명히 인간보다는 동물에 대해 훨씬 더 완전한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동물, 특히 시간의 지속에 대한 감각을 결여한 동물은 인간보다 배경적 감정은 훨씬 덜, 상황적 감정은 더 많이 가졌을 수 있다.

특히 그는 습관화된 화들짝 놀람은 유기체를 변화시키며, 그리하여 뒤바꾸기가 아주 어려움을 보여준다. 일단 동물이 화들짝 놀래키는 자극에 의해 조건반사화되면 오직 아주 오랜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재조건반사화에 의해서만 다시 조건반사에서 풀려나올 수 있다. 이러한 연구 결과들은 궁극적으로 감정적 습관의 집요함, 그리고 변화에 대한 끈질긴 저항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는 항상 아주 조심스러웠으며, 항상 모든 장면을 냉정하고 무관심한 구경꾼으로서 묘사했다.. 본인이 주인공이었지만 자신이 고통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 그는 삶에도 그와 동일한 중립적 어조로 접근했던 것 같다.”

먼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내용을 강력하게 주장해야 한다. 즉 인지적 가늠은 모두 성찰적인 자기의식의 대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동물(그리고 인간)은 자기의식 없이도 위협적인 것을 그렇지 않은 것과, 달가운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대부분까지는 아니더라도 많은 동물은 의식적 인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것을 갖고 있다. 즉 동물에게는 세계와 비슷한 어떤 것이 존재하며, 세계를 지향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동물의 행동에 대한 설명에서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논한 일부 동물은 도무지 자기의식이 없지만 감정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기의식을 갖고 있지만 항상 그것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위협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있다. 모든 경우에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정식화하지 않고도 또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를 성찰적으로 면밀히 따져보지 않고도 말이다.

어쨌든 그러한 절차가 인간의 사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배경적 감정과 상황적 감정 사이의 구분을 낳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동물도 일반적 사유 능력을 갖고 있고 이를 일시적으로 확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만큼 두려움, 사랑, 분노 등의 배경적 감정이 동물들이 하고 있는 것을 설명하는 데서 적어도 일정한 역할을 한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어떤 것이 중대한 의미가 있다거나 중요하다는 생각이 드러나는 인지적 활동이나 어떤 것을 그렇게 보는 방식은 많다. 즉 회화적 방식으로 상상하기, 음악적 방식으로 상상하기, 춤과 관련해 몸동작을 이용한 형태로 상상하기 등. 이것은 모두 언어적 상징체계로 환원 가능하거나 곧바로 번역 가능하지 않으며 또한 언어적 재현 방식이 가장 복잡하거나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를 갖고 있다고 가정해서도 안 된다.

따라서 욕구는 대상에 고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치에 대해 무관심하다. 감정은 대상의 가치나 중요성에 대한 생각을 포함한다. 그것은 자체에 내재적이다. 그리고 실체로 가치에 대한 이 생각은 대상을 특징짓기 위해 감정이 사용하는 핵심적 방식이다.

감정에 핵심적인 것은 대상에 투여되는 가치이다. 따라서 감정은 가치평가적이며 (어쨌든 어느 정도는) 대상에 대해 유연하다.

감정은 여전히 내가 가치 있고 중요한 것으로 파악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당혹감, 우울, 득의양양, 침착함 같은 기분은 이 특징을 결여하고 있다. 실제로 모호하거나 아주 일반적인 대상을 가진 감정을 기분과 구분하기는 매우 어렵다. 만약 어떤(모호한) 위험이 임박한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 내용이라면 일반적으로 무서움을 느낄 수 있으며, 그것이 모호한 대상을 가진 감정이 될 것이다. 심지어 그처럼 매우 일반적인 또는 모호한 대상이 부재하는 만큼 기분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삶이 진행되는 방식이나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해 아주 일반적인 즐거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일반적인 대상을 가진 감정이 될 것이다. 다른 한편 즐거움은 기분 같고 정말로 대상이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어떤 것에도 초점을 맞추지 않은 일종의 희열 같은 것이 그것이다.

간단히 말해 감정은 나의 목표와 그것의 지위에 대한 인정이다. 따라서 세계가 그러한 목표에 대해 내가 무엇을 하도록 만드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욕망은 모두 자신의 대상이 좋은 것이라는 지각을 포함할 것이다. 하지만 좋다고 하는 모든 지각이 직접 행동을 이끌어내는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행동을 믿음이나 판단 그리고 욕망이라는 두 가지 상이한 종류의 관점에서 설명하려는 경향을 보다 복잡하게 만들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감정은 판단이지만 불활성 판단이 아니다. 가치평가적 내용 때문에 다른 믿음과 달리 동기부여와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다른 한편, 목전의 상황을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끌어들이지 않기 때문에 또한 욕망과도 다르다.

