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ma, Just Killed a Man

    

  보헤미안 랩소디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정재민, 2014.

 

   

   퀸, 프레디 머큐리의 노래가 소설의 제목이다. 노래속의 처절한 절규가 전이되는 이 소설의 흡입력은 외적인 부분에서도 많이 눈에 띈다. 퀸의 노래 제목, 현직 판사가 쓴 소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 그렇기에 ‘사건’이 무엇인지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진다.

   “이건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의 손가락 모양이 아닌 것 같은데”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진을 바라본 의사 후배의 한마디에서 의심은 시작된다. 판사 하지환의 어머니는 무려 9년 동안을 류마티스 관절염약을 먹으며 병원치료를 받았고 그로 인해 암으로 돌아가셨다. 이것을 조사하던 중 어머니는 퇴행성 관절염이었을 뿐인데 병원 의사, 우동규에 의해 지속적으로 독한 류마티스 관절염약을 먹게 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류마티스 유병률이 일 퍼센트 미만임에도 그의 어머니가 살고 있던 신해시의 경우 인구의 10%나 되었다. 신해시에만 우리나라 평균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의 수를 뛰어넘은 류마티스 관점열 환자들이 살고 있는 것이다. 이에 고발을 진행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더 확장되어 간다.

   우동균은 많은 일반 환자들을 특정 약을 먹어야 하는 류마티스 관절염 환자로 진단함으로써 이익을 얻었다. 그 과정에서 환자들의 인권은 외면하고 자신이 가진 의료정보와 권력으로 환자들을 제 이익을 얻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어찌 보면 한 개인의 이기적인 욕심이 비윤리적인 의사의 행동이, 그로 인해 당연히 처벌되어야 하는 우동균의 행동이 발각되고 이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생명과 관계된 일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용서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은 집단적이고 조직적으로 은폐되는 상황으로 전개된다.

   한 조직, 한 나라가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비리에 얽혀 난리가 나는 상황이 가능할진대 한 도시에서 맞닥뜨리는 이런 상황은 오히려 더 그쯤이야 하게 된다. 이지환 역시 판사임에도, 그가 가진 사회적 권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압력이 들어오는 것이다.

 

“신해성모병원은 신해시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종합병원이야. 직원들만 천 명이 넘어. 신해시의 정치인들, 종교인들, 지역 유지들과 뿌리 깊게 연결되어 있어. 선배는 단지 의사 한 명이 아니라 그 많은 사람들과 싸워야 하는 거야. 이기기도 어렵고 이긴다 해도 선배가 다칠 거야.”

“그렇다고 엄마의 원수를 눈앞에 두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네 엄마가 당했다고 생각해봐. 그래도 그렇게 말할 거야?” p80

 

 

   우리는 오로지 ‘정의’와만 싸울 수 없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담보로 된 의료사기죄인 이 사건은 언론에서조차 보도되지 않는다. 특히나 지역신문조차 외면하는데, 신해성모병원이 신해시에서 가장 큰 광고주라는 이유 때문이다. 한 사건이 감춰지는데는 그것을 보도하지 않는 언론, 사건을 수사하지 않는 경참, 범죄자를 눈감은 검찰, 법의 정의의 잣대를 엉뚱하게 적용하는 법원이 모두 함께 한다. 여기에 신해병원은 종교단체에서까지 보호한다. 정치, 권력, 종교. 무엇보다 자신과 가까이 있는 사람들로부터 회유와 협박을 거듭 받는다. 판사 이지환은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고발하며 맞서보지만 그 어떤 법적인 처벌이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경험을 통해 판사 이지환은 “검찰의 힘은 사람을 감옥에 보낼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가야 할 사람에게 면죄부를 줄 수 있다는 데 있음을 절감”하기까지 한다. 우동규 한명의 비리를 처단하기 위해, 아니 처단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줄줄이 나서야 하는 수많은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이 익숙하면서도 놀랍다. 그 줄줄이 기차 중 어느 한칸도 문제에 대해 지적하고 바꾸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그들이 이 사회에 사회적인 지위와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배운 이들이라는 것도, 온갖 세상의 정의를 다 지켜내는 사람이라 포장하는 것도.

