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웁게 훌쩍

 

여행자의 인문학-21명의 예술가와 함께 떠나는 유럽 여행

문갑식, 이서현 (사진), 다산3.0 | 2016-01-25.

 

    이런 여행이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잠깐, 이런 여행? 아니 이런 장소라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여행을 생각했지만 준비부족이랄까, 딱히 인문학적인 여행은 되지 못했다. 그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 기인 연휴에 끼어 부랴부랴 여행을 다녀왔는데 첫 강렬한 인상은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황금연휴기간답게 공항 인파는 많았고 비행기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비행기 안으로 사람들이 줄지어 들어서는데 젊은 사람들이 많았다. 좌석을 찾아 들어서는 사람이 많을수록 당연 소란스러웠고 선반에 짐을 싣는 소리들이 굉장했다. 가만, 이제 여행의 출발인데 짐을 싣는 소리라니. 부스럭 부스럭. 비행기를 꽉 채운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이제 막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 모두의 손엔 면세점 쇼핑백이 한가득 했다. 선반 위로 올라가는 짐은 이제 여행을 떠나는 이들의 손에 들린 면세품이었다. 나는 이 광경에 놀랐는데, 마치 면세품을 사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는 사람들인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여행이 휴식이라면 여행지에서 만큼은 편안함을 즐겨야 하는데 인문학을 붙들고 있느냐 하겠지만 저자의 여행만큼 편안해 보이는 휴식은 없어 보인다. 장소가 주는 마음의 편안함일 것이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볼거리가 있는 여행지가 아니라 고즈넉함과 여백이 있는 곳에서 느껴지는 긴장이 누그러지는 그런 느낌들 말이다. 문학속에서 또는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보며 상상의 나래와 비교하는 맛 또한 추가되니 일석이조다. 저자는 그런 여행의 기록을 담아 <여행자의 인문학>을 썼다.

   예술가들과 문학작품 속 등장인물의 흔적이 있는 유럽의 스무 곳. 저자는 가는 곳에서 그들을 떠올리고, 아니 그들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간다. 이미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그렇게 조성해 놓은 곳도 있고 유달리 한국인의 방문이 잦다는 곳도 있다. 어쨌든 낯선 곳임에도 낯설지 않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그곳으로 찾아가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문학작품의 배경이 된 곳, 작가들의 흔적이 있는 곳을 찾는 기분은 좀 더 들뜨게 되는 모양이다.

 

고원에는 히스꽃과 잡초 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무의 세계, 들리는 것은 바람 소리뿐입니다. 죽어서야 함께 할 수 있었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유령이 못다 한 사랑을 속삭이며 지금도 벌판을 떠돌아다닐 것만 같습니다. p15~18

 

   폭풍의 언덕에 등장하는 요크셔의 황량한 들판마저도 인상적이니만큼 어쩌면 조용한 곳에서의 휴식이 필요한 시기인지도 모르겠지만. 베아트릭스 포터의 유언처럼 자연이 그대로 살아 숨쉬는 땅에 대한 욕구일지도.

   “자연 그대로 이 땅을 잘 보존해달라.”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도 예술가들의 생가나 문학관 사업이 진행되고 있지만 유럽의 그것에 비해 부족하고 미흡해 보인다. 각 지자체의 관광 사업 수단쯤 여기는 행태도 보이고 그저 보여주기식으로만 건립되어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작가나 예술가에 대한 경외나 배려가 찾아보기 힘든 성장에 급급한 나라에서 살아온 터라고 이해하려 해도 씁쓸하다. 하긴 예술가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나 만드는 나라이니만큼 뭘 기대하겠는가.