하지만 감정의 사회적 가변성의 정도와 본질에 대해 일정한 인식을 갖고 있을 때만 감정을 제대로 직시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른 한 극단에는 인규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종종 마치 한 사회의 감정적 레퍼토리는 속속들이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듯이, 생물학이나 삶의 공통적인 상황에 의해 감정의 구성에 강요되는 제한은 거의 없는 듯이 말한다. 최소한 종종 그러한 공통성이 무엇인지에 대해 호기심이 결여된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보통 다른 사람 처지에 있는 게 어떤 것인지를 상상할 수 있으며, 아동기 초부터 지속적으로 이 능력의 획득 훈련을 받는다. 이 관점주의적 사유는 인간의 감정적도덕적 삶에 근본적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이 모든 인지적 차이는 자야 개념, 그리고 자아와 타자 간의 관계라는 개념에서 차이를 낳는다. 우리가 자신을 보는 방식은 우리의 타고난 인식적∙지각적∙통합적 능력에, 하지만 또한 시간성, 인과성에 대한 우리의 특수한 개념에 의존한다. 종과 민족 그리고 가족 관념에. 그리고 선, 정신 그리고 우주 개념에. 또 우리가 타자들과 별개임을 파악하는 정도, 자신을 타자와 동일한 범주의 성원으로 간주하는 정도에. 동물은 상대적으로 초보적인 자기-개념을 갖고 있을 수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는 전혀 갖고 있지 않다.

간단히 말해 윤리적∙사회적/정치적 피조물에게서 감정 자체는 윤리적이고 사회적/정치적이며, ‘무엇이 돌볼 만한 가치가 있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일부이다.

동물도 무리[사회]를 공유하는 다른 동물에 관한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는 감정을 명명하고 규범적 가치평가의 관행을 전달하며, 그것들은 성원들이 가질 감정의 내용 속에 들어간다. ‘사회적 구성이라는 명제는 가장 개연성 놓은 형태로 보자면그러한 관행들이 구체성을 띨 때 사회의 감정적 레퍼토리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명제이다.

러츠는 이팔루크 문화어업 경제에 기반한 섬 문화는 특히 자연의 위험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섬의 감정적 레퍼토리는 그러한 강박증에 대한 반응으로 발전해왔다고 주장하는데, 상당히 개연성이 있다.

예를 들어 핀란드인들은 숲, 엄청난 자연에 직면한 인간 개인의 왜소함과 하찮음에 대한 고독한 명상과 관련된 감정을 집중적으로 함양하며 그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처럼 특수한 경험을 위한 조건은 캘커타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부는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타인들과 긴밀하게 협력해야 하는 반면 다른 사람들은 자기 길을 가며 자기 주도적인 기획을 추구할 수 있다.

확실하게 자기 통제 하에 있지 않은 외적 재화를 더 놓이 평가할수록 두려움, 슬픔, 분노, 시기, 질투, 희망 같은 온갖 종류의 감정을 느낄 기회도 더 많다는 스토아학파의 생각은 정확한 것이었다(세네카 말을 빌리자면 만약 희망을 그칠 수 있다면 두려움도 그칠 수 있을 것이다”). 사회들은 명예, , 육체적 아름다움, 건강, 우정, 아이들, 정치권력의 중요성과 관련해 상이한 규범적 가르침을 갖고 있다. 따라서 분노, 질투, 두려움, 사랑, 슬픔에서 많은 차이를 가진다.

우리가 살펴본 감정적 변형의 다섯 가지 원천이 모두 규범적 판단의 이 차이들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 물질적 조건이 분노를 멀리하려는 우트쿠 족의 바람을, 사랑에 너무나 많은 초점을 두는 미국의 여유로운 삶을, 로망스보다는 연민을 위한 여지를 더 많이 가진 이팔루크 족의 삶을 형성한다. 형이상학적 믿음(또는 그것의 부재)이 슬픔에 대한 발리인들의 혐오를, 사랑을 구원과 연관시키는 미국인의 태도를 형성한다. 관행과 판에 박힌 일상의 일 또한 마찬가지인데, 예를 들어 엄마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이 눈을 응시하거나 로마인들은 당신의 사회적 환경에서는 관례였기 때문에 적을 위협하거나 한다. 언어도 아마 일정한 역할을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낭만적 사랑을 가리키는 특정한 용어의 부재, 그리고 파고라는 용어가 양육의 핵심적 경험과 관련해 가르쳐지고 충족되기를 요구한다는 사실은 이팔루크 족이 낭만적 사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미국적 믿음을 왜 공유하지 않는지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물론 한 문화 안의 모든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가, 여성과 남성은 어떠해야 하는가, 상이한 계급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사회적 규범은 사회 전체든 아니면 특수한 사회적 행위자에 대해서든 감정의 범주를 속속들이 형성한다.

