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일 수 있는 방법


오소희,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이 여행의 기록이 터키라는 건 부수적인 것 같다. 터키라는 나라는 동서양의 문화와 예술이 공존하는 도시로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물론 전적으로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얻는 글이 아니라 여행에 대한 에세이기에 터키라는 도시는 여행을 떠난 작가의 감흥을 불러 일으켜주는 소재가 될 뿐이기도 할 것이다. 그 특유의 느낌과 기억을 제공해 주는 것. 그래서 작가는 터키라는 나라에서 어떤 인상을 받았고 어떤 일을 경험했는지에 따라 내가 행해볼 여행지의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오소희 작가는 많은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담은 책을 쓰고 많은 사람들에게 ‘여행’의 꿈을 심어준 작가이자 현재는 동화작가로 그 영역을 넓혀 글을 쓰고 있다.

  작가의 여행기가 책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이 열광했던 것은 ‘터키’라는 장소에 대한 매혹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책이 첫 출간되었을 시기에도 여전히 ‘여행’은 사람들에게 낭만적인 꿈이자 매혹이었으니까. 또한 터키 역시 대표적인 여행지로서 각광받는 곳이니까.

  여행기에서 장소가 부수적이 되는 것은 이 책이 여행을 한 ‘사람’에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이 여행기에 대해 많은 반응이 인 것은 감성적인 문체와 더불어 어린 아이와 함께 여행을 떠난 엄마의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아직 어릴 뿐인 아이는, 한국말조차 서투를 듯한 아이는 낯선 땅으로의 여행에 엄마와 동참하고 때로는 엄마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더구나 세 살 아이는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하고 있잖은가. 이 모든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람, 특히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강렬한 자극제가 됨과 동시에 희망과 열망의 상징이 되었을 것이다.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주겠지… 이 말투는 희망적인 뉘앙스이지만 또한 비관적인 뉘앙스가 될 수도 있어 보인다. 이 글을 읽으며 엄마들은 희망을 꿈꾸었을까, 체념을 되새김했을까.

  여행을 좋아하여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도 여행을 두루 다녔다는 작가는 아이가 태어나서도 그 여행의 기억을 잊지 못해 아이와 함께하는 여행을 선택한다. 어쩌다 한번의 경험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리다시피 하는 이 삶에 대해 사람들이 물으면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다고 말한다.  “좋으니까요.”

  어쩌면 혼자서 하는 여행과 아직 어린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해야 하는 것과 해야 할 것과 생각하는 것에서 차이가 있을 것이다. 작가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남과 동시에 자신의 아이와도 만나는 여행을 하게 된다. 다행히도 아이는 칭얼되지 않으며 엄마의 여행의 방식에 함께 하며 자신의 방식으로 여행의 즐거움을 알아간다. 또한 작가 역시 낯선 이들과 부대끼면서 그 속에 아이를 둠으로써 한발짝 관조적으로 아이를 바라보기도 하며 ‘내 나라’에서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느끼고 일깨운다.  


아이가 그 옛날 술탄의 삶에 관심이 없듯 오늘 구석에 핀 들꽃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생생하게 현재를 좇는 아이의 눈은 죽은 자의 흔적을 따라가느라 치열하게 피어나는 생의 에너지를 발견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는 것이다. 그런 일은 터키를 여행하는 내내 일어났다. 아이의 보폭은 좁고 일정은 늘어졌지만 아이는 그렇게 걷지 않았으면 결코 보지 못했을 것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것들은 모두 작고 조용하고 낡은 것들이었다. p45


  여행이 가져다주는 매력은 그것일 것이다. ‘일상’이라는 잣대에서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생각들을 얻는 것. 그것은 감사한 일이며 어떻든 성장하는 일이다. 작가가 혼자서 하는 여행과 자신의 아들과 하는 여행의 차이는 무얼까. 아이 때문에 여행을 가지 못하는 ‘엄마’가 있고 아이를 위해 ‘여행’을 하는 엄마가 있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이겠지만 아마도 조금이나마 누군가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그것을 ‘엄마’의 문제로 보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되면 ‘나’는 잠재워야 한다는 사고, 문화의 영향일지 모른다. 작가가 말하는 대로 “좋으니까요”.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의 방식이 내가 좋은 것을 하고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삶은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이란 경험의 수와 폭이 많을수록 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얼마나 오랫동안 내가 ‘아침’이란 어휘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서울에서의 아침이란, 오로지 바쁨과 서두름 속으로 나를 채찍질하는 시계의 분침에 불과했다. 그런데 이곳에서의 아침은 눈과 코와 귀로 음미되고 스며드는 어떤 것이다. 다시 하루가 시작되는 것에 대해, 위대한 우주가 내게 또 한 번 손길을 내밀어준 것에 대해 저절로 마음으로부터 경배를 올리게 되는 정결한 순간인 것이다. 그 자애로운 우주의 손길을 보지 못하고 인간이 펼쳐놓은 잡다한 그물에 얽혀 허우적거리고 마냥 조바심냈던 나날들이 부끄러워진다. p210


