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격동 : 2 연민
감정이 윤리(학)에 어던
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처럼 아무리 부분적이더라도 모두 에로틱한 사랑의 애증병존성과 과도함을 다루어야 한다.
하지만 에로틱한 사랑의 제거가 과연 연민과 다른 감정을 그대로 놔둘지 의심할 수 있는 이유가 실제로 존재한다. 친구 사이의 사랑은 모두 실제로는 은폐된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프루스트의 주장은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두 감정이 너무 긴밀하게 서로 뒤얽혀 있어 만약 에로틱한 사랑을 도덕(성)에 대한 위협으로 제거한다면 시혜적인 연민의 에너지를 계속 유지하기를
기대할 수 없으리라고 본 것은 아마 맞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심지어 신스토아학파적 설명이라는 관점에서도 사랑에 대한 내러티브적 설명들에 특히 민감한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감정 사이의 관계를 탐구함으로써 뿐만 아니라 또한 감정들을 아리스토텔레스적
사랑의 다른 요소인 행위 및 상호작용과 관련시킴으로써 감정적 측면을 조명해줄 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는 이미 성적 욕망 자체는 어떤 특수한 육체적 드러남이라기보다는 생각과 환상의 문제라고 주장해왔기
때문에 그것은 에로틱한 사랑을 어떤 특수한 육체적 드러남에 의존하도록 만들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우리의
신스토아학파적 견해를 근본적인 방식으로 수정할 것을 요구하는 식으로 에로틱한 사랑은 육체적인 것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다.
도망치지만 용감한 병사(아리스토텔레스는 그를 이렇게 묘사할 것이다)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렵지만 도망치는 것은 수치스럽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비슷한 DJEJS 것이
사랑에 대해서도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사랑은 종종 소유 및 통제 기획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도우려는 보다 호의적인 기획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그리고 비록 사랑에 대한 몇몇 유명한 설명은 그러한 기획을 사랑에 대한 규정의 일부로 삼지만– 아마 그 대신 말해야 할 것은 사랑은 가장 경이롭고 가장 중요하며 자아에 의해 절실하게
요구되는 대상에 대한 특수한 종류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도하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고, 복수심에 불타거나 편파적이지 않도록 그리고 일반적인 사회적 연민, 상호성, 개별성에 대한 존중을 지지하도록 하려면 사랑은 어떻게 자신을 갱신할 수 있을까?
불멸의 대상을 사랑하는 그녀는 세속적 재화에의
의존을 포기하고, 어떤 필멸의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불멸의 자신에게 다가가야 한다. 하지만 이 이행은 그녀가 일반적인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하고 원하는지, 어떻게
고통 받는지, 그리고 왜 그것이 중요한지를 보는 데는 그리 능숙하지 못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연민을 가혹하게
거절하고 비극 시인을 공격한 것은 플라톤의 등정 이야기와 동류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의 방향
수정을 수반하고 있는 것이다. 등정을 마친 연인에게 굶주린 자들, 사별당한
사람들, 병약자들, 박해 받고 박해로 고통 받는 사람들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었어야 할 때 ‘외적인 것들에 아연실색한’ 바보들처럼
보이며, 실제로 바보들이다. 임종의 자리에 누운 소크라테스는
동정을 꾸짖는다. 크산티페와 아폴로도로스 모두 방에서 나가야 했다. 눈물이
아니라 냉철한 논증이 세속적 고통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재앙을 넘어서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연민을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것을 우쭐대는 성향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적 연인은 그와 반대로 사랑의 대상을 소중한
속성의 처소로, 따라서 창조에 적합한 매개체로 바라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다른 사람 자신의 주체성과
선택을 무시한다. –이 점은 오래 전에 블라스토스에 의해 크게 강조된 바 있는데, 그는 이것을 플라톤 이론의 핵심적인 결함으로 그리고 기독교도들이 진보를 이루어낸 핵심적인 영역으로 간주한다. 플라톤적 사다리에 오르는 순간부터 A는 M이 하거나 선택하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는 그녀가 찬양하는
명상의 대상이지 그의 독립을 그녀가 원하고 조장하는 의지가 아니다. 그녀의 명상적 관점에서 볼 때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과 과학적 체계 또는 세계 전체의 미를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궁극적으로 아무 차이도 없다. 이것이