   이 사건은 이렇게 사라지는 것 같았지만 이지환은 허무하게 종결이 난 사건을 안고 지속적인 공황장애를 겪는다. 신해시에서 겪은 사건으로 인해 너무나 큰 충격을 얻은 탓일까. 해결되지 않는 사건의 억울함이 마음에 남아 있기에 어머니의 물건만 보면 공황장애를 겪는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그는 판사 아닌가. 결국 후배의 권유로 정신분석을 받으며 하지환은 자신의 내면의 갈등과 정신적인 이 장애의 원인을 찾아내고 상처를 치유해간다. 퀸의 노래 가사처럼 그의 어린 시절엔 홀어머니의 지나친 기대에 휘둘렸던 어린 지환이 있다. 어머니의 바람대로 살아온 자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들. 그리고 우동규의 사건을 조사하고 진행하는 과정에서 만난 자신의 어린 시절 친구, 사망한 친구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들… 퀸의 노래 보헤미안 랩소디의 가사처럼, Mama, Just Killed a Man…

   이지환의 상처는 치유해갈지 모르나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상처는 어떡해야 하나. 이것이 실화라는 사실을 생각하며 공황장애를 겪을 것만 같다. 이 지독하게도 답답한 사회의 정의라는 것들. 우리 사회에서만 적용되는 정의의 다른 모습들. 사회정의가 바로 세워지지 않을 때면 어떡하든, 개인적으로라도 정의를 실행하려 하는 경우도 많다. 사회정의가 무너진 것을 보고 겪는 것만큼이나 개인적으로 정의를 실행하는 일도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힘든 일이고 위험한 일이다. 허나, 개인적으로 ‘정의’를 실천한다는 말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이겠는가. 우리 사회는 이 정의가 무너짐으로써 정의를 외면하는 무리들의 집합체 속에서 늘 Mama, Just Killed a Man… 보헤미안 랩소디와 같은 노래를 부르는 소년들을, 사람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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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의 공포



 선량한 시민

 2013년 제9회 세계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김서진. 2013.


 그것은 누명임이 분명했다. 평범한 주부이자 교통 법규도 한번 위반해본 일 없는 모범적이고 선량한 시민이었던 

은주가 어느 날 아침 경찰에 의해 체포된 것이다. p7


  이것이 사실이라면 또 한명의 평범한 시민이 공권력에 의해 억울함을 당했다. 그것도 살인 사건 용의자로. 그렇기에 이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사건을 더 내밀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결론부터 얘기하자. 그 평범하고 모범적이고 선량한 시민, 은주는 명백히 살인자이다. 더 정확히는 연쇄살인자가 된다. 그녀가 아닌 다른 선량한 시민이 은주에 의해, 은주로 인해 희생된다.  

  시민 강은주. 평범한 40대 전업 주부. 시아버지와 남편, 아들,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시아버지는 한때 큰 교복공장을 운영했고 남편은 사업이 망한 후 백수이다. 그렇기에 은주에게서는 그 어떤 살인의 동기를 찾을 수가 없었다. 은주 역시 동네 개천에 만취한 60대 남자가 죽은 사건은 자신과 무관하다고 적극적으로 부인한다. 실족사로 결론 내리려던 사건이 은주가 살인자라는 목격자로 인해 조사가 이뤄지지만 역시 경찰도 다른 증거를 찾지 못한다.

  은주는 고교 동창 모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개천에서 오줌을 누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서 등을 밀어버린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사건은 실족사로 처리되었고 자신은 기억을 잊고 일상의 삶을 잘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목격자가 있다는 말에 바짝 긴장한다. 그리고 목격자로부터 살인의 이유를 재촉받자 그의 정체를 알아내어 마시던 막걸리에 농약을 타 넣음으로 그를 제거한다. 이제 다시 은주는 선량한 시민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나, 은주의 오해로 목격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살해된다. 여전히 목격자는 남아 있다.

  목격자는 살인 현장을 보고 두려움과 공포보다 ‘궁금함’이 더 차오른다. 관련없어 보이는 이를 살해하는 이유를 알고 싶은 소설가를 꿈꾸는 논술강사 윤창수. 그는 은주의 모든 것을 목격하고 관찰하며 은주로부터 살인의 동기를 알기 위해 애쓴다.

