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근원


 나비잠, 최제훈 저, 문학과지성사, 2013.

  

  아이 시절을 지나 나비잠을 잔 날은 얼마나 될까. 형태적인 것을 넘어 정말 달콤하고 편안한 잠의 세계, 개운하게 일어나 아침을 맞는 일은 언제부턴가 요원해졌다. 짧고 불편한 잠과 흉흉한 꿈의 뒷자락으로 뒤숭숭한 하루 하루는 늘 불편하고 불안한 ‘현재’를 만든다.

   이렇게 살고 있는 요섭이다.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이 소설은 요섭의 꿈과 현실사이를 오간다. 꿈은 각본이 있는 것처럼 어릴 적 보던 만화영화나 동화의 내용들과 어우러져 등장한다. 꿈에서는 늘 쫓기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만 현실이라고 다를 리 없다. 이 소설이 잡지에 연재된 작품으로 당시 제목은 ‘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라는 점에서 이 소설 속 동화가 차지하는 역할은 크다고 할 수 있다. 4부로 나뉘어 소설이 전개되는데 하루, 균열, 몰락, 몰락이 소제목이다. 눈에 띄는 것은 소단락 제목의 반복이다. 바로, '몰락‘. 더할 나위 없는 몰락의 세계를 그리는 것일까. 이미 몰락 속에 있는데도 더 몰락할 거리가 남았다는.

  그럼 요섭의 몰락 세계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요섭은 목사 아들로 고급아파트, 미모의 아내, 야구선수를 꿈꾸는 아들이 있는 로펌 변호사다. 잘나가는 로펌변호사로서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익히 봐온 로펌변호사의 전형이다. 그러니까 변호인의 정의는 어디다 줘버린, 기업이나 구린 사람들의 변호가 일순위인 그런 조직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어쨌든 어디든 잘나가면 그만일 수도 있겠다. 계속 그렇게 그 세계 속에서 잘먹고 잘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다 ‘정의’의 이름으로 쾅 뭉개지는 게 맞는 그림인데… 그렇지가 않다. 그는 꿈속에서 뭘 찾고 있는 것일까. 반복적인 꿈과 그 동화의 세계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그를 이끌어 간다. 역시, 이야기는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되는 것이다.

  늘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고 어느 순간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그가 지내오던 하루의 삶에서 비껴간 순간이다. 그런 로펌 변호사라면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리기사를 무료 변론하면서 일은 생겨난다. 이 시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은 당연하지만 진짜와 가짜로 나뉜다. 진짜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지만 ‘있는 자’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상당수다. 이것을 몰랐던 것일까. 라이벌 변호사와는 ‘다르다’는 한순간의 ‘방심, 엉뚱함’이 일으킨 자기 삶의 균열을.

  이 사건을 승소하면서부터 아니 이 사건을 맞은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보는 눈을 달리한다. 보는 눈만 달리하면 되는 것을 그의 삶까지도 달리 만든다. 그러한 세력들도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이 뒤바뀌게 만드는. 촌지 전달한 학부모, 바람피는 아내, 주식 투자 실패, 쫓기며 린치를 당하고 아들은 자살로 생명이 위중한 상황에 놓인 전직 로펌 변호사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세력들. 현실의 그는 그들을 향해 한방을 날리려 동분서주하면서도 꿈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나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역시 동분서주한다.

  그의 몰락이 자신이 지켜오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원칙을 ‘깨고’, ‘선한 일’을 한 대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옳은’ ‘선의의’ ‘좋은’ 일을 하려는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여지없이 깨져버릴 때의 참담함. 비록 평소에는 그렇게 살지 않았던 요섭이라고 그런 일의 결과는 좋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선의의 결과가 기대한 바가 아니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선의가 선의를 낳을 수 없는 구조라면 선의가 피해를 발생시키고 삶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된다면, 결과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선의를 바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종국엔 선의의 실종이 되고 마는 사회가 된다. 이 한번의 선한 행동으로 일어난 요섭의 몰락은 ‘개과천선’의 당위성마저도 허물어버린다. 이 세상은 정말 악의만이 부귀영화를 보장받는 길인가.

  현실의 그를 어쩌면 지배하기도 하는 요섭의 꿈. 꿈속에 등장하는 온갖 동화들의 세상이 그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또 뭔가. 그의 이 ‘선한’ 행동은 꿈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꿈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잊어버렸던 기억을 찾아 떠난다. 반복된 꿈속의 무성과, 메달이 의미하는 것은 어린 그가 살았던 지명인 무성과 그림을 그려 수상한 메달이다. 기억은 자신이 메달의 주인이 아니고 그렇기에 메달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메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언가. 그가 살아온 것처럼 누구에게 빼앗은 것인가, 악의 결과물인가. 기억을 찾아 가면서 묻어 두었던 기억이 그를 괴롭게 한다면, 로펌 변호사였던 그는 정말 직업을 잘 선택한 것이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그가 이 기억을 잃어버린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린 건, 사소함 때문이 아니라 유해함 때문이었다. 진화는 윤리나 미학과 무관했다. 합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때그때 하는 땜질일 뿐. 나를 경멸하게 만드는, 내가 해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상기시크는 기억은 꼬리뼈처럼 퇴화되기 마련이었다. 살아남는 데 방해가 되니까. 그러다 어느 날 빙판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척추를 관통하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떠올리는 것이다. 아, 내게도 꼬리뼈가 있었구나. p355 


  그러나…. 그의 기억은 잘못된 것이다. 보다 기원. 찾아다니며 기억하는 것과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진짜 그의 꼬리뼈를 찾았을 때 그의 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연결이 되는가. 모르겠다. 이 끝없는 꿈의 세계. 그에게 몰락을 가져다주었던 ‘선의’. 그 기억 속에 어린 요섭이 있었다. 그것을 기원이라 한다면 그것을 근원이라 한다면 그가 주욱 잊고 잃고 살았던 것은 결국 ‘선의’가 되는 건가. 그의 몰락은 ‘선의’를 해서가 아니라 ‘선의를 져버리고 살았기에’가 되는 건가. 나비잠을 잘 수 없는 이 꿈의 세계는 그런 거였던가. 꿈은, 기억 속의 어린 그의 모습이 찾던 것은 그의 맘속에서 계속 찾고자 했던 것은 결국 선한 세계였던가.

  알 수 없다. 그저, 한 사내가 몰락한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