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희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문학동네, 2016.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은 캐릭터의 특성이 어떠한 경우라도,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지 않는 것일 게다. 현실 가능성을 가늠한다 해도, 우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김금희 소설에선 이야기는 사라지고, 아니 조금 뒤로 가고 인물이 부각되어 남는다.

  가령,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양희가 어쨌다거나 필용이 어쨌다거나 하는 것 없이 통째로 ‘양희’가 생각나는 것처럼. 굳이 연관성을 짓자면 양희는 캐릭터는 드라마 <연애시대>의 ‘지호’ 캐릭터가 떠오른다. 떠올라 가만 생각하니 드라마 속에서 지호 역시, ‘양희’와 같은 톤으로 사랑을 고백했고 고백을 들은 남자는 필용과 같은 반응을 한다. 그래, 이렇게 유사 캐릭터가 생각났으니 “독특한” 이란 수식어를 빼도 되겠다. “조중균”이나 “세실리아” 역시도 그들의 특징이 너무나 뚜렷하여 현실세계에 없을 듯한 인물인 듯 보였다가 점점 그들의 행동이, 사고가 뭐가 그리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대로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너무나 똑같은 것일 수도 있다. 특별한 ‘다름’은 ‘나’와 같지 않음이 우선하고 ‘내가 아는’ 선에서의 다름이 되니까. 누군가의 다름이 내가 쫓고 싶은 것이라면, 지양하고자 하는 바라면 그 인물의 ‘다름’은 각각 다르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모습의 ‘나’가 있다. 그 많은 면면 중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세실리아’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세실리아’를 기억하며 그것이 ‘세실리아’라고 자신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내 기준으로 구별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사람을 판단한다. 같지 않음의 이유로 ‘판단’의 대상이 되는 양희의, 조중균의, 세실리아의 다름은, 어떻게 ‘나’의 세계와 가까워질 수 있는가.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한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p20



  나와의 거리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가 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고백’이다. 양희만이 갖는 고백의 특별함이란 그것이 느닷없고, 상대방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 고백임에도 건조하고 무심하고 또한 지극히 일상적인 이 고백의 힘은 오히려 고백받는 이를 당황하게 하며 마침내, 강한 힘을 부여하게 한다.

 

시설들에게는 말이 없고 시설들에게는 응시가 없다. 시설들에게는 관계가 없고 시설들에게는 터치가 없다. p17~18


  시설관리로 인사이동 조치된 ‘필용’이 내뱉는 말을 인간관계로 돌려서 이야기하면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타인을 이와 같이 ‘시설들’로 바라보다가 고백과 같은 일들, 조금도 명민하게 갖는 관심,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관계의 전이를 이루게 된다는 것. 양희가 독특하며 유일한 캐릭터라 생각하다 이내 비슷한 ‘지호’를 떠올리게 된 것처럼, 결국엔 조금씩의 유사성을 찾아 관계를 맞추어가는 것이라는 것.

  「너무 한낮의 연애」의 연애가 제목처럼 양희의 이름처럼 ‘양’의 기운이 샘솟아 전체적인 서술의 분위기가 같을 줄 알았더니, 그렇진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희의 기운만이 남아 책의 느낌을 지배한다. 서정적인 느낌이 드는, 나도 모르는 새 내 등을 누군가 토닥여 주는 느낌이. 물론 그것은 양희일 거고. 양희의 고백을 받은 듯, 고백한 당사자는 이미 저 멀리에 있는데 뒤늦게 양희를 쫓아가고 있다. 물론, 이때의 양희는 작가 김금희일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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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2016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서 외면적으로 눈에 띈 건 등장인물의 공간적 위치다.  20대의 청년들이 당연하다는 듯 어딘가, 아니 구체적으로 다른 나라에 있거나 가려거나 갔다 왔다. 작가가 교환학생이나 외국 생활의 경험이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나는 왜 그많은 이야기들을 제쳐두고 이게 제일 눈에 띄었을까.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낮게 깔린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상태’처럼 느껴졌다. 정서적인 느낌을 말함인데, 정적인 이 분위기는 배경에도 영향을 미쳐 이국의 지명이 등장함에도 그곳이 국내인지 국외인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어찌 보면 지명이란 부수적인 것일 뿐, 본질적인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내용을 압도하는 공간적 배경이 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소설 속 이국은 마냥 낯선 곳이고 먼 곳이라는 이미지가 약해지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p31. 쇼코의 미소 