정확한 이기심인 것은 아닌데, 플라톤적 창조성은 세계 전체에 아낌없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무망한 태도이며, 따라서 공적
영역의 다른 시민들에 대한 태도의 무망한 토대이다. 시민들은 행위와 존재를 위한 노력들에서의 협력만큼
다른 시민들의 명상을 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블라스토스의 견해를 들어보자. 좋은 것과 아름다운 것의 처소로서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정확히 개인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포용하는
방식이 아니다. 개인들의 별개성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얼마
후 아름다운 것의 모든 특수한 초소는 그저 텅 빈 용기처럼 보일 것이며, 거의 전혀 중요하지 않으며, 아름다운 것의 모든 차원은 ‘아름다움의 큰 바다’의 방울들처럼 보일 것이다. 각각의 개인은 각자에 고유한 별개의 삶을
산다는 생각은 이 분석에서는 전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질적 변별성의 경우 플라톤의 등정은 훌륭하거나
아름답지 않은 사람에 관한 모든 것은 무시하며, 따라서 사랑에서 제외한다. –결함과 결점들, 중립적인 특이성들, 신체의 내력 등이 그것이다. 아주 철저하게 차이라는 사실 자체를
포용하기를 거부한다. 그것은 오직 이상적으로 좋은 것과 같은 종류의 것만 좋아한다. 다른 부분들 –너무나 인간적인 부분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은 포용하기를 거부한다. 이 거부가 비자유주의적인 완벽주의 정치, 외적으로 강요한 도덕적 표시와 함께 나타날 때만 시민들의 선택을 존중하는 정치와 함께 등장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 등정은 또한 개인적 삶에서의 실제적인 인간 존재를 사랑하는 방법으로도 유망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오직 내가 소중하게 간직했을 속성을 네가 존중하는 한에서만 너를 사랑할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는 자비를 위한 여지가, 불완전하고 취약한 삶에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을 감싸는 무조건적 사랑을 위한 여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의 치유법과 등정에 대한 스피노자의 설명은
플라톤주의 전통에 크게 빚지고 있다. 하지만 사랑의 질병에 대한 진단의 깊이에서, 따라서 이해가 왜 그리고 어떻게 치료를 가져오는지에 대한 설명에서 플라톤을 넘어선다.
스피노자에게 두려움, 슬픔, 분노, 즐거움, 사랑 같은 감정은 항상 자신의 안녕과 관련되어 있는 상황에 대한 평가를 포함한다. 감정은 단순히 갑작스런 충동이나 욕구가 아니라 고도로 선별적인 유형의 비전과 해석이다. 예를 들어 두려움을 느낄 때 나는 단순히 몸을 떨지만 않는다. 나는
나 자신 그리고 나의 안녕과 관련해 세상의 상황을 평가하며, 나의 안녕이 상황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판단한다. 이런 식으로 스피노자는 스토아학파의 견해 중 소중한 통찰로 간주되는 것을 통합해 들이며, 감정의 인지적 내용과 지향성을 강조한다.
스피노자는 감정[정서]은 외적 사물과 이처럼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인지라고, 따라서
실제로는 이러한 외적 사물들 앞에서의 –좋든 나쁘든– 우리의
궁핍함과 수동성에 대한 인식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감정을 갖는 것은 ‘속박’ 상태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감정에 복종하는 인간은 자신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권리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4부 서문).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식으로 살며 “외적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동요되어 결코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5부 정리 42 증명).
따라서 속박 문제는 무엇인가를 덜 필요로 하고, 우리 바깥의 사물을 우리의 안녕에 필수적인 것으로 덜 보는 것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스토아주의로부터 이 생각을 끌어오며, 감정의 멸절이라는
그의 프로그램은 직접적으로 스토아학파의 생각을 모델로 하고 있다.
M에 대한 A의 사랑은 수동성에서 태어난 일종의 속박이다. 잘살려고 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러한 속박을 증오하며, 그것을
초래한 원인을 증오하는 동시에 사랑한다. 스피노자는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간직하고
보존하려 한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증오하는 사람은 증오하는 것을 없애고 파괴하려고 한다(3부 정리 13 증명). 하지만
증오와 복수하려는 욕망에 휘둘린 삶을 사는 것은 훌륭한 삶일 수 없다(4부 정리 44). “자신이 당한 불법을 미움으로 복수하려고 하는 사람은 확실히 비참하게 생활한다”(4부 정리 46 증명).