마지막으로 감정의 어휘 자체도 사회에 따라 달라진다. 나는 모든 알려진 사회는 사랑, 두려움, 슬픔, 분노, 질투, 선망, 그리고 몇몇 다른 것 등 주요한 감정의 유형에서 몇 가지 변형태를 갖고 있다고 말해왔다. 하지만 심지어 커다란 유적 범주 수준에서도 우리는 문화 간의 완벽한 일대일 대응관계를 발견할 수 없는데, 문화들은 감정을 서로 구분하는 요소를 상이한 방식으로 조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팔루크족의 파고는 개인적 사랑뿐만 아니라 연민의 요소를 포함하는데, 이것의 핵심적인 생각은 양육적인 태도로 어떤 것을 필요로 하거나 취약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사랑을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는 높은 가치나 특별남과 연관시키는 문화들은 동일한 방식으로 이 두 감정을 결합시킬 수 없다. 그러한 한 내가 방금 커다란 유적 범주에 대해 제시한 목록은 편협하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로마인들이 좋은 것/미래라고 분류한 것이 과연 정확히 나의 학생들이 현재의 것/나쁜 것으로 통일적으로 분류한 분노와 동일한 유적 감정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는 개인의 감정에 대한 설명의 핵심적인 부분을 제공해주며, 인지적/가치평가적 이론은 감정적 삶의 이러한 측면을 조명해줄 완벽한 채비를 갖추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 자체가 쿠키 만드는 틀로 수많은 쿠키를 찍어내듯이 일련의 동일한 인간을 판에 박듯이 찍어내는 권력 기계가 아니라 개인이 최소한 제법 움직일 수 있는 여지를 일부 가질 수 있는 공간을 창조해주는 격렬한 논쟁과 상당한 다양성의 장면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또한 직관적으로 개인적 유형들은 최초의 그리고 몇몇 경우에는 주요한 문화 전달의 매체임을, 그리고 문화는 개별적 아이의 삶 속에 들어갈 때만 전달 가능함을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감정을 깊은 사랑의 역사, 보호와 위안에 대한 갈망의 역사, 위안의 원천이 멀리 떨어져 있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에 대한 분노의 역사, 나의 공격성에 대한 두려움의 역사, 죄의식과 보상해주었으면 하는 욕망의 역사 속의 한 가닥으로 파악하지 않고는 나의 슬픔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할 것이다. 슬픔 자체는 그러한 역사 전체의 흔적을 담고 있다. 배경에 숨어 있는 다른 감정들은 그것에 특수한 내용과 인지적 특수성을 부여한다.

스토아학파는 감정을 범주화하면서 시간적 범주로서의 과거를 뺐다. 이 학파의 어휘에는 과거의 사건을 겨냥한 감정을 위한 여지가 전혀 없다. 더 중요하게는, 이 학파는 또한 과거의 사건, 특히 유아기와 아동기의 사건이 현재의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을 부각시키는 데 실패하고 있다. 여기서 이들의 너무 지적인 유형의 인지주의가 감정의 특수한 감정적 내용을 완전히 인식하는 것을 막고 있다. 철학에서 감정에 대한 인지적 설명을 옹호하려는 최근의 몇몇 탁월한 시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는데, 그것들은 감정을 과거로부터 단절시키고 어떤 사람이 당면한 상황에 대한 현재의 입력에 의해 완전하고 신뢰 가능하게 규정되는 것으로 묘사한다.

감정이 유아기와 아동기에 뿌리내리고 있는 모습에 대한 일반적 설명 이것은 또한 특수한 감정의 역사를 분석하고 그것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의 개요를 그려 보려고 할 것이다. 나는 발생론적 명제와 인과적 명제를 동시에 제시할 것이다. 즉 후일의 삶에서 갖게 되는 검정은 자신의 안녕에 중요한 대상들과 인지적 관계를 맺는 것으로 처음 유아기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역사는 후일의 감정의 경험에 다양한 특수한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그러한 연구 결과들은 비록 기원이나 지금도 계속 작동하고 잇는 많은 기능에서는 적응적으로 합리적이지만 감정이 종종 또한 과거의 이미지를 감정에 투사할 때 현재의 대상에 부응하는데 실패한다는 의미에서 비합리적인 이유를 설명해준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처럼 경직된 태도는 또한 윤리적으로 되려는 또는 윤리적인 아이를 만들려는 모든 시도에도 여러 가지 결과를 가져온다. 그리고 나는 일군의 극히 일반적인 윤리적 목표를 위해 대조적인 발달 유형을 검토할 것이다. 이러한 규범적 쟁점들에 대한 탐구는 가정에 대한 이해에서 그리고 감정의 발달 자체에서 상상력이, 따라서 내러티브적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함을 보여줄 것이다.

