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거리를 뒀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책읽는고양이, 2016-10-20.


  기차를 타며 읽으려고 선택한 몇 권의 얇은 책이 모조리 일본 작가들의 책이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다」의 제목이 좋아 책을 꺼내드니 표지가 익숙했다. 제목과 표지의 연관성이 뭔가 생각할 겨를 없이,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에 표지가 익숙할 만큼 알라딘에서 많이 본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 책과 역시 제목만 들은 ‘뭐라고’ 시리즈의 작가 사노 요코 작가의 에세이를 들고 기차를 탔는데….

  너무 거리를 뒀나. 몇 문장의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약간의 거리를 두다」는 제목이 주는 느낌만큼 다가오지 못했다. 덜컹이는 기차때문이라고 생각해보려 해도 오히려 덜컹이는 기차였기에 그 감상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다는 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결과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다」와 사노 요코의 책을 기차여행에 선택한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습니다.”

  에세이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 에세이가 번역되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면 이것은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거나 작가의 유명에 달린 것이라고. 물론, 우리나라 출판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두 작가 모두 소설가라 하는데 작품이며 작가며 전혀 알지 못했고 에세이의 문장에 감흥하지 못하는 것을 여전한 ‘일본풍’이라는 취향으로 돌리기에도 함께 선택한 일본 소설은 그 일본풍에도 기억에 남는다는 점에서 탁월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이 책들의 무엇이 여행길의 내게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성’만을 작동하게 했을까.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거리를 두었어도 점점 가까이, 그리고 계속 머물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러니, ‘약간의’ 거리를 둔 것이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산문집은 타인의 경험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이끌어내는 작가의 통찰을 접하며 나는 왜 내 삶에서 이러한 것을 간과했나 생각하게 되고 그 시선을 돌아보기도 한다. 때론 너무나 공감하는 문장들을 만나 하염없이 빠지고 때론 전혀 생각지 못한 문장들을 만나 또 풍덩인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익숙한 경험의 나열이었다. 하긴, 어떤 에세이들은 너무나 익숙한 감정을, 타당한 논리를 얘기하기에 신선하지 않을 때도 있다. 신선하지, 않다가 이 책들에게서 얻은 느낌이다. 소노 아야코는 차분한 가운데 어두운 느낌으로 사노 요코는 수다스럽고 경쾌한 느낌이긴 했지만.

  소노 아야코는 나답게를 위해 타인과의 거리두기를 제시한다. 타인과의 거리두기에 관한한 일본인들이 월등히 잘하고 있는 점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나 했지만 일본의 원제는 「인간의 분수」. 원제였다면 이 책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일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나답게 사는법에 관한 한 어느 나라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 같긴 하다. 타인의 기준에 매달리지 말고 나만의 법을 찾으라는 이 조언은 굳이 일본 번역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오고 들어온 이야기다. 알지만 늘, 실천에 능력발휘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런 에세이를 통해서 또다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 또 실패하고, 또 노력하다 실패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싶다.

  소노 아야코의 「인간의 분수」 우리나라 번역본 「약간의 거리두기」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 방법에서 자주 눈에 띄는 건 익숙하게 들어온 방법이나 감정적 서가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 역시도 반복적으로 들어온 수사이긴 하다. 그래서 번역본의 제목보다 오히려 원제가 가지는 「인간의 분수」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걸맞은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운명과 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가 제시하는 이 나답게 살기 위해 타인과의 거리를 두는 법에서 전하고자 하는 방법은 내게는 절대로 해당사항이 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신도 좋고, 세상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세상은 좋아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가 옳지 못하기에 신을 찾는 사람도 있다. 세상의 이런 모습은 악이라고 규탄했지만 의외로 신은 ‘상관없다’라고 응답해주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 신은 언뜻 봐서는 공존이 불가능한 적대관계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해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종교인이 아니라 ‘특정’종교가 없기에 이 반복된 메시지에 감흥이 적었음은 분명하다. 힘겨운 삶의 고민들을 종교를 통해 좀더 가볍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거나 나쁜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가고, 또 제 경험을 타인에게 제시한다. 그 지점에서 소노 아야코의 방법이 내게 와닿지 않았을 뿐.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신앙이 인간을 더욱 이기적이게 한다“라고도 주장한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를 이어가는 종교와 어제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도 이 생각에 한몫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할 때 불행히도 ‘종교인’은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하면 너무 억울할 것도 같지만, 종교를 갖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종교’가 제 힘들을 제대로 못써먹고 있는가, 잘 써먹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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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지음, 배수아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로베르트 발저를 아시나요


산책자 - 로베르트 발저 작품집 

로베르트 발저, 한겨레출판, 2017-03-15.