그리스와 로마의 스토아주의자들처럼 스피노자는 크게
보아 공적 삶에서 분노와 증오에 의해 초래되는 손해에 대한 자신의 견해 때문에 감정을 해부해볼 생각을 품게 되었다. 종교적 관용에 대한 그의 옹호 그리고 애증병존적인 감정들에의 속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그에게서는 동일한
기획의 일부이며, 그의 철저한 반-감정 프로그램에 대한 모든
비판은 그러한 질문들과 제대로 씨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를 괴롭히는 인간은 각각 우리에 의해 어떤
신성과 결합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경우 그러한 인간은 그와 같은 신성의 단편적인 반영이며 그러한
신성의 가장 낮은 품계에 불과할 뿐이고 그러한 신성을 관념으로 바라본다면 우리에게는 우리가 당한 그러한 괴로움 대신 당장 기쁨을 얻는다. 살아 나가는 온갖 기술, 그것은 우리를 괴롭힌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우리로 하여금 성스러운 형태에 이르게 하는 계단의 발판으로만 이용하면서 그들 신성에 의해 우리의 생활을 하루하루 풍요롭게 만드는 데 있다(『되찾은 시간』, 209~210).
내레이션은 마치 진창에 빠지듯 너무 감정에 깊이
빠져 자유의 전달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스피노자와 달리 프루스트는 내레이션은 유일하게 참된 자유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는데, 그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 듯하게 들린다. 오직 내레이션을 통해서만
온갖 인과적 관계를 맺는 우리 사랑의 보편적 형태에 숙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렇게 숙달되는
과정을 독자에게 선물로 주면서 말이다. 따라서 다른 삶들을 사다리의 단으로 이용해 자신의 삶을 문학작품으로
바꾸는 것이 등정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제는 창조보다는 해독의 노동을 요구하는데, “실제가 우리에게 받아쓰게 강요한 유일한 책이자 실재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인상을
낳게 한’ 유일한”(『되찾은 시간』, 190) 텍스트를 위해 자신의 과거를 탐색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원료는 삶 자체에 의해 심중에 남은
상념들이다(190). 하지만 이 과제는 따라서 실제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등지고 살아가는”(207) 일상생활의 통상적인 운용과는 정반대 작업이어야 한다. 일상생활은 사람들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중요한 습관과 질투심들과 허영심을 덮어, 그것들의 중요성을 감추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처럼 거짓으로 덮어
가리고 있는 것을 타파하고 삶의 참된 소재를 드러낸다. “완전히 살아온” 삶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 일상생활이 아니라 오직 예술작품뿐인 것은 이 때문이다(206, 207). “나는 현실에서 나 자신의 심층에 있는 것에 도달하기가 불가능함을 이제까지 너무도 많이 경험해왔다.”
단 한 동의 성당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많은 성당을
보아두어야 하듯이, 양감, 밀도, 보편성, 문학적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작가는 화가보다도 더 단 하나의
감정에 대해서도 많은 사람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되찾은 시간』, 218)
자아인식과 예술적 표현의 소재는 고통이다. 하지만 이 고통을 보편적인 소통의 힘과 형식미를 가진 예술을 위한 소재로 사용하는 것은 심오한 기쁨(209)과 위안을 준다.
한 지점에서 화자는 심지어 고통당하는 것에 대한
연민이 사랑의 즐거움보다 강하다고 진술하기까지 한다(『사라진 알베르틴』, 16).