  또한 우리의 청년들은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그 삶이 비슷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그들은 희망하거나 절망을 이유로 한국을 벗어나 있지만, 희망이나 절망의 근원은 ‘내적인 것’이 더 주요한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리적이든, 공간적이든.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89. 신짜오, 신짜오


  또하나, 걷히지 않은 안개의 느낌은 타인에 대한 ‘나’의 태도다. 제 이해의 틀에서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외면하진 않고 있구나, 라는 느낌. 그래서 희미한 안개 속에서 그들은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라고.  베트남 전쟁과 세월호,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하면서 엮어 가는 이야기들이 시대적인 우울을 주면서도 그래서 무거움을 인식시키면서도, 사람에 기대어 희망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아픔을 보아가도록 하면서. 그래서, 이 안개 속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서로 의지하는 것일 거라고.

  이것이 우울에 내려앉는 느낌이 들다가도 되살아나도록 이끌어 주는 힘인 모양이다. 최은영의 우울은, 퇴폐적이고 무겁지 않은 우울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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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5.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p18~19


  성차별과 인종에 대한 편견이 크게 문제로 부각된다. 충격적인 일들과 함께 접하기도 하지만 coincidence와 같이 황당한 상황과 함께 전해지면 이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어두운 밤 외국 여성에게 다가가 coincidence의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요청했다는 이 남학생에게 외국 여성은 밤9시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낯선 이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거절한다. 이에 남학생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한다. 물리적 위협까지 느낀 이 여성은 경비원을 부르고 큰길로 나갔다. 마침 지나던 여학생들이 달려와 괜찮냐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진정시킨다. 이 와중에도 남학생은 “영화를 보면 다 그렇다고, 외국인들은 다들 잡담을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인 남학생의 행태만큼이나 나를 비탄에 빠지게 한 것은 두 여학생에 관한 것이다. 이 외국인 여성의 눈에는 남성이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상황에서 두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거듭 사과를 하는 듯이 보였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였다고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남학생이 자신을 ‘성추행범’ 혹은 그 이상으로 오해하는 듯해 격분했다라고 말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저런 황당한 말을 하면서 잘못을 외국인 여성에게로 돌리며 제가 화를 계속 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찰뿐이고, 그런 남학생에게 여학생들이 사과를 하는 맥락은 도대체 뭐인가? 이것은 너무나 익숙한, 자주 보아야만 했던 모습 아닌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남자친구에게 빌고 있는 풍경. 아무런 안면없이도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남자는 욕망과 그 욕망이 퇴짜 맞을지도 모른다는 노여운 전망을 함께 품고서 여자에게 접근한다. 분노와 욕망은 늘 함께 존재하며, 두 가지가 마구 뒤엉켜 한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는 언제든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사랑이 죽음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가끔은 정말 말 그대로 된다. p46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했거나 하지 않은 일을 갚아주기 위해서 엉뚱한 여자를 강간하거나 처벌해도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p193~194


  한국의 대학교에서 일어난 이 ‘coincidence’ 사건에서, 외국인 여성은 러시아 출신, 이 학교 외국인 교수였다. 남학생은 이 여성이 교수임을 알았으면 달리 행동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하였지만 이 교수는 학생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이 학생의 행동이 “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교육하는 것”은 교수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학생의 행동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밤 9시에 외진 곳에서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면서 낯선 백인 남성에게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일은 대중 매체에 보도된 사건들을–한국에서, 그러나 한국 외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남성의 불쾌한 접근을 여성이 거절했을 때, 그 여성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여성을 괴롭히거나, 여성을 폭행하는 사건들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강간 문화”라고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리 주장과 폭력을 제도화하는 사회 안에 배태된 여성혐오적인 문화인 것이죠.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페도렌코 올가 조교수의 공개서한 중(中)