위니콧은 정말 말 그대로 보다 건전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으로, 인간의 다양성과 상호작용에 보다 진실하게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신화가 묘사하는 것은 유아의 전지전능함, 세계가 자신의 욕구를 중심으로 돌며 완전히 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배치된다는 유아의 생각이다.

안아주기라는 그의 개념은 영양 공급, 세심한 돌봄, ‘촉진적 환경의 조성을 포함한다. 위니콧이 지적하는대로 상당히 큰 힘이 되는 촉진적 환경은 유아의 전지전능함(이것은 또한 완전한 무기력함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것이 아이가 관심의 중심을 차지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이 충족되고 인정되는 환경을 말한다.

위니콧의 말을 빌리자면 안겨 있는 유아는 …… 무한히 떨어지는 것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음을 인식하지 못한다. 하지만 조금만 잘못 안아도 아이는 무한히 떨어진다는 느낌을 갖는다.” 이처럼 극심한 무력감은 유아의 삶에서 불확실성, 불안, 분노가 나타날 여지를 아주 크게 만든다.

생물학자 허디의 표현에 따르면 인간의 유아는 품에 안겨 듬뿍 사랑받는 거에 대한 거의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갖는데, 그런 식으로 사랑받기를 바라는 것이다.” 품에 안겨 있는 것을 통해 유아는 세상 속에서 살아갈 의지를 갖게 되며, 세상은 위험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적극적 행동을 지원해줄 수 있는 정도로 충분히 상냥하다는 확신을 발달시킨다.

따라서 수치심과 나르시시즘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먼저 자아가 혼자인 것으로, 별개의 존재로 그리고 작은 존재로, 그리고 이어 장대하게, 완벽함을 지향하며 자신의 이상과 다시 결합하려고 애쓰는 것으로 경험되면서 말이다.”

로진의 잠정적 결론은 이렇다. 즉 혐오감에서 핵심적인 생각은 만약 동물의 분비물의 동물성을 받아들이면 우리 자신이 동물적 지위로 격하될 것이라는 믿음이라는 것이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대상을 피해야 하는지에 대한 과도한 일반화는 의문의 여지없이 우리 조상들을 진짜 위험한 것을 멀리하도록 이끄는데 보다 성공적으로 기여했다. 오래 전에 니체가 말한 대로 과도한 일반화를 거부하고 어떠한 일반화도 하기 전에 각각의 특수한 대상을 탐구하는 종은 아마 오래 전에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심지어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아를 혐오스러운 것으로부터 확실하게, 과도하게 일반화해 떼어놓는 것은 자아에게 자신의 견고함과 권력을 확신시켜주는 데 기여하는 것처럼 보인다.

원초적 수치심과 관련해서와 마찬가지로 혐오감과 관련해서도 우리의 신체적 구조, 무기력함, 필멸성 및 부패와의 연관성에 대한 우리의 애증병존적 태도가 아이의 발달하는 사회적 삶의 감정을 물들이며, 완강하게 지속되는 몇몇 도덕적사회적 문제들의 씨앗을 뿌린다.

혼자 놀기라는 개념과 과도적 대상이라는 개념 모두 상상()에 핵심적 역할을 부여한다. 부모가 아이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응해줄 때 상상력을 행사하듯이 이제 아이는 자기가 자신의 위안이 되는 것을 즐기며, 안전을 보장해주는 가시적 자원이 부재하는 세계에서 안전한 세계를 상상한다.

따라서 사랑, 불안감, 분노 그리고 종종 미움은 하나의 동일한 인물에 의해 촉발된다. 그 결과 고통스런 충돌이 불가피해진다.”