따라서 등정은 오직 실제 사람들 위로 너무나 높이
올라가 그들의 인간적 실존의 특수성이 보이지 않을 때만 성공할 수 있다. 우리의 세 사상가는 모두 오직
이런 식으로만 사랑의 무시무시한 과도함과 애증병존성이 치유될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
A에게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만약 세 사람 진단에 동의하지만
결론에는 여전히 불만이라면 우리는, 특히 사회적 삶이 관련되는 한 어려운 선택에 직면하는 것처럼 보인다. 증오를 극복할 수 있는 아무런 희망도 없거나 아니면 극복하더라도 그것은 여민,
상호성, 그리고 특수성을 완전히 제거해버릴 것이다. 철학자와
신 또는 독자와 텍스트 사이의 명상적 관계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명상적 연인은 모든 연인이 유한하고 필멸일 수밖에
없는 세상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우기보다는 유아기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기발한 도구를 발견한다. –인간의 유아의 최초의 기질에서 너무나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탄과 호기심을 상당히 효율적으로 동원해서 말이다. 이 연인은 보다 적절한 인간적 바람을 위해 총체성에 대한 바람을 포기하는 대신 계속해서 유아기의 전지전능함에서
동기를 부여받아 왔으며, 바로 이 때문에 유아의 바람들이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세계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리고 프루스트도 인정하듯이 다른 사람의 특수성을
진정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보려면 이 다른 특수자를 통합시키거나 집어삼키려 하지 않는 자세가, 지금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고수하려는 자아에 외적인 행위 주체들이 존재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절대적으로 맞았다. 알베르틴을 실제로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알지 못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하지만 그의 잘못인 것은 (그가 생각하는 대로) 그녀와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에서 자신이 설정한 특수한 목표 그리고 그가 받아들인 사랑에 대한 설명
–이것은 그처럼 기저에 깔린 목표에 너무나 잘 들어맞는 것이었다– 때문이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세속적 사랑과 천상의 사랑
사이에는 심원한 심리적 연관성이 존재한다. 두 사람 모두에게서 선한 기독교적 삶은 플라톤적 전통에서
바라는 사랑보다 더 변덕스럽고 에로틱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중요한다. 두 사람은 기독교적 전통 내부의
상이한 관점을 대변하는데, 나는 둘이 공유하는 생각뿐만 아니라 차이도 탐구할 것이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든 단테든 사랑에 대한 두 사람의 생각 전체를 공평하게 다루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텐데, 두 사람 모두 내적으로 아주 복잡한 내력을 거쳤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는 기독교도로서 순수하고
적극적인 지성이 아니라 민감한 감수성을 갖고 사랑으로 가득 한 복잡한 심리를 통해 등정하게 된 A는
두 가지 방식으로 심오하게 우연성의 처분에 맡겨진다. 등정을 위해 그녀는 자신의 자제가 아니라 그녀의
인격 중 본인이 지배하지도 또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는 측면에 의존해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인격 속에
들어 있는 이처럼 민감한 요소는 역으로 행복한 활성화를 위해서는 하느님이 부르는 신비한 방식에 의존해야 한다.
『고백론』에서 감동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훌륭함, 자기이해, 지식에 대한 추구는 이 책 내내 자신은 연속적인 시간적 존재라는 아우구스티누스 본인의 인식을 전제한다. 이 시간적 역사는 그의 영혼의 비-필연적 속성일 수도 있다. 그것은 여전히 그의 구원에 핵심적이다. 자기이해는 그가 이것을 성취하는
한 고백의, 즉 핵심적으로 기억을 통해 과거를 끌어내는 활동의 “열매”라고 말해진다. 그는 분명하게 이렇게 선언한다. 하느님에 대한 추구는 “널따란 평원을 지나 기억이라는 큰 전각에
이르며” 이루어져야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온
갖가지 사물의 무수한 영상이 간직되는 보고이다”(10장 8장). 기억은 변덕스러운 능력이다.
그것은 항상 의지에 복종하는 것도 또 그것의 내용이 신중한 검토에 항상 맡겨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에 따른 어려움과 어둠 없이는 열매를 거둘 수 없다. 플라톤주의적
등정이 주장하는 대로 그것을 잘라내는 것은 자아에 대한 인식을 포기하는 것일 것이며, 따라서 갈망하고
사랑하기를 그치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기억과 책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되어 있다.