  알고자 하는 자와 알리고 싶지 않은 자의 싸움이 시작된다. 과연 누가 승리할 것인가? 독자의 입장에선 윤창수의 편에서 은주의 살해동기를 알고 싶다. 그러나 은주 자신도 그것에 대해 뚜렷이 알지 못한다. 심지어는 살인을 하고서도 멀쩡히 일상을 살고 있고 그 자신도 그것에 대해 무심하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고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단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은주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왜 가공의 연쇄 살인범이 현실로 나타났는지, 자신은 왜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죽였는지, 사람을 죽이고도 왜 아무렇지도 않은지 이해하려 하지 말자. 단지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뿐이다. p195


  생각해보면 선량한 시민을 힘들게 하는 것은 경찰이다. 동네에서 일어난 두 건의 살인에 대해 경찰은 전혀 범인을 밝히지 못하는 것이다. 첫 번째 살인이 동기없이 일어난 것이라면 두 번째 살인은 명백한 동기가 있다. 그러나 두 사건의 관련성을 찾지 못하는 경찰은 여전히 첫 번째 살인 용의자가 아닌 은주에 혐의점을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은주는 너무나, 평범하다.

  사람들은 동네의 연속적 살인에 공포를 느끼지만 은주는 예전처럼 별일없이 산다. 단지, 윤창수와의 밀당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윤창수는 다르다. 그는 삶이란 우연과 충동에 의해 이해할 수 없이 흘러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은주의 살인 동기를 알고 싶어하는 그는 살인 사건으로 조사를 받은 적이 있다. 고교 시절 과학실 수은 중독으로 과학교사가 사망했는데 그날 창수가 수은을 쏟았던 것이다. 과학 교사의 죽음이 창수의 실수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창수에게 그 기억은 오래 남아 있다. 창수는 그 죽음의 이유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때의 그 사건에 대한 이해를 풀고 싶은 욕구이듯 은주에게 집착하는 그로 인해 결국 창수가 두 사건의 용의자가 되어 경찰에 잡혀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알다시피, 너무나 평범하지 않다.


동기가 정말 중요한 것일까. 창수는 의심스러웠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어떤 이유가 있고, 엄청난 일에는 그만큼 엄청나고 절박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착각일지 모른다. 사람들은 누구나 때로 절박한 심정이 되곤 하지만, 그 절박함들은 대부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다. 반대로 아무것도 아닌 사소한 이유가 때로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무엇이 이러한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그것을 동기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p93 

  

  왜? 왜 그랬습니까?

  뉴스를 보아도 드라마를 보아도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한 중요 질문은 항상 “왜”다. 얼굴을 가린 범인들에게 묻는 기자들의 질문은 항상 “왜 죽였습니까?” “미안하지 않습니까?” “사과한마디 하십시오.” 가끔 이런 말들이 너무나 공허하고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체포되어 경찰서로 이성되는 범인들을 향해 미안하냐고 물은들, 사과하라고 말한들…. 그럼에도 말이라도 그렇게 해야 된다고 보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러면서 범인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라고 말을 해야 비로소 심신의 안정을 느끼는 듯하다. 그리고 범인이 묵묵부답이면 그것대로 또 비난을 쏟으며 참을 수 없어 한다. 어떤 경우라도 잘못한 사람에게서 그것의 진정성을 떠나 입 밖으로 “잘못했다”는 말을 듣고 싶어하는 ‘선량한’ 시민인 우리.


지극히 평범한 아줌마의 껍질 아래 비인간적인 공격성과 철저한 이중성,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무심함이 자리 잡고 있다고 생각하니 창수는 거의 전율을 느꼈다. 그 전율은 기막히게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했을 때 느끼는 충격과도 유사했다. 평범한 말만 골라 하면 할수록 은주는 더 신비롭게 보였고, 은주 앞에서 자신은 너무나 평범한 인간인 듯한 겸손한 마음이 들었다. p133

 

  선량하게 살고 있고 선량한 이웃과 살고 있고 선량하고 싶은 시민은 ‘선량하지 않은’ 이들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미 몸속에 그러한 기질이 내재되어 있고, 그러한 기질을 드러낼 환경 속에서 살거나 자라 와 ‘선량하지 않은’ 시민이 된다고 생각한다. 결국 이러한 편견이 그 옛날부터 범죄자의 얼굴은 따로 있다, 같은 생각을 만들고 신념화한다. 실체를 알아보기 보다는 외면에 표피에 집착한다. 우리들 살고 있는 곳곳에 속속들이 진실을 감추고 선량함을 가장한 ‘은주’와 같은 시민이 아주 평범하게, 아주 우아하게, 아주 별일없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눈을 키우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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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희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문학동네, 2016.