  누군가의 눈엔 한없이 이기적인 엄마이자 생각이 모자란 엄마로 비쳐질 수도 있고 마냥 행복한 이의 가진 자의 여유로운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래서 어쨌든 이 작가에 대해서 이 글에 대해서 부러움과 시기가 공존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 있어 우리 역시 선택할 수 있는 또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알아가게 될 것이다. 삶의 방식은 내 것이지만 우리는 그 방식을 여러 경험을 통해서 터득한다. 여행 역시도 타인의 여행의 기록을 통해 내 경험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일이다. 마침 이 ‘엄마’의 여행의 선택에 대한 답변이듯 터키에서 만난 노부부의 삶에서 작가의 대답을 얻는다.


한 터키인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여행을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짐작할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 할아버지는 이기적인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어떤 꿈은 이기적이지 않고서는 이룰 수 없다. 꿈이라는 것의 속성이 현실을 배반하기 때문에, 꿈꾸는 자를 얽어매고 있는 지독한 현실(생계나 가족 같은)에는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이기적이지 않기 위해 꿈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다른 것으로 메운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후회가 남지 않는 것만이 더 나은 것일 것이다.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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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장할 인간들


프란체스코 다다모, 난 두렵지 않아요- 아름다운 소년, 이크발 이야기 


 

  검은색 자동차 한 대가 마을에 들어서서 차문을 서서히 내린다. 언덕을 오르는 자전거 한 대가 지나간다. 네 다섯 번의 총성이 울렸고 빗속에서 열세살 아이의 핏물이 흘러간다.

  책 속에서 묘사된 이크발 마시흐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크발 마시흐에 관한 이야기에서 놀라는 점은 그가 열세 살 어린 나이에 한 일보다 열세살 아이를 죽여버리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범인은 모르지만 알 수 있는 이 일은 1995년 부활절에 파키스탄에서 일어났다. 이 후로 파키스탄의 아동노동에 대한 관심과 변화가 일었다.

  이 책은 노동운동가가 된 소년 이크발의 이야기다. 이크발의 생애에 대한 전기가 아니라 이크발을 회상하는 소녀를 내세운 동화다. 그렇기에 이 동화의 문체는 간결하고 아이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솔직하다. 열세 살 이크발에 대해서 더 깊이 알 수 있지는 않지만 조용하게 이 책을 읽는 아이들에게는 동화 특유의 감성으로 다가갈 수 있을 듯하다. 특히 이크발이 어린 소년이고 이 책이 동화라서인지 이야기의 형식이 잔잔하고 동화적으로 흐른다. 이크발의 죽음 장면 역시도 생생한 묘사가 아니라 이크발과 함께 지냈던 한 소녀에게 또다른 소녀가 이크발의 소식을 전하는 편지로 대신한다. 같은 일을 겪은 아이가 자신들을 도와주고 또한 수많은 아이들에게 희망이 되는 모습을 아이의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이크발은 네 살에 가족의 빚 때문에 카펫 공장에 팔려간다. 하루 1루피(25원)의 임금에 10시간 이상을 일했다. 이 공장엔 이크발 뿐만 아니라 많은 어린이들이 빚에 팔려와 하루하루 빚을 갚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꿈꾸며 열악한 환경에서, 학대를 받으며 일을 한다. 이크발은 함께 일하는 아이들에게는 달라 보였고 결국 공장을 탈출한다. 탈출을 한 후 이크발은 아동노동문제를 위해 일하는 운동가들의 연설을 듣고 불법 고용주를 신고하지만 오히려 공장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당연히 예상가능한 유착관계가 카펫 공장을 중심으로 지역사회에 퍼져 있던 것이다.