 

우리가 근대화한다며 모든 걸 싹 밀어버릴 때 샬럿과 에밀리 브론테가 걷던 워더링 하이츠 가는 길 돌담에 이끼가 낄 때까지 기다렸으며, 우리가 눈 돌리면 잊는 사이버 잡담에 한눈팔 때 종이신문을 들췄던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게 바로 셜록 홈스와 스크루지와 햄릿과 피터 래빗과 해리 포터다. p58

 

  책 한 권에 스무 곳의 여행지를 돌아보고 관련 지역의 예술가의 생애나 작품들 에피소드, 감상들을 엮으니만큼 각 지역과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는 소개 정도로 짧다. 조금 가볍게 예술가들에 대해 맛볼 수 있는 정도랄까. 그 감상에 더해 작가나 지역에 대한 매력과 궁금함이 일면 더 깊이 그곳에 대해, 예술가들에 대해 알이 위해 다른 책을 들척여봐야 할 것이다. 그래도 예술기행으로서 가벼운 산책정도의 느낌으로 읽으면 될 듯하다. 긴 연휴가 끝났는데도 사방 벽들을 보며 벌써부터 너른 들판이 그리워진다. 역시,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 필요한 휴식이 필요한 나날인 모양이다. 그래도 쉬는 것 같지 않은 휴식을 맞이하지도 불편한 일상에 허덕이지 않아도 될 나날들이 될 거라는 기대감에 조금은 위안이 된다. 근원적인 분노와 답답함으로 새롭게 시작되는 날이다. 가벼웁게 살짝. 그동안 눌렸던 답답함을 조금은 버려도 좋으려나. 


나의 날들을 줄곧 따라다니는 저 샘물 소리. 샘들은 햇빛 밝은 맑은 들판을 거쳐 와 내 주위에서 흐른다. 이윽고 내게 더 가까운 곳으로 와서 흐른다. 그리하여 나는 이제 그 소리를 내 안에 갖게 되리라. 마음속의 그 샘, 그 샘물소리는 나의 모든 생각들과 함께 흐르리라. 그것은 망각이다.

  -알베르 카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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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버둥

 

누운 배

제21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이혁진 저, 한겨레 출판, 2016.07.14.

 

   배가 누웠다. 일으켜 세워야 한다.

   이 소설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누운 배를 일으켜 세우는 과정을 담았다. 얼핏 ‘세월호’가 연상된다는 리뷰를 본 것 같았는데, 커다란 배가 기울어졌다는 것 외에 세월호 사건을 연관짓자면 누운 배를 일으키는 과정의 이야기들이 제 이익과 이해에 따라 결정되고 중구난방이라는 점일 것이다.

   단지 급박한 시간에 읽었기 때문이라 생각해봤지만 이 소설은 한겨레수상이라는 기대만큼의 충족을 주진 않았다. 가장 많이 든 생각은 경영혁신 사례집으로 유용하다, 라는 것.

   회사의 이야기다. 직장인이라면 공감갈 직장의 업무처리 과정의 수직관계, 상사와의 관계가 누운 배를 통해 이야기되고 있다. 한마디로 직장생활의 단면을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공감이 가는 듯도 하지만, 그래서 재미가 덜했다라고 볼 수밖에. 일의 처리 과정에서 겪는 갈등은 너무도 명확하게 보였고 이에 따른 사람들의 반응도 예상 가능한 바라서 소설을 읽는다는 기분이라기보다 어느 회사의 상황을 전해 듣는 것 같았다. 실제 상황이라면 “우리 회사에도 그런 사람 있어.”라는 대꾸가 바로 튀어나갈. 그러니 당연히 어느 회사나 똑같은 인물들이 자리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는.

심사위원은 이 소설을 ‘미학’이 아닌 ‘사실’ 소설이라 했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말인가. 소설이 사실을 아닌 것으로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만큼이나 소설은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사실 소설이라는 말 자체가 주는 힘은 압도적이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남긴다. 그래서 수필과 어떻게 다른가, 수기와 어떻게 다른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 소설은 미학이 배제된 소설이 아니라서, ‘혁신’적이라 말하고픈 건가.

