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격동 : 1 인정과 욕망

롤즈는 칸트가 훌륭한 윤리적 행위 주체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장치로부터 연민을 갖도록 하는 감정을 빼뜨린 것에 대한 쇼펜하우어의 비판에 응답하면서 그러한 결합이 실제로 쇼펜하우어가 칸트적 합리성보다 우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의 모델을 제공해준다고 말한다. 롤즈는 자기이익과 무지의 결합을 연민과 정보의 결합보다 선호하는데, 자신의 전략이 더 많은 확실한 결과를 낳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이 두 전략이 아주 내밀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민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상력의 운동은 몇 가지 방식으로 차단될 수 있다. 루소의 주장에 따르면 한 가지 장애물은 계급과 신분(그리고 우리는 쉽게 종교, 인종, 민족, 남녀라는 구별짓기를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에 따른 사회적 구별짓기에 의해 제공된다. 이러한 구별짓기는 첨예한 사회적 형태가 주어질 때 연민을 방해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나도 언젠가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는 것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 어려움은 사람을 범주별로 분류해 서로 분리시키는 모든 사회적 체계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루소 말대로 위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특히 첨예하게 드러난다. 이 상황에서는 특권 집단이 자신의 전망을 열등한 집단보다 훨씬 더 우월한 것으로 규정하며, 심지어 자신을 끄떡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데까지 이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무엇인가를 갖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강렬한 질투심을 느낀다. 상실감과 슬픔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좌절을 원한으로 전환시킨다. 실제로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이 세상을 맘대로 하는 것을 위협한다. 어떤 경쟁자도 세상을 맘대로 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감정이입뿐만 아니라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 모두를 거부한다. 그러한 사람이 연민 같은 것을 가질리 없음은 너무나 자명하다.

따라서 폭넓고 바람직한 연민을 가르치길 바라는 사회에게 주어지는 핵심적인 도전은 수치심과 혐오감의 이러한 이상비대성 버전들 이면에 놓인 메커니즘과 싸우며 자신의 인간성과 함께 살 수 있는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쉽지는 않을 것이다. 도저히 쉬울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저런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다.

예술을 통해 연민을 발전시키기 위해 당연히 우리가 의지하게 될 내러티브는 비극적 곤경의 내러티브로, 특히 현저하게 고전의 비극 드라마 자체를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필록테스 이야기가 그것으로, 그는 본인은 아무 잘못도 없는데도 끔찍한 고통을 당한다. 우리는 쉽게 그러한 예술작품들은 연민뿐만 아니라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불러옴으로써 청중에게 연민을 촉진함을 볼 수 있다.

이와 비슷하게 스토아학파적 무관심의 가장 충격적인 측면 심지어 제 자식을 포함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마음 아파하지 말라는 명령은 스토아학파의 평등주의적 코즈모폴리터니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모든 인간 존재는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우리는 기본적으로 가족이나 도시국가의 성원이 아니라 kosmoploitai, 세계의 도시국가의 성원이다. 이것은 우리가 만인에 대해 동일한 관심을 가져야 하며, 동일한 관심은 친족에 대한 특수한 애착과는 양립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가족의 성원이나 동료 시민에게 편중된 양의 관심과 에너지를 쏟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는데, 그것이 삶이 우리를 놓아둔 위치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곳에서 도움이 되려고 시도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기 가족에게 얼마나 특수한 가치나 양을 부여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조직적 쟁점이 편중된 투자를 정단화해준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스의 스토아학파는 이보다 더 멀리 나가 가족의 존재 자체가 본래적인 의미의 관심 자체를 위태롭게 하며 질투심과 적대감을 낳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아이들은 공동으로 양육되어야 한다.