카펫 공장 주인들은 힘이 있어. 벽돌 가마 주인들도 그렇고. 고리대금업자들도 가만있지 않을 거고. 경찰은 그들을 보호하려고 하지. 너희들도 알잖니. 판사들은 못 본 척하려고 해.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온갖 협박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어. p161


  다시 이크발은 탈출한다. 그곳을 벗어나지만 이크발은 공장을 탈출한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이 어린 소년은 자신과 같은 상황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을 생각하며 열악한 아동노동현장을 알리는 노동운동가가 된다. 아이들을 착취하는 이러한 환경은 개선되지 않고 이어지며 아이들은 온갖 학대에 시달리며 병에 걸린 채 노예와 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고 가진자들이 권력을 쥔 이들이 그들의 힘을 과시하는 상황에서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고 하겠지만 이크발은 열악한 공장들의 불법한 상황을 카메라에 담고 아이들을 만나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다음 몇 달 동안 이크발은 미성년자를 착취하는 열한 개의 다른 공장들 문을 닫게 하고 이백여 명의 어린이들을 해방시키는 데 공헌했다. 전선 본부는 고아원으로 변했다. 모두 같은 이야기, 비슷한 사연이었다. 시골 어딘가에 있는 멀고 먼 마을, 빼앗긴 수확물, 고리대금업자에게 꾼 돈, 노예 생활.

 “우리가 공격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고리대금업자들이에요.” 이크발이 말했다. “모든 게 다 그자들 때문이라고요.” p164


  이러한 이크발의 노력은 아니러니하게도 파키스탄보다 전세계를 울린다. 많은 이들이 이크발의 행동에 놀라워하고 응원을 보내며 또한 학대받는 아이들의 환경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오로지 이 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책임을 느껴야 하는 이들만 다른 생각을 갖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져야 할 것을 정당하게 가지는데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에 해가 되는 것만 생각한다. 사람에 대한 아이에 대한 가증스런 배려도 없는 이들은 해야 하는 일보다 해서는 안되는 일을 지속하는데 늘 사로잡혀 있다. 그렇게 카펫 마피아로 불리는 카펫 공장주들은 결국 열세살 어린아이의 활동에 두려움을 느끼고 아이를 죽인다.

  이 일을 1995년 파키스탄이라며 시간적 공간적인 제약을 두어 보지만 그럼에도 생각할수록 할말을 잃게 만든다. 이크발의 활동 덕분에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공부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이 증가하였고 아동 해방 운동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2016년의 지금도 완전히 뿌리뽑혀지진 않았지만 전세계 아동착취 상황에 대한 고발과 변화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애쓰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아동뿐만 아니라 장애인, 노인등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노동착취는 계속되고 있다. 대한민국만 해도 수십년 노동착취를 일삼는 이들의 사건 소식이 등장하고 있다.

  나쁜 일이라는 것을 몰라서 행한 것이 아니라 나쁜 일임을 알면서도 내 이익에만 환장한 사람들이 벌이는 인간에 대한 착취. 인간을 소유물로만 도구로만 보는 이들의 결정은 문제를 일으키는 자신들에 대한 반성이 아니다. 자신들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이크발의 살해다. 이크발이 사라진다고 해서 자신들의 문제가 드러나지 않고 해결되는 것도 아님에도 그들의 결정은 자신들에게 귀찮은 것을 파괴하는 것이 당연하듯 군다. 파키스탄에서도 범인을 알지만 ‘괴한’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 역시 같은 맥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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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예방의 날에



 9월 10일. 세계 자살예방의 날에 대한민국의 자살예방책은 어디쯤에 있을까. 아니, 세계 1위의 자살공화국인 나라로서 하고 있는 것과 해야 할 정책이 무엇일까. 세계적으로 자살예방의 날이 제정된 것도 인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이 이 날의 취지일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건 없어 보인다. 자살의 이유는 우울증이기에 인간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울증을 가볍게 볼 것이 아니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기사들만 넘치게 본 것 같다.

  우울증이 문제라면 왜 유독 한국인들이 이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그리고 그 우울증이 자살로 연결되는가. 자살의 이유 역시 불행한 가족의 이유 역시 제각각이겠지만 어느 순간 대한민국의 ‘자살’의 나라라는 것은 죽어야 할 이유가 있는 나라, 죽기 좋은 나라라는 건 아닌가. 그렇게 되어 버리는 요소가 곳곳에 채이고 있는 자살의 나라. 자살을 거꾸로 하면 ‘살자’라고 백만번 외친다 한들!