 

임원들이 차례로 일어나 발표를 시작했다. 무엇을 어떻게 혁신하겠다는 것인지 내용은 하나도 없었고 핵심 관리 지표라는 것도 모두 타 회사 자료에서 베꼈는지 회사 실정과 전혀 동떨어져 있었다. 중언부언에 말끝마다 혁신, 혁신, 혁신 모두 그뿐이었다. 말밖에 안 되는 말이 중력 없이 떠돌았고 드러낸 거소다 감춘 것이 더 많은 실적 수치들은 속이 텅 빈 잔망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회장은 아무 불만도,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수량 넉넉한 호수처럼 관대하게 웃었고, 횡설수설하는 임원들을 지켜보며 이따금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는 원만히 이어졌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p74~75

 

   혁신. 혁신. IMF 이후에 기업은 이 혁신을 부르짖었지만, 혁신이란 개념에 대한 집착은 사랑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인다. 기업을 나와 개개인에게도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소설 속 회사에 닥친 ‘위기’를 혁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위의 문구처럼 하나같이 혁신을 외치지만 혁신의 정확한 개념도 성립되지 않은 채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문제를 해결하고 원인을 찾아내는 방식은 항상, 말로만 이루어지는 듯하다. 지난 정권도 혁신을 부르짖었고 변화를 부르짖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구태의연함을 유지했을 뿐이다.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말의 난무는 허무함을 끌어올린다.

   <누운 배>는 화자가 일하는 중국의 한국 조선소에서 갑자기 쓰러진 배를 가리킨다. 배는 똑바로 바다 위를 항해하는 것이기에 옆으로 누운 배는 일으켜 세움이 마땅하다. 왜 쓰러지게 되었는지, 어떻게 일으켜 세워야 하는가를 계획하고 진행하기 위해선 무수한 대책회의가 필요하고 담당자의 문책과 변경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극대화하는 것인 ‘이기심’이다. 내 이익이 되는 쪽으로. 그리고 ‘회사의 이익’이 되는 것이 직원의 이익보다 선행한다. 다른 말로 대체하자면 이 이익과 이기를 모든 모순의 총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관료제와 계급구조의 모순들. 배는 쓰러졌고 배가 쓰러졌음이 타당한 문서로 성립하는 과정은 배를 일으켜 세우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하다. 책임회피와 보험을 취득하기 위한 노력들이 결국 최종적으로 배가 완전히 쓰러졌음을 알리는데 일조한다. 도장 쾅. 원인과는 상관없는, 배제된 서류의 낙인이 배의 상태를 알리는 표지가 된다.

   그리고 다시 누운 배를 세우기 위한 회장의 한마디로 모든 직원들은 전전긍긍 배를 세우기 위해 일한다. 합리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고 의견을 제시하고 논의할 겨를 없이 그 말 한마디로 고철같은 배는 세워져야 하는 거고, 월급을 받기 위해서는 배를 세우려는 일련의 작업들을 진행해야 한다.

 

매일 똑같은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요령을 익혀나갔다. 일이 쌓여도 쌓인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요령, 금방 해도 시간과 공을 많이 들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일도 아닌 일을 일처럼 보이게 하는 요령, 그리고 적당히 틈만 보이면 혁신이라는 단어를 붙여 넣는 요령. 요령을 익히니 일은 편해지고 회사 생활은 평화로웠다. 퇴근하면 술마시고 여자를 주무르다 집으로 갔고, 잤다. 불편하고 불쾌한 것들, 틀렸지만 틀렸다고 말할 수도, 고치거나 치울 수도 없는 것들은 적응하거나 아예 잊어야 했다. 기쁘고 즐거운 것, 보상을 찾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p125

 

   기업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사람도 물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느덧 표피에만 머무르며 영혼없는 일터를 오간다. 수직적인 기업의 문화가 기업이익에만 매몰하는 행태가 그러한 직원들을 양상하는 것일까. 그럼에도 혁신은 멀고, 혁신 역시도 표피에만 머무른다. 이런 생활이 반복될 때 일하는 인간은 단지 일을 하고 있다고 행복할 수 있을까. 수많은 이들이 출근하고 월말이면 급여를 받지만, 자기성취와 행복감은 알지 못한 채 ‘요령’만을 파악하게끔 하는 기업문화. 그런 구조는 대한민국의 기업의 당연한 문화로 너무나 오래 자리잡았다.

