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평점 :
습설의 삶
복자에게, 김금희, 문학동네, 2020-09-09.
‘고고리섬’이 어디메쯤 있는지 찾아본다. 가장 닮았을 섬으로 상상하며 섬 찾기를 멈춘다.
제주의료원 산재 사건을 찾아본다. 제법의 기사들이 검색된다. 10년, 재판은 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을 읽게 되면, 사실 먹먹함이 더 배가된다. 여기에 그들이 살았었구나, 어딘가에 살고 있겠구나, 좀더 실체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소설 속 문장을 빌려오자면 ‘습설’의 삶이 내게로 옮겨오는 듯하다. 내 삶은 옮겨가지 못하고 겹겹이 습설이 되어가기에, 그렇다고 한다면.
“사람을 한번 만나면 그 사람의 삶이랄까, 비극이랄까, 고통이랄까 하는 모든 것이 옮겨오잖아. 하물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언제나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야. 이를테면 판사는 그때마다 눈을 맞게 되는 것이야. 습설濕雪의 삶이랄까. 하지만 눈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
사는 동안 무엇을 털어내어야 했을까. 오래도록 끌어안고 있거나 푹 파묻힌 습설의 삶을 사는 이로써 새삼 묻게 된다. 털어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작가는 소설을 다 쓰고 나서 한 문장을 떠올린다면 “나는 실패를 미워했어”라는 문장이라고 했다. 순간 난 생각했다. 누구의 실패일까. 무엇을 실패라고 보는 걸까. 내겐 ‘습설의 삶’이 기억나는 한 문장이다. 돌이켜 보니 “억울하고 슬프고 손해보고 뭔가를 빼앗겨야 하는 이들“이라면 그 삶 내내 실패와 실패의 거듭이겠구나 싶다. 다만, 저 말은 ‘판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의 말이다. 우리나라 판사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정말로 ‘습설의 삶’을 살고 있는가 의구심이 든다.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듯이 습설의 삶을 느끼는 판사들도 분명 있겠지. 이영초롱 판사는 어떤가.
소설은 나, ‘이영초롱’이 1999년 열세 살 한때 살았던 고고리섬에 좌천되어 오면서 어린시절 만난 ‘복자’와의 시간을 회상하고, 또한 재회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부모의 사업 실패로 고고리섬 고모에게 맡겨진 이영초롱은 ”씩씩하고 많이 웃고 더 진취적인 아이“ 복자를 만남으로써 섬생활을 버텨낼 수 있었다. 하지만, 섬 어른들 사이 갈등에 휘말린 상황에서 ”자주 상처받고 여러 번 실망한 아이가 쉽게 선택하는 타인에 대한 악의“로 이영초롱은 복자의 간절한 부탁을 거부함으로써 상처를 주고 화해하지 못한다. 이 이후로 이영초롱은 편지를 쓴다. 복자에게, 복자야 안녕?, 복자야, 복자에게…… 끝나 버린 그들의 관계처럼, 부치지 못하고 폐기되어 버린 편지들이다.
타인의 삶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자가 필연적으로 짊어지게 되는 무게와 끊임없이 유동하는 내면의 갈등과 번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어린 시절의 이영초롱은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가 연상되었는데, 필시 훗날 제 이러한 행동을 후회할 것이다 싶었다. 일찌감치 고모로 인해 ”미안함“을 인생에서 가장 무거운 기억으로 간직했기에, 이영초롱은 눈을 빨리 털어내지 못하는 판사가 되었다고 본다. 눈은 빨리 털어내지 못했는데 법정에서 욕설은 내뱉으면서 이영초롱 판사는 고고리섬으로 가게 된다. 다시 만나게 된 복자는 힘든 삶 속에 있었고…… 그건 어린 시절 그때 이영초롱이 한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영초롱 판사는 ‘어톤먼트의 브라이오니’가 그랬던 것처럼 ‘복자’의 삶에, 사건에 개입하여 ‘복자’를 위해 ”힘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된다.
‘복자’는 실제 사건이 모티프가 된 ‘제주의료원 산재 사건’의 당사자다. 병원의 열악한 근무환경에서 일한 수많은 간호사들이 유산하거나 기형아를 출산했고, 간호사로 근무하다 유산한 복자는 이들과 함께 산재소송을 진행 중이다. 허나, 익숙하듯 ‘병원’과 ‘대형로펌’이라는 거대 자본 골리앗 연합에 이들은 작은 돌조각 하나도 제대로 쥐지 못한 다윗일 뿐이다.
소설은 산재 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지는 않는다. 물론 ‘재판’이라는 점에서 필연적으로 이영초롱과의 연결이 이루어져 전개된다. 하지만 사건이 중심이 된 소설이기보다는 고고리섬을 중심으로 이영초롱의 고모, 복자에게 엄마같은 이선 고모, 친구 고오세, 그리고 이영초롱의 동료들……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들은 모두 삶 속에서 각자의 빛과 어둠을 품고 살아가며 복자의 산재 사건도 이의 한 부분이다.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이 연상되는. 소설은 오세가 드론을 띄워 찍은 고고리 영상을 통해 이러한 의미를 표현하고 있다.
오세는 드론을 띄워서 찍은 고고리 영상을 올리기도 했다. 그렇게 보면 바다 위에 그 작은 고고리섬이 떠 있는 게 기적처럼 느껴졌다. 연속해서 몰아치는 파도를 견뎌가며 섬은 마치 가지를 뻗듯 선착장과 부두를 만들고 꽃처럼 다채로운 지붕의 집들을 피우고 보리밭과 해바라기밭을 보듬으며 거기에 있었다. 해안의 거친 바위들, 섬의 유일한 공장인 보리 도정공장과 밭둑의 고인돌들까지, 그렇게 위에서 보니 모든 것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하지만 드론이 점점 내려앉아 지붕의 시점이 되고 잠자리들의 시점이 되고 우리의 눈높이가 되고 갯강구들의 자리까지 내려와 착륙하면 슬픔이 먼지처럼 피어올랐다.
참, 본질적으로 모든 것은 그 자체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슬픔을 지는 존재들일 것도 같다. 살아간다는 건 사실 얼마나 버거운 일인가. 본능을 감당하는 일도 억제하는 일도 힘겹다. 지성과 이성을 끊임없이 담금질하여 문명인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도 끊임없이 사람들과 관계맺음 속에서 감정을 교류하는 일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하지만 마냥 어렵다, 버겁다, 힘들다고만 할 수 없으니… ”마냥 우울하고 슬플 수가 없어서“, ‘복자’처럼 “할망! 나! 슬! 펏! 저! 소리치고 나면 슬픔이라는 게 아무것도 아닌 듯하고 그냥 숨 한번 크게 쉬고 나면 괜찮은 듯“ 살아가는 거겠지. 그조차 하지 못했던 이영초롱은 그러한 삶을 깨달아가는 것일테고.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냉소적인 이영초롱이 유년의 상처와 죄책감을 털어가는, ”나 슬펏저“라고 외치는, ‘실패를 용인할 줄 아는 이’가 되어가는 이야기이다. 나는 이 인생에서 ‘복자’인지, ‘이영초롱’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