  여기 자살을 결심한 여자가 있다. 하야마 아마리. 그녀의 결심은 스물 아홉, 생일에 이루어졌다.


스물아홉 번째 생일, 이제 혼자만의 파티를 시작한다. 혼자인 건 괜찮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혼자였으니까. 그래, 괜찮다. p18

나는 스물아홉이다. 나는 뚱뚱하고 못생겼다. 나는 혼자다. 나는 취미도, 특기도 없다. 나는 매일 벌벌 떨면서 간신히 입에 풀칠할 만큼만 벌고 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내가 이렇게도 형편없는 인간이었나? 처음엔 물이 뜨겁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내가 끓는 물에 들어온 개구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현재의 삶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진 것이다. p21


  그녀는 파견사원이고 애인에겐 버림받았고 뚱뚱하고 못생겼고 외톨이다. 그녀는 생일날 떨어진 딸기케이크를 먹으려 하다가 자신의 이 모습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그순간 그녀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죽는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용기도 없다. 마침 텔레비전에는 라스베이거스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고 그녀는 라스베이커스의 풍경에 매료되고 만다. 죽기로 결심했기에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던 걸까.


너덜너덜한 바닥에 퍼질러 앉아 있는 나의 현실과 라스베이거스 사이에는 영겁의 간격이 있어 결코 닿을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숨 쉬는 것과 똑같은 공기로 호흡할 수 있는 곳에 저런 세상이 있다는 게 새삼 신기했다. 암울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곳, 날마다 행복한 축제가 펼쳐지는 세계, 그곳은 지상낙원 그 자체였다. p44


  그 순간 그녀는 삶을, 죽음을 유예한다. 스물아홉의 마지막 날에 죽기로. 라스베이거스에서 최고로 멋진 순간을 맛본 뒤에 죽기로. 그래서 그녀는 라스베이거스에서 죽기 위한 계획을 실행한다. 무력하던 생일날 그녀에겐 목표가 생겼고 용기를 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돈이었으니,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애를 쓴다.

  일본인인 그녀는 파견사원이었는데 돈을 벌기 위해 그녀는 투잡을 띈다. 유흥가에서.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파견사원이기에 퇴근시간이 이르다는 점이었다. 파견사원이란 일종의 비정규직과도 같은데, 한국이라면 그게 가능할까. 정규직이나 비정규직이나 정해진 퇴근 시간이 엄수되는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한국의 직장문화는 정말…. 한국의 퇴근 시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눈치의 시간이다.

  외모에 자신도 없던 그녀가 돈을 더 벌기 위해 선택한 또다른 일이 유흥가의 호스티스라는 점이 놀랍다. 이전과는 전혀 다른 행동력이다. 이 일과 누드모델일도 하며 살도 빼고 점점 자신감을 갖는다고 해야 하나. 또한, 우연과 운들이 따라오는 것도 같았다.


외톨이는 사람들로부터 소외됐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무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외톨이인 것이다. p86 


  정말 그런듯이 그녀는 두 일을 하는 과정에서 외톨이라는 기분을 떨치고 새롭게 관계를 맺는 친구들도 생긴다. 그녀의 처절한 노력들이 치열한 그 기간이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한’ 결심이라는 걸 그녀는 잊지 않았고 드디어 서른번째 생일을 앞두고 라스베이거스 비행기에 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을 베팅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그녀의 20대도 끝나버렸지만, 그녀는 잠에서 깨어 제 손에 쥐어진 5달러 지폐를 보며 뭉클해진다. 그리고 다시 살기로 한다.


무수히 많은 사람의 손을 거쳐 왔을 이 5달러짜리 지폐가 갑자기 나를 뭉클하게 했다. 1년이라는 치열한 시간을 환전해서 여기까지 날아와 인생을 건 도박 끝에 5달러를 번 것이다. ‘……그래, 이긴 거야. 달랑 5달러지만 난 이긴 거야!’ p224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고 한다. 일본의 실화수기로 2010년 출간됐다. 하지만 저자의 이름은 본명이 아니다. 가명인 ‘아마리アマリ’는 ‘나머지・여분’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죽음을 결심하고 죽음을 1년 유예했다. 그 기간 동안 그녀는 죽음을 위해 계획했던 일들을 목표로 삼으며 죽을 힘을 다해 살았고, 그리고 그녀는 변했다.  


