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 추리


분실물이 도착했습니다 - 다섯 개의 미스테리, 오오사키 코즈에, 생각의집, 2017-02-10.



  분실물이 도착했다.

  찾으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우연처럼 제 스스로 도착했다. 전체 다섯의 단편이 있는데 부제가 다섯 개의 미스터리이다. 추리 소설인가 했는데, 다 읽고 나서야 왜 제목이 전혀 잃어버리지 않은 분실물일까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여기, 다섯 개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잃어버린, 제쳐두었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결국 분실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지난날의 기억은 그때 해결치 못한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가늠케 한다. 오래 전 잃어버린 물건들이 나도 모르는 새 집으로 도착해 내 손에 쥐어진 것처럼 여기 이야기들은 모두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미스테리하다. 분실물은 어떻게, 왜 지금 도착한 것일까.

  미스터리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의 일의 파장이 무엇인지, 또 범인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소설들에 관통하는 느낌은 그러한 범인 추적이나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것보다 분위기이 듯하다.


저는 ‘살아온 일대기’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단 하루의, 아니 한 순간일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 「들장미 정원으로


  기존 미스터리물에서 볼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서늘한 느낌보다는 정제되고 깔끔한, 담백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공포와 잔인함이 가미된 미스터리가 아니라 아련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단편 속 대사처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어떤 일들이 다른 계기로 인해 이야기되면서 그때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이야기의 전말을 가늠하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해결되지 못한 기억들은 그렇게 잔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그 기억에 대한 마무리를 완결을 하고픈게 사람들 마음인 듯하다. 우연찮게 책을  들었는데 첫 번째 단편 「사라의 열매」의 인상이 괜찮아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사라의 열매」는 부동산 중개업자 코히나타 히로시가 업무일로 방문한 집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 20년 전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시작된다. 결국 자신이 관계된 그날의 이야기, 그러니까 소풍날 히로시는 납치됐고 그 시간 사망한 남자가 있었던 사건. 자연적으로 가정폭력에 대해 나아가는 이 이야기에서, 상처와 죄책감의 흔적이 짙게 묻어난다. 그리고 친구….


원치 않게 사람을 상처 입히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방황을 하던 중 들어가 산소에서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하얀 꽃을 보게 되었어. 그는 그 꽃에 완전히 매료되어 몇 번이나 산에 왕래했고, 그러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꽃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네. 그 열매를 가지고 돌아와 하얀 꽃의 모습에서 자비를 빌며 표식을 새기였지. 자기가 타인에게 입힌 상처. 자기가 자신에게 입힌 상처. 이렇게 가로로 두 줄의 상처를 내고, 그것을 봉인하기 위해 세로로 상처를 내었어. 그리고 일생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숨기겠다고 맹세하지. 그런 이야기였어. -「사라의 열매」


  히로시가 들고 다니는 두 줄의 흠집이 새겨진 노각나무 휴대폰 고리. 사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꿰맞춰보던 선생님의 숙제처럼 남은 죄책감. 힘들 때 의지할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이 오래도록 남아 아동학대에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님은 히로시에게도 그 죄책감을 덜어버리라고 말한다. 과거의 열매를 버림으로써. 그것은 히로시가 범인임을 단정하고 하는 말인가.


사라쌍수의 꽃이라고 알아?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앞부분에 ‘기원정사의 종의 소리, 제행무상의 울림이 있고, 사라쌍수 꽃의 색, 성자필쇠의 이치를 나타낸다’라는 문장이 있잖아. 그 사라쌍수의 꽃 색깔이 하얀 색인데, 이게 그 열매야. 정말이래. 특별한 열매야. 상처가 없으면 꽃이 피지만 말이야. 심지 말고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 너에게 맡길게. 그냥 부적 같은 거야.  - 「사라의 열매」

      

  히로시는 더 이상 무겁고 괴로운 짐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노각나무 열매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 자신도 맡아 놓고 있는 것이었으니. 차 속에서 오래도록 흐느껴 우는 성인의 모습이 참으로 애잔하게 기억되는 사라의 열매다. 사라의 나무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날 때 근처에 있었다는 나무고 노각나무는 사라의 나무라 불린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각나무 단편의 이야기가 맞물려 이야기의 풍성함을 더한다. 