즉 이 단계의 발전에서 가장 강력하고 어느 정도는 보편적인 요소는 애증병존적인 사랑/분노로, 이는 수치심과 시샘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이 감정들이 과연 좁은 의미에서 성적인지, 얼마나 그런지 아니면 특별히 성적 질투 포함하는지는 사회와 개별 사례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인간적 사랑의 애증병존성 얼핏 이것은 우리가 동물과 다른 것의 나쁜 특징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 이 또한 인간적 사랑의 강도와 창조성의 원천일 수 있음을, 자신의 비순수성을 발견하는 끔찍한 순간이 또 다른 사람의 욕구를 인정하기 위해 진정으로 밖을 향하는 것의 원천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대신 가차 없는 나쁨이 자신의 자아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죄책감이 아니라 수치심이 아이의 원초적 반응이었다. 몸을 숨기고 문을 걸어 잠그는 것이다. 자신의 분노에 대처할 방법이 없으며, 그리하여 대부분의 아이가 분노와 시샘을 물리치기 위해 수행하는 투쟁을 겪기를 거부한다. B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이제, 나중에야, 투쟁에 가치가 있을 수 있음을 알겠어요. 물론 처음에 일이 잘돼야 하지만 말이죠. 요약하자면 나 자신의 문제는 결코 치루지 않았던 투쟁을 어떻게 하면 찾을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죠.” 도덕적 위기는 사형선고처럼 느껴졌으며, 그는 자신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위니콧은 그는 배상 능력으로 어수선해져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직 배상이라는 현상을 사용하고 있음을 가리킬 수 있는분노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이는 물론 도덕()에 대해서는 명백히 무능력해졌다. 도덕()은 배상 능력의 사용, 다른 사람의 인간성에 대한 존중 그리고 타자의 곤궁에 대한 배려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인간이 불완전한 것은 나쁘다는 것을 강력하게 강조하고, 완벽하고 관용을 모르는 부모의 이미지를 통해 원초적 수치심을 강화시키는 것은 모두 아이의 도덕적 위기를 도덕적 죽음을 낳을 정도로까지 악화시킬 수 있다. 다른 한편 자비로운 안아주기는 아이가 배상 노력으로 공격성에 맞서 싸우도록 격려해준다. 이 일이 일어나려면 부모가, 아이가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아이에게 두 명의 동등하게 인간적인 형상이 나눌 수 있는 미묘한 상호작용같은 것에 쾌감을 느끼도록 생각을 북돋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이것은 예를 들어 아이가 하는 놀이와 창조적 노력에 기쁨을 표시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과 타인들 안에 있는 인간적인 것에 대한 아이의 사랑을 형성해줄 수 있는 관계를 창조하려면 특정한 유형의 안전, 즉 완벽하고 무자비한 아버지가 저 놓은 곳에서 모든 의무를 지시하는 유형의 엄격한 체계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은 안전을 포기할 것이 요구된다. B가 말하는 대로 대등함과 관련해 걱정스러운 것은 그렇다면 우리는 둘 다 아이라는 것으로, 그렇다면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즉 아버지는 어디 있는가?”

초도로우는 이 요구는 세계의 많은 문화의 남성의 발달사에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어머니에게 의존하는 것은 나쁜 것이며, 어른이 되려면 부모와 떨어져 제 할 일은 제가 알아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배우기 때문에 남성은 종종 상호성과 유희성을 보여줄 수 잇는 자신의 인간적 능력에 대해 수치심을 보이도록 배우게 되는 반면 여성은 어른이 되려면 지속적인 상호의존 관계를 가져야 하며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표시하는 감정은 적절하다는 메시지를 부모에게서 받을 가능성이 더 크게 된다.

이와 다른 방향에서 보자면, ‘안아주기와 상상적 놀이 능력이 질투의 포기 및 타인들의 적법한 요구의 수용을 지지하는 걸 볼 때 그것들을 아이의 발달의 중요하고도 매력적인 부분들로 볼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발전 자체에 대한 설명에서 주어진 이유들에 덧붙여 말이다. 완벽함과 원초적 수치심을 강조하는 B와 같은 방식의 양육이 타인을 자체에 고유한 목적을 가진 존재로 존중하거나 배려할 수 없는 사람을 만들어내는 걸 볼 때 그러한 양육에 비판적일 수 있는 추가적인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B의 슬픈 발달사 자체에 의해 주어지는 이유에 덧붙여 말이다. 이와 비슷하게 혐오감의 이상비대화를 조장하지 않으며, 나중에는 혐오감을 다른 아이나 집단에 투사하는 것을 저지하는 부모의 노력을 지원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배변 훈련이 모든 사람에 대한 존중을 허용하는 정의로운 사회를 지지하는 걸 볼 때 이 유형의 발달을 지지할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앞서 언급된 심리적 이유에 덧붙여 말이다. 테벨라이트가 연구한 독일 장교들의 발달사가 광적인 반공주의와 반유대주의를 통해 이상비대화하고 원래 여성혐오적인 혐오감의 매개체가 되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걸 볼 때 그러한 종류의 유아발달을 피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존재하는 셈이다. 비록 그와 다른 상황에서라면 그것은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말이다.

이제부터 내가 성숙한 상호의존이라고 부를 성숙한 의존에서 아이는 자신이 사랑하고 계속 필요로 하게 될 사람은 자신의 의지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별개의 존재임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아이는 모종의 방식으로 그()에게 의존하는 것을 허용하며 전지전능함을 주장하지 않는다. 역으로 그()의 모종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을 허용한다. 그리고 모종의 방식으로 헌신적으로 그()에게 책임을 다한다.

다른 한편 그는 또한 아이가 유아적 의존을 벗어나 성숙한 상호의존을 향해 발달하려면 배타적이며 국지적인 사랑을 포기하고 점점 더 넓어지며 호혜성과 상호배려에 의해 지배되는 공동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성숙한 의존은 부모의 별개성과 자유에 대한 인정을 포함한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그것은 타자들이 부모의 관심을 차지할 수 있으며 보다 일반적으로는 타자들도 욕구를 갖고 있으며 자신처럼 삶의 좋은 것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을 포함한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자유를 공격하기 때문에 거부되어야 하는 한편 일부 민주주의 또한 과도하게 민족주의적이며 인종주의적이기 때문에 비판받아야 한다.