  

  소설이나 영화 속 인물은 캐릭터의 특성이 어떠한 경우라도, 현실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지 않는 것일 게다. 현실 가능성을 가늠한다 해도, 우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전제하기에 그럴 것이다. 그런데도 김금희 소설에선 이야기는 사라지고, 아니 조금 뒤로 가고 인물이 부각되어 남는다.

  가령, 「너무 한낮의 연애」에서 양희가 어쨌다거나 필용이 어쨌다거나 하는 것 없이 통째로 ‘양희’가 생각나는 것처럼. 굳이 연관성을 짓자면 양희는 캐릭터는 드라마 <연애시대>의 ‘지호’ 캐릭터가 떠오른다. 떠올라 가만 생각하니 드라마 속에서 지호 역시, ‘양희’와 같은 톤으로 사랑을 고백했고 고백을 들은 남자는 필용과 같은 반응을 한다. 그래, 이렇게 유사 캐릭터가 생각났으니 “독특한” 이란 수식어를 빼도 되겠다. “조중균”이나 “세실리아” 역시도 그들의 특징이 너무나 뚜렷하여 현실세계에 없을 듯한 인물인 듯 보였다가 점점 그들의 행동이, 사고가 뭐가 그리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반대로 그들을 제외한 다른 이들이 너무나 똑같은 것일 수도 있다. 특별한 ‘다름’은 ‘나’와 같지 않음이 우선하고 ‘내가 아는’ 선에서의 다름이 되니까. 누군가의 다름이 내가 쫓고 싶은 것이라면, 지양하고자 하는 바라면 그 인물의 ‘다름’은 각각 다르게 다가오지 않겠는가.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모습의 ‘나’가 있다. 그 많은 면면 중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세실리아’에 대해 수많은 이들이 각자의 시선으로 ‘세실리아’를 기억하며 그것이 ‘세실리아’라고 자신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내 기준으로 구별하고 그것에 의지하여 사람을 판단한다. 같지 않음의 이유로 ‘판단’의 대상이 되는 양희의, 조중균의, 세실리아의 다름은, 어떻게 ‘나’의 세계와 가까워질 수 있는가.


양희와 필용의 허무하고 특별한 것 없던 관계가 다른 색채를 띠게 된 건 양희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 때문이었다. p20



  나와의 거리가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가 변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의 ‘고백’이다. 양희만이 갖는 고백의 특별함이란 그것이 느닷없고, 상대방의 반응에 ‘영향’을 받지 않는 듯해 보인다는 것이다. 사랑 고백임에도 건조하고 무심하고 또한 지극히 일상적인 이 고백의 힘은 오히려 고백받는 이를 당황하게 하며 마침내, 강한 힘을 부여하게 한다.

 

시설들에게는 말이 없고 시설들에게는 응시가 없다. 시설들에게는 관계가 없고 시설들에게는 터치가 없다. p17~18


  시설관리로 인사이동 조치된 ‘필용’이 내뱉는 말을 인간관계로 돌려서 이야기하면 같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타인을 이와 같이 ‘시설들’로 바라보다가 고백과 같은 일들, 조금도 명민하게 갖는 관심, 열린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관계의 전이를 이루게 된다는 것. 양희가 독특하며 유일한 캐릭터라 생각하다 이내 비슷한 ‘지호’를 떠올리게 된 것처럼, 결국엔 조금씩의 유사성을 찾아 관계를 맞추어가는 것이라는 것.