벚꽃 이야기를 했어. 전화를 든 채로 커다란 벚꽃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하얀 것이 떨어지길래, 꽃잎 인가 하고 봤더니 눈이었다. 정말 예뻐서,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거미줄」


  유달리 다섯 이야기에는 꽃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이 아련한 느낌을 더욱 배가시켜 주고 있는 듯하다. 「거미줄」속의 벚꽃도 이야기의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대화 속에 지나간 어느 날의 사소한 일 하나가 어떤 이에겐 중요한 기점이 되는 일로 작용하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어떤 이의 생에 대한, 나의 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인생에 대한 비애를 공감하면서 그러나 헤어짐은 변함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의 날.


그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 마음 깊이 남았어. 뭐라고 할까? 땀 투성이가 되도록 동네를 뛰다가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릴 때에 문득 하늘을 바라본 느낌? ‘이제 됐어’ 그렇게 중얼거리면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숨쉬기도 편해지지.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버팀목이 뚝하고 부러진 걸지도 몰라‘.’이제 됐다‘는 그 말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느껴졌어. 분명 지쳐있던 걸 거야. 나도, 선배도 너무 많은 일을 무리하게 했어. -「거미줄」


  이제 됐다. 왜 이 느낌을 알 것 같은가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도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숨쉬기 힘들었던 기억들이, 아슬아슬하게 삶을 지탱하던 버팀목을 붙들고 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이 대화가 나오기까지의 두 연인들의 희극적인 상황도 블랙코미디같이 여겨졌다. 삶은 참 여러모로, 아니러니다. 참 서정적으로 다가온 미스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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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거리를 뒀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책읽는고양이, 2016-10-20.


  기차를 타며 읽으려고 선택한 몇 권의 얇은 책이 모조리 일본 작가들의 책이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다」의 제목이 좋아 책을 꺼내드니 표지가 익숙했다. 제목과 표지의 연관성이 뭔가 생각할 겨를 없이,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에 표지가 익숙할 만큼 알라딘에서 많이 본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 책과 역시 제목만 들은 ‘뭐라고’ 시리즈의 작가 사노 요코 작가의 에세이를 들고 기차를 탔는데….

  너무 거리를 뒀나. 몇 문장의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약간의 거리를 두다」는 제목이 주는 느낌만큼 다가오지 못했다. 덜컹이는 기차때문이라고 생각해보려 해도 오히려 덜컹이는 기차였기에 그 감상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다는 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결과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다」와 사노 요코의 책을 기차여행에 선택한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습니다.”

  에세이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 에세이가 번역되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면 이것은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거나 작가의 유명에 달린 것이라고. 물론, 우리나라 출판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두 작가 모두 소설가라 하는데 작품이며 작가며 전혀 알지 못했고 에세이의 문장에 감흥하지 못하는 것을 여전한 ‘일본풍’이라는 취향으로 돌리기에도 함께 선택한 일본 소설은 그 일본풍에도 기억에 남는다는 점에서 탁월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이 책들의 무엇이 여행길의 내게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성’만을 작동하게 했을까.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거리를 두었어도 점점 가까이, 그리고 계속 머물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러니, ‘약간의’ 거리를 둔 것이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산문집은 타인의 경험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이끌어내는 작가의 통찰을 접하며 나는 왜 내 삶에서 이러한 것을 간과했나 생각하게 되고 그 시선을 돌아보기도 한다. 때론 너무나 공감하는 문장들을 만나 하염없이 빠지고 때론 전혀 생각지 못한 문장들을 만나 또 풍덩인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익숙한 경험의 나열이었다. 하긴, 어떤 에세이들은 너무나 익숙한 감정을, 타당한 논리를 얘기하기에 신선하지 않을 때도 있다. 신선하지, 않다가 이 책들에게서 얻은 느낌이다. 소노 아야코는 차분한 가운데 어두운 느낌으로 사노 요코는 수다스럽고 경쾌한 느낌이긴 했지만.