   이 공개서한에 남학생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는 아직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은 매우 감탄스러운데 남학생 역시 그 감탄을 안다면, 제 잘못을 깊이 깨닫는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의식 깊이 쟁여놓은 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정형과 폭력성을 완전히 소거시킬 수 있을까. 올가 교수가 지적한대로 외국인 남성이었으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남학생이 올가가 ‘교수’인 것을 알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올가 교수가 말하는 바대로 좀더 예의를 갖추어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남학생의 의도는 정말 저 단어의 발음을 궁금해 했을까를 의심케 한다. 그의 이어진 반응이 그것을 보여주고 일단, 올가 교수가 이 학생의 접근에 불쾌함과 공포감을 함께 느꼈다는 점이다.

   이 기사를 보고 이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떠오른 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남자에게 가르치는” 상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이 책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이런 차별적인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며 흥미와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이 유사한 상황들에 웃음까지 나온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이 상황들, 현상들을 어쩌랴.

  수없이 세상은 변했고 수많은 이들이 사고방식이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도대체 그 ‘수많은’은 어느 정도를 이야기하는가. 이 남학생처럼 자기만의 사고방식에 갇혀 제 행동의 정당성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을 반복해 맞닥뜨리게 되니, 이 세상의 페미니즘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성차별의식이 높아졌다고 말하는 동시에 반작용인지 여성혐오는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페미니즘을 여전히 여성도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도 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페미니즘이 포함하고 있는 양성적인 개념을 외면하고 ‘여성’에 한정지어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은 인식의 전환은 이런 책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치 금기의 도서를 보는 듯이 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이 리베카 솔닛의 장점이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통찰력있게 상황을 간파한다. 수전 손택과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신화 속 등장인물 카산드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다 생각할 거리들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책은 짧다. 페미니즘의 개념 설명도 상당히 쉽다. 그녀가 주창하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리베카는 설명을 아주 잘한다.


남성권리운동과 대중적으로 퍼진 숱한 오보들 때문에, 사람들은 요즘 성폭행 무고가 만연했다고 여기곤 한다. 집단으로서 여성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강간 고발이 진짜 문제라는 암시는 개별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폭행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게 만들고, 남성을 주된 피해자로 부각하는 도구로 쓰인다. p169~170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이 여성의 억압적인 상황과 여성성을 비하시키는 상황과 침묵의 세계에서 허덕이는 여성을 향한 정체성 정립이 주가 되고 있기에 흥미 유발이 안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새로운 담론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를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만큼 아는데도 왜 여전히 현실은 이 모양인지 말해 줄 수 있지 않는가. 계속 들으면서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리베카가 이야기하는 이 여성혐오와 폭력의 구조들에 대한 전개에 반론이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겠는가. 충분히 들을 의향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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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incidence


Synchronicity 리더란 무엇인가

- 싱크로니시티, 미래를 창조하는 리더십 내면의 길

조셉 자보르스키, 에이지21 , 2010.


 

 실검에 등장한 coincidence를 보면서 감정과는 별개로 떠올린 몇 가지 생각 중 하나는   Synchronicity였다. 의미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 단어가 연상된 것은 한국번역본의 제목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coincidence의 발음을 빙자로 발생한 이 ‘우연한’ 사건을 보면서 단순한 우연의, 일회성이 아니라 사건 당사자의 내면에 깊이 잠재된 의식의 분출이라는 생각을 하며 홀로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 기사와 댓글들은 놓치지 않고 여기에 이 학교를 거론한다. 왜냐면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우리나라에서 이 최고의 지성, 서울대가 차지하는 위상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이 지성인이라며, 공부를 잘했네라며 사회에 나와서 어떤 꼴로 군림할까를 생각하다보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대한민국을 흔드는 이 난리의 중심을 잡고 줄줄줄 연달아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학력과 학벌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니까. 같은 꼴. 소위 엘리트라는 인간들의 저열함이 미래에까지 연장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 비약인가. 연장될까봐 걱정이다가 더 적합한가.