  「너무 한낮의 연애」의 연애가 제목처럼 양희의 이름처럼 ‘양’의 기운이 샘솟아 전체적인 서술의 분위기가 같을 줄 알았더니, 그렇진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양희의 기운만이 남아 책의 느낌을 지배한다. 서정적인 느낌이 드는, 나도 모르는 새 내 등을 누군가 토닥여 주는 느낌이. 물론 그것은 양희일 거고. 양희의 고백을 받은 듯, 고백한 당사자는 이미 저 멀리에 있는데 뒤늦게 양희를 쫓아가고 있다. 물론, 이때의 양희는 작가 김금희일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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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다



 최은영, 쇼코의 미소, 2016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서 외면적으로 눈에 띈 건 등장인물의 공간적 위치다.  20대의 청년들이 당연하다는 듯 어딘가, 아니 구체적으로 다른 나라에 있거나 가려거나 갔다 왔다. 작가가 교환학생이나 외국 생활의 경험이 있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 정도로 나는 왜 그많은 이야기들을 제쳐두고 이게 제일 눈에 띄었을까.

  소설집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낮게 깔린 안개가 아직 걷히지 않은 상태’처럼 느껴졌다. 정서적인 느낌을 말함인데, 정적인 이 분위기는 배경에도 영향을 미쳐 이국의 지명이 등장함에도 그곳이 국내인지 국외인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다. 어찌 보면 지명이란 부수적인 것일 뿐, 본질적인 아닐 것이다. 그것이 내용을 압도하는 공간적 배경이 되지 못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소설 속 이국은 마냥 낯선 곳이고 먼 곳이라는 이미지가 약해지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모르겠다.


그때만 해도 내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나는 비겁하게도 현실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비웃었다. 그런 이상한 오만으로 지금의 나는 아무것도 아니게 되어버렸지만, 그때는 나의 삶이 속물적이고 답답한 쇼코의 삶과는 전혀 다른, 자유롭고 하루하루가 생생한 삶이 되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p31. 쇼코의 미소 


  또한 우리의 청년들은 한국에서나, 외국에서나 그 삶이 비슷한 일면을 보이고 있다는 얘기일지도. 그들은 희망하거나 절망을 이유로 한국을 벗어나 있지만, 희망이나 절망의 근원은 ‘내적인 것’이 더 주요한 해결책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리적이든, 공간적이든.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도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p89. 신짜오, 신짜오


  또하나, 걷히지 않은 안개의 느낌은 타인에 대한 ‘나’의 태도다. 제 이해의 틀에서 생각하고 타인에 대해 적극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쓰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외면하진 않고 있구나, 라는 느낌. 그래서 희미한 안개 속에서 그들은 손을 내밀 수 있을 것이라고.  베트남 전쟁과 세월호, 그리고 민주화 운동을 소재로 하면서 엮어 가는 이야기들이 시대적인 우울을 주면서도 그래서 무거움을 인식시키면서도, 사람에 기대어 희망의 느낌을 갖게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씩 아픔을 보아가도록 하면서. 그래서, 이 안개 속을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서로 의지하는 것일 거라고.

  이것이 우울에 내려앉는 느낌이 들다가도 되살아나도록 이끌어 주는 힘인 모양이다. 최은영의 우울은, 퇴폐적이고 무겁지 않은 우울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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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5.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p18~19


  성차별과 인종에 대한 편견이 크게 문제로 부각된다. 충격적인 일들과 함께 접하기도 하지만 coincidence와 같이 황당한 상황과 함께 전해지면 이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어두운 밤 외국 여성에게 다가가 coincidence의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요청했다는 이 남학생에게 외국 여성은 밤9시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낯선 이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거절한다. 이에 남학생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한다. 물리적 위협까지 느낀 이 여성은 경비원을 부르고 큰길로 나갔다. 마침 지나던 여학생들이 달려와 괜찮냐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진정시킨다. 이 와중에도 남학생은 “영화를 보면 다 그렇다고, 외국인들은 다들 잡담을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인 남학생의 행태만큼이나 나를 비탄에 빠지게 한 것은 두 여학생에 관한 것이다. 이 외국인 여성의 눈에는 남성이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상황에서 두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거듭 사과를 하는 듯이 보였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였다고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남학생이 자신을 ‘성추행범’ 혹은 그 이상으로 오해하는 듯해 격분했다라고 말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저런 황당한 말을 하면서 잘못을 외국인 여성에게로 돌리며 제가 화를 계속 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찰뿐이고, 그런 남학생에게 여학생들이 사과를 하는 맥락은 도대체 뭐인가? 이것은 너무나 익숙한, 자주 보아야만 했던 모습 아닌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남자친구에게 빌고 있는 풍경. 아무런 안면없이도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남자는 욕망과 그 욕망이 퇴짜 맞을지도 모른다는 노여운 전망을 함께 품고서 여자에게 접근한다. 분노와 욕망은 늘 함께 존재하며, 두 가지가 마구 뒤엉켜 한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는 언제든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사랑이 죽음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가끔은 정말 말 그대로 된다. p46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했거나 하지 않은 일을 갚아주기 위해서 엉뚱한 여자를 강간하거나 처벌해도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p193~194


