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지막 바이킹 관련 영화를 소개하도록 하겠다(따지고 보면 바이킹 관련 영화가 참 적다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다).

제목 그대로 '이방인'이라는 의미인데, 내용은 다소 식상하다. 앞서 <패쓰파인더>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 영화도 전체적인 줄기는 이와 비슷하다. 패쓰파인더에서 주인공이 인디언이고, 외부에서 바이킹족이 쳐들어왔다면 이 영화에서는 바이킹족이 주인공이고 외계인이 쳐들어오는 스토리다. 잉? 왠 외계인?? 앞서 필자가 <드래곤 길들이기>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 바이킹에 대한 다소 환상적이면서도 뭔가 심오한 이미지가 판타지적인 영화를 내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한 바 있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바이킹족이 가진 야만성(?) 혹은 와일드함, 거칠고 강인한 전사적 이미지가 외계인이라는 조합과 어울려 이 영화를 탄생시킨 것 같다. 또한,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 <언더월드 1 : 라이칸의 반란>을 만든 감독인데 개인적으로 그 영화를 좋아하기도 해서(딱 그 영화라기보다 그 시리즈물 전체를 좋아한다) 개인적으로 어느 정도 기대를 하고 이 영화를 봤다.

일단 전체적인 분위기는 상당히 음침하고 어두워서 좋다(?). 그리고 스토리 또한 B급 영화로 치부하기에는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역시 시대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배경은 노르웨이의 어느 바이킹족 마을이다. 우주선 1척이 불시착하고 물 속에서 우주복을 입은 외계인 2명이 나온다. 1명은 이미 죽은 상태였지만 나머지 1명은 멀쩡하게 살아 있었다. 그리고 그 1명은 누군가에게 잡혀가는데, 그들이 바로 바이킹족이었다. 처음에 이 '아웃랜더'를 못 믿은 바이킹족은 얘를 잡아 가두고 족치기 시작한다. 그런데 당시 바이킹족에는 두 세력이 있었고, 그들은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 상황에서 바이킹족의 차기 족장이 될 울프릭이 속한 마을 주변의 취락 하나가 박살이 난다. 울프릭은 상대방 세력이 공격한 것으로 판단했고, 그 자리에 있던 외계인 카이난을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범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바로 무어웬이라고 불리는 외계 괴물이었다.

거기서 카이난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카이난이 속한 집단은 살만한 별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다가 어느 한 별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별의 원주인이 바로 덩치 큰 사자같이 생긴 무어웬들이 사는 동네였던 것이다.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을 지닌 카이난 집단은 무어웬을 싸그리 죽여버리고 그 별을 청소한 다음, 자신들이 살아갈 수 있게끔 개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떤 일로 인해 카이난은 지구로 불시착하게 됐고, 무어웬 한마리가 지구까지 따라오게 된 것이다.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테란족의 배틀 크루저같은 무기로 싸그리 죽였던 녀석들인만큼 무어웬 한마리가 지닌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그리고 서로 대립하던 두 바이킹족 마을은 힘을 합치게 되고, 카이난 역시 여기에 합세해 무어웬을 없앨 계획을 세운다. 그 과정에서 무어웬의 근거지까지 쳐들어가게 되고, 그 놈의 새끼까지 있는 상황에서 주인공 일행은 무어웬을 해치우는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차기 족장이었던 울프릭은 전사하고, 차기 대권(?)을 카이난에게 물려주고, 카이난은 호수 속에 불시착한 우주선 안에 갇혀 죽은 아내를 떠나 프레야라는 아가씨와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는 해피엔딩이다.

이 영화의 내용은 일단 이 정도이며, 액션씬이나 CG 수준도 상당히 수준급이다. 무어웬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세밀하며, 움직임이나 전체적인 화면 구도 자체가 굉장히 안정적이어서 '오~의외네~'라는 생각을 했다. 다른 블로거분들의 글을 보니 흐름이 뚝뚝 끊어지는 경향이 많았다고 하시는데, 필자 개인적으로는 무난했다고 생각한다. 갑자기 외계인이 등장한 것 자체를 뭐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암튼, 외부 세력이 아닌 외계인이라는 소재와의 조합 자체가 일단 신선했다고 본다. 또한, 처음에 사이가 좋지 않다가 점점 대립 구도를 없애고 하나로 힘을 합치는 과정도 그닥 나쁘지 않게 자연스러웠던 것 같다. 특히나 액션 중심의 오락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시대 고증에 상당히 신경을 쓴 부분들이 있어 좋았다.

먼저 바이킹족과 관련된 영화에서 많이 나오는 것들이 있다. 그건 바로 거대한 목조건물로 이뤄진 연회장과 그 안에서 뷔페식으로 벌어지는 활기차고 왁자지껄한 연회다. <베오울프>의 첫 장면을 장식한 것도 이것이며, <드래곤 길들이기>에서 주인공 히컵과 그 친구들의 심리 묘사가 주로 이뤄지는 곳 또한 연회장에서다. 여기에서도 그러한 장면은 절대 빠지지 않았다. 연회장에서 울프릭은 카이난에게 게임을 제안하고 그 게임과 연회를 통해서 카이난과 바이킹족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어깨 위에 방패를 올리고 그 위에 한명이 올라가 빨리 걷거나 뛰면서 그 위에서 재주를 부리는 게임인데, 바이킹족 중 최고라고 하는 울프릭 못지 않게 카이난이 이를 잘 수행함으로써 양측은 더 긴밀한 사이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게임에 착안한 카이난은 무어웬을 잡기 위한 함정을 팔때 이를 응용하기도 한다. 즉, 바이킹 특유의 문화적 현상을 영화 중간중간에 잘 집어넣어 스토리 전개에 무난하게 써먹었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가 바이킹 족장의 장례식장에 대한 묘사다. <베오울프>에 대한 리뷰에서는 이 얘기를 딱히 콕 짚어서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베오울프> 마지막 장면에서도 화려하게 불타는 왕의 무덤배에 대한 묘사가 멋있었다. 필자의 기억이 맞다면, 왕의 시신과 각종 금은보화를 실은 배가 불덩이가 떨어지는 바닷가의 계곡부를 지나면서 불타 점점 가라앉는 장면이었는데, 여기에서는 울프릭의 시신이 담긴 배에 카이난이 불화살을 날려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이 나왔다. 이는 바이킹족의 배로 된 무덤들이 발견되면서 우리가 바이킹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이미지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다(고고자료가 아니었다면 문헌기록이 부족한 바이킹족의 상황을 아는데 많이 부족했을 것이다). 리처드 루드글리의『바바리안 - 야만인 혹은 정복자』에서도 언급한 바가 있지만, 바이킹족의 삶은 고도로 조직된 제국적 시스템이 없었을 뿐, 상당히 수준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바이킹족의 독특한 장례행위는 바이킹에 대한 또 하나의 문화상을 알려주는 좋은 소재라고 할 수 있다. 바이킹과 관련된 영화에서 이런 장면이 안 나오면 아쉬울 정도다.