   화자가 맞닥뜨린 일은 <누운 배>에 대한 처리과정이지만 작가는 누운 것은 배만이 아님을 말한다. 일방적으로 매몰되고 마는 기업 속의 개인들. 천편일률적인 기업 조직 속에서 또 그렇게 천편일률적인 직장인의 모습으로 살고 있는 이들을 가리킨다. 자기도 모르게 까라면 까면서 다 똑같은 사람이 되어가는 사람들. 어쩌면 모두 똑같이 되어가는 것에 안도를 할지 모를. 여기에 작가는 질문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질문은 단 하나였다. 내가 무엇을 할 것인가. 그것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돈벌이가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떤 질문보다 가장 앞서야 할 질문은 바로 그것이었다. 그 질문을 하고 어떤 답이든 구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모른 채 이대로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는 말에 길들어가며 세월만 보내게 될 것이다. 결국 지금 저 배처럼 다 썪은 채 일어선 것도, 누운 것도 아닌 것은 내가 될 터였다.

다 그렇게 산다고들 말하지만 다 그렇게 죽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죽기는 싫었다. 적어도 나는, 정말 그렇게 죽기 싫었다. 말도 안 되는 인간들 뒤치다꺼리나 하면서, 그런 것이 회사 생활이라고 스스로 강박하고 세뇌하면서 일생을 보내다 늙고 병든 닭이 돼 죽기는 싫었다. 그렇게 살기에 나는 아직 젊었고 내게 남은 인생은 너무 길었다. 나는 그럴 수 없었다. p306

 

직  장인의 삶이란 늘 현실과 이상 사이의 타협점이긴 하다. 이상을 쫓자면 놓쳐버릴 현실에 울고 현실을 쫓자면 놓쳐버릴 이상에 운다. 어떡하든 조화를 이룰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다음에는 어느덧 회사에서 내쫓겨버릴 상태에 처할 뿐이다. 어쩌면 오래도록 느끼지만, 깨달음은 결정은 한순간일지 모른다. 어디에 발을 더 두느냐에 따라서 여전히 누운 배로 머물 수가 있다. 썩고 썩고 썩은 채 누워 있는 배가.

   소설 속 문대리처럼 사람들은, 개인은 이렇게 조직을 벗어나고 또다른 조직에 들어가기를 반복한다. 더 나은 직장인이 되기 위하여, 더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개인은 끊임없이 누운 채로 발버둥친다. 그러나 그런 발버둥이 무색하게 희망과 선택과 결정을 가지고 들어가는 곳이 또다시 같은 조직들 속이라면야 얼마나 허무한가. 누운 배이고 싶지 않아 발버둥치는 이 무수한 개인들 면면의 노력만큼이라도 커다란 시스템이 얼른 누워있지 않은 채로 탁 버티고 있는 그림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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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왜, 왜!


풍경소리 - 2017년 제4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구효서 외, 문학사상


  비가 오는 날 어느 절간 처마에서 울리는 풍경소리를 듣는 게, 잠을 재워줄 소리로 느껴진다. 풍경소리. 풍경에도 소리가 있다면, 이 풍경소리에서 느껴지는 조근조근한 조용함이지 않을까. 이러한 풍경을 너무 좋아하고 그리워하는 때, 빗소리가 만들어내는 화음을 풍경소리인양 대체하며 하늘을 처마인듯 쳐다보며 이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

 폭풍전야의 시간을 견디고 있다라고 하니, 풍경소리의 한 문장처럼 나도 어딘지 머쓱.


  네, 저, 그런데, 쓰는 데는……촛불이 좋아요. 네. p13


  시작부터 한 구절에 눈이 꽂힌다. 피식 웃음이 난다. 마냥 차분한 듯도 들뜬 듯도 한 이 기분, 종잡을 수 없는 복합적 상태로 책을 읽고 있겠다 했지만, 집중이 될까 말까 한 생각이었는데 <풍경소리>가 주는 차분함에 어느새 긴장의 마음 틈들이 메워져가는 듯했다.