아동기에 징벌의 핵심적 목표는 아이의 배상 능력을 지원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의 주장이 시사하는 바에 따르면 징벌이 그것을 가장 잘할 것이다. 만약 징벌이 배상 능력을 약화시키는 원초적 수치심을 강화시키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이에게 죄책감을 느끼도록 촉구해야 하는데, 그것이 아이가 저지른 짓에 대한 적절한 도덕적 감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B에게서처럼 불완전함에 대해 수치심을 가지라고 촉구해서는 안 되는데, 이것은 아이의 인격 속에 경직성과 공포를 만들어내 배상 능력을 지하로 숨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이에게 벌을 주는 부모는 아이를 업신여기는 것 이것은 불안전하다는 것은 거부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기 때문이다이 아니라 위엄 있게 다루어야 함을 의미한다. 부모는 배상 능력에 대한 아이의 신뢰를 강화시켜 줄 수 있는 방법을 골라야 하는데, 위니콧은 이것을 무엇인가를 기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것임에 대한 점증하는 신뢰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자신이 저지른 것에 대해 배상할 수 있도록 가족적 맥락으로부터 일정한 시간 동안 분리시켰다가 재결합시키는 것을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여성혐오적 분노와 증오를 품고 있다면 생각의 변화는 행동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 자체의 변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은 가치판단에 따라 세상을 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견해는 예를 들어 다른 종족과 종교의 성원에 대한 감정의 영역에서의 도덕 교육을 위해 중요한 함의를 가진다. 세상을 바라보는 좋은 방식을 발전시켜 증오가 드러나는 것을 막을 수 있기를 희망해볼 수 있을 것이며, 항상 선천적인 공격적 성향을 억눌러야 한다는 생각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감정이 바뀌기 어려운 것은 습관 그리고 그와 관련된 인지의 초창기 뿌리 때문인 것으로 본다. 나의 견해는 우리는 감정-생각이 무엇인지를 전혀 모를 수 있으며, 또한 그것을 바꾸지 않는 것에 많은 것을 투자했을 수도 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견해는 성격에 관한 여러 상 중 모든 감정을 이성의 정언명령이나 무엇이 되었든어떤 사람의 이상의 정언명령과 일치시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너무 단순할 뿐만 아니라 너무 잔인한 것으로 거부할 것을 촉구한다. 인간이 애증병존적이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인 한,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나는 감정으로 미루어볼 때 그러한 목표를 처방하는 것은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그리고 달성 불가능한 완벽함이라는 규범을 처방하는 것이 바로 B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감정을 망가뜨려 엉망으로 만든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가 선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감정적 완벽함을 요구할 수 있으며 또 반드시 그렇게 해 항상 정확한 사람에게, 정확한 방식으로, 적시에 등등으로 화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면 그의 견해는 압제적이며, 우리에게서 인간-임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감정이 내러티브적 구조를 갖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일한 감정에 대한 모든 이해는 현재의 반응에 어떤 빛을 비추어 주느냐라는 관점에서 그것의 내러티브적 역사가 파악되고 연구되지 않으면 완전할 수가 없다. 이것은 이미 인간의 자기이해에서 예술이 핵심적 역할을 함을 암시한다. (음악작품이든 시각 예술작품이든 문학작품이든) 다양한 종류의 내러티브적 예술작품은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이 감정-역사[내력]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감정에 관한 몇몇 진리는 오직 내러티브적 예술작품에 의해서만 언어적이고 텍스트적인 형태로 전달 될 수 있다는 프루스트의 주장은 이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직 그러한 작품만이 감정적 생각의 상호 연관된 시간적 구조를 정확하고 완전하게 보여주며, 마음속으로는 자신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과 부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것을 탁월하게 포함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위니콧은 예술적 활동은 아기와 엄마, 아이와 가족, 개인과 사회를 매개하는일종의 잠재적 공간으로 개인에게는 성스럽다고 말한다. 엄마가 아이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고 아이의 욕구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어머니 본인이 자신의 잠재적 공간을 계발했기 때문임을 주목하라. 다라서 상상력은 건강한 성격, 따라서 세대를 초월한 사회적 안정성의 재생산의 핵심적 부분이다. 아기와 부모 사이의 미묘한 상호작용은 아이 또한 다른 사람의 경험을 상상할 수 있게 되면서 내러티브와 이미지들을 이용한 놀이에 의해 핵심적으로 매개된다.