  소노 아야코는 나답게를 위해 타인과의 거리두기를 제시한다. 타인과의 거리두기에 관한한 일본인들이 월등히 잘하고 있는 점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나 했지만 일본의 원제는 「인간의 분수」. 원제였다면 이 책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일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나답게 사는법에 관한 한 어느 나라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 같긴 하다. 타인의 기준에 매달리지 말고 나만의 법을 찾으라는 이 조언은 굳이 일본 번역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오고 들어온 이야기다. 알지만 늘, 실천에 능력발휘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런 에세이를 통해서 또다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 또 실패하고, 또 노력하다 실패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싶다.

  소노 아야코의 「인간의 분수」 우리나라 번역본 「약간의 거리두기」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 방법에서 자주 눈에 띄는 건 익숙하게 들어온 방법이나 감정적 서가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 역시도 반복적으로 들어온 수사이긴 하다. 그래서 번역본의 제목보다 오히려 원제가 가지는 「인간의 분수」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걸맞은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운명과 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가 제시하는 이 나답게 살기 위해 타인과의 거리를 두는 법에서 전하고자 하는 방법은 내게는 절대로 해당사항이 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신도 좋고, 세상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세상은 좋아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가 옳지 못하기에 신을 찾는 사람도 있다. 세상의 이런 모습은 악이라고 규탄했지만 의외로 신은 ‘상관없다’라고 응답해주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 신은 언뜻 봐서는 공존이 불가능한 적대관계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해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종교인이 아니라 ‘특정’종교가 없기에 이 반복된 메시지에 감흥이 적었음은 분명하다. 힘겨운 삶의 고민들을 종교를 통해 좀더 가볍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거나 나쁜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가고, 또 제 경험을 타인에게 제시한다. 그 지점에서 소노 아야코의 방법이 내게 와닿지 않았을 뿐.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신앙이 인간을 더욱 이기적이게 한다“라고도 주장한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를 이어가는 종교와 어제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도 이 생각에 한몫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할 때 불행히도 ‘종교인’은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하면 너무 억울할 것도 같지만, 종교를 갖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종교’가 제 힘들을 제대로 못써먹고 있는가, 잘 써먹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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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로베르트 발저를 아시나요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한겨레출판, 2017-03-15.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글을 읽을수록 여러 생각의 갈래로 달려갔는데 그 중 하나는 끌림이었다. 끌림의 느낌은 서늘함이었다. 싸늘함과는 다른, 왜인지 모르게 서러움 가득한 기분. 발저의 글 속으로 푸욱 파묻혀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글픈 설움에 떨렸다. 작가의 생애를 먼저 알았기에 작가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을까. 물론 그렇지않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작가의 생애로 인해 글과 작가가 일치되었고 길 위의 고독가가 느껴졌다.

  발저의 생애를 보다가 몇몇의 작가가 생각났는데 거리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리며 국민작가라 칭송받는 보후밀 흐라발이다. 발저 역시 스위스의 국민작가라 칭송받는다 하며 독일문학사의 중요한 작가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부코스키, 흐라말, 발저의 공통점이라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글을 쓰고 주류라 불리는 분위기로부터 몇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그들의 주변에 흐르고 있었고, 물론 그것이 내면에도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은 그의 작품 「크리스마스이야기」에서처럼 크리스마스의 아침, 산책길, 눈밭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작품 「산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걷고 걷는 이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작가의 인생에서 걷기와 쓰기가 중요한 듯 그의 인생은 걷는 것과 쓰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그의 생에 종이조각이라면 어디든 글을 썼다는 발저는, 자살을 시도하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발저의 자살은 원체도 가난한 삶에 전쟁으로 인해 더 심해진 궁핍과 그로인한 우울때문이라 한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절대 글을 쓰지 않았는데, 왜냐면 글을 쓰러 간 것이 아니라 ‘미치기 위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라고. 독특한 그의 세계가 가늠이 되지만 내면 깊이 걸어 들어가는 발저의 글맛이 독특한 세계, 그런 것이 어디 있나 싶다.