세계에 속하는 과정에서 내가 만든 자아를 사랑하지 않은 것과 동일하게 나는 구체적으로
이 세상에서 만나는 내 이웃 역시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그 속에 있는 어떤 것, 즉 그에게 속하지만 그가 아닌 바로 그것을 사랑한다. ‘너는 그의
속에 있는 어떤 것을, 있는 그대로의 그가 아니라 네가 그였으면 하고 바라는 그것을 사랑한다.’ 이는 심지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서조차도 단지 그들 소에 있는 신을 사랑하는 한에서만 걱정하는 연인을
계속 고립되도록 만든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이웃의 입장에서도 사랑은 단지 고립으로 불러들이는
초대이자 신의 현전 속으로 들어오라는 소환장일 뿐이라는 의미이다. ...... 죽음은 이러한 사랑에
부적합하다. 왜냐하면 사랑받는 모든 이는 오직 신을 사랑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뿐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간 속에 있는 동일한 원천이 사랑받는다. 어떤 개인도 이
동일한 원천과 비교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다.[169~170]
아우구스티누스는 분명히 감정을 훌륭한 삶에서 명예로운 위치로 복원시켰다. –그리고 이 감정과 함께 우리 인간성의 궁핍하고 불완전한 측면을. 그는
플라톤주의적 전통으로 하여금 모든 불완전성과 인간적인 것을 수치스러운 것으로 비난하도록 만든 교만을 비난했다. 하지만
에덴동산 그리고 그곳으로부터 우리를 추방한 죄에 대한 본인의 생각은 사랑의 등정에 대한 생각과 마찬가지로 그에 고유한 방식으로 원초적 수치심에
기반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의지의 불복종 –그리고
그것의 징후인 정욕– 이 우리를 우리가 알고 있는 인간 존재로, 따라서
에덴동산에서 생식기를 원예 도구처럼 이용해 만든 로봇 같은 사람들과는 다르게 만든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많다. 즉
우리 인간성의 기본 요소, 즉 독립성, 의지함, 성적∙도덕적 예견 불가능성을 여전히 플라톤주의자들처럼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심원한 수치심을 느껴야 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최선을 다해
행동하는 대신 몸을 가리고, 슬퍼하고 기다리는 편이 더 나은 것이다.
즉 개인의 가장 진실 되고 가장 적절한 사랑을, 개인을
모든 유별남과 독특함 속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고 사랑하는 사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기독교적 구원의 맥락에서라는 주장이 그것이다.
단테는 이교도적 전통을 통째 기각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아퀴나스의 헌신적 추종자로서 그는 주체성의 존엄성과 특수성의 지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에 충실하며, 이교적
전통과 기독교적 전통의 최고의 것을 융합시키려고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이 세상에서의 분토는 새로운
존엄성을 얻으며, 심지어 천국도 미덕을 안다.
우리가 갖게 되는 느낌은 이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개(인)성과 주체성을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개(인)성과 주체성에
대한 충분한 존경심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삶을 주체성이나 숙고를 포함한 것으로 전혀 간주하지
않는다. 열정의 힘들에 내맡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단테의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다. –심지어
플라톤도 아니다. 지성의 자기-추진적인 운동을 보다 에로틱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가 단테에게 던지는 첫마디는 궁정풍 연애시에서는 편안한 사랑의 말들이다.
상호성 및 행위 주체로서의 동료 시민에 대한 존중과 관련해 우리는 플라톤적 전통과
아우구스티스적 전통 모두를 넘어 정말 결정적 진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단테의 기독교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일반적인 윤리적 태도는 타자의 주체성과 자유에 대한 아주 강력한 존중을 포함하는데, 그것은
훌륭한 인간적 사랑의, 따라서 함축적으로는 사회적∙정치적
제도들의 핵심적 성분이다.
예를 들어 사회계약론은 시민들을 단지 행위 주체로만,
롤즈의 의미심장한 구절을 인용하자면, “완벽한 삶에 대해 완전히 협력하는 사회의 성원들”로서만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어떤 인간 존재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모두 심각하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종속의 시기를 갖기 때문이다. –가장
분명하게는 유아기와 노년에. 하지만 돌봄에 대한 필요와 요구는 우리 삶의 직물로 직조된다. 돌봄에 대한 이 필요는 충족되어야 하며, 사회는 그것이 잘 충족되도록
돌보아야 한다.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또 돌봄을 베푸는 사람들을 착취하지 않고 말이다.
실제로 “무감각은 인간의 특성이 아니다. …… 그러니 만약 누군가에게 아무것도 즐거운 것이 없고 모든 것이 아무 차이가 없다면 그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는 정의와 인간의 안녕에 대한 세속적 추구는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임을 아주 분명하게
한다. 그런 만큼 천상의 연민을 포함해 연민은 계속 세상으로 다시 돌아와 굶주린 자들을 먹이는 일, 박해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일, 슬퍼하는 자들을 위로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성인 프란치스쿠스의 자발적 빈곤과 고통 받는 모든 사람에 대한 연민은 그를 『천국』(11곡)의 중심적 ‘주인공’ 중의 하나로 만든다.