또한 무어웬을 잡기 위한 함정을 파는데, 바이킹 남자들이 나무삽을 갖고 땅을 파는 장면이 나왔다. '오홋!' 고증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감독이었다면 분명 철삽을 썼을텐데 별거 아닌 부분에 신경을 썼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밖에 바이킹족 마을을 공중에서 한바퀴 돌면서 보여주는 화면이 있었는데, 건물의 형태나 취락의 구조에 대해 어느 정도 신경을 썼다는 점을 느낄 수 있었다. 거기에다가 바이킹족들이 쓰는 무기(창이나 도끼, 활 등) 역시도 괜찮았다. 다만, 중간에 카이난이 무어웬을 벨 수 있는 무기를 만들기 위해 호수 속에 가라앉은 우주선 잔해를 갖다가 무기를 만드는 장면이 나오는데, '저렇게 단단한 녀석이 풀무질 몇번에 담금질해서 강해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긴 했다. 하지만 뭐 전반적으로 무리없이 스토리가 전개됐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을 듯 싶다.

이상이다. 지금껏 총 5편의 영화에 대해서 언급했는데 솔직히 이 리뷰들을 기획하게 된 계기가 바로 이 영화였다. 상당히 독특한 소재에 기대한 것 이상(기대를 워낙 많이 안 하긴 했지만)의 CG와 액션씬, 스토리 라인 등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저기 단순한 액션영화로 끝나지 않을만큼 고증에도 신경을 많이 써서 괜찮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된다. 앞으로 바이킹 관련된 영화가 얼마나 많이 나올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어떤 소재와 조합된 것이 나올지 상당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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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회 골든글로브시상식 장편애니메이션상 후보(2011)

23회 시카고비평가협회상 애니메이션상 후보(2010)

67회 베니스국제영화제 PERSOL 3-D상 수상(2010)

 
대단한 애니메이션이다, 이 영화. 아마 작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 중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부턴가, 애니메이션 하면 '디즈니!' 대신에 '드림웍스!'가 바로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그 유명한 <슈렉> 시리즈와 <쿵푸팬더> 시리즈를 내놓으면서 드림웍스가 새로운 스타일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작품 역시 드림웍스에서 야심차게 준비한만큼 상당히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가족 단위로 많이 가거나, 아이들이 즐겨 봤던 작품일텐데 어른들이 보더라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3D로 구현된 화면은 정말 애니메이션의 수준을 한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단 이 영화의 주인공은 바이킹 족장의 아들 히컵과 그의 애마(?) 투슬리스(이가 없다고 해서 주인공이 붙여준 이름이다)다. 배경은 바이킹의 마을이며, 시기는 당연히 모른다. 바이킹과 드래곤이 공존하는 동네에서 바이킹들은 정기적으로 가축을 약탈해가는 드래곤들을 막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그렇다고 그 과정이 전혀 지루하거나 진지하지도 않는다. 바이킹들에게 있어 드래곤과의 사투는 늘상 있는 일이며, 그런 드래곤과의 대결에서 두각을 드러내야만 진정한 바이킹으로서 인정을 받는데 도입부부터 이야기는 흥미롭게 흘러간다. 주인공 히컵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을 뿐, 체력이나 전투력(?)이 월등히 낮다. 그런데 우연히 마을로 쳐들어온 드래곤들을 향해 자기가 개발한 거대한 투창기를 쏘게 됐고, 하필이면 가장 빠르다고 알려진 드래곤(이름이 밤의 안개였나? 이름 까먹었다)이 여기에 맞는다. 

다음날 드래곤을 발견한 주인공. 그런데 다른 바이킹의 생각과 달리 가장 빠르고 흉폭하다고 알려진 드래곤은 사실 굉장히 작고 귀여운 모습이다. 그리고 주인공이 쏜 투창기에 꼬리 날개를 다친 드래곤은 하늘을 날지 못 한다. 그래서 주인공은 인공 날개를 달아주고, 안장을 얹어서 드래곤을 타고 다니기 시작한다. 드래곤에게 먹이도 주고, 투슬리스라는 이름도 지어주고, 드래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등 드래곤을 적이 아닌 친구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다른 바이킹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로서, 투슬리스 또한 주인공이 특별한 것을 알고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다. 그렇게 하루하루 즐거운 나날을 보내면서 주인공의 삶도 크게 달라진다. 예전에는 드래곤은 커녕 마을에서 제대로 하는 일도 없었던 주인공이 드래곤을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게 되고, 결국에는 마을에서 제일 용감한 전사로 뽑히기까지 한다.

항상 걱정이던 아들이 이제는 아주아주 듬직한 아들로 바뀌자 아버지(바이킹족 족장)는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하지만 이내 아들이 드래곤과 친하다는 것을 안 그의 아버지는 투슬리스를 이용해서 드래곤 소굴을 일망타진하려고 한다. 그렇게 대함대를 이끌고 떠난 바이킹들. 그래서 어떤 외딴 섬으로 다가갔는데, 세상에나. 거기에는 엄청나게 큰 드래곤 보스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드래곤들이 바이킹 마을에서 끊임없이 가축들을 납치해 갔던 것도 모두 이 드래곤 보스를 먹이기 위해서였고, 그것마저 부족한 이 녀석은 음식을 날라주던 드래곤들까지 잡아먹는 흉폭한 녀석이었다. 바이킹족은 난생 처음 보는 거대한 녀석때문에 얼어붙었고, 그때 히컵과 투슬리스는 거대한 드래곤을 상대로 훌륭하게 싸워 결국 이겨버린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흥미롭게 본 부분은 마지막에 나온다. 끝판 왕과 싸워 이기지만 거대한 드래곤이 폭발하면서 생긴 화염 속으로 히컵이 떨어지게 되고 투슬리스는 그런 히컵을 구하기 위해 불덩이 속으로 뛰어든다. 히컵의 아버지가 뛰어가고, 투슬리스의 날개 사이에서 목숨을 부지한 아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아버지의 표정이 바뀐다. 그리고 히컵은 집에 돌아왔고 잠에서 깼는데, 이게 왠 일. 다리 한쪽이 없는게 아닌가. 투슬리스처럼 주인공도 똑같이 불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게 의족을 달고 투슬리스에게 의지한 채 주인공은 집 밖으로 나서고, 집 밖에서는 드래곤들과 바이킹족이 평화로운 한때를 보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뭐랄까~마지막 반전이랄까? 주인공도 불구로 만들면서 인간과 드래곤의 교감을 극대화시킨 것이 아주 인상깊었다.