  왜 번뇌하는 자들은 하나같이 절로 들어가는지. 깊숙하고 깊숙하고 조용한 어느 곳, 그곳으로. 갈수록 믿고 의지하기가 힘들어지지만 종교 자체가 내뿜는 힘이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에 의탁해 힘을 내는 것, 그것은 사람의 의지인가. 어쨌든, ‘묘음’을 들려주는 이 <풍경소리>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을 차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이것이, 30년 내공의 작가가 가진 힘이라면 마냥 젊은 작가의 동질의 언어에만 반가워하지 않고 이들의 언어의 맛을 계속 느낄 것이다. 이처럼 오랜 인생살이의 삶의 언어를 터득한 세대들의 목소리라면 그들의 소리에도 귀기울일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같은 소리를 듣고 다른 소리를 내뱉는다 답답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세대 단절의 소리는, ‘왜’라고 묻는데서 시작하는 것일까? 너는, 너희는, 당신은, 당신들은, ‘왜’ 그렇게 하는 건대요?

  

   왜라고 묻고 싶을 땐……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렇군.

   예?

   왜라고 묻는 대신 그렇군, 이요?

   그래요.

   그렇군이라고 말한다고요?

   그래요.


 성불사에서는, “왜라고, 묻지, 않습니다”만 여기, 이 대한민국의 현실의 삶은 성불사가 아니므로 나는 끊임없이 ‘왜’라고 물을 것이다. 왜, 왜, 왜!라고.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해하기 싫어서, 이해할 수 없으므로, 이해할 성질이 아니기에.

 성불사에 온 듯 갑작스럽게 “그렇군”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여기 <풍경소리>에 취해 갑자기 전환할 수 없음을 안다. ‘머쓱’하기도 하고. 하루만 지나고 나면, 어쩌면 그때는 하게 될까. 어쩌면 오늘 밤이 지나고 결정의 순간이 오면, 내가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오면, 오히려 왜라는 질문보다 “그렇군”이라 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군, 역시 여기는 살만한 데가 못되는군.”


  달라지고 싶어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러 가는 미와의 성불사에서 머문 날의 이야기는 ‘달라지고 싶다’는 미와의 의지가 만들어낸 것도 같지만 ‘묘음’이 이끌어들인 짧은 여행같기만 하다. 소설인듯 아닌듯 끄적거리는 미와의 이야기와 서술자의 글이 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이 소설의 매력도 증폭된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떨림이 눈가로 스칠듯 말듯. 경건함을 밑바탕에 두고 담백함의 밀도가 꽉 찬 이 느낌이 성불사로 당장 달려가고프게 이끈다. 이미지와 소리 속에서 묘한 근원의 소리를 알아가는, 깨쳐가는 것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또한 반복된 소리에 미칠듯한 심경 또한 자신의 탓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무수한 소리들 속 특정한 소리의 강박과 집착에 묶여 있다. 단순한 욕망이라 치부하기엔 억울한 면도 없잖아 있는 그런 소리타래들에서 벗어나고픈, 달라지고픈 우리의 마음은 성불사 <풍경소리>를 들으면 정화가 될 수 있을까.

   

어쨌거나 성불사의 밤은 각자의 방에서 잠든 그들을 달빛과 함께 꼭꼭 품었다. 객실의 미와도 촛불을 끄고 잠든 지 오래. 나만 깨어 그들을 굽어보지만 나는 원래 잠을 모르는 터라 깨어 있는 거라고도 할 수 없었다. 바람이 잦아들고 밤이 깊어 사물이 딱 정지해 고요하고 적막해도 모든 소리의 연원인 나마저 잠들거나 사라지지는 않는 것이다. p79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를 보면 한없이 불편해진다. 개인적인 상황에서든 업무적인 상황에서든 불편과 불쾌를 초래하는 시선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렇듯 성불사에서는, 아니 어느 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저 멀리서 지켜보는 ‘시선’에 대한 욕구가 솟아나는 걸까. 태양은 어느 곳이나 뜬다는 말을 진리라 친다면 태양은 어느 곳에나 같은 빛으로 비추지 않는다는 것 역시 진리다. 어느 곳에든 그림자는 있기 마련이니까. 이런 시선에게 왜 그림자를 지웠느냐고 묻고 싶은 것일 게다. 왜 나만 불편하고 불쾌하고 힘들고 근근히, 살아가고 있는 걸까란 물음을. 무언가 정의롭지 않다는 물음을. 한동안 돌려져 있던 시선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를 묻는, 그런 것.