이 두 비전은 각각 자체에 고유한 방식으로 평등뿐만 아니라 자유를 추구한다. 전자는 기본적 욕구에 대한 동등한 지원을 겨냥하며, 그것을 통해 자유로운 선택과 자기실현을 위한 동등한 기회를 촉진시키길 바란다. 후자는 내적 자유라는 사실 어떠한 불행도 제거할 수 없는 사실로부터 시작하며, 이 사실 속에서 정치적 평등의 원천을 발견한다. 전자는 선택의 자유를 완전히 인간적인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도록 해줄 세속적 배치들을 통해 사람들을 위해 쌓아올려져야 할 어떤 것으로 바라본다. 후자는 자유를 양도 불가능한 소여, 모든 물직적 배치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간주한다. 전자는 고통에 대한 상상과 관심의 점진적 확대를 통해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정념을 물리치는 것을 겨냥한다. 후자는 그러한 정념을 완전히 제거하고, 앙갚음을 자제와 자비로 극복하는 것을 겨냥한다. 전자는 인정 많음을 통해 자선을 베풀려고 시도한다. 후자는 칸트와 함께 그러한 인정 많음은 인간 존재들 사이에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자는 인간의 허약성이 인간을 사교적으로 만든다고 주장한다. 후자는 유약함은 공통체에 대한 장애물이며, 오직 진정 자족적인 인간만이 진정한 친구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연민의 지지자와 적 사이의 논쟁은 공적 삶에서의 선택에 영향을 미쳐야 하는 사유 과정의 유형이나 능력의 유형과 관련된 단순한 형식적 논쟁이 결코 아님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또한 이성의 열렬한 옹호자와 어떤 무심하고 비인지적인 힘의 열렬한 옹호자 사이의 논쟁도 아니다. 그것은 윤리적 가치에 관한 실질적 논쟁이다. 이제 우리는 이 논쟁에 대한 판정을 내려야 한다.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해 연민을 갖는 것과 그러한 사람의 위엄에 대해 존경심을 갖는 것 사이에 왜 전부 아니면 전무 식의 선택을 강요받아야 할까? 그렇게 구분한 다음 운명이 초래한 잘못과 관련해 연민을 갖는 동시에 훌륭한 사람이 그러한 재난을 힘껏 견뎌내는 방식에 존경심과 경외심을 가질 수는 없을까? 인간성을 볼 때 그것을 존중하려면 그의 도덕적 인간성이 상실을 상쇄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탁월함을 스토아학파가 바라는 대로 존중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도덕적 능력을 미덕을 위해 이용하는 것으로 인간이 훌륭한 삶을 사는 데 충분하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 상실은 심각한 상실이 아니었다는 스토아학파적 입장을 택한다면 실제로 이 경우 우리가 어떤 것을 존중하게 될지를 알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만약 그렇다면 사건을 위엄 있게 견뎌내는 불굴의 용기는 어디 있어야 할까? 비극은 비극의 주인공들이 아이들의 죽음, 강간, 전쟁, 물질적 박탈에 의해 전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그처럼 끔찍한 일들이 그러한 인격의 핵심 자체를 어떻게 찌르는지를 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파괴하지는 않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탁월함에 대한 경탄을 끌어낸다.

다른 한편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과 결합해 나타나는 한 연민 자체는 공통의 인간성이라는 생각을 포함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이런 식으로 그것은 존중의 적이 아니라 동지인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타인들의 동등한 인간성에 대해 우리가 가진 존중은 그들의 물질적 행복에 대한 무관심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강력한 관심으로 이어져야 할 것처럼 보인다. 특정한 개인이 인간적 능력의 담지자라는 사실은 그에게 물질적 관심을 요구할 권리를 부여하는데, 그리하여 그러한 능력은 적절한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자원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거나 아니면 어려움은 인간 존재에게서 훌륭한 삶을 박탈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러한 능력을 제대로 존중할 수 없다.

그러한 구분을 위해 연민은 기본적인 인간적 재화에 대한 적절한 이론과 결합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처럼 형편없는 이론을 갖게 될 것이라고 추정할 이유는 없다.

연민 속에 구현되어 있는 가치평가를 좋은 것으로 승인하지 못하는 칸트의 실패는 정념을 비인지적인 것으로 보는 그의 일반적 관점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또 다른 원천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본성상 보다 인지적이다. 칸트는 연민의 대상이 되는 것에는 뭔가 모욕적인 것이 있다는 깊은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존중과 자기존중은 너무 많은 사랑의 관심이 아니라 거리를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실천적 사랑이라는 원리는 가까움과 주의 깊은 관심을 명한다. 칸트는 이 두 가지 도덕적 힘은 균형을 이룰 수 있지만 훌륭한 도덕적 주체를 어느 정도는 모순적인 방향으로 끌어당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만약 우리 능력이 육체적 능력이라면 육체적으로 필수적인 조건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수미일관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니체는 당시의 민주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루소에 의해 발전된 친-연민적 전통은 외적 재화에 대한 연민의 생각을 민주주의적-평등주의적 사유의 현대적 발전을 위한 토대로 만들었다. 하지만 지체는 기본적인 생각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에 루소가 하려고 했던 것을 보지 못한다.