나중에 검색해보니 이 영화의 원작은 책이라고 한다.  
영국인 작가 크레시다 코엘이 어린이들을 위한 소설로 2003년에 발표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국내에도 번역판이 있으니 나중에 한번 읽어보려고 한다. 또한 영화에 나오는 음악도 좋은 것들이 많은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OST도 한번쯤 들어보기를 권하는 바이다.

또한, 이 영화에서 용(드래곤)이 등장하고, 드래곤과 인간의 관계가 처음에는 안 좋았다가 점점 좋아지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두고 어떤 이는 이 영화가 '안티 기독교 영화'라고 말하기도 한다. 애까사쩨님의 '행복한 진화론적 무신론자'라는 다음 블로그를 가 보니 이 영화를 두고 '세련된 안티 기독교 영화' (http://blog.daum.net/ekasacce/152)로 소개하고 있어 조금 독특했다. 뭐 대강의 내용은 이렇다. 서구 사회에서 용은 사탄이고 악마라서 절대로 인간과 양립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초반부에도 바이킹과 용들은 대립하지만 결국 화해를 하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는 안티 기독교 영화라는 것이다. 흐음. 정말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애니메이션 하나에 너무 많은 사상을 주입시킨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를 딱 보면서 든 생각은 '바이킹'이라는 존재가 상당히 미지의 존재이면서도 다소 국가체를 형성하지 못 하고 와일드하게 살아가는 그런 이미지가 강하구나~라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도시 국가를 이루고 한때 제국을 지향했던 그리스인들과 드래곤이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 어울릴까? 오히려 그리스하면 세련된 느낌의 신과 더 어울리지, 이런 괴수 혹은 드래곤과는 많이 어울리지는 않는다. 그럼 로마인과 드래곤? 에이...거기다가 드래곤과 거칠게 싸워가면서 자신의 삶의 터전을 지킨다는 설정 또한 바이킹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도와 아주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바이킹과 드래곤이라는 소재는 아주 적절하게 잘 조화되는 것 같고, 그 결과는 영화의 큰 성공과 직결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실제 영화 평가도 어마어마하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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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톰 홀랜드 지음, 이순호 옮김 / 책과함께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몇년 전에 후배가 생일 선물로 사줬던 건데 늘 중간중간 필요한 부분만 보고 말았다가 최근에야 다 읽었다.

이 책은 제목 그대로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책이다. 페르시아 전쟁?? 조금 의아해하실 분도 있을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이라면 뭘 말하는 거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책 표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책 표지에는 그리스군이 쓰는 투구가 그려져 있어 이 책이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에 벌어진 전쟁에 대해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그 옆에 <코란>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그리스군의 투구와 묘한 밸런스를 맞추고 있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유명한 전투는 알려진 것들이 몇몇 있다. 마라톤 전투, 테르모필라이 전투, 살라미스 해전 등등. 그리고 이 책에서는 이들 여러 개의 전투를 하나의 '문명대전'(그리스 vs 페르시아)으로 규명하여 포괄적으로 서술하고 있다(이는 마치 고-수, 고-당 전쟁에서 주목되는 몇몇 전투들, 예를 들면 살수대첩이나 안시성 전투 등을 주목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이를 하나의 문명대전으로 인식한 김용만의『고구려의 발견』,『새로 쓰는 연개소문전』과 같은 서술방식이었는데, 개인적으로 당시 시대사를 通史적으로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페르시아 전쟁이 세계사적으로 아주 중요하다고 하면서도 오히려 이에 대해 나온 책이 별로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그는 피터 그린(Peter Green)이 30년 전에 쓴『살라미스 해전이 일어난 해(The Year of Salamis)』가 일반독자를 상대로 출간된 마지막 작품이라고 하면서 이는 상당히 놀라운 결과라고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솔직히 이 책을 필자는 읽어보지 못 했다(우리나라에 번역작이 나왔나 해서 검색해 봤는데 적어도 '살라미스'로 검색했을 때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4년 전에 배리 스트라우스의『살라미스 해전』을 읽어본 것이 전부일 뿐인데, 솔직히 인터넷 서점에 검색해봐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해 다룬 작품은 정말 많지 않았다. 배리 스트라우스의 작품 말고 굳이 하나를 더 꼽으라면 프랭크 밀러가 그린 만화『300』정도랄까? ^^; 저자는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를 두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41~43쪽 부분).

- 페르시아 전쟁이 지닌 그 모든 중요성, 스케일, 극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페르시아 전쟁이 디테일한 재구성이 가능한 역사상 최초의 전쟁인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헤로도토스가 그 전쟁의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 하지만 앞뒤가 맞지 않기로 유명한 저 살라미스 해전도, 스파르타 초기 역사와 비교하면 사료가 많은 축에 속한다. … 페르시아 역사는 실제의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볼 만한 것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 페르시아인들과 그들 제국에 대한 연구는 거의 전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저작물에 의존해야 한다. 게다가 그리스인들, 다시 말해 페르시아 제국 군대의 이런저런 침공, 점령, 약탈을 당해본 사람들이 쓴 것이 대부분인 이들 저작물은 페르시아의 특성과 업적을 크게 왜곡하고 있다. 호기심 많고 열린 마음을 가졌던 헤로도토스만이 예외가 있다는 것은 곧 규칙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 유일한 인물이었다. -

어디서 많이 본 문구같다. 그렇다. 이는 한국사를 논할때도 종종 나오는 말이다.『삼국사기』나『삼국유사』가 우리가 가진 고대사 기록의 거의 대부분인 상태에서 우리는 가까운 일본 혹은 중국측 사료(주로 중국)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 식민사학이라는 된서리를 맡기도 했고, 동북공정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한국 고대사는 조금씩 고쳐지고, 만들어지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저자에 의하면, 그리스도 물론이거니와 그보다 더 심한 것은 바로 페르시아라고 한다. 저 유명한 전쟁을 치룬 양자임에도 양자에 대한 정확한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막연하게, 대강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와 페르시아는 자체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았을까? 하고,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러한 정확한 역사 기록의 부재는 초기 역사를 동화로 만들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저자는 말하면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필요한 3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1. 그리스인들의 편견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페르시아를 불가사의하게 세계를 정복하기는 했지만 나약한 겁쟁이였던 것으로 묘사(이건 앞서 언급한 만화 300이나 영화 300에서 잘 드러난 것 같다).