고독하다는 것. 얼음과 같은, 쇠붙이와 같은 전율, 무덤의 냄새. 자비심 없는 죽음의 전조. 아, 한번이라도 고독했던 자는 다른 이의 고독이 결코 낯설지 않은 법이다.


  이 작품집으로 발저의 글을 처음 접하지만 고독이 짙게 배여 있다는 느낌과 머릿속이 복잡하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방법이 발저의 산책으로 그리고 글쓰기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끌림도 글속에 짙게 배인 이 고독과 서정의 나래였다고 생각된다. 100년도 전에 태어난 발저에 대해 책표지의 저자 소개 정도로만 알고, 단지 작품 하나 읽었다 뿐인데도 나는 그의 세계가 이해되는 듯이 굴고 있다. 나는 홀로 산책하듯 발저의 글을 읽다가 그가 내 앞에서 걸어가는 듯이 여기며 글을 읽었다. 어떤 정서나 문체에서 발저의 끌에 한없이 끌린 후 마냥 산책을 하고픈 기분에 시달렸다.


나는 언제든지 할 수만 있다면 몽상에 잠긴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하는 건 아니다. 조금도 알지 못한다! 나는 늘 생각하는데, 어디서 큰돈이 굴러 들어오면 나는 일하지 않으리라,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나를 어린아이처럼 기쁘고 들뜨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걷고 싶었고 길만이 아니라 내 내면의 길로도 끊임없이 걸어가고 싶었다. 마냥 걷는 것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탁월하고 두서없이 글을 적는 것 역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나름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글이 생각을 따라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발저의 이 산책과 함께 한 글들에 자꾸 맴돌게 되었나, 싶다. 그래서 반가운 글들과 더러는 재밌는, 그리고 아주 많이 서러운듯 느껴지는 글들을 보면서 그의 마지막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나, 아니 그의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 생에 또한 우울했던 그의 생에 대해 그 자신, 아름답다 생각하며 눈을 감았을까.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비가 오지 않는 오랜 가뭄의 날들. 발저의 글을 들여다볼수록 왜인지 서러운 울음이 나는 듯했는데 눈이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이 세상에 불만도 불안도 많고 어쩔 땐 전혀 원하는 것이 없기도 어쩔 땐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한동안은 계속 그랬고, 지금도 역시 분노를 버리면 안 되겠구나, 하며 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잡고 있는 것도 없으면서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에 들 때가 있는데…발저처럼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지 않을 날이 올까. 아직, 확신할 수 없어서 더 서글픈지도 모르겠다.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움의 색 바랜 고결한 그림이여, 감미롭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 이 세상과 이 인간들에게 등을 돌려버리는 것 또한 합당하지 않으니, 그 누구도 역사의 사색에 잠겨 있는 자신의 기분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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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를 보았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해냄, 2017-04-03.