하지만 그들의 천국은 에드거 린튼의 정적인 천국이 아니라 이승적 열정의 활기찬 영역으로, 거기서는 자연과 육체를 사랑하는 영혼의 본질 자체가 된다. 그들은
여전히 사랑에서의 자유로운 주체성과 특수한 지각에 대한 기독교적 연인들의 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이 관심은 더 이상 관습적인 종교적 권위의 체계 내부에는 수용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주체성은 자신의
내부로부터 방향을 찾아야 하며, 관습적인 기독교도에게 이들이 걷는 길은 지옥에 이르는 길처럼 보일 것이다.
요약해보자. 낭만주의적 연인은 기독교적
세계에 이 세계가 잃어버린 에너지와 헌신의 깊이를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기독교적 동정심을 박탈당해 우리를
동물로 만들지 않고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이 린튼 가의 세계에서는 일종의 지옥을 만들어 진짜 열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만든다고
주장한다.
린튼의 죽은 감정들은 사회적 도덕(성)과 연결되며, 이 둘은 모두 자기방어적 자체 및 타산과 연결된다. 그와 반대로 완전 무방비 상태인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좀 더 깊은 종류의 관대함 및 좀 더 진정한 이타주의의
뿌리와 연결된다. 이 소설에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 진심으로 자기 목숨을 희생하는 캐릭터는 히스클리프뿐이며, 진정한, 즉 비타협적인 이타주의에 따라 자신의 이익을 버리고 행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 번째로, 관습적인 기독교는 모든 움직임과
분투가 멈추는 정적인 천국을 고대할 것을 가르친다는 비판을 받는다. 그리하여 움직임과 분투를 폄하하고, 위험을 감수하고 품이 넓은 미덕이 아니라 쩨쩨한 린튼적 미덕을 함양할 것을 가르친다.
마지막으로, 이 소설의 기독교적 세계는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 중의 하나, 즉 상상력을 무시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기독교적 캐릭터들 중 생생한 공감과 함께 다른 사람의 삶을 상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앞서 말한 대로 히스클리프와 캐시의 사랑은 자아를 타자의 손길과 눈길에 완전히 드러낸 것을 요구한다. 이런 식으로 위험을 자초하는데, 너무나 전적인 그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 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방어막도 존재할 수 없다. 다자는
자신 속에 있고 자신과 한 몸이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경계들이 투과적인 것이 되도록 허용하려면 과거의
자신이거나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모습대로의 자신이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실로 그렇게 하려면 낯선 이, 집시가 되어 이 모든 캐릭터들이 자신을 보호해온 자족성이라는 단단한 껍질을 포기해야 한다.
말러도 교향곡의 결론을 위한 원천으로 기성의 모든 문학을 거부했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또한 나는 이 텍스트가 1악장의 정서적 궤적에 대한
해석을 위해 뭔가 엄청나게 도움이 되는 것을 제공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러 본인의 프로그램들이 분명히
훨씬 더 큰 통찰력을 보여준다.
우리는 여기서 관습적인 종교적 도덕과 말러의 예술의 지정한 영성사이의 대조가 또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말러의 삶은 많은 측면에서 격동으로 가득 차고, 관습적인 기준으로 볼 때 ‘죄로 가득한’ 것이었다.
휘트먼에게 민주주의적 비전은 자체가 시적 비전이며,
시민이란 “모든 봉건적 절차들과 시를 버리고 민주주의 시와 절차를 받아들인 사람”(BO 185)을 말한다.
휘트먼은 다소 말러적 –우리는 그가 성경을
포함한 모든 세계문학을 통해 ‘구원의 말’을 찾았지만 사랑의
말들은 단지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철학적∙종교적 체계들에 의해 창조된
우주론들에 맞서기 위해 휘트먼이 제공하는 새로운 우주론이 있다. 즉 유한하고 필멸이며 개인적이며 다른
사람들과 평등하며 동등한 민주적 시민인 우리는 슬기로운 상상력과 연민어린 사랑 덕분에 자신 안에 세계를 담고 있다. “나는 공감을 입증하는 사람”(LG 22. 461)이라고 시인은
선언한다. 따라서 “공감하지 않으며 길을 걷는 자는 누구든지
수의를 걸치고 자신의 장례식으로 걸어가는 것이다”(SM 48. 1272). 그리고 이승적 사랑의 결함들은
어떤 기성의 신념 체계가 아니라 –시인은 “종파나 학파는
접어두자”고 말하기 때문이다(SM 1. 10) –동등한 사랑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도록 공감의 원환들을 외부로 확대할 수 있는 개인의 능력에 의해 극복될 수 있다.