  Synchronicity는 한국에서 「리더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타인의 리더십을 생각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누구라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때가 있다. 내 자신에게도 리더십을 발휘해서 내 삶을 이끌어가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은 「미래를 창조하는 리더십 내면의 길」이란 부제가 붙었나보다. coincidence, Synchronicity, 리더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사실 이렇듯 간단하다.

  해괴망측한 리더와 그 리더십에 따라 삶이 나락을 치는 상황에서 리더의 역할과 자질에 대한 요구가 특히나 부각되는 이때, coincidence로 인해 이 책의 내용이 되살아나는 이런 우연이 놀라운 건, 이 책의 출발이 워터게이트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여느 리더십 역량책과는 다른 특이점을 보인다. 리더십은 무엇인가, 리더의 자질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며 첫째, 둘째, 셋째, 이런 도식화된 나열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외면’적 리더의 역량에 대한 것보다는 끊임없는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조건을 탐구해가는 여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내용을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두 명의 대표적인 학자를 생각나게 한다. 한명은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전개시킴 칼 융이며 또다른 사람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용적으로는 칼 융의 ‘동시성’을 형식적으로는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에 따라 서술하는 것이다. 

  칼 융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여기에는 우연한 가능성 이상의 뭔가가 작용하고 있다.”라고 동시성을 정의한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 우리에게 확실한 길을 알려주는 그런 순간들”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동시성이 어떻게 리더십과 연결되는 것일까.

  저자는 변호사이다. 그는 한국의 박근혜 게이트보다는 덜 추악한 사건이라고 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으며 ‘리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은밀한 닉슨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리처드 닉슨이라는 사람의 진모를 헌법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터무니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이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속이 다 메스꺼릴 정도였다. 충격과 혐오감이 솟구쳤다. 나라 전체가 걱정스러웠다. 인격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나라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국민들이 느낄 공포와 불안이.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의 수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누구의 책임인가?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54


  다행히 저자는 이런 ‘리더’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대통령의 거짓말에 경멸감과 환멸을 느낀다. 저자는 “권력을 남용하는 파렴치한 리더들과의 악순환 고리”가 문제라고 인식하며 촛불을 든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런 상황을 바꾸지 못하리라는 무력감이 자신을 괴롭혔지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며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그는 철학자, 물리학자, 경영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진실한 접근과 결론에 이른다.

  이 여행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 여행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모험에의 부름’을 받은 것이라고 ‘소명’이라 생각한다. 조셉 캠벨은 영웅이 길을 떠나는데 그것은 영웅으로 하여금 그 길을 떠나도록 만드는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그 모험에 따라 영웅은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목적과 꿈을 찾고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이 영웅의 귀환의 패턴을 따라 길을 떠나고 역경을 겪고 결론을 찾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저자가 찾은 리더는 어떤 것인가. 저자는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리더십이란 사람들이 내부에서 계속 현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세상의 펼쳐짐에 참여할 능력을 키우는 그런 영역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리더십이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다. p19~20 