2. 그리스인들이 쓴 글을 죄다 인종주의, 유럽중심주의, 쓰레기통에 쳐넣어야 할 생각범죄(Thought crimes)의 기록으로 치부하는 방법

3. 설사 왜곡되었더라도 그리스가 페르시아인들의 삶과 그들의 세계관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말하고 있는지, 그들이 오해하고 있는 내용을 규명해보는 방법

당연히 3번째 방법이 가장 생산적이며 효율적이다. 실제 페르시아에 대한 발굴조사가 많이 진행되고, 국내에서도 특별전(황금의 제국, 페르시아 특별전) 등을 통해 사람들이 페르시아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페르시아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은게 사실이다. 저자는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이 책의 시-공간적 배경을 크게 확장시켰다. 즉, 그리스와 페르시아만 딱!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헤로도토스가 밟은 길을 따라 페르시아 전쟁에 관련된 모든 세계, 즉 당시 세계의 전부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지역에 대해 하나의 파노라마를 그려보고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서는 아시리아부터 언급해서 페르시아, 바빌론 등 메소포타미아 혹은 쉽게 중동이라고 말하는 지역의 역사를 개괄적으로 언급한 뒤 비로소 스파르타와 아테네로 넘어간다(마케도니아는 책 뒷면에 쬐까 나오고).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페르시아 간의 본격적인 전쟁은 책의 중간쯤 가야만 겨우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김용만이 그의 저서『새로 쓰는 연개소문전』에서도 비슷하게 취했던 방식인데, 익숙하기도 했고 그 방법이 개인적으로 효율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책 역시 상당히 재밌는 내용을 담고 있겠구나~하는 추측을 할 수 있었다.

이 책의 목차를 가볍게 살펴보면 앞으로 이 책이 어떤 내용으로 흘러갈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1장 호라산 하이웨이
2장 바빌론
3장 스파르타
4장 아테네
5장 페르시아 대왕의 수염을 불사르며
6장 짙어가는 전운
7장 만에서
8장 네메시스

1장에서 저자는 50쪽 이상을 할애하여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역사를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다. 말미에는 페르시아를 건국한 키루스 대왕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었는데, 예전에『페르시아의 태양 키루스 2세』라는 책을 한번 본 적이 있어 쉽게 와 닿았다. 2장에서는 키루스 이후 페르시아의 정치상황을 보여주면서, 다리우스와 크세르크세스와 같은 인물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지가 잘 나타나고 있었다. 즉, 전반의 150여 쪽에 가까운 분량은 페르시아의 발전 과정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었다.『살라미스 해전』에서도 페르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한 것은 아니었다(미리 말하지만 이 책이 거시적인 개설서라면『살라미스 해전』은 아주 미시적인 분야를 다룬 책이라고 할 수 있다. 2권의 책을 다 읽으면 당시 그리스-페르시아 간에 벌어진 전쟁과 전투 등에 대해서 자세히 알 수 있을 것이다). 페르시아의 역사에 대해서는『페르시아 문화』등의 책을 통해서도 가볍게 접한 적이 있었지만 저자가 서술한 페르시아사는 아주 간단명료하면서도 짜임새있는 내용들이었다. 특히 키루스 이후 다리우스가 집권하게 되는 과정은 상당히 흥미진진했다.

예전에 장-노엘 로베르의『로마에서 중국까지』를 읽으면서 중국과 마찬가지로 로마 역시 세계를 지배하려는 의지를 가졌다는 사실에 놀랐던 적이 있다. 로마는 문명국으로서 세계를 지배해 왔으며, 그러한 지배범위는 점점 확대되어야만 하고, 당연히 역사는 그렇게 돌아가야 한다는 어떠한 당위성, 그런 것들이 로마에게 있었다는 것인데 동양 뿐만 아니라 서양도 그랬구나~라는 사실에 적지 않게 놀랐었다. 로마의 경우에는 그러한 제국의 의지가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지나면서 사그라들었다고 한다(중국 역대 황제들이 한무제병에 걸린 것에 비교하면 이 부분 역시 흥미롭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경우에도 로마와 비슷한 면모가 보였다. 키루스와 캄비세스로 이어지는 왕계와 달리, 지방 군벌로서 페르시아의 왕위를 찬탈한 다리우스는 대내외적으로 자신의 즉위을 입증할만한 역사적 전공이 필요했고, 정당성이 필요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아후라 마즈다로 대표되는 배화교의 선과 악으로 이 세상을 二分하는 시각과 맞물리게 되었다. 즉, 페르시아의 대왕, 왕 중의 왕은 곧 선을 대표하는 신의 대리자로서 악을 없애고, 교화시켜야만 한다는 강한 당위성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악은 곧 페르시아의 서방 변두리에서 깔짝대는 그리스라는 세력들로 지목되었고(저자는 책 첫머리에서 악의 축, 미국과 테러 등을 언급했는데 당시 다리우스의 심정 또한 별반 다를 바는 없었을 것 같다), 곧 페르시아는 그것들을 짓밟을 준비를 하게 된다.

그렇게 긴장감 가득 안고 저자는 스파르타와 아테네로 건너간다. 스파르타라고 하는 독특한 군국주의에 물든 패권국가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그리고 그들은 왜 다른 그리스인들과 다른 사람을 살았는지가 서술된 부분이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것은 스파르타 소년들이 12살이 되면 합법적으로 남색가들의 노리개가 되었다는 사실인데, 그것을 통해 그의 보호자가 그 소년을 출세시켜줄 수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즉, 이런 식으로 해서 엘리트는 계속 엘리트를 생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사적이고 은밀한, 개인적인 부분까지 모두 국가가 마음대로 처분할 권리를 지녔던 나라 스파르타. 정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예의가 바르기 때문에 연장자를 존중했다는 것 또한 쉽게 상상이 가지는 않았다. 기본적으로 이런 부분은 서양보다는 동양적인 이미지라는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테네에 대해서 저자는 어떻게 민주정이 아테네에 정착하게 됐는지를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왜 이렇게 정치사적인 내용에 집중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다소 재미없는 부분을 읽어나갔는데, 나중에는 왜 그런지 알 수 있었다. 비록 아테네에서 참주정이 사라지고 민주정이 등장하게 된 계기는 우연적이고, 큰 의미가 없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민주정을 이룬 아테네는 이후 벌어질 살리미스 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저력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살라미스 해전』의 저자, 배리 스트라우스가 살리미스 해전을 두고 '민중이 승리한 전투'라고 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특히 아테네를 다룬 4장은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흔히 배우는 유명한 그리스 위인들(철학가이자 정치가이자 웅변가였던)을 한번 쭉 훓어볼 수 있게끔 해줘서 더 좋았던 것 같다.