  그러다가도 언제나 시선은 동일했다는 것에 조금의 위안을, 언제나 ‘쳐다보고 있었다’라는 것에 격한 안도와 변화의 의지를 다지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의지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하며 결국 ‘내’가 행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끔도 된다. 그렇더래도 오늘의 이 <풍경소리>는 한동안 지속되어 마음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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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기를 쓴다는 것


매혹의 러시아로 떠난 네 남자의 트래블로그, 서양수·정준오, 미래의창, 2015.


  긴 연휴가 시작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인천공항에는 무수한 인파가 가득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이 나라를 떠나 휴식을 취하기 위해 떠나고 있다. 그래, 그동안 너무도 지쳤다.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너무도 힘들었던 시간이다. 일 때문이기도 하지만 일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나라 때문에 아직 회복되지 않은 채 바짝 긴장된 몸과 마음. 이 기회를 맞아 힐링을 하고 돌아오면 5월엔, 5월엔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새로운 정권을 볼 수 있을까.

  

 “시베리아 자작나무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여행은, 홀리듯이 가더라도 몸이 지쳐 돌아와도 다시 가고프다. 여기 네 남자가 떠난 러시아여행처럼, 여행에서의 잊지 못할 기억이 자꾸 불러댄다. 여행 책들의 결론은 한결같다. 어쨌든 떠나라!

  이 책은 갑작스럽게 떠나게 된 네 명의 남자들의 러시아 여행기이다. 네 명의 남자들은 2008년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만난 인연으로 다시 한번 러시아를 떠난다. 갑작스럽게. 네 명이지만 두명만이 여행 서술을 담당하고 있고 그들이 방문한 러시아의 감상과 겪은 여행 에피소드를 곁들이고 있는 여행기다. 네 명의 왁자지껄한 여행의 일상이 담겨 있다.

  여행기를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경험을 통해 여행에 대한 욕구를 충독질하는 일이다. 가고자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곳에 대한 인상을 타인의 경험을 통해 간접경험하며 절실하게 나도 여행을 가겠다는 마음과 그들이 예찬하는 장소 어딘가를 선택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여행기 또한 넘쳐난다. 어떤 이는 여행을 가고 시리즈로 여행기를 발행하기도 한다. 세상에 여행할 곳은 너무도 많으니까 여행기는 사람들과 장소에 비례하여 기하급수적이 될 것이다. 그 많은 여행기 중에서 어떤 여행기를 선택한다는 것은 내 여행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음을 감안할 땐 중요한 일일 거다.

  이 책의 특징은 뭐랄까. 편하게 읽히는 만담같다. 여느 여행기나 블로그에서 보듯 방문한 곳의 유명한 장소에 대한 소개와 그곳에 대한 인상이 담겨 있는데 이를 통해 “아, 나도 가고 싶어”라고 할만한 장소는 선뜻 와닿지 않는다. 그만큼 특정한 장소에 대한 묘사와 강렬한 인상을 담고 있진 않다.

 기억에 남는 건, 이 책을 쓰게 된 동기와 그들의 이력이다. 어떤 여행기는 “여행을 떠난 이유” 자체가 여행의 내용보다 차별화된다.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일생일대의 선택을 하는 일인듯 ‘과감’하게 일상의 일들을 접고 떠난 이들의 여행기가 주를 이뤘다. 그들은 과감하게 일을 그만두거나, 전세금을 빼거나, 전재산을 몽땅 들고서 여행을 간다. 그런 일들은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러나 한편으로는 로망이기에 그렇게 해서 떠난 여행이 어떤 매력으로 가득했는지, 그들이 후회를 하는지가 궁금해서 그들의 여행기를 보게 된다.

  그다음 작가나 학자의 여행기다. 그들은 학술적인 정보를 감상과 함께 섞어 준다. 문학가의 감상은 남다른 언어를 통해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억을 일깨우고 학자들은 그 지역의 역사와 사회문화적 배경을 잘 설명해준다.