  작가가 13년 만에 펴내는 단편소설 모음집이라고 하는데 수록된 다섯편의 글을 보면서 소설과 수필 사이에서 갸우뚱했다. 마지막 수록된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2011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일 때 읽었던 것이라 단편소설상을 받은 만큼, 소설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때도 수필 느낌을 더 받았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외에는 대체로 수필로 느껴졌는데 그건 특히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 여겨지는 내용과 작가의 등장 때문일 듯하다. 장르가 글을 읽는데 어떤 영향이 있느냐 할지 모르겠지만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읽을 때의 느낌이나 방법에서 나름 차이가 있다고 여겨진다. 상상의 면에서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글은 상당히 속도감 있게 읽혔다. 수록된 단편이 적은 분량이긴 했지만 산문집을 보는 듯한 편집의 영향도 있었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땐 고령화시대의 노인들의 연륜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거나 탄핵 사건을 계기로 노인세대에 대한 비판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성향을 보건대 후자쪽으로 더 기울었다. 막상 읽어보니, 이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는 현대 과학을 다 동원해 의사가 예측한 대로 일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돌아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숯덩이 같은 빛깔의 얼굴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할머니의 숨소리는 정신 나간 거위가 꽥꽥거리는 것처럼 커서 가끔 할머니의 용태를 확인하러 집에 들르던 친척들은 할머니 방에 얼씬하지 않고도 거실에서 느긋하게 햄과 치즈 그리고 연어 따위를 안주삼아 위스키를 마시면서 골프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곤 아마 “저 양반 참 오래 버티시네……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제 고만 가셔야지.”라고 모든 것이 할머니를 위한 생각이라는 듯, 스스로를 매우 선량하게 여기는 얼굴로 말했던 것뿐이었다.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할머니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쩌면 기다리고 있을 때 할머니는 당신 자신의 자식을, 며느리의 죽음을 겪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후에도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기다리면 어김없이 다음날 할머니는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났고 그 대신 다른 생물들이 어김없이 죽었다. 생생한 몸을 일으키며 미음을, 밥을, 갈비를 뜯어먹는 할머니에게 ‘나’는 경악하지만 ‘나’가 목격한 것은 할머니의 죽음의 순간 강렬하게 내뿜는 할머니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옭아매려던 기운에 소리쳐 반항하며 빠져나왔다. 여전히 할머니는 죽을 때가 되었다가 다른 생명의 죽음과 함께 생생히 살아나 밥을, 갈비를 먹고 있다.

  오래도록 병을 앓은 채 이제 죽음이란 문턱에 있던 노쇠한 할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생생해지는 모습은, 그 사이에 ‘다른 것이 (대신) 죽었다’가 삽입된 상황을 맞닥뜨리며 할머니에게서 구미호를 겹쳐보이게 한다. 매일밤 가축들을 잡아먹으며 아침이면 인간의 얼굴을 들이밀었을 구미호.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른 것을 죽여 일상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도록 당연한 것으로 용인되었고 생명의 본질로 여겨졌다. 용인된 것과 용인되지 않은 것의 차이, 어떤 것이든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항상 문제는 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오래전 구미호를 보며, 읽으며 구미호에게 연민을 느꼈던가. 인간이 되고자 하나 하루를 착각해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던가. 기껏해야 사람을 잡아먹는 여우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발버둥을 가소롭게 여겼던가. 여우가 인간이 됨을 타당하지 않다 여겼던가. 글쎄, 확실히 어린 날엔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가 무서워보기인 했을 지라도 결국 눈물 흘리며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한 구미호에게 마냥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어떤가.


내가 아는 것은 그 힘이 분명 할머니에게서 왔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 힘은, 그렇게까지 목숨 바쳐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가여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가난해서 마음을 굽혔던 것도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지만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도 사실은 자신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꼭 남을 해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힘이라는 것을……

  

  할머니가 죽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죽지 않는가, 죽지 못하는가를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쏟아 나오는 기운을 보건대는 분명 죽지 않는 것이다. 그 기운이 여전한 탐욕과 욕망이라 말한다면 자신보다 약한 생명들을 죽임으로써 살아나는 할머니의 생에 대한 욕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강자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할머니 대신 죽은 생물들은 약자라는 이 프레임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고양이가, 진돗개가, 까치가 그렇다고 치다. 할머니의 아들이, 며느리가 약자인가? 대체로 우리는 노인들을 사회적 약자로 간주한다. 그래, 분명 할머니는 사회적 약자다. 더구나 할머니는 병들었다. 이보다 더 약자인 경우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왜 할머니를 약자라 하지 않는가. 오로지 할머니가 가진 게 ‘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돈’만 가지면 그저 세상의 강자로 바라보는구나. 이 서글프고 씁쓸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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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문학과지성사, 2016-04-15.