  한국의 대학교에서 일어난 이 ‘coincidence’ 사건에서, 외국인 여성은 러시아 출신, 이 학교 외국인 교수였다. 남학생은 이 여성이 교수임을 알았으면 달리 행동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하였지만 이 교수는 학생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이 학생의 행동이 “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교육하는 것”은 교수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학생의 행동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밤 9시에 외진 곳에서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면서 낯선 백인 남성에게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일은 대중 매체에 보도된 사건들을–한국에서, 그러나 한국 외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남성의 불쾌한 접근을 여성이 거절했을 때, 그 여성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여성을 괴롭히거나, 여성을 폭행하는 사건들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강간 문화”라고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리 주장과 폭력을 제도화하는 사회 안에 배태된 여성혐오적인 문화인 것이죠.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페도렌코 올가 조교수의 공개서한 중(中)


   이 공개서한에 남학생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는 아직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은 매우 감탄스러운데 남학생 역시 그 감탄을 안다면, 제 잘못을 깊이 깨닫는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의식 깊이 쟁여놓은 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정형과 폭력성을 완전히 소거시킬 수 있을까. 올가 교수가 지적한대로 외국인 남성이었으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남학생이 올가가 ‘교수’인 것을 알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올가 교수가 말하는 바대로 좀더 예의를 갖추어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남학생의 의도는 정말 저 단어의 발음을 궁금해 했을까를 의심케 한다. 그의 이어진 반응이 그것을 보여주고 일단, 올가 교수가 이 학생의 접근에 불쾌함과 공포감을 함께 느꼈다는 점이다.

   이 기사를 보고 이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떠오른 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남자에게 가르치는” 상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이 책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이런 차별적인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며 흥미와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이 유사한 상황들에 웃음까지 나온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이 상황들, 현상들을 어쩌랴.

  수없이 세상은 변했고 수많은 이들이 사고방식이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도대체 그 ‘수많은’은 어느 정도를 이야기하는가. 이 남학생처럼 자기만의 사고방식에 갇혀 제 행동의 정당성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을 반복해 맞닥뜨리게 되니, 이 세상의 페미니즘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성차별의식이 높아졌다고 말하는 동시에 반작용인지 여성혐오는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페미니즘을 여전히 여성도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도 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페미니즘이 포함하고 있는 양성적인 개념을 외면하고 ‘여성’에 한정지어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은 인식의 전환은 이런 책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치 금기의 도서를 보는 듯이 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이 리베카 솔닛의 장점이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통찰력있게 상황을 간파한다. 수전 손택과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신화 속 등장인물 카산드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다 생각할 거리들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책은 짧다. 페미니즘의 개념 설명도 상당히 쉽다. 그녀가 주창하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리베카는 설명을 아주 잘한다.


남성권리운동과 대중적으로 퍼진 숱한 오보들 때문에, 사람들은 요즘 성폭행 무고가 만연했다고 여기곤 한다. 집단으로서 여성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강간 고발이 진짜 문제라는 암시는 개별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폭행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게 만들고, 남성을 주된 피해자로 부각하는 도구로 쓰인다. p169~170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이 여성의 억압적인 상황과 여성성을 비하시키는 상황과 침묵의 세계에서 허덕이는 여성을 향한 정체성 정립이 주가 되고 있기에 흥미 유발이 안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새로운 담론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를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만큼 아는데도 왜 여전히 현실은 이 모양인지 말해 줄 수 있지 않는가. 계속 들으면서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리베카가 이야기하는 이 여성혐오와 폭력의 구조들에 대한 전개에 반론이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겠는가. 충분히 들을 의향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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