“지금이라는 것보다 더 나은 완벽이란 없을 것이고/지금이라는 것보다
더 나은 천국이나 지옥도 없을 것이다”(SM 3. 42~43). 단지 삶만이 있을 뿐. 그것은 부단히 자신을 갱신한다.
그것이 노예경매의 범죄이다. 모든 육체는
동등하게 존중받을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육체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우리는 자신을 자신에게 똑같이 궁핍하며, 유한하고 필멸인 존재로, 또한 똑같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존재로 드러낸다. 우리는 동등한 지원뿐만 아니라 동등한 존중과 사랑의 토대를 발견한다. 그러면
일부 육체는 단순한 살덩어리로 다루고 다른 육체는 영혼으로 다루는 태도의 추함과 비합리성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노예건 자유민이건, 노동자건 관리자건, 이주민이건, 원주민이건, 부유하건 가난한던 “각자는
모두 행렬에 자기 위치를 갖고”(BE 6. 88) 있음을 볼 수 있다.
『에밀』에서의 루소와 아주 흡사한 방식으로(6장을 참조하라) 휘트먼은 공통의 육체적 인간성과 취약성에 대한 지각을 고도로 비판적이며 도덕적으로 공격적인 공감의 발생과 연결시킨다. 우리의 인간성을 생각한다는 것은 일부 집단을 예속시켜 단순한 사물로 다루는 권력의 위계들은 인위적이며 옹호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휘트먼에 의한 섹스의 복권은 그의 비판자들이 종종 주장하듯이 섹스에 대한 가볍고 난잡한
접근인 ‘자유연애’에 대한 승인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그와 정반대로 산문뿐만 아니라 시에서도 그는 근엄한 모럴리스트로 성적 문란과 성의 상품화, 특히 사람들을 포르노의 대상으로 삼는 것 –그는 이것을 민주적 목표와
과정을 심하게 파괴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을 통렬히 비난한다. 하지만
로런스와 흡사하게 그는 포르노에서 표현되는 섹스에 대한 호색적인 태도, 그리고 섹스 산업으로 대변되는
성의 상업화를 에로틱한 욕망의 불가피한 양상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에 대한 청교도주의적 거부의 양상들로, 진정
에로틱한 시선에 대한 아메리카의 공포와 동류의 양상을 간주한다. 휘트먼은 사람들에 대한 이러한 형태의
잘못된 관계를 아메리카의 다른 왜곡된 형태들과, 특히 자연에 대한 착취적 태도 –자연은 자신의 필멸성을 거부하는 사람에 의해서는 생사를 넘어 연속되는 외경스러운 존재로 바라보여질 수 없다– 와 끈질기게 결부시킨다. 자연에 대한 시인의 사랑을 성적 여성의
인간성에 대한 인정과 연관시키면서 휘트먼은 1860년에 아래 시구를 흔히 볼 수 있는 창녀에게 바치고
있다. “태양이 그대를 내쫓지 않는 한 나는 그대를 내쫓지 않소/물길이
그대 위해 반짝이길 마다하고 나무 잎사귀가 그대 위해 살랑거리길 마다하지 않는 한/내 말은 그대 위해
반짝이며 살랑댈 것이오.”
이 목표들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휘트먼은 말러와 아주 흡사하게 공동체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민의 힘을 강조하며, 또한 사랑의 성공적 갱신에서 민주적 평등과 호혜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말러처럼 그는 이 목표들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랑은 에로틱해야 하며, 자신의 이승적 분투를 목적 그 자체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두
사람 모두 비록 각자에 고유한 방식으로 종교적이지만 관습적인 종교를 거부하고 예술가의 상상력의 역할을 크게 강조하는 보다 개인적인 영성을 선호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검토한 모든 설명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모두 일상적 삶을 거부한다.