5장으로 가면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전초전이라고 할 수 있는 마라톤 전투가 등장한다. 가공할 위력을 자랑하는 페르시아의 기병대에 기가 눌려 지내는 그리스군이 아닌, 강력한 위력을 자랑하는 그리스군으로서 그들은 페르시아의 대군을 무찌르고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숨가쁘게 양측간의 본 게임으로 돌입했다. 페르시아도 그렇고, 그리스도 그렇고 이제는 여유 부릴 시간이 없었다. 정치적인 문제는 당연히 복잡해지고, 국제 역학관계에 따라 수많은 사건들이 벌어진다. 한번 페르시아군을 무찔렀다고 하지만 여전히 왕 중의 왕은 자신의 모든 능력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리스는 이전처럼 폴리스끼리 흩어질 것이 아니라 다시금 뭉쳐서 하나가 되어야 했다. 특히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참주정에서 민주정(당시까지는 아주아주 생소하고, 그 운용능력의 검증여부가 입증되지 않은 독특한 정치체제)으로 돌아서서 새로운 체제 안에서 어떻게 페르시아 대군을 무찌를 수 있는 국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까? 를 두고 복잡한 아테네의 상황이 흥미로웠다. 지금이라 해도 익숙치 않은 그런 새로운 정치체제를 탄생시킨 계기야 그렇다쳐도, 단기간 내에 새로운 정치체제에 적응하고 다시 이를 일정한 물리력으로 표출시켰다는 것이 정말 신기했다. 궁지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문 격이랄까. 아테네의 존폐 여부를 두고 아마 당시 아테네인들은 하나가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6장과 7장에 이르면 비로소 이 책의 제목과 걸맞는 내용이 나온다. 바로 그 유명한 테르모필라이 전투와 살라미스 해전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이다. 레오니다스 왕에 대해서는 단순히 만화와 영화 <300>에서의 그 화려한 전투씬과 강인한 카리스마 정도로만 이해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보니 그 역시도 나름의 고충이 있던 인물이었다. 즉위와 관련된 미심쩍은 부분과 관련해서 레오니다스 왕은 뭔가 특단의 결정이 필요했고, 이는 스파르타인 고유의 습성과 맞물려 테르모필라이 협곡에서 빛을 발했던 것이다. 생동감있게 묘사된 글을 보면서 영화 <300>에서의 각 장면과 몇몇 대사들이 떠올랐다. 왕 중의 왕이 치를 떨었을 그 순간이 필자에게도 전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기에 크세르크세스는 위대한 스파르타 왕의 목을 쳐 협곡에 박은 말뚝 위에 올려놨을 것이다. 자신의 분노가 채 가시지 않았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곧 거센 폭우에 씻기고 말았으니, 페르시아의 대규모 해군이 살라미스에서 완패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살라미스 해전도 누군가 주목하여 영화화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영화 <300>에서 보는 것과 같은 영화 전면을 장식하는 화려한 전투씬은 보이지 않겠지만, 적어도 영화 <적벽대전>에서 볼 수 있는 두뇌 싸움 및 거대한 스케일의 해상 전투씬 혹은 <골든 에이지>에서 나오는 간결하면서도 임팩트있는 해상 전투씬 정도는 만들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암튼, 살라미스 해전에 대한 내용이 소략한 정도는 아니지만 필자는 이미 배리 스트라우스의 책을 한번 읽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간략한(?) 내용을 후딱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8장의 제목인 네메시스는 신의 이름이다. 보복의 여신이기도 한 그녀가 낳은 알이 트로이전쟁의 불씨가 된 헬레네라고도 한다. 암튼 그녀는 진정 냉혹하고 재치있는 여신이었다. 8장 전반부는 살라미스 해전을 대승리로 장식한 아테네, 그리고 이어진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왕을 빼앗긴 복수를 제대로 한 스파르타에 대한 내용을 싣고 있었으며 이윽고 분열되는 그리스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네메시스의 오만방자함은 페르시아만 망하게 한 것이 아니었다. 아테네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전 이후 도편 추방되었고(그리고 그는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크세르크세스에게로 가 페르시아 서쪽 변경인 마그네시아의 사트라프(영주)가 되었다),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는 페르시아의 전제군주를 따라하다가 국가전복죄를 선고받았다. 댈로스 동맹의 맹주이자 페르시아로부터 그리스를 구해냈다고 칭송받는 아테네는 이후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도시를 무력으로 굴복시키거나 동맹에 속하지 않는 도시들까지 공격해 오만한 독재자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이에 스파르타를 비롯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반발이 가시화되고 그리스는 분열되었다. 그리고 페르시아 역시 다시는 그리스를 넘보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채 수십년이 흘렀고, 이후 마케도니아의 젊은 왕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서방과 동방을 하나로 통합한 지배자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상이다. 앞에서도 누누히 말했지만, 이 책은 당시 그리스-페르시아의 역사를 통사적으로 살펴본 것으로서 중간중간 엉성하거나 간결한 부분은 있지만 포괄적으로 당대사를 이해하는데 아주 유효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군다나 페르시아 혹은 그리스 어느 한쪽의 입장에서 쓴 책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아주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게끔 한다는 것이 이 책의 강점이 아닐까 싶다. 이런 객관적인 시각 덕분에 오히려 당시 상황이 더 쉽게 이해가 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책의 맨 뒤에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과 관련된 전후 연대표가 정리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보다 간결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8장의 내용이 가장 마음에 들었는데,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표현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의 느낌은 배리 스트라우스의 책을 읽고 난 다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역사적으로 한국사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는지 한번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서 이만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p.s) 제목과 달리 통사적인 성격이 강한 책이어서 분류는 군사서적이 아닌 역사서적으로 하였음을 밝히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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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할 영화는 조금 독특한 영화다. 뭐 내용도 그렇고, 이걸 보게 된 느낌도 그렇고.

일단, 필자는 처음에 이게 애니메이션인지 모르고 봤다. 잉? 뭔 소리야? 라고 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처음에 TV 광고나 예고편을 봤을때 너무나 사실적인 표현때문에 실사 영화인 줄 알았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한번 봐라~ 저 포스터하며, 영화 중간 캡쳐 사진까지! 아마 다른 분들도 공감하시겠지만, 예고편에 나왔던 장면들을 한번 보면 실사인지 CG인지 쉽게 구분이 가질 않을 것이다.