이의제기는 연민의 소중한 감정으로, 핵심적 사례에서는 진정한 믿음에 기반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것의 판단 각각이 정확한 윤리적 이론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심각함에 대한 판단은 외적 재화의 가치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필요로 한다. 부당성에 대한 판단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행복주의적 판단은 본연의 관심에 대한 정확한 이론을 필요로 한다. 문제는 단순히 사회가 종종 이 영역에서 잘못된 이론을 가르친다는 것만이 아니다. 그것이 연민을 버리고 보다 추상적인 규칙의 체계로 옮겨가는 이유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규칙 또한 오류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간 존재가 전형적으로 연민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에 이르도록 해주는 심리학적 메커니즘이 전형적으로 그것을 원리상 협소하고 불평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감과 상상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발달에 대한 설명이 그래도 타당성이 있다면 사람들은 유아기의 강렬한 특수한 애착을 통한 처리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죄책감과 감사함을 통해 서서히 그러한 애착을 확대하지는 않고는, 연민의 특징을 이루는 상상을 통해 관심사를 확장하지 않고는 이타주의에 이르지 못한다. 연민은 타인에게 좋은 것을 우리의 상상들의 근본적으로 (이기적이 아닌) 행복주의적인 구조와 우리의 가장 강력한 관심과 결합시키기 위한 우리 인간이라는 종의 방식이다. 타인들에게 좋다는 말은 추상적으로는 또는 그렇게 되기 전에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이 매우 중요해지기 시작하는 것은 그거이 우리가 이미 부모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함께, 편안함과 안전에 대한 열정적 요구와 함께이해하고 있는 것과 관계를 맺게 될 때이다. 인간적(반드시 신성한 것은 아니지만) 연민에서 중요한 메커니즘인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상상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중요한 도덕적 작업을 수행한다. 전통적으로 사람들은 오직 다른 사람에게 좋고 나쁨을 상상할 수 있을 때만 도덕적 관심을 타인들에게까지 완전히 확대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는 우리 각자가 일군의 동심원 속에서 산다고 상상해 보자고 말한다. –가장 가까운 존재는 자신의 육체이며, 가장 먼 존재는 인간 존재들이라는 우주 전체이다. 도덕적 발단의 과제는 이 원들을 점점 더 중심에 가깝게 움직여나가며, 그리하여 부모는 자신처럼, 다른 친인척은 부모처럼, 이방인은 친인척 등처럼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처음부터 동등한 관심을 또는 규범적으로 올바른 다른 어떤 유형의 적절히 순위가 매겨진 관심을 요구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어떤 인간 정신도 그것을 성취할 수 없다. 자신이 이해하는 바의 의미들에 기반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절박함이 없는 평등만 남게 된다.

그와 반대로 상상력과 연민이 떠올려주는 이 연관성들의 손길이라고는 닿지 않은 추상적인 도덕 이론은 쉽게 사악한 목적에 전용될 수 있는데, 그것의 인간적 의미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연민의 특징을 이루는 판단은 완벽한 성인의 합리성의 건강함을 위해 핵심적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민 자체는 우리가 타인에게 좋고 나쁨을, 그리고 그것의 완전한 의미를 보는 눈이라는 결혼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계산적인 지성의 추상적 시선은 가치에 맹목적이게 된다.

