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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네, 빛의 순간들 - 100개의 대표작으로 만나는 클로드 모네의 모든 것
박송이 지음 / 빅피시 / 2026년 5월
평점 :
눈부신
모네, 빛의 순간들 - 100개의 대표작으로 만나는 클로드 모네의 모든 것
박송이, 빅피시, 2026-05-27.
모네는 ‘빛’, ‘인상’이라는 단어들로 소개된다. 이 책은 ‘빛의 순간들’이라는 이름으로 모네의 대표작 100점을 연대기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프랑스 공인 문화해설사다. 2016년부터 파리에서 거주한다고 하는데, 미술관이나 모네의 자베르니 정원에서 모네의 작품을 책에 쓴 것처럼 설명하겠구나 싶었다. 문화해설사가 들려주는 화가와 작품 이야기다.
‘인상주의’하면 파스텔톤 풍경화가 떠오른다. 모네의 작품도 그렇게 여기고 있다. ‘빛’의 활용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는 나로서는, 미술책에서 본 그림만으로는 ‘빛’의 흐름이나 머묾을 세세히 잡아내기 어려웠다. 설명을 듣는다 해도 예민한 그 감각을 따라가기가 벅차다. 그러니, 어쩌면 그림은 한 순간의 ‘인상’이고 그림이나 화가의 이야기에 더 관심갖게 되는 것 같다. 신화나 성경을 배경으로 한 그림은 어떤 내용인지를 구체적으로 찾아보게 되니 풍경 그림의 장소가 ‘어디’인지를 궁금해하는 것하고는 좀 다르니까. 그래서인가. 미술계에서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 나올 때면 화단계 영향력있는 이들이, 수용하지 못하고 비난과 비판을 주로 하는 것이.
모네 또한 파리 유력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한 대표적인 화가다. 모네가 활동하던 초창기, 당시 화단에서는 “전통적인 역사화나 신화적인 주제를 선보이는 것이 일반적”이었기에 모네의 그림은 프랑스 왕립미술아카데미가 주관하는 공식 전시회에 입선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조롱받거나 거부당했다. 물론, 모네는 1866년 살롱전에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을 출품하여 수상했다. 이는 모네가 입선을 목표로 하고 그린 그림, 그러니까 현재로 생각한다면 입시용이나 공모전 수상 패턴을 분석하여 이에 맞게 그려서 수상한 것이라 볼 수 있을 것 같고 모네 자체는 ‘빛’의 표현에 더 관심을 두었기에 이 그림에 만족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네를 ‘빛’의 표현으로 이끈 이가 모네의 스승 외젠 부댕이다. 15세 모네가 그린 캐리커쳐에 매료된 외젠 부댕이 모네를 자연의 세계로 이끈 것이다. 외젠 자신이 바깥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고 함께 야외에서 그림을 그린 모네는 이 경험 이후로 “야외에서 눈앞에 펼쳐진 자연을 바라보며 이해”함과 동시에 ‘풍경화가’로서 그림을 그리기로 한다. 나아가 모네에게는 “빛의 표현”, “밖에서 보고 기억한 ‘관념적인 색채’가 아니라 야외의 자연광을 받은 ‘지금 눈에 보이는 색’이야말로 그의 관심사였다.”
모네는 1866년 살롱전 입선 후, 바로 파리 근교의 빌 다브레에서 정원이 딸린 집을 빌려 2.5m가 넘는 큰 캔버스를 야외에 설치하고 대규모 인물화를 제작한다. 캔버스가 너무 커서 윗부분에 손이 닿지 않아 정원의 땅을 파고 도르래를 설치해 캔버스의 높낮이를 조절하는 장치를 설치하고 그렸다. 이 그림이 모네의 연인 카미유 동시외가 그려진 <정원의 여인들>이다.