삶의 목적을 알고 있는 미나코는 방향을 잃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발걸음이 너무 더디다고 했다. 반대로 나는 눈앞의 목표는 너무도 선명하지만 삶의 목적을 모르기 때문에 라스베이거스 이후의 시간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래도 인생이란 바다는 목적이나 목표 하나만으로는 불완전한 항해를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신대륙을 찾아가는 범선은 타륜으로써 방향을 잡지만, 돛과 노가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결국 미나코와 나는 각각 하나씩만 가지고 있는 셈이다. p146


  아마리의 실화를 읽다 보면 그녀의 인생은 판타스틱하다. 그 1년의 간극이 너무 크기도 하지만 현재의 그녀는 훨씬 더 변한 환경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이 개인의 삶이 갑자기 남달리 느껴지지 않는 건, 그녀가 진정 죽기로 결심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그녀는 살고 싶은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었고 살고 싶은 이유를 찾은 것이다. 죽고 싶은 이유가 아니라 굳이 죽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죽고 싶다’라고 하지만 그것은 살고 싶다, 간절하게 살고 싶다는 다른 말이다.

  그녀의 얘기는 죽기로 결심했다는 이야기만 뺀다면 화려한 라스베이거스에 가기 위한 청춘의 열정에 대한 기록으로도 읽혀진다. 치열하고 힘들었던 그녀의 날들이 잔잔하게 읽혀지는 것은 역시나 ‘실화’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한편으로 삶에서 ‘결심’만 ‘생각’만 바꾼다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해 응원을 하면서도 약간은 허무해진다.

  지금 이 순간도 살기보다는 죽음에 무게를 두는 사람들에게 ‘생각’을 전환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자살이 잠시의 힘겨움에 의한 충동이 아니라면 , 지속적인 상태에 의한 결정이라면 그들에게 그 상태를 지속하게 만드는 수많은 계기들은 도대체 어떤 ‘계기’가 되어야 전환될 수 있을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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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지는가


   철학이 뭐 별건가? 삶에 대해 생각하는 자세이고, 인생을 살아가는데 좀더 비중을 두는 격언같은 것이라 말하면 안되는가? 철학자라고 철학을 공부한 이들만의 언어로 개념으로 세상을 설명하는 것만이 철학인가? 그것만이 철학이라는 이름 아래 논의되어야 할 높은 수준인가.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


    이 책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를 읽었을 때 사실 나도 그랬다. 이 책은 너무 쉬운데라고. 그래서 다른 어떤 나라보다 성평등지수가 높은 국가인 스웨덴에서 이 책이 성평등 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에도 놀랐다. 한 칼럼니스트가 “페미니즘의 기치를 교육받고 자란 스웨덴 고등학생에게 이 책의 내용은 좀 구식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라고 했다는데 딱, 내 심경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난 생각하기를, 좀더 강하고 좀더 처절한 성차별적 상황을 보여주어야 한다고만 생각했나보다. 어쩌면 조금 더 포장된 말로 감싼 책을 원했던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으로 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얼만큼 자리잡을 수 있을까 하면서도 가슴에 와 닿는 것보다 이론적인 말의 향연을 더 기다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페미니즘은 수준이 떨어진다”라는 한 철학자의 기사를 접하면서 내 생각이 짧았다라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끔 됐다. 페미니즘에 관한 한, 가장 쉬운 말로 해도 모자라기에 이 책만큼 적격인 것은 없구나라고.

  한편으론 생각한다. 페미니즘은 철학이 아닐 지도 모른다고. 그것은 삶의 가치관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고. 그러다 또 생각한다. 왜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여성적 사고라고만 생각하는 건가. 최근 급격히 증가된 혐오논쟁과 더불어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더욱 강건해지고 공고화되는 듯하다. 물론 페미니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늘 있어 왔지만. 아마도 이 부정적 인식의 전제에는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가 ‘여성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치마만다도 거듭 이야기하듯이 페미니스트는 “모든 성별이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평등하다고 믿는 사람”이다. ‘모든 성별’이지 결코 ‘여성만’이 아니다.

  아마도 여기에서부터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강신주는 “페미니즘은 여성적인 입장을 다루나, 아직 인간 보편까지는 수준이 안 올라갔다. 그래서 항상 배타적이고 공격적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이해하는데 왜 이리 어렵게 느껴질까. 짧은 지식으로, 아니 짧은 지식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바가,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인간 보편의 삶을 위한 것이라는 내 이해가 일찌감치 철학적이지 못했거나 한없이 형편없거나 한 모양이다.