이 모든 작품은 이처럼 각각의 작품이 구성하는 독자와 현실적 삶 속의 독자 사이에
넓은 간극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저 위를 주목하도록 사람들을 몰고 가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이다. 하지만 이 전략은 우리가 여전히 우리임을 발견했을 때 분노와 혐오감을 악화시킬 수 있는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
윤리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쇼비니즘은 사랑, 따라서 삶과 정반대되는 “모욕 그리고 증오”의 주요한 원천이다. 결국 –블룸은 이렇게 말한다– 어쨌든
“같은 지역 안에 살고 있는 같은 백성”(602)이 아니라면
민족이란 무엇인가? –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을 전혀 만족시키지 못할 김빠진 규정이다. 블룸은 이를 이렇게 요약한다. “나는 어떠한 형태나 형식이든 폭력이나
편협성을 불쾌하게 여기네.” “모퉁이 근처에 살면서 다른 국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들을 증오한다는 것은
확실히 불합리한 짓이지, 말하자면 옆집에 말이야”(1089)
조이스는 이상주의적이든 아니면 결함이 있는, 헌신적이든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든 사람들이 온전히 나아가 되는 것을 허용할 분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러한 ‘예’ –조이스는
이렇게 암시한다– 가 건전한 정치적 삶, 즉 민주적이고 보편주의적이며
따라서 자유주의적인 삶의 핵심적 토대로, 거기서 인간의 자유는 copriright의
법칙에 의해 보호받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 등정적 전통은 자기증오와 타자들에
대한 증오의 공범일 수도 있다는 의구심이 대상이 된다.
창조적 개인의 몸과 영혼의 분투에 대한 말러의 의기양양한 긍정은 주목할 만한 방식으로
이 딜레마를 가로지른다. 우리의 분투는 자체가 하나의 목적임을 간파함으로써, 우리가 이 세상에서 헌신하는 일들의 고결함을 믿고 앞으로 나감으로써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려는 의지 자체에
의해 증오심을 물리친다. 등정에 대한 이 견해는 여러모로 이상으로는 내가 가장 완벽한 것으로 여기는
것으로, 사랑이 어떻게 증오를 이길지 하는 질문과 관련해 최고의 대답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혐오감에서 나온 이 비명은 말러의 작품이 보여주는 대로 자체가 이상에 대한
모든 지속적 헌신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 따라서 또한 현실적인 것에 대해서도 자비와 사랑을 보여주는
관념론이 요구되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사랑하는 개인들은 다져서 양념한 통조림 고기를 먹고 요강을
사용하는 등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동시에 원대한 낭만적 갈망과 영혼에 대한 진지한 믿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포함하는 정의에 대한 헌신이. 우리가 연속적으로 살펴본 것 중에서는 오직 폴디와 몰리만이 둘 사이의 사랑의 아주 코믹한 단편성 속에서 영혼을
포함해 사랑에서 가장 인간적인 것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오직 이 텍스트만이 현실 속의
삶을 사는 독자의 사랑을 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다 관념론적인 등정론들이 현실적인 것을 용납하지
못함으로써 자체 속으로 붕괴되어 들어가지 않도록 필요한 것을 보충해주는 방식으로.
『율리시스』의 거꾸로 뒤집힌 사다리는 불완전함은 우리의 인간적 이상과 사람들에 대해
당연히 예상해야 할 것임을 상기시킨 바 있다. 그것은 사다리를 올라갈 것을 요구하지만 종종 그것을 뒤집어
침대 속이나 요강에 앉은 현실의 사람을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오직 그런 식으로만 이상으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을 수 있다. 오직 그런 식으로만 모든 이상 속에 내재해있는 유혹, 즉 그저 인간적이고 일상적인 것을 경멸하려는 유혹을 극복 할 수 있다.
등정의 정신을 인정하는 동시에 부드럽게 조롱하는 폴디와 몰리로 논의를 끝마치는 것을
통해 나는 심지어 현실 생활의 불완전한 형태에서, 실로 특히 인간적 삶의 불완전함과 놀라움이 증오되기보다는
받아들여지는 그처럼 불완전한 형태에서 여러 감정(연민, 슬픔) 중 사랑과 이 사랑의 동맹자들은 우리 텍스트들이 식별해낸 다양한 형태의 증오를 낳기보다는 다른 집단과 민족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정치의 토대를 이루는 사회 정의로 나갈 수 있는 강력한 안내를 제공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시도해왔다. 우리는 폴디가 돌연 스피노자를 저버리는 것에서, 몰리의 변덕스런
욕망에서, 놀라움과 수동성이 텍스트의 움직임 속에서 포용되는 방식에서 우리의 보다 지고한 다른 비전들과
결합시킬 필요가 있는 자비와 공평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의문의 여지없이 어떤 것에 관심을 보이고 욕망하는
것이 한결같지 않게 간헐성을 띠는 것 –이것은 우리 자신의 상상 속에 내재해 있다– 을 우리 자신이 관용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