살롱의 평가는 냉혹했다. ‘그림에 주제가 없다’, ‘붓질의 마감이 거칠다’는 이유로 모네는 그해 살롱전에서 고배를 마셨다. 이를 두고 모네의 전작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던 비평가이자 소설가 에밀 졸라는 “모네는 살롱의 문을 열었지만, 그가 들고 온 ‘빛’이 너무 눈부셔 심사위원들은 서둘러 그 문을 닫아버렸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런 평가는 또 있다. <까치(1869년)> 또한 심사위원들로부터 살롱 출품을 거절당했다. 이유는 “그림이 지나치게 밝아서 눈이 멀 것 같다”는 것. 마치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깊이에의 강요』가 생각나는 평이다. 주제가 없다라니, 내가 보기에 <초록 드레스를 입은 여인> 또한 무슨 큰 주제가 있나 싶은데 말이다. ‘빛이 너무 눈부셔 서둘러 그 문을 닫아버렸다’라는 에밀 졸라의 평이 너무나 인상깊다!
이렇게 화가로서 초기부터 평단으로부터 외면받았기에 모네의 삶은 어려웠다. 모네의 일대기를 보면 “평생 가난과 궁핍”하다는 설명들이 있기에 정말 아주 가난한 거리의 화가로 생각했다. 그러나, 모네는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고 어린 시절은 풍족하게 보냈던 것 같다. 모네의 궁핍은 ‘화가’가 되어 평단으로부터 외면당한 것과 카미유 동시외와의 결혼을 아버지가 반대함에 따라 경제적 지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인 카미유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1867년 아들 출산 시에는 카미유의 곁에 있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게 눈치를 보며 아버지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의 모네는 20대 후반이다. 당시를 생각하면 충분히 독립하였을 나이인데 아버지가 된 상황에서도 모네는 여전히 ‘어린’ 느낌이다. 부유한 집안의 철없는 아들 같은 느낌이랄까.
화가로도 자리잡지 못한 상황에서 한 가정을 가졌으니 경제적인 궁핍은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모네는 계속된 경제적 궁핍에도 철학이 있었으니, “열 병의 저렴한 와인 대신 단 한 병의 좋은 와인을 택하는 삶”이 그것이다. 모네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항상 어느 정도의 안락함 속에서 살아야만 하네. 그래야 네 모든 에너지를 그림에 쏟을 수 있기 때문이지”
모네는 빚을 지거나 임금을 체납하면서도 고용인들을 해고하지 않고, 돈을 잘 벌 때도 아끼고 저축하기보다 저명한 양복점에서 옷을 맞춰 입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이와 함께 모네에 대한 많은 글 중엔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달라’ 호소하는 내용이 많다. 이런 생활 속에서도 그의 그림은 <여름(1874년)>과 같이 “햇빛이 비치는 풍경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는 듯한 상쾌함”이 깃든 그림들이다. 글쎄, 이것은 좀더 자신의 자존감을 높이고 안정화하기 위한, 지난 어떤 경험으로 인해 쌓인 방어기제였을까. 모네는 1868년 6월, 강물에 몸을 던진다. 곧 자신의 무모함을 깨닫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물 밖으로 빠져나왔다는데, 모네는 화가 프레데릭 바질(Frédéric Bazille)에게 보낸 편지에 이를 ‘실수’라고 표현했다. 모네의 전기학자들은 이를 모네의 ‘자살 시도’라고 얘기한다. 이때, 모네의 상태는 아버지의 후원 중단으로 인한 지속된 궁핍, 살던 집에서 쫓겨나기 일보 직전에 그림까지 압류될 위기에 처한 상황이었고 화가로서 인정받지 못한다는 상실감도 있었을 테다.
모네 인생을 보면 동료와 후원자를 비롯하여 ‘인복’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네의 경제적 궁핍 호소에 그의 그림을 사주거나 경제적 지원을 하였던 이들이 많다. 그들은 화가로서 ‘모네’를 보았을까. 인간 ‘모네’를 보았을까.