우리는 대담하게 스토아학파에게 분노는 종종 정당화될 수 있으며 올바른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은 불의와 심각한 잘못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다. 실로 분노를 멸절시키면 사회정의와 억눌린 자들을 옹호하기 위한 주요한 힘을 멸절시키게 될 것이다. 만약 분노가 부적절한 대상에게까지 넘쳐 흐를까봐 걱정이라면 그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야지 분노를 완전히 제거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연민은 오직 기본재의 가치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갖출 때만, 오직 행위 주체와 잘못에 대한 적절한 이론을 갖출 때만, 그리고 오직 가까운 사람뿐만 아니라 먼 사람까지 포함해 행위 주체의 관심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에 대한 알맞게 포괄적인 이론을 갖출 때만 귀중한 사회적 동기가 될 것이다. 이 판단들은 훌륭한 발달 과정을 통해 생성되어야 한다. 다른 한편 연민은 핵심적인 삶 그리고 도덕()과의 연관성을 제공하는데, 이것들이 없다면 연민은 위험할 정도로 공허하고 뿌리를 잃게 될 것이다. 그리스 비극에서 제대로 재현되는 핵심적 사례에서 연민은 정확한 가치평가를 구현하며, 우리의 관심을 우리와 공동의 인간성을 공유하는 사람을 향하도록 한다. 유아기의 관계들에서 배우는 이 연관성들은 도덕()을 둔감할 것보다는 분별력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데서 중요하다. 따라서 연민은 존중에 대해 반드시 필요한 보완물로, 그것이 없다면 칸트의 주장대로 선행은 에너지를 결여할 가능성이 크다(칸트가 제시하는 것보다는 휠씬 더 인지적인 이유에서). 우리는 오직 연민이라는 동기만을 통해 좋은 사회를 만들려고 해서는 안되는데, 연민이 별나고 신뢰 불가능하기보다는 가치 있는 것으로 입증되는 것은 말하자면 이성의 한계 내에서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그런 식으로 제한된다면 그것은 아이의 협소하고 자기 참조적인 관심사에 훨씬 더 넓은 도덕적 세계로 이어주는 극히 중요한 다리를 마련해줄 것이다.

즉 타인의 고통에 슬퍼하라는 요청이 그를 도우려는 행동이 아니라 방종과 자축적인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연민을 경험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훌륭한 일을 했다고 너무 쉽게 느낀다.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어떤 조치이것은 이들을 진짜 어려움과 희생 속에 끌어들이게 될 것이다도 취하지 않은 채 말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회에 적절한 연민을 고취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연민에 기반한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연민은 공적 도덕성에 윤리적 시각 이것 없이는 모든 공적 문화는 위험할 정도로 뿌리를 잃고 공허하게 될 것이다에 핵심적인 요소를 제공한다고 생각할 이유가 충분한 만큼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제도와 관련해 연민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 체제는 인간적이며, 오직 인간적 방식으로 살아 있는 한에서만 좋은 것이다.

루소와 토크빌 공히 보여주듯이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은 제도가 사람들을 서로 관련을 맺도록 하는 방식에 의해 심오한 영향을 받는다.

비극은 엄청난 불행이 인간적 행위의 심장부를 강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재앙은 단지 피상적인 불편만 초래하지 않으며 이동성, 계획, 시민권, 궁극적으로 삶 자체를 방해한다. 다른 한편 이 재앙이 인간적 주체를 강타할 때 우리가 비극적 연민의 감정을 갖는 것은 바로 그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성이 허비되는 것을, 또는 심지어 매정하게 처분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아주 복잡한 상황에서 제대로 평가하기가 어려운 점을 고려해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이 실수들에 대한 그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심지어 기본적으로 훌륭한 사람도 잘못을 한다. 용서하는 태도가 전반적 유약함과 인간이 내리는 판단의 취약성에 적절할 것이다. 어떤 사람의 비난받을 만한 실수를 용서하는 정신에 따라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아무리 최선의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우리 자신이 판단에서 완벽하지 않음을 밝히는 셈이다.

비거 같은 범죄자에 대해 그가 범죄에 대해 완전히 책임이 있는 것으로 다루는 것과, 동시에 그가 어떤 아이도 견뎌서는 안 되는 불행을 겪었음을 연민어린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은 완전히 일관된다. 오직 이 점을 인정할 때만 사회적 위계와 경제적 박탈에 따른 비용을 온전히 추정할 수 있다. 스타인벡은 정말 부자들을 편안하게 해준다. 불평등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불행뿐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만약 불평등이 인격 자체 속에까지 깊이 뿌리 내려 분노와 원한, 나쁜 성격의 뿌리를 낳는다는 걸 이해한다면 모든 아이에게 인간의 존엄성이 요구하는 물질적사회적 지원을 제공하는 데 참여할 훨씬 더 깊은 동기를 갖게 될 것이다. 연민을 가진 사회는 소포클레스적 비극이 암시하는 의미에서 내 행위와는 무관하게 시민에게 닥칠 수 있는 피해를 충분히 가늠하는 사회이다. 따라서 연민은 인간의 존엄성을 뒷받침하고 보호하는 기본적 지원을 모든 사람에게 확보해주려는 동기를 마련해준다.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사회는 기초적인 복지 후생을 일련의 특히 중요한 영역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일군의 역량이나 기회로 묘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중요한 것으로 입증될 인간의 삶의 몇몇 핵심영역에서 제대로 기능할 수 있는 일군의 기본적인 기회를 모든 시민에게 보장해야 한다(다원주의 기회와 역량을 제공하는 것에 의해, 따라서 시민들에게 자신들이 갖게 되는 기회에 맞추어 기능할지 여부를 선택할 수 있는 풍부한 여지를 허용함으로써 존중된다).