그래서 별 생각없이 선배 2명과 함께 극장을 찾았다.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그 당시에 이미 3D 상영이 되는 영화여서 뭘로 볼 것인지 물어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별 생각없이 그냥 2D로 보겠다고 했고, 그렇게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엇! 그런데 첫 장면이 딱 봐도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화면! 그래서 우리는 서로 속닥거리면서 '이거 만화였어? 잘못 들어온 거 아니야?' 하면서 당황했었다. 암튼, 그렇게 영화를 계속 감상했고, 나중에는 점점 빠져들게 되었다. 특히 놀랄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화면을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 했던 기억이 난다. 암튼 필자의 이런 생각은 다른 블로거들의 생각과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캰슐츠님'의 '완성도 20.03%' 블로그 포스팅  →  이 분도 처음에 실사인 줄 알고 보셨단다. ^^;  

'슬픈단잠님'의 '여럿~ 공략의 장' 블로그 포스팅  →  3D 아이맥스가 아니면 재미없다라...후회된다. 다시는 못 볼테니...-.-;; 

'SALON_de_April shower' 블로그 포스팅  →  이 감독이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거듭 든다.

일단 줄거리를 간단하게 적어보자면...

때는 바이킹이 활약하던 8~9세기 쯤이지만, 신과 인간, 괴물과 영웅이 공존하는 독특한 환경으로 설정해놨다(늘 느끼는 거지만,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 너무 익숙하다 보니 그런 문화가 다른 곳에는 없었던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너무 그리스 신화를 기준으로 다른 나라의 신화를 바라보려 한다고나 할까?). 호르트가르 왕의 왕국에서는 매일밤 그렌델이라는 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을 살해하고, 잡아간다. 그때 바다 건너 대단한 영웅으로 소문나 있던 베오울프가 호르트가르 성에 나타나 왕을 도와주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그날밤 그렌델과 싸운 베오울프는 그의 팔 한쪽을 자르게 되고, 괴물은 죽는다. 이윽고 그렌델의 어머니인 마녀까지 죽이기 위해 베오울프는 출동하는데, 여기에서 놀랄만한 반전이 있다. 호르트가르 왕이 마녀의 꼬드김에 넘어갔고,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 바로 그렌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주인공인 베오울프를 꼬드기는 마녀...(안젤리나 졸리가 분한 마녀는 정말 놀랍도록 아름답고 매력적이어서 남자들로 하여금 그 치명적인 마력에서 빠져나가지 못 하게 하고 있다)

예전에 베오울프를 너무 재밌게 봐서 영화를 보고 난 다음 까페에 베오울프 관련된 글을 하나 올린 적이 있다. 베오울프가 뭔지 전혀 몰랐었기에 그 내용이나 생겨나게 된 배경 등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일단 원본의 내용과 영화는 약간 다르다. 원본에는 그렌델과 화룡이 적으로 등장하는 내용이 1, 2부로 각각 다른데, 영화상에서는 이 둘을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으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좀 더 부드럽게 살을 붙여서 내용을 만들었다고나 할까? 또한, 이것이 기독교가 스며드는 그 과도기적인 단계에 등장한 영문 서사시라고 하니 그 오묘한 분위기 또한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어쨌든, 스토리 면에서도 어느 정도 원작의 내용을 충실히 반영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일단 어떻게 보면 신화적 내용을 현실감있게 잘 표현한 것이 일단 마음에 들었다.

또 하나, 실사와 CG의 경계가 헤깔릴 정도로 잘 만들어진 화면은 정말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물론 모든 장면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일단 딱 보면 CG로 만들었구나~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이 감독이 <폴라 익스프레스>라는 작품을 먼저 만들었다고 하는데, 확실히 그것도 대단한 작품이지만 그거에 비하면 이건 뭐 비할 바 없이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흐르는 땀방울이라든가,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이라든가, 눈썹이나 미간이 살짝 찌그러지는 등의 미세한 표정연기까지 놀라울 정도로 잘 표현해내고 있어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스타일의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화룡과 싸우는 장면은 여느 판타지 영화 못지 않은 수준이었다. 

거기다가 바이킹의 생활을 영화 속에 잘 고증한 것 같아서 그 점도 보기 좋았다. 호르트가르 왕의 궁궐과 바이킹 전사들의 무기, 그들의 무장과 戰船, 그들의 사고방식, 연회 장면 등등 이것저것 세세한 부분까지 많이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앞에 이미 소개한 2편의 영화들에 비해 전혀 고증 부분에서 후달린 부분은 없어 보였다. 또한 스토리 면에서도 서사시를 바탕으로 약간 윤색만 가했기 때문에, 개연성이 부족하다거나 앞뒤 연결이 부자연스러운 면이 오히려 적어 보였다. 물론 원본 서사시의 내용이 많이 함축되어 있었고, 기독교적인 색채, 즉 당시 서사시가 생겨나게 된 시대적 상황 등이 잘 반영이 되어 있지 않았지만 뭐 정통 사극을 지향한 영화가 아니었기 때문에 큰 상관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상이다. 나중에라도 3D 영화를 볼 기회가 있다면 다시금 꼭 보고 싶은 이 영화,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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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
이희진 지음 / 소나무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하아~정말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서평 하나를 쓴다.
얼마전 이 책의 저자이자『전쟁의 발견』의 저자인 이희진 선생님과 온라인상에서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아직 충분히 대화를 나누지는 못 했지만). 예전에 필자가『전쟁의 발견』에 대한 서평을 쓴 바가 있었고, 그 서평에 대해 서로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인데...저자의 학문적 스타일이 어떤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 대화가 엇나갈 수도 있겠다~싶어서 또 다른 책을 하나 구입해보게 되었다. 일단 이 2권의 책 말고도 여러 책들을 쓰셨지만, 일단은 이 책 하나만으로도 저자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래서 책을 구입해놓고는 이래저래 송년회다, 신년회다, 종무식이다, 시무식이다...미루고 미루고 미루다가 이제서야 겨우 서평을 쓰게 되었다. 

암튼...딱 제목만 봐도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새삼 논의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또한 책 표지의 신공황후가 그려진 우표만 봐도 그렇고 말이다. 이 책의 목차는 크게 제1장 식민사학 왜 문제인가?, 제2장 한국 고대사 학계에 침투해 있는 식민사학의 논리, 제3장 깡패 논리로 심어지는 식민사학 이렇게 3개로 구분할 수 있겠다. 제1장에서 저자는 식민사학이 무엇인지, 일종의 개념 정리를 하고 있다. 그 다음에 그러한 식민사학이 한국 사학계에 어떤 식으로 투영되었는지, 한국 사학계가 어떤 식으로 식민사학의 잔재 속에서 허우적대는지를 학문적인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어가면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왜 이렇게밖에 될 수 없는지, 왜 이런 현실이 오늘날 계속되고 있는지...비판적인 시각에서 살펴보고 있었다. 이 정도만 말해도, 왠만큼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와! 정말 이런 내용을 책으로 써낸 사람이 있단 말이야!!!'라고 느끼면서 놀랄 것이다. 하지만 여기 있다. 그리고 그 문체가 상당히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데다가 실명을 거론하고 있어서 더더욱 놀라운 글이 아닐 수 없다. 필자는 딱 책 표지만 살짝 넘겨서 나오는 저자의 약력만 보고도 앞으로 나올 책 내용이 기대되서 두근두근거렸다.