오늘날 젠더의 문제는 우리가 각자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도록 돕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사람이어야만 하는지를 규정한다는 점입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일 우리가 젠더에 따른 기대의 무게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행복해질까요? 각자의 진정한 자아로 산다면, 얼마나 더 자유로울까요? p37~39


  오히려 강신주 자신이 페미니즘을 폄하하기 위해 여성성을 더욱 강조하며 제한하는 듯하다. 기사 한 줄로 말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잘못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좀더 알아봐야지 하다가 참 마음이 가라앉는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지만 그의 철학은, 그의 책들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그의 강의를 들었다는 사람의 트윗글, 교복은 입은 여학생에게 "담요 왜 둘러? 그런거 두르면 안이 궁금하잖아. 저 외국엔 성범죄 하나도 안 일어나. 다 벗고 다니거든.“

  저 말이야말로 나온 맥락을 따진다 해도 부정할 수 없이 강신주라는 철학자가 가진 기본 인식을 보여준다고 느꼈다. 그러니 이 말은 페미니즘 발언과 연계가 되면서 그가 말한 수준낮은 페미니즘에 대한 의견은 철학적이고 인문적인 주장이라기보다 오히려 ‘남성’적 우월주의에 가득찬 시선이 담긴 의식의 표출이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도대체 여성에게 참정권이 20세기에 들어온 것과 인간을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이러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발단이 된 그의 새로운 저서 철학 vs 철학을 읽어보지 않았다. 이 책에서 그가 주장하고픈 바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철학’에 대해 가지는 그의 입장이 허울가득한 텍스트적인 지식의 자랑이었던가. 삶의 의미와는 무관한. 그가 말하는 인문주의 시선이라는 것은, 그토록 편협적이었던가.


젠더는 대화하기 쉬운 주제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이 주제를 불편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짜증스럽게 여깁니다. 남자도 여자도 젠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꺼리며, 혹은 젠더 문제를 성급히 부정해버리려고 합니다. 현 상태를 바꾸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란 늘 불편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p43


  한편으로는 강신주의 말에 동의도 된다. 페미니즘은 수준 낮은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페미니즘은 기본이니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인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데 대한 인식이니까. 그래서 이것은 기본 중에 기본을 생각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밥을 먹고 어떤 커피를 마실까를 생각하며 커피가게를 찾아가는가를 고려하는 문제가 아니니까.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가장 낮은 욕구의 문제이니까. 낮을 수밖에.


내가 남자와 동행하여 나이지리아 식당에 들어서면, 웨이터들은 매번 남자에게만 이나를 건네고 나는 무시합니다. 그 웨이터들의 태도는 남자가 여자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사회의 산물일 뿐이고, 나도 그들이 일부러 나를 기분 나쁘게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님을 알지만, 무언가를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들이 나를 무시할 때마다 나는 투명인간이 된 기분입니다. 속이 상합니다. 그들에게 나도 남자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나도 똑같은 인사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그저 사소한 일이지만, 때로는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픈 법입니다. p22~23

 

  사소한 일이 가장 아프다. 그렇다. 전문가, 학계로부터의 비판에 대해 “난 그들에 대해 전혀 생각 안 한다. 일고의 가치가 없다. 50년 지나면 나만 남고, 그들은 아무도 안 남을 텐데”라고 말하는 한 철학가의 이 자만에 내 자존심은 상처입었다. 그의 철학은 인간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있는 건가. 나는 생존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데 그는 내 생존을 한없이 비웃고 있다. 저와 다른 수준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묻습니다. “왜 페미니스트라는 말을 쓰죠? 그냥 인권옹호자 같은 말로 표현하면 안되나요?” 왜 안 안되느냐 하면, 그것은 솔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페미니즘은 전체적인 인권의 일부입니다. 그러나 인권이라는 막연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젠더에 얽힌 구체적이고 특수한 문제를 부정하는 꼴입니다. 지난 수백년 동안 여성들이 배제되어왔다는 사실을 모르는 척하는 꼴입니다. 젠더 문제의 표적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이 문제가 그냥 인간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콕 집어서 여성에 관한 문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꼴입니다. 세상은 지난 수백년 동안 인간을 두 집단으로 나눈 뒤 그중 한 집단을 배제하고 억압해왔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해법을 이야기하려면, 당연히 그 사실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p44


나는 페미니스트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남자든 여자든, 맞아, 오늘날의 젠더에는 문제가 있어, 우리는 그 문제를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더 잘 해야 해, 하고 말하는 사람이라고요. 여자든 남자든, 우리는 모두 지금보다 더 잘해야 합니다. p52


  오우! 응고지와의 말을 듣다보면 어떤 철학자는 반드시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듯하다. 그리고 야심한 밤에 난 분노했다. 하지만 나 역시 반성하지 않겠다.