핵심적인 인간 역량

1.    생명. 정상 수명이 끝날 때까지 살 것.

2.    신체적 건강. 재생산적 건강을 포함해 신체가 양호할 것.

3.    신체적 통합성. 자유롭게 장소를 이동할 수 있을 것.

4.    감각, 상상, 사유. 감각을 사용하고, 상상하고, 사유하고, 추론 할 수 있을 것.

5.    감정. 외부의 사물과 인간들에게 애착을 가질 수 있을 것.

6.    실천이상. 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형성하고 자기 삶을 계획하는 것에 관한 비판적 성찰에 뛰어들 수 있을 것(이것은 양심과 종교 의식의 자유에 대한 보호를 포함한다).

7.    귀속. A. 타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은 향해 살고,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관심을 인식하고 보여주고,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참여할 수 있을 것. B. 자기존중 및 모욕당하지 않을 사회적 토대를 가질 것.

8.    다른 종. 동물, 식물, 그리고 자연의 세계에 대한 관심과 함께 그리고 그것과 관련을 맺고 살 수 있을 것.

9.    놀이. 웃고, 놀고, 레크리에이션 활동을 즐길 수 있을 것.

10.  자신의 환경에 대한 통제. A. 정치적인 것. B. 물질적인 것.

사람들을 서로 가까이 놓음으로써 이 체제는 타자의 곤경 속에서 자신의 곤경을 보는 것을 더 쉽게 만들어준다.

국경 바깥에 있는 사람에 대한 우리의 극히 불균등하고 신뢰할 만하지 않은 연민은 대부분 우리의 극히 불균등하고 신뢰할 만하지 않은 연민은 대부분 우리를 함께 삶의 공통 형태속에 놓아줄 수 있는 모든 효율적인 제도적 구조가 부재한 데서 원인을 추적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의 비극적 곤경 속에서 우리 자신도 그렇게 될 가능성을 아주 충분히 인식할 수 있고 또 종종 실제로 그렇게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은 정말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랑과 연민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가치들과 관련해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그가 알다시피 그러한 연민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법적 구조에 의해 형성된다.

사회가 만약 시간, 나이, 유악함, 질병의 온갖 부침에 종속된 인간적 몸을 가진 건 하등 부끄러울 게 없다는 생각을 전달할 수 있다면 공적 삶에 미치는 원초적 수치심을 감소시킬 가능성이 가장 커진다. 젊은이들에게는 (또래 또는 연장자의) 그러한 몸을 경멸감과 공격성 이것은 너무나 자주 자신도 그렇게 될 가능성에 대한 원초적 수치심을 동반한다이 아니라 존경심과 우정을 갖고 바라보도록 촉구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육제적이고/또는 정신적으로 극단적으로 의존적인 사람들을 돌보는 것을 주요한 사회적 선으로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문화는 더 이상 시민이 모두 독립적인 합리적 성인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자유주의적인 사회 계약론이 조종 그렇게 주장하는 바와 달리 말이다. 이 사회는 모든 사람이 무엇인가를 필요로 함을,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극단적인 의존 상태에서 삶을 시작하며 많은 사람은 그러한 상태에서 삶을 마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정신박약아와 신체장애우의 존엄성을 지원하기 위한 최근의 노력([장애 아동과 특수 아동의] 특별[차별] 교육 철폐, 적절한 교육에 대한 지원)도 그와 비슷하게 유약함과 연약함을 수치심이나 혐오감 없이 바라볼 것을 요구한다.