- (전략) 하필 역사학 중에서도 가장 험악한 한국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그 와중에 못 볼 꼴을 많이 보게 될 고대 한일 관계사 분야를 중점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중략) 그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고대사 연구자들이 얼마나 일본의 연구에 의지하고 있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뭘 모르던 시절, 함부로 입을 놀려서는 안 되는 미천한 신분을 깨닫지 못하고 알고 있는 내용을 여기저기 발설한 죄로 지금까지 왕따를 당하고 있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도 이러한 인생역정과 관계가 깊다 -

우리나라의 그 어떤 역사학자가 이런 내용을 거침없이 책 표지의 '저자 소개'에 쓸 수 있겠는가. 그것도 인터넷상에서 활약하는 아마추어나, 되도 않는 대륙삼국론 등을 주장하는 재야사학자가 아닌 정식으로 대학원에서 석 · 박사 학위까지 받으신 분이 말이다. 이전에 책을 읽을 때는 이런 분인 줄 몰랐는데, 이 책을 읽으니 저자에 대한 상당한 호기심이 갔다. 아무리 비주류 사학자라고는 하지만, 정말 이런 책을 내고도 별탈이 없을까? 싶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언급하겠지만 저자가 말하는 한국 고대사학계가 어떤 곳인지는 필자도 대강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튼, 그렇게 한장 한장 책장을 넘겨봤다. 

일단, 제1장에서 가장 눈여겨본 부분은 식민사학의 갈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었다. 스에마쓰 야스카즈[末松保和]야 원체 유명한 식민사학자니깐 알고 있었지만,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에 대한 내용은 몰랐던 부분이라서 적이 놀랐다. 그는 단지 꼴통 보수학파와 달랐을 뿐, 그 역시 식민사학자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이 바로 저자의 주장이었다. 단지 그가『일본서기』를 비판적으로 보자고 했을 뿐, 오히려 더 교묘하게 식민사학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李弘稙의『韓國古代史의 硏究』를 실례로 들면서 쓰다를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한 '양심적인 학자' 쯤으로 기억하는 것을 비판하고 있었다.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다. 식민사학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교묘하고, 깊숙하게 한국 고대사학계에 스며들어 왔다는 사실이 말이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한국 고대사 학계의 기득권층을 규탄(비판이 아니라 거의 규탄 수준이었다. 필자가 느끼기에는)하는 내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는 내용들이다. 이병도 선생님, 그리고 서울대학교, 이후 서울대학교에서 줄줄히 졸업해 학계의 주류를 형성하는 역사학자들까지...그러면서 저자는 창의력이 말살된 학풍은 식민사학을 재생산할 뿐이며, 남의 연구를 베껴 먹는 성향이 곧 식민사학을 재생산하는 것과 맞물려 학계를 좀먹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역사학계, 특히 고대사 학계의 식민사학 문제는 식민사학 자체의 논리보다 학계의 구조적 비리와 훨씬 더 밀접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그 식민사학의 잔재를 체계적으로 추적해서 청산하기 어렵다는 저자의 지적이 피부에 와닿는 듯 했다. 

어떻게 보면 고고학을 전공하는 필자 역시 이러한 역사학계의 문제와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 저자는 143~148쪽에 걸쳐 '고고학 팔아 식민사학 비호하기'라는 작은 장을 마련해 고고학을 비판하고 있었다. 저자는 고고학이 역사 해석에 도움을 주는 경우는 많지 않다, 고 하면서 고고학은 오랜 시간에 걸친 문화 흐름을 보여주는 데 적합한 학문이지, 짧은 시간 안에 일어나는 정치적 변화를 보여주는 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정치의 영향과 문화의 영향은 다르다고 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미국 문화의 영향, 냉전 시대 소련에 펩시콜라가 들어간 것, 한국을 좋아하지 않는 베트남에 한류 열풍이 부는 것 등을 이유로 제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극단적으로 고고학을 해석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오히려 문헌에 나오지 않는 기간의 일반 사람들의 생활양식이나 구체적인 삶의 모습은 문헌사가 아닌 고고학으로 복원이 가능하다.『삼국사기』만 갖고, 삼국시대 사람들이 무엇을 먹고,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집에서, 무슨 그릇을 쓰면서 살았는지 알 수가 있을까? 전혀 알 수 없다.『삼국사기』에 적힌 기사가『조선왕조실록』처럼 매일매일을 적지 못 하고 있는데, 그 공백 기간의 일까지 문헌만 갖고도 알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고고학은 단순히 오랜 시간에 걸친 문화 흐름뿐만 아니라, 특정 유물과 유구의 변화상을 통해 급진적인 문하의 변화상에 대해서도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역사고고학의 경우, 문헌과의 상호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이지만, '문헌에 이러이러한 기록이 있으므로, 그 고고자료는 그렇게 해석되서는 안 된다!' 라는 식의 결론은 도출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특히 토기 같은 경우는 사용자(더 엄밀히 말하면 그 사용자가 속한 공동체에서 그것을 만든 제작자)에 따라 미세한 차이가 있으므로 그걸 갖고 사용세력에 대해 구분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 물론 저자의 발언처럼 토기만으로 100% 세력을 구분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토기가 출토된 유구의 종류, 공반 출토된 다른 유물까지 같이 살펴보는 것이다. 또한 베트남과 구소련, 미국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의 경우, 그러한 고고자료가 나온다 하더라도 이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데에는 당연히 그와 관련된 문헌기록이나 뉴스나 신문같은 언론매체, 수많은 인터넷 상의 자료가 있기 때문에 교차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 고대사에서 그럴만한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없는 부분은?? 믿을 수 있는 것은 고고자료 뿐이다. 

마지막으로 저자가 고고학을 비판하면서 언급한 학자로는 가야사 연구자이신 金泰植 선생님인데, 솔직히 이 분을 가야 고고학자라고 보는 고고학자는 없을 것이다. 이 분은 사학자이다. 우리나라의 고고학 자료는 일본과 마찬가지로 보고서로 잘 만들어져 전부 공개하고 있는데, 그런 자료를 역사학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러한 인용 과정에서 고고 자료의 해석을 고고학자와 다르게 하는 경우다. 물론 별로 해석하지 않고, 보이는 현상들을 나열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봤을때 저자가 김태식 선생님을 언급하면서 고고학을 비판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마치 그건 필자가 인류학자를 거론하면서 문헌사학계를 비판하는 것과 같은 일이랄까? 