  일반인들이 여행을 하지만 여행기를 쓰는 경우 저런 ‘과감한 행동과 이력’이 있어야 눈에 띄는 게 보통이다. 그런 점에서 이 네 남자의 여행기는 직장 생활하거나 공부하거나 일상을 누리다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주말과 휴일을 이용해 여행을 떠났다. 아주 특별할 것도 없이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그들의 기록을 책으로 만들었다. 아니다. 더 정확히는 여행을 가는 멤버를 영입하기 위해 ‘책으로 쓰자’는 아이디어가 먼저 나왔다. 어쨌든 보통의 사람들이 여행을 갈 때 하는 방법 그대로, 그 전날까지 일에 치여 있다가 날짜에 맞춰 허겁지겁 떠나는 여행이다. 그렇게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하고 또다시 휴가에 여행을 떠나는 그런.

  여행을 떠나는 일이나 혹은 여행을 가서 여행기를 글로 쓰고, 책으로 내는 건 특별한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 여행기는 일상과 평범이 그대로 녹여있는 여행기이다. 여행을 하고 싶고 여행기를 쓰고 싶은 이들에게 새로운 욕망을 씌워주는 책이라고나 할까. 물론 몇 박 며칠의 휴가를 다녀온 이야기를 책으로 쓴다고 해서 출판사해서 즉각 환영하며 출판해 줄 거라는 보장은 없다. 다른 책들과는 다른 ‘차별성’이 필요한 법이니까. 한편으로는 이들 네명의 독특한 이력이 한몫했다는 생각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우주비행사에 도전하기도 하고 공모에 당선되어 갈라파고스를 촬영하기도 하는 사람들, 이미 20대에 연해주 역사탐방단에서 시베리아 순례를 하던 이들 네 명. 그러나, 지금은 30대 직장인이거나 아직 공부중인 채로 지난 날의 여행의 기억을 마음에 품고 언제든지 그 여행 속으로 달려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

  여행은 그리고 여행기는 정해진 누군가의 몫은 아닌 것이다. 누구든 도전하는 자의 몫이라는 생각이, 긴 연휴를 앞두고 든다. 도전하고픈 연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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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04-28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 모 항공사 광고에서 본 듯한 사람들인데 맞는지 모르겠네요.
이들의 이력이 여행서 출판에 한몫했다는 얘기가 의미있게 다가오네요. 많은 이들이 꿈꾸지만
여건이 허락해주지 않은 현실에 살짝
서글퍼지려하네요^^ 의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

모시빛 2017-04-29 22:14   좋아요 0 | URL
동감이요. 서글픔...출판에 있어 콘텐츠도 중요하지만 저자 프로필이 우선하기도 한다더군요. 심지어 프로필이 70%라는 얘기도들은 기억이 나네요... 그래도! 즐겁게 열심히 책읽고 좋은 콘텐츠를 쌓아보자구요. 화이팅입니닷!
 


스트롱맨에겐 의식 정화가 필요하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이민경, 봄알람, 2016-08-02.


  “집에서는 안 그래요. 부드러운 남자에요.”

  집에서 부드럽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집에서는 안 그런데 왜 밖에서는 그렇게 행동하는가. 어떤 행동은 집에서 하는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밖에서 해서는 안되는 말과 행동이라는 것은 있다.

  여러 가지로 두 부부의 발언에 적잖이 놀라고 있다. 나랏일을 하겠다고, 큰일을 할 사람이라 자청하며 목소리 높이고 있는 누군가의 ‘언어’는 개인의 언어로서도 부적절하다. 하물며 한 나라를 이끌어갈 대통령 후보의 언어라니.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투표일을 앞두고 뱉은 말들을 주워 담기 위해 ‘이해시키려’ 쏟아내는 말들은 오히려 앞의 언어가 ‘한번 삐끗’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 언어가 빠져 나온 통 속에는 동종의 언어가 가득함을, 언어통을 지배하는 ‘인식세계’의 수준이 어떠함을 드러낸다. 이 인식체계에서 주워 담은 언어통 속 언어로 이야기하는 것은 같은 의미의 무한재생일 뿐이다. 그들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하면 할수록 이해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다. 이 책 작가의 말대로 이해란 ‘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니까.