공감 및 나도 비슷하게 될 가능성에 대한 판단 이것은 관심의 확대를 지지한다 이것 중 많은 것은 사적으로, 가족 내부에서 이루어질 것이고 또한 그렇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모든 사회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시민 됨 그리고 훌륭한 시민적 판단의 이상을 수용할 것을 가르친다. 그리고 실제로 연민에 대한 교육을 지지하는 몇몇 구체적인 실천 전략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들 없이는 둔감하고 감정이 죽은 시민들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며, 그들은 타자의 이미지에 무감각한 내면 세계를 너무나 자주 동반하는 공격적 바람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예술을 교과 과정에서 제외하는 것은 병리적 나르시시즘을 낳는, 어떤 사안이 인간적으로 중요하다는 인식을 해당되는 다른 사람과 연관시키는 데 어려움을 가진 시민을 낳는 처방일 뿐이다.

그리고 단지 이들만을 위한 것도 아니다. 성인들은 항상 경험을 확대하고, 핵심적인 윤리적 진리에 대한 파악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미래의 젊은 시민에게 비극은 특수한 중요성을 가진다. 그러한 관객은 이 과정에서 연민을 배우기 때문이다.

특수한 사회적 장애물을 넘어 공감을 촉진시키려면 그러한 장애물과 그것의 의미를 아주 구체적이 방식으로 제시하는 예술작품에 의지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계급, 인종, 국적, 자신과는 다른 성적 지향에 대한 사실을 배워야 한다는 것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상을 통해 이 삶 속으로 끌려들어가야 하며 그러한 투쟁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미디어는 숙고적 도구이다.

게다가 모든 것에서 다산에 가득 찼던 아 어머니여, 얼마나 오랫동안 불임에 불임을 거듭했던가?

이 이유로 경제학자 센은 복지와 개발의 초점은 마치 자체로 어떤 가치를 갖기라도 한 듯 자원 자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역량이 중요한 방식으로 기능하는 것을 지원하는 데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에 두어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나는 모든 시민에게 헌법의 기본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이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역량이라는 접근법을 사용해왔다. 그동안 이와 동일한 접근법은 국제기구들의 복지 측정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UNDP가 고인이 된 울 하크의 후원 하에 1990년부터 속간해온 『인간 개발 보고서』 시리즈는 복수형으로 복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며 경제적 척도들이 몇몇 핵심적인 영역에서 기능할 수 있는 시민 역량에 대해 가진 인간적 의미를 강조해왔다. 거기에는 개발은 인간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경제를 자체에 고유한 생명을 가진 엔진으로 다루기보다는 상이한 종류의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들의 상이한 종류의 삶의 영역에서 경제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의 오류 가능성이 모든 믿음을 빼버리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어서는 안되듯이 연민의 오류 가능성이 법적 숙고로부터 그것을 완전히 빼버리도록 유도해서는 안 된다.

법의 인간적 의미와 영향을 이해해 보려고는 하지 않은 채 동등한 보호라는 쟁점에 외적이고 형식적으로 접근한다면 그러한 법률들은 평등에 대해서는 둔감하기 쉬우며 동등한 보호를 위해서는 형식적 중립성으로 충분한 것으로 간주하며 시민들에게 법의 보호라는 진정 동등한 가치를 부정하는 데서 인종과 젠더라는 위계체계가 하는 역할을 놓치고 말 것이다.

따라서 내러티브가 더 많다고 해서 항상 더 좋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을 아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한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서 나타나는 특수한 결함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이유에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 내러티브를 도입해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혐오감은 정확한 공적 선택, 합리적 공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 경우 그것은 또한 합리적인 자기비판을 가로막는 장애물인 반면 얼마든지 나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은 건강한 자기비판을 촉진한다.

혐오감과 원초적 수치심은 공적 숙고에 아무런 소중한 것도 제공하지 못하며, 심지 이간을 고급과 저급이라는 두 부류로 나눔으로써 그것을 훼손한다. 모든 감정은 동등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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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정의 격동 : 3 사랑의 등정
    from 木筆 2017-01-22 12:00 
    감정이 윤리(학)에 어던기여를 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려는 모든 시도는 이처럼 아무리 부분적이더라도 모두 에로틱한 사랑의 애증병존성과 과도함을 다루어야 한다.하지만 에로틱한 사랑의 제거가 과연 연민과 다른 감정을 그대로 놔둘지 의심할 수 있는 이유가 실제로 존재한다. 친구 사이의 사랑은 모두 실제로는 은폐된 에로틱한 사랑이라는 프루스트의 주장은 너무 멀리 나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 두 감정이 너무 긴밀하게 서로 뒤얽혀 있어 만약 에로틱한 사랑을 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