내러티브적 놀이는 불안전함을 즐겁고 유희적인 형상으로 꾸밈으로써 인간적인 모든 것에 대한 원초적 수치심을 약화시키고, 아이가 불완전한 존재의 삶에 대해 일정한 관용, 심지어 기쁨을 갖는 것을 도울 수 있다. 만약 나의 주장이 맞다면 이 발달은 역으로 애증병존성에 맞서는 사랑과 감사의 투쟁에, 그리고 상실의 무기력함에 맞선 적극적인 관심의 투쟁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미학적 활동의 잠재적 공간은 삶의 가능성 중의 일부를 탐구하고 시험적으로 사용해볼 수 있도록 해주는 공간이라고 말해왔다. 비극에 연민과 공포를 갖고 반응하는 가운데 우리는 등장인물들뿐만 아니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몇몇 절박한 주장을 파악하게 된다. 즉 오이디푸스는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는데도 슬픔을 겪게 되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선한 사람이 이런 식으로 슬픔을 겪는 것이 가능하며 우리도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함을 말이다. 이런 식으로 문학작품의 독자나 관객은 작품을 읽거나 보며, 동신에 세상을 읽고 자신의 자아를 읽는다. 그러한 의미에서 작품은 프루스트 말대로 독자가 특정한 개인적 현실에 초점을 맞출 수 있도록 해주는 광학 기계이다.

음악작품의 표현적 특징은 문제의 음악적 전통과 해당 작곡가의 전작에 대한 상당한 지식 없이는 해독될 수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문학작품에서도 상황은 동일하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비록 아주 일반적인 수준에서 인간에 공통적인 사건들의 문학적 재현은 종종 광범위한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감정을 끌어내는 것을 가능하게 해줄 수도 있지만 말이다.

랭거에게 음악은 인간적 느낌의 역동적 유형을 상징하는 형식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이것을 지향성을 참조하지 않아도 형태를 이해할 수 있는 내적 활동으로 간주한다. 감정을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고 확신하는 레빈슨에게 음악은 어떤 감정 전체를 재현하거나 초래할 수 없다. 하지만 감정의 운동적 측면이나 정동적 측면은 재현하거나 초래할 수 있다. 레빈슨은 이 정동적 측면을 완전한 감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믿음이나 판단과는 인과적으로 독립적인 것으로, 감정을 식별할 수 있는 믿음이나 판단 없이도 충분한 것으로 다룬다.

하지만 이 모든 견해의 난점은 한슬릭이 맞다는 것이다. 즉 감정에는 판단 또는 판단과 아주 흡사한 모종의 지향적 활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감정에게는 각자에 특징적인 인지적/지향적 내용을 참조할 때만 개성이 부여될 수 있다. 랭거는 설명에서 지향성을 빠뜨리기 때문에 감정에 대해 아주 특이한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그에 상응하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에 비해 훨씬 덜 흥미롭다).

음악은 언어와 문화에 의해 크게 분리되어 잇는 사람들이 같은 음악을 사랑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반응이 자동적이거나 별로 애쓸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보편적이지는 않다. 일본 음악이나 인도 음악의 표현적 내용은 서구인들의 귀에는 분명 처음에는 당혹스럽다. 다른 어떤 교향곡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에게 말러 식의 교향곡의 표현적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몇몇 민요는 복잡한 교향곡 작품과 달리 쉽게 표현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톨스토이의 지적은 정확하다. –그리고 바로 이 의미에서 단순성 때문에, 즉 도로게시판을 헨리 제임스 소설보다 훨씬 더 쉽게 읽을 수 있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휠씬 더 큰 보편성을 가진다. 그리고 일부 복잡한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 더 쉽게 즐길 수 있음 또한 명백하다.

심리학에서 감정에 대한 행태주의적 견해가 인지주의적 견해로 대체되던 것과 동일한 수십 년 동안 또한 그와 동일하게 당시 지배적이던 음악적 행태주의’ –음악 학습과 음악적 행동은 인지적 행위는 언급하지 않고 자극과 반응에 호소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다는 입장음악적 인지주의’, 즉 음악의 획득과 음악적 기능은 음악이 펼쳐지면서 점점 더 증가하는 정교화의 여러 수준에서 복잡한 인지적 기능을 포함한다는 견해로 대체된 것을 볼 수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음악을 본질상 음악 외적인 단순한 인지 도구로 다루기를 거부하면서 음악적 경험의 인지적상징적 복잡성을 보전할 수 있는 설명이다. 이 설명은 음악은 우리의 감정적 깊이와 내밀한 관계 실로 예술 중에서도 특수한 강도와 절박성을 갖고 있을 연관성를 맺고 있다는 우리의 직관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음악은 문학보다 덜 모호하다. 실제로 이것은 음악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감정의 상처에 보다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접근할 수 있다고 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음악은 문학작품과 같은 방식으로 대상을 재현하거나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그 결과 음악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우리처럼 공간과 시간이라는 일상적 세계에 사는 캐릭터의 행동이나 고통에 대한 반응이라기보다는 보편적 형태의 감정의 결정화이다. 이 사실은 모종의 방식으로 음악의 감정적 잠재력, “사물의 진상을 탐구하며, 외양을 넘어설 수 있는 음악의 능력과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음악적 경험에서 실제 느낌이 주는 전면적 충격으로 우리를 후려지는 환등상 같은 구조를 보게 된다.