  아주 오래 전에 이 ‘사건’을 접했다. 파리 한 마리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결말이 끔찍스러워 잠자는 이를 깨우는 것에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프랑스 사람들이 해질녘을 표현하는 말이다. 해가 지고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 멀리서 보이는 짐승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는데, 참 탁월한 표현이다 싶었다. 우리나라엔 아마도 드라마 제목으로 유명해진, 그래서 더 널리 알려진 말로 안다. 이 멋진 표현에 끔찍한 우순경 사건이 겹쳐진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 사건과는 안 어울리는 말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선 서정과 불안의 기분이 얹어지는데 우순경 사건에서와 같은 공포는 덜 느껴지니까. 선과 악이라는 프레임을 얹으려 해도 쓸데없이 꺼려지는 느낌은 악이라는 단어조차도 부족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깊어져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서야 나는 그 기이한 감정이 실은 서글픔이었음을 깨달았다. 불빛은 너무나 취약했다. 들에 핀 꽃처럼 무심한 한 줄기 바람에도 목이 꺾일 수 있었다. 어쩌면 불가해한 어떤 악의(惡意)에 의해서도. 30여 년 전 ‘남한’의 벽촌에서 하룻밤새 동네 사람 쉰여섯을 총으로 쏴 죽인 순경은 불 켜진 집만 노렸다고 했다.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새까만 지평선에서 외로이 빛나는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전된 총을 들고 빛을 찾아가는 하나의 그림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림자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두려움 속에 자문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p330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알게 되는데 이것을 보면 왜 제목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했는지 알듯하다. 「동화처럼」을 읽은 후에 「개와 늑대의 시간」을 읽은 터라 「동화처럼」의 동화같은 연애 이야기와 실화 사건 이야기의 간극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 사람이 하룻밤새 55명을 총기로 난사하는 이 이야기는 그날의 기록이다. 한마을을 휩쓸고 간 총성이 울리기 전부터의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를 사실과 상상을 더해 작가가 재창조하고 있다.

  1982년 4월 26일의 사건 속에서 술만 마시면 난폭해지는 성격이자 평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우순경이 있다. 총기난사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범인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었던 경찰이었다는 것이다. 낮잠을 자던 우수경의 가슴에 붙은 파리를 잡겠다고 동거녀가 가슴을 때린 것에서 싸움이 시작되고 이후 무기고를 탈취해 시간 간격을 두어 인근 4개 마을 사람들에게 총과 수류탄을 난사해 사망 56명, 부상 34명을 기록한 것이 이날의 공식적인 사건의 전모다. 우순경은 우체국으로 가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해 외부와 완전히 통신을 차단하게 하고 전깃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난사했는데, 당시 마을은 집장촌으로 대부분 서로가 친척 관계였다. 우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기사로는 알 수 없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고 있다. 일상의 삶에 들이닥친 우순경이라는 실루엣에 그날그날의 충실한 하루를 살던 사람들의 생애가 어떻게 소멸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비극의 난사가 더 가속화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에 자리잡은 관료주의와 권위주의가 따라온다. 살인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보고 체계를 가지고 따지는가 하면 나 혼자만이 살겠다고 숨어 버리는 책임자들, 반공 이데올로기가 꽉 붙들어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항상 끔찍한 사건의 뒷배경으로 자리하는 이 모든 구조는 개개인의 삶에서 필요한 순간마다 얼마나 쉽게 내쳐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사건이 발생한 1982년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2년 후, 당시의 정권은 전두환. 사건 후 민심을 두려워 해 언론 보도 역시 통제했다. 범인 27세의 청년 우순경은 청와대 근무 이력이 있는 자로 청와대에서 좌천되어 의령으로 발령받았다. 이런 좌천에도 우순경의 열등감과 불만이 쌓여 있었는데 이러한 사건이 좌천되기 전에 벌어졌다면 하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끔찍하다는 것을 알지만 ‘차라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늑대의 시간을 만든 것, 늑대를 활개치게 한 것이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그 모든 탐욕과 구조의 한 요소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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