생각해 보면 ‘이해를 시키려 노력한다’는 말, 묘하게 모순입니다. 이해란, 원래 시키는 게 아니라 하는 겁니다. 대화를 마치고 ‘이해시키느라 힘들었다’는 소리가 나온다면, 상대가 해야 할 이해를 도와주는 노력을 했는데 그게 힘에 부쳤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럼 힘을 키우면 될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계속 말하겠으나 당신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잠깐, 이해가 누구 몫이어야 하는지는 짚어둡시다. ‘이해’가 성립하는 데 필요한 노력을 누가하고 있는지도 봅시다. p21


  “설거지를 어떻게…. 남자가 하는 일이 있고, 여자가 하는 일이 있다.

 남녀 일은 하늘이 정해준 것이다”


  사람들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여성 비하, 성차별 발언이라며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아들은 “아버지는 집에서는 설거지, 청소, 빨래도 자주 하시고 라면도 잘 끓이시는 자상한 분”, 부인은 “빨래도 잘하고 설거지도 잘한다”라며 아버지를 두둔했다, 가 아니라 아버지가, 남편이 말한 것이 거짓말임을 밝혔다. 거짓말하는 대통령은 안된다면서 참 쉽게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 후보를 만난다.

  이 발언이 ‘여성혐오적 발언’이라고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자 후보는 “스트롱맨이라서 웃자고 한 소리다” “센척할려고 한 소리다” 라고 변명했다. 웃자고 한 소리라는 말에 정작 웃을 수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알지 못하는 건가. 더 정색할 말이 이어진다.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말도 자당 후보를 향한 비판에 유권자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언어’를 구사한다. 아니 수습의 언어라고 해야 하나. 같은 통에서 꺼낸 말로 당 대변인은 한마디 덧붙였다. “설거지 발언은 이 시대 남성 심경을 대변한 것이다.”

  이 말이 여성혐오의 표현만이겠는가. 남성차별의 언어이기도 하다. “강한” “멋진”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여성을 폄하”하는 데 기대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강함의 진정성은 있는 것인가. 그 강함은 자립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진다. 여성을 비하하고서야, 여성을 깔아뭉개고서야 비로소 제 위치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여성에게 의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또한 그 속에는 “여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성혐오”의 표현을, 행동을 감행하는 이율배반적인 행태도 분명 포함되어 있다. 이 잘못된 언어의 중심에는 결국 잘못된 전제와 잘못된 인식이 바탕에 있는 것이다.

  이 “강한”남성들의 세계관은 여성비하, 폄하 못지않게 남성 자신들의 비하와 폄하를 일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강한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해 여성혐오를 하용하면서 “남성적이지 않은 남자들”을 지적하고 걸러내 또한 차별하고 있음을 정녕 모르고 있는 건가. 아니,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러기 위해 행하는 행동이라는 데 더욱 분노할 수밖에 없다.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행하는 행동, 절대 바꾸고 싶지 않아 외면하는 행동 패턴들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영원히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 하는 그 인식세계다. 굳이 가부장제를 끌어 오고 싶지 않지만 가부장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얻어낸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일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여성만이 아니라 남성에게도 스트레스와 공포를 주는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여성집단”을 차별함으로써 이 무한 경쟁 사회에서 경쟁 대상을 줄이고 싶은. 정의와 평등의 언어가 아니라 혐오의 언어로 제 존재적 증명을 펴려는 그들만의 언어의 세계. 이 혐오의 언어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점점 집단화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배제하려는 이유는 결국 제 것을 더 갖기 위한 발악이다. 한편으로 이 여성혐오의 언어는 물론 주욱 이 나라에서 이어져오고 잘 써먹어 온 말이다. 그러나 변화하지 못하는 소멸되는 언어로 만들지 못하는 건 헬조선 사회가 움켜쥐고 있기 때문이며, 특정한 권력이 그것을 더욱 부추기는 이유 아닐까.

  

 이 책 <우리에게도 언어가 필요하다>는 사실, 다른 페미니즘 책보다 그렇게 흥미를 당기진 않았다. 최근 페미니즘 관련 책들이 너무 쏟아져 나와서 비슷한 경험과 이야기들을 반복해서 보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분명, 환호할 정도의 공감이나 끄덕거림보다 뭔가 아쉽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오늘 문득, 한 대선 후보의 발언에 반응하는 내 언어가 이 책에서 말하는 바와 별 다르지 않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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