즉 꿈으로서의 음악적 감정의 암시적 이미지의 안내를 따라가되 꿈의 소재를 구현하는 것은 음악 자체의 형식이라는 생각을 시야에서 놓치지 말아야 한다. 놀랄 것도 없이 이 세 명 중 오직 말러만이 이 점을 올바로 파악해 반복해서 내용과 형식은 해소 불가능하게 섞여 있으며”, 삶의 고통과 슬픔은 실제로는 음악 자체 속에, 독특하고 엄밀하게 말해 해석 불가능한 형식 속에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작품의 ‘~에 관한 것임은 형식적 정교화와 불화하지 않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에게 교향곡은 동원가능한 모든 기술적 수단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악은 그 자체로는 원초적이거나 태곳적의 것이 아니다. 음악이 표현하는 내적 세계 또한 복잡한 지향성과 내용을 결여하고 있지 않다. 여기서 쇼펜하우어의 견해는 큰 단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음악이 의식적인 자기이해 아래 놓여 잇는 인격의 부분을 표현하기에 특히 편리한 장르라는 그의 말은 무엇인가 심오한 것을 건드리고 있다. 음악은 상징적 구조가 빛의 고통스런 광선처럼 직접 인격의 가장 취약한 부분으로 뚫고 들어가는 식으로 습관, 용법, 그리고 지성화를 우회할 수 있다. 우리가 언어에서는 익숙한 서사적이고 대상 지향적인 구조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음악은 종종 아동기의 확실한 형태가 없는, 태곳적의, 극히 강력한 감정적 소재와 친화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음악은 그것을 예리하게 하고 밖으로 표현하면서 정확하게 가다듬는데, –말러는 이를 결정화라고 부른다여전히 태곳적 형태로 생각에 완전히 가려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언어 그리고 시간 및 인과성의 일상적 구조가 더 이상 장악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한 어둠의 세계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우리는 음악이 그러한 어둠의 흐릿한 형상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음악적 경험과 지적 통제나 조작의 결여 사이의 이 연관성은 내포 청취자의 경험이 집중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는 인지적 활동인 동시에 또한 놀라운 수동성 중의 하나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음악적 경험을 여성적이고 여성화시키는 것으로, “세상의 정신에 의해 이용되는 것으로 바라보는 말러의 놀라울 말한 이미지가 나오는 것이다.

음악(어쨌든 형식적으로 작곡된 음악)은 일상적 몸짓이나 움직임보다는 시에 더 가깝다. 음악의 감정적 힘은 표현 매체의 압축적이고 형식적으로 복잡한 사용과 분리 불가능하다. 따라서 문제의 시적(음악적) 전통에 무지한 사람에게는 오직 가장 피상적인 이해 혹시 그러한 것이 가능하다면 말이다만이 가용하게 된다. 우리는 시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특히 시적인 방식을 갖고 있으며, 이 방식은 특정한 시적 전통에 내적임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렇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특히 음악적인 방식이 존재하며, 그것은 특정한 음악적 전통에 특수함을 인정하기를 왜 그렇게 주저하는 걸까? 형식적 구조의 표현적 내용은 소통적 전통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해 주어진다.

작품은 불타는 듯한 고통이 결정화되는 구조를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처럼 불타는 듯한 고통을 경험하는 내포 청취자를 구성한다. 또는 –< 2번 교향곡>의 일부의 감정적 구조에 대한 그의 묘사를 이용하자면좋고 훌륭한 모든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구현하는 형식을 포함할 수 있으며, 바로 이 형식 덕분에 적막함을 세게 얻어맞아 땅바닥에 고꾸라지는것처럼 경험하는 청취자를 구성한다. 그것은 인간의 일상적 삶의 영위의 하찮음을 초월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구현하는 형식 그러한 초월의 가능성에 대한 수용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으며, 이 구조 덕분에 천사의 날개를 타고 최고의 높이까지 올라가는내포 청취자를 구성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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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정의 격동 : 2 연민
    from 木筆 2017-01-22 11:57 
    롤즈는 칸트가 훌륭한 윤리적 행위 주체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로부터 연민을 갖도록 하는 감정을 빼뜨린 것에대한 쇼펜하우어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그러한 결합이 실제로 쇼펜하우어가 칸트적 합리성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의 모델을 제공해준다고말한다. 롤즈는 자기이익과 무지의 결합을 연민과 정보의 결합보다 선호하는데, 자신의 전략이 더 많은 확실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그는 이 두 전략이 아주 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