  이와 같이 저자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미래를 변하게 하리라 생각하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리더십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변화를 주도하는 창조적인 리더십이 되기 위해서는 강한 헌신과 광대한 비전을 갖춘 리더십은 환경에 얽매인 리더십 조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특히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행동이 아니라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깊은 헌신, 애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용기를 북돋는다고 그리하여 실천으로 이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을 위한 헌신의 노력의 과정엔 당연 어려움들도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흔들리지 말고 내면의 부름에, 목소리에 따라 힘껏 나아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러더십에 대한 자질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끊임없는 내면탐구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전혀 별개의 일들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그것은 하나의 관계된 힘을 만드는 연결고리를 짓는다고 말한다. 얼핏 미래의 창조를 위해 열린 사고를 갖는 일은 더불어 순간순간의 일들에도 충실할 것을 주문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어느새 그것을 조직적으로 연결지어 미래를 창조하는 힘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면 말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내적인 투쟁으로 채워진다. 이런 내적인 투쟁을 통해서 누적된 부담감을 극복해야만, 다시 펼쳐지는 생성적 질서의 흐름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내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글자 그대로 그것을 ‘겪는’ 것이다. 말하자면 함정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다. p234


  워터게이트로부터 충격받은 저자의 깊은 내면탐구와 미래 변화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간절한지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불투명하게 흩트려지는 융의 이론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사고방식이나, 내적인 진실성에 더 깊이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느낌, 내가 이해하는 명확성과는 별개로 약간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기대도 깃든 듯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잘못 이야기하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주의 기운”으로 이해될까 염려스러운 바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리더’의 자질엔 사명감도 포함하여 심리적인 ‘확신’, 그 역할에 대한 ‘확고한 믿음’ 또한 필요하리라는 것이다. 아니다. 최고로 간단한 말은 그냥 이럴 것 같다. “도덕적이어라, 끊임없이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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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열의 근원


 나비잠, 최제훈 저, 문학과지성사, 2013.

  

  아이 시절을 지나 나비잠을 잔 날은 얼마나 될까. 형태적인 것을 넘어 정말 달콤하고 편안한 잠의 세계, 개운하게 일어나 아침을 맞는 일은 언제부턴가 요원해졌다. 짧고 불편한 잠과 흉흉한 꿈의 뒷자락으로 뒤숭숭한 하루 하루는 늘 불편하고 불안한 ‘현재’를 만든다.

   이렇게 살고 있는 요섭이다.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이 소설은 요섭의 꿈과 현실사이를 오간다. 꿈은 각본이 있는 것처럼 어릴 적 보던 만화영화나 동화의 내용들과 어우러져 등장한다. 꿈에서는 늘 쫓기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만 현실이라고 다를 리 없다. 이 소설이 잡지에 연재된 작품으로 당시 제목은 ‘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라는 점에서 이 소설 속 동화가 차지하는 역할은 크다고 할 수 있다. 4부로 나뉘어 소설이 전개되는데 하루, 균열, 몰락, 몰락이 소제목이다. 눈에 띄는 것은 소단락 제목의 반복이다. 바로, '몰락‘. 더할 나위 없는 몰락의 세계를 그리는 것일까. 이미 몰락 속에 있는데도 더 몰락할 거리가 남았다는.

  그럼 요섭의 몰락 세계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요섭은 목사 아들로 고급아파트, 미모의 아내, 야구선수를 꿈꾸는 아들이 있는 로펌 변호사다. 잘나가는 로펌변호사로서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익히 봐온 로펌변호사의 전형이다. 그러니까 변호인의 정의는 어디다 줘버린, 기업이나 구린 사람들의 변호가 일순위인 그런 조직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어쨌든 어디든 잘나가면 그만일 수도 있겠다. 계속 그렇게 그 세계 속에서 잘먹고 잘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다 ‘정의’의 이름으로 쾅 뭉개지는 게 맞는 그림인데… 그렇지가 않다. 그는 꿈속에서 뭘 찾고 있는 것일까. 반복적인 꿈과 그 동화의 세계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그를 이끌어 간다. 역시, 이야기는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되는 것이다.

  늘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고 어느 순간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그가 지내오던 하루의 삶에서 비껴간 순간이다. 그런 로펌 변호사라면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리기사를 무료 변론하면서 일은 생겨난다. 이 시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은 당연하지만 진짜와 가짜로 나뉜다. 진짜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지만 ‘있는 자’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상당수다. 이것을 몰랐던 것일까. 라이벌 변호사와는 ‘다르다’는 한순간의 ‘방심, 엉뚱함’이 일으킨 자기 삶의 균열을.

