쭈굴해졌다

 

  겁이 많고 줏대가 없어 떳떳하지 못한 것, 비굴의 뜻이다. 한국학을 전공한 귀화한 학자 박노자는 2014년의 책에서 한국을 비굴의 시대라 일컬었다. 그가 한국의 정권에 대해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귀화한 한국인이기 이전에 외국인임이 전제된 것일까. 그의 시선은 타자의 시선일까.

  비굴을 생산한 것이 공포의 정권에 의한 것이라는 진단에 반박할 여지는 없다. 파시즘적 이라고 말하는 이 학자의 말이 다른 한국인에게서 나왔다면 그들의 지위와 안전이 보장이 되었던가를 생각하게끔 한다. 언론의 집중포화는 둘째 치고라도.

  저자는 많은 종류의 공포 중 낙오의 공포가 근저에 깔려 있고 경쟁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가? 가만히 있으면 죽어간다. 무기력도 사회적 타살의 원인이라고, 국가가 쉽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연대의 부족과 망각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우리 모두 ‘국민 불행의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공포가 필요하지 않은 새로운 사회적 게임룰을 연대해서 정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아마도 그런 연대가 성립하자면 무엇보다 먼저 각자가 한 가지를 깨달아야 한다. 나는 물론 우리 모두 공포 속에서 산다는 것, 그러기에 다 같이 연대해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정확한 실체를 대중이 이해한다면 이 지옥을 함께 벗어나는 깨달음의 길이 펼쳐질 것이다. p49 


  다같이, 함께라는 말은 모든 것의 ‘당연한 해답’처럼 제시된다. 기승전, 함께. 하지만 언제나 제대로 이루어지 못하기에 이토록 ‘함께’를 부르짖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함께의 이유와 목적이 서로 괴리될 때도 있다. 그러니 ‘함께’에 대한 방향을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자유주의자는 그들의 이념이 제시하는 규준이 보편이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 이념을 배태한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 바깥에 있는 사회에다가 그 규준을 들이대고 준수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그저 타자에 대한 폭력일 뿐이다. p215 


  저자인 박노자는 사회주의적 삶을 방향으로 제시한다. 물론 사회주의적 삶이라고 자본주의적 삶보다 윤택한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의 시장경제가 사회 구성원을 불안하게 만든다면 사회주의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사회주의가 꿈꾸는 사회는 일단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그가 보는 사회주의란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며 “집권만을 위한 정당 운동이 아니라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고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다.


사회주의자들의 과제는 한정된 지구의 자원을 되도록 골고루 평등하게 분배하고, 공동체 안에 민주주의, 상호 배려, 삶의 기쁨이 가득 차도록 하는 것이다. 제한된 자원을 빨리 쓰면서 소비를 무제한으로 늘리는 것은 사회주의적 삶의 방식과 거리가 멀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자동차를 생산하여 자본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을 추구하지만,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환경을 보존하고, 교통 사고율을 최소화하며, 석유 같은 자원을 보존하고, 개인이 언제나 사회에 의존할 수 있도록 안정적인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추구한다.  p286


  저자가 사회주의 사회를 내세우는 이유는 한국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고 한국사회가 불행하게도 신자유주의의 대표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중에서도 최고의 자본주의적인 신자유주의의 나라. 신자유주의 국가들이 신자유주의가 파생하는 문제에 직면하여 해결을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볼 때, 한국은 어떤 대안도 ‘깊이’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더 자본주의적인, 더 파시즘적인 상태를 끌어올리는데 열성적이라는 박노자의 비판은 그가 단지 사회주의자라서가 아니라도 새겨볼 일이다.

  자본주의도 신자유주의도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보다 좋은 세상을 위한 제도적 선택이다. 다함께 전지구적인 위협에 대응하고 ‘인간’을 위한 삶을 부르짖는 흐름에서 한참을 벗어나 뒷걸음질치는 사회에서 비굴해지는 삶을 사는 우리에게 보내는 박노자의 안타까움에 가득 찬 비판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이 사회주의적 삶은 마냥 ‘이념’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보다 생존에 직접적인 것이며 그렇기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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