얼마 전에 나는 라고스에서 젊은 여성으로 산다는 것에 관한 글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사람 하나가 그 글을 읽고는 성난 글이었다며, 그렇게 성난 투로 이야기해서는 안 되었다고 말하더군요. 하지만 나는 반성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정말로 성이 나니까요. 오늘날 젠더가 기능하는 방식은 대단히 불공평합니다. 나는 화가 납니다. 우리는 모두 화내야 합니다. 분노는 예로부터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분노에 더해 내게는 희망도 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더 나은 자신으로 변하는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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쭈굴해졌다

 

  겁이 많고 줏대가 없어 떳떳하지 못한 것, 비굴의 뜻이다. 한국학을 전공한 귀화한 학자 박노자는 2014년의 책에서 한국을 비굴의 시대라 일컬었다. 그가 한국의 정권에 대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귀화한 한국인이기 이전에 외국인임이 전제된 것일까. 그의 시선은 타자의 시선일까.

  비굴을 생산한 것이 공포의 정권에 의한 것이라는 진단에 반박할 여지는 없다. 파시즘적 이라고 말하는 이 학자의 말이 다른 한국인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의 지위와 안전이 보장이 되었던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언론의 집중포화는 둘째 치고라도.

  저자는 많은 종류의 공포 중 낙오의 공포가 근저에 깔려 있고 경쟁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가? 가만히 있으면 죽어간다. 무기력도 사회적 타살의 원인이라고, 국가가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연대의 부족과 망각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모두 ‘국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공포가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적 게임룰을 연대해서 정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연대가 성립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각자가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나는 물론 우리 모두 공포 속에서 산다는 것, 그러기에 다 같이 연대해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정확한 실체를 대중이 이해한다면 이 지옥을 함께 벗어나는 깨달음의 길이 펼쳐질 것이다. p49 


  다같이, 함께라는 말은 모든 것의 ‘당연한 해답’처럼 제시된다. 기승전, 함께. 하지만 언제나 제대로 이루어지 못하기에 이토록 ‘함께’를 부르짖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함께의 이유와 목적이 서로 괴리될 때도 있다. 그러니 ‘함께’에 대한 방향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자유주의자는 그들의 이념이 제시하는 규준이 보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이념을 배태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 바깥에 있는 사회에다가 그 규준을 들이대고 준수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저 타자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p215 


  저자인 박노자는 사회주의적 삶을 방향으로 제시한다. 물론 사회주의적 삶이라고 자본주의적 삶보다 윤택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시장경제가 사회 구성원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사회주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사회주의가 꿈꾸는 사회는 일단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보는 사회주의란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며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니라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되도록 골고루 평등하게 분배하고, 공동체 안에 민주주의, 상호 배려, 삶의 기쁨이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이다. 제한된 자원을 빨리 쓰면서 소비를 무제한으로 늘리는 것은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과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동차를 생산하여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추구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환경을 보존하고, 교통 사고율을 최소화하며, 석유 같은 자원을 보존하고, 개인이 언제나 사회에 의존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p286


  저자가 사회주의 사회를 내세우는 이유는 한국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고 한국사회가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중에서도 최고의 자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가 파생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을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한국은 어떤 대안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더 자본주의적인, 더 파시즘적인 상태를 끌어올리는데 열성적이라는 박노자의 비판은 그가 단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도 새겨볼 일이다.

  자본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한 제도적 선택이다. 다함께 전지구적인 위협에 대응하고 ‘인간’을 위한 삶을 부르짖는 흐름에서 한참을 벗어나 뒷걸음질치는 사회에서 비굴해지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보내는 박노자의 안타까움에 가득 찬 비판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이 사회주의적 삶은 마냥 ‘이념’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보다 생존에 직접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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