모네는 “빛이 매 순간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나는 눈부신 대화들을 기록할 뿐”이며 이것이 그가 꿈꾸던 화가의 삶이라고 했다. 그저 낯선 구도를 중시하며 과감한 붓질을 통해 “ 빛의 표현”하던 모네는 그의 아내이자 모델 카미유가 사망하는 순간에도 “사별의 아픔을 겪는 남편이기보다 빛의 변화를 포착해야만 하는 화가라는 실존적 숙명을 깨달았다. 임종의 안색에서 푸른색, 노란색, 회색의 조화를 분석하는 본능을 자각한 순간, 그는 슬픔을 앞서는 예술적 관찰력에 경악하며 깊은 자괴감에 빠졌다.” 그리고 〈임종을 맞은 카미유 모네(1879년)〉를 완성해냈다. 모네는 단순히 정적인 풍경을 담기보다는 빛의 산란이나 구도를 위해 거칠고 험한 곳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예술적 집착이 정점에 달했던 1890년 5월 초, 모네는 봄이 오면서 돋아난 초록빛 나뭇잎들이 겨울의 황량한 구도를 망치자 기상천외한 지시를 내렸다. 인부들을 고용해 그림 속 참나무의 잎을 일일이 다 따 버리게” 하기도 했다. 사진작가들이 자신이 원하는 구도로 대상을 촬영하기 위해 자연에 험한 짓을 하는 일이 있다는데 잠시 이 상황이 동일시되어 순간…… 문화해설사인 저자는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자연의 시간마저 자신의 캔버스에 맞추려 했던 이러한 행위는, 화가를 넘어 창조주로서 대상을 통제하고자 했던 모네의 광기 어린 집착을 여실히 보여준다.
광기 어린 집착이라, 예술가들에게 필연적이고 오히려 이런 면모가 유명한 예술가라는 인정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다. 연작 시리즈로 유명한 <건초더미(1890~1891년)>를 그리던 때에는 이웃 농부들의 사유지를 “최적의 각도를 찾기 위해 수시로 농작물이 심어진 구역을 가로질렀고”, “농부들의 대화 소리나 마차의 굉음이 자신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린다며 항의”하기도 했으며 이에 농부들과 갈등이 멈추지 않았다. 탈곡을 위해 건초더미를 치워야 하는 시기가 되자 모네는 농부들에게 탈곡을 늦추는 대가로 현금을 지급하기도 했다 한다. 또한, 연작이 많았던 만큼 “갤러리에 천창을 설치해 외부 날씨와 태양의 위치에 따라 그림의 색채가 실시간으로 변하게”하거나 “작품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연결되어 있어, 전체의 흐름과 공간까지를 모두 작품”으로 여길 수 있게 전시되도록 갤러리도 직접 구상하고 기획하기도 했다.
삶의 안정기, 모네는 1899년부터 1901년까지 매년 작업을 위해 런던을 찾았다. 1870년 보불전쟁을 피해 머물던 시절 매료된 ‘안개’를 다시 그리기 위해서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안개를 불편하고 성가진 존재로 여겼는데 모네가 그림을 그리고 나자 안개가 아름답고 신비로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한다.
모네는 수많은 그림을 남겼다. 많은 화가들이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모네는 86세까지 생존했다. 자연의 ‘빛’을 중시하는 화가로서 일찌감치 ‘눈’으로 고통받았는데 말년에는 백내장과 수술 후 부작용으로 색채가 제대로 보이지 않는 증상을 겪었다. 이때 모네는 기억과 감각에 의존해 그림을 그렸으며 사망한 해에는 폐암으로 극심한 고통 속에 있었다. 86세의 화가는 신체적 질병과 그로 인한 고통뿐만 아니라 첫 번째 아내 카미유, 두 번째 아내 알리스와의 사별, 아들과 의붓 딸,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때문에도 슬픔과 아픔 속에 있었다. 모네는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여러 유명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모네의 그림을 ‘국가’가 소장해야 한닥 강력하게 주장한 친구와 모네의 그림을 사랑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모네의 그림을 수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기까지,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음을 새삼 느낀다. 클레망소도 대표적인 사람이다. 모네가 사망할 당시 모네의 관 위에 검은 천이 덮여 있었다. 이때, 클레망소는 “안 돼! 모네에게 검은색은 안 돼! 검정은 색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관 위의 검은 천을 치우고 창문에 걸려 있던 화사한 꽃무늬 커튼을 뜯어와 덮었다고 한다. 검은색을 싫어하고 꽃을 사랑한 친구의 마지막을 진정 “꽃길”이 되도록 해준 것이다.
모네의 삶은 꽃길이었을까. 모네가 사랑하고 가꾼, 그의 예술의 공간인 자베르니는 개방된 곳이라고 한다. 화창한 여름, 그곳에 가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