  이 사건을 승소하면서부터 아니 이 사건을 맞은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보는 눈을 달리한다. 보는 눈만 달리하면 되는 것을 그의 삶까지도 달리 만든다. 그러한 세력들도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이 뒤바뀌게 만드는. 촌지 전달한 학부모, 바람피는 아내, 주식 투자 실패, 쫓기며 린치를 당하고 아들은 자살로 생명이 위중한 상황에 놓인 전직 로펌 변호사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세력들. 현실의 그는 그들을 향해 한방을 날리려 동분서주하면서도 꿈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나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역시 동분서주한다.

  그의 몰락이 자신이 지켜오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원칙을 ‘깨고’, ‘선한 일’을 한 대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옳은’ ‘선의의’ ‘좋은’ 일을 하려는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여지없이 깨져버릴 때의 참담함. 비록 평소에는 그렇게 살지 않았던 요섭이라고 그런 일의 결과는 좋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선의의 결과가 기대한 바가 아니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선의가 선의를 낳을 수 없는 구조라면 선의가 피해를 발생시키고 삶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된다면, 결과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선의를 바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종국엔 선의의 실종이 되고 마는 사회가 된다. 이 한번의 선한 행동으로 일어난 요섭의 몰락은 ‘개과천선’의 당위성마저도 허물어버린다. 이 세상은 정말 악의만이 부귀영화를 보장받는 길인가.

  현실의 그를 어쩌면 지배하기도 하는 요섭의 꿈. 꿈속에 등장하는 온갖 동화들의 세상이 그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또 뭔가. 그의 이 ‘선한’ 행동은 꿈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꿈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잊어버렸던 기억을 찾아 떠난다. 반복된 꿈속의 무성과, 메달이 의미하는 것은 어린 그가 살았던 지명인 무성과 그림을 그려 수상한 메달이다. 기억은 자신이 메달의 주인이 아니고 그렇기에 메달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메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언가. 그가 살아온 것처럼 누구에게 빼앗은 것인가, 악의 결과물인가. 기억을 찾아 가면서 묻어 두었던 기억이 그를 괴롭게 한다면, 로펌 변호사였던 그는 정말 직업을 잘 선택한 것이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그가 이 기억을 잃어버린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린 건, 사소함 때문이 아니라 유해함 때문이었다. 진화는 윤리나 미학과 무관했다. 합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때그때 하는 땜질일 뿐. 나를 경멸하게 만드는, 내가 해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상기시크는 기억은 꼬리뼈처럼 퇴화되기 마련이었다. 살아남는 데 방해가 되니까. 그러다 어느 날 빙판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척추를 관통하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떠올리는 것이다. 아, 내게도 꼬리뼈가 있었구나. p355 


  그러나…. 그의 기억은 잘못된 것이다. 보다 기원. 찾아다니며 기억하는 것과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진짜 그의 꼬리뼈를 찾았을 때 그의 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연결이 되는가. 모르겠다. 이 끝없는 꿈의 세계. 그에게 몰락을 가져다주었던 ‘선의’. 그 기억 속에 어린 요섭이 있었다. 그것을 기원이라 한다면 그것을 근원이라 한다면 그가 주욱 잊고 잃고 살았던 것은 결국 ‘선의’가 되는 건가. 그의 몰락은 ‘선의’를 해서가 아니라 ‘선의를 져버리고 살았기에’가 되는 건가. 나비잠을 잘 수 없는 이 꿈의 세계는 그런 거였던가. 꿈은, 기억 속의 어린 그의 모습이 찾던 것은 그의 맘속에서 계속 찾고자 했던 것은 결국 선한 세계였던가.

  알 수 없다. 그저, 한 사내가 몰락한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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