필자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한국 고고학의 태동 및 성장에 있어 일본 고고학(혹은 건축학)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고,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지만(얼마전 전국고고학대회때도 이런 문제에 대한 지적과 비판이 있어왔고), 식민고고학(식민사학처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고고학계의 영향이 적지는 않지만, 고고학이라는 학문 특성상 새롭게 확인되는 유물과 유구를 갖고 논리를 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 과거 수준에서 발전하지 않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법론적인 부분에서 일본 고고학의 영향을 받을지언정, 연구과정이나 연구성과에 있어 저자가 비판하는 식민사학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골치아픈(?) 문헌사를 공부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기도 하고(필자도 한때는 한국 고대사 전공을 하려고 했으므로), 그러한 식민사학에서 탈피하는데 있어 고고학이 어떤 도움이 될만한 것은 없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제2장에서 저자가 크게 지적한 3가지,『삼국사기』초기기록에 대한 지적, 4세기 백제와 일본의 세력균형에 대한 지적(더불어 천관우 선생님에 대한 지적까지), 신라가 일본에 보인 저자세에 대한 지적은 여러모로 공감가는 부분이 많았다. 일단『삼국사기』초기기록에 대한 지적이야 필자 역시도 저자와 공감하는 부분이며, 실제 고고자료 상으로도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별다른 이견이 없다. 다만, 저자가 실례로 들어준 고구려, 백제, 신라 트집 잡기 시리즈(?)는 필자가 그동안 갖고 있던 생각을 정리하는데 유용했다. 특히 노태돈 선생님이 많이 까이셨는데(?), 아마 이는 한국 고대사학계의 큰 기둥으로 남아 있는 '부 체제론' 때문인 것 같다. 이종욱 선생님과 극히 대립적인 이 이론에 대해서 필자 역시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그게 좀 심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긴 했다. 

그밖에 4세기에 대해서 저자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는 필자랑 기본적으로 생각이 달라서 딱히 할말이 없다. 왜냐하면 필자는 신공황후의 활약과 칠지도 등을 4세기가 아닌 3세기때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4세기가 한-일 양국의 고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분기점이 되지는 못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반적으로 백제의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하는 4세기 근초고왕에 대한 평가가 심히 과장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4세기에 백제가 영산강 유역 등을 완전하게 병합하지도 못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서『삼국사기』에는 근초고왕 재위 시절에 영산강 일대가 백제에 병합되었다는 직접적인 기사는 없다. 다만,『일본서기』의 신공황후 관련 기사를 4세기로 비정하여 그렇게 해석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고고자료상 4세기 백제가 한반도 서남부를 통합했다는 근거는 없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고고학이 잘못 해석되었다고 하면서, 식민사학에 일조하였다고 비판하신 것 같은데...오늘날 영산강 유역에 대해 연구하는 연구자들은 그 지역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토기를 비롯한 유물과 그 곳에서 확인된 수많은 고분들을 갖고 그러한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4세기에 영산강 유역은 백제에 통합된 지역이 아니었다.' 고 말이다. 

암튼, 이 부분은 나중에 저자와 따로 온라인상에서 얘기를 나눠봐야 할 부분이므로 여기에서는 Pass!

마지막으로 신라가 일본에 저자세 외교를 했다는 의견에 대한 지적, 이 역시 전적으로 공감한다. 사료 비판에 있어 다소 비객관적인 시각으로 당시 역사를 바라보다보니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 같은데, 김태렴의 구라(?) 사건만 보더라도 당시 신라가 일본에게 저자세로 일관했다고 볼만한 근거는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삼국시대 내내~통일기까지 한반도 혹은 중국에서 수많은 인력이 일본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은 인정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일본의 국력이 성장했다는 것 또한 인정한다. 하지만 그러한 새로운 성장 원동력의 유입이 곧 일본이라는 국가의 성장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또한, 일본이 그렇게 성장할 동안 한반도 내의 다른 정치세력들의 성장이 정체된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일기 이후 일본의 성장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입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숨가쁘게 제2장까지 살펴본 저자는 제3장에서 드디어 칼을 뽑아 단죄를 한다! 한국 고대사학계의 온갖 비리와 추악한 실태를 낱낱히 고해 바치고 있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제3장의 제목이 '깡패 논리로 심어지는 식민사학'이겠는가! 깡패 논리라...정말 저자의 호탕함이 절로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제3장의 작은 챕터들을 살펴보면 그걸 더 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검열보다 더한 검열 - 심사
망나니
기득권층을 위한 시스템
무책임한 관료 조직
파워와 야합
야합의 길 - 학술지 등급제
야합에서 비호로
나라 팔아먹기
쇼 같지 않은 쇼 - 공개 발표
편파 판정
검증 기피
패거리 가르기 - ‘재야 사학’과 ‘강단 사학’

어떤가...그동안 이런 글을 썼던 역사학자가 또 어디 있을까? 제3장의 내용은 필자가 100% 경험하지도, 동의하지는 않지만 상당 부분 필자 역시 인정하는 부분이고, 또 직접적으로 살에 맞닿는 내용이라 더 잘 읽혔다. 특히 심사라는 부분, 뭐 대학원에서 교수님이 지도학생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다는 말이야 예전부터 나온 말이고, 기득권층을 위한 시스템이라든가, 파워와 야합, 학술지 등급제(야합의 길), 야합에서 비호로, 공개 발표(쇼 같지 않은 쇼), 편파 판정, 검증 기피, 패거리 가르기 등등. 어떻게 보면 가려운 곳을 쏙쏙 긁어주고 있는 글이고, 어떻게 보면 감추고 싶은 것을 팍팍 들춰내고 있는 글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다른 나라의 사학계는 어떨까? 라는 생각도 하게끔 만들어준 내용이기도 했다. 분명 다른 나라에서도 자국의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쳐주는 사학과라는 것이 있을텐데 그 나라에서는 이러한 학술 시스템이 어떻게 정비되어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런 면에서 고고학과 관련된 부분은 필자의 생각과 일부 다르지만, 전체적으로 대단히 굉장한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이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그 용기와 자신감에 찬사를 보내고 싶으며, 그러한 배짱과 호탕함을 지닌 저자의 성격에 존경심까지 보내고 싶다. 그렇기에 나중에 저자와 온라인상에서 대화할 생각을 하니, 더 흥분되고 들뜨기까지 하다. 암튼, 나중에 시간을 두고 저자가 쓴 책을 몇권 더 읽어보려고 한다. 어쨌든 간만에 속시원하고 통쾌한 내용의 책을 봐서 아주 기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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