    그 누구도 내가 되기를, 나는 원하지 않는다.

    오직 나만이 나를 견뎌낼 수 있기에

    그토록 많은 것을 알고, 그토록 많은 것을 보았으나

    그토록 아무것도, 아무것도 할 말이 없음이여.


  글을 읽을수록 여러 생각의 갈래로 달려갔는데 그 중 하나는 끌림이었다. 끌림의 느낌은 서늘함이었다. 싸늘함과는 다른, 왜인지 모르게 서러움 가득한 기분. 발저의 글 속으로 푸욱 파묻혀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서글픈 설움에 떨렸다. 작가의 생애를 먼저 알았기에 작가에 대한 연민에서 비롯되었을까. 물론 그렇지않다고 할 수는 없다. 분명 작가의 생애로 인해 글과 작가가 일치되었고 길 위의 고독가가 느껴졌다.

  발저의 생애를 보다가 몇몇의 작가가 생각났는데 거리의 작가 찰스 부코스키와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리며 국민작가라 칭송받는 보후밀 흐라발이다. 발저 역시 스위스의 국민작가라 칭송받는다 하며 독일문학사의 중요한 작가라는 위치를 점하고 있다. 부코스키, 흐라말, 발저의 공통점이라면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글을 쓰고 주류라 불리는 분위기로부터 몇발짝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외부적인 요인이 그들의 주변에 흐르고 있었고, 물론 그것이 내면에도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하다.

  로베르트 발저의 마지막은 그의 작품 「크리스마스이야기」에서처럼 크리스마스의 아침, 산책길, 눈밭에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이 작품 「산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이 걷고 걷는 이의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작가의 인생에서 걷기와 쓰기가 중요한 듯 그의 인생은 걷는 것과 쓰는 것의 반복이었다고 한다. 가난한 그의 생에 종이조각이라면 어디든 글을 썼다는 발저는, 자살을 시도하고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발저의 자살은 원체도 가난한 삶에 전쟁으로 인해 더 심해진 궁핍과 그로인한 우울때문이라 한다. 스스로 정신병원에 들어간 후 절대 글을 쓰지 않았는데, 왜냐면 글을 쓰러 간 것이 아니라 ‘미치기 위해’ 들어간 것이기 때문이라고. 독특한 그의 세계가 가늠이 되지만 내면 깊이 걸어 들어가는 발저의 글맛이 독특한 세계, 그런 것이 어디 있나 싶다.


고독하다는 것. 얼음과 같은, 쇠붙이와 같은 전율, 무덤의 냄새. 자비심 없는 죽음의 전조. 아, 한번이라도 고독했던 자는 다른 이의 고독이 결코 낯설지 않은 법이다.


  이 작품집으로 발저의 글을 처음 접하지만 고독이 짙게 배여 있다는 느낌과 머릿속이 복잡하였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머릿속을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방법이 발저의 산책으로 그리고 글쓰기로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었다. 끌림도 글속에 짙게 배인 이 고독과 서정의 나래였다고 생각된다. 100년도 전에 태어난 발저에 대해 책표지의 저자 소개 정도로만 알고, 단지 작품 하나 읽었다 뿐인데도 나는 그의 세계가 이해되는 듯이 굴고 있다. 나는 홀로 산책하듯 발저의 글을 읽다가 그가 내 앞에서 걸어가는 듯이 여기며 글을 읽었다. 어떤 정서나 문체에서 발저의 끌에 한없이 끌린 후 마냥 산책을 하고픈 기분에 시달렸다.


나는 언제든지 할 수만 있다면 몽상에 잠긴다! 그게 무엇인지 알고 하는 건 아니다. 조금도 알지 못한다! 나는 늘 생각하는데, 어디서 큰돈이 굴러 들어오면 나는 일하지 않으리라,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나를 어린아이처럼 기쁘고 들뜨게 만든다.


   나는 언제나 걷고 싶었고 길만이 아니라 내 내면의 길로도 끊임없이 걸어가고 싶었다. 마냥 걷는 것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탁월하고 두서없이 글을 적는 것 역시 머릿속을 정리하는데 나름 좋은 방법이기도 하다. 다만 글이 생각을 따라가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인지 발저의 이 산책과 함께 한 글들에 자꾸 맴돌게 되었나, 싶다. 그래서 반가운 글들과 더러는 재밌는, 그리고 아주 많이 서러운듯 느껴지는 글들을 보면서 그의 마지막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나, 아니 그의 선택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한 생에 또한 우울했던 그의 생에 대해 그 자신, 아름답다 생각하며 눈을 감았을까.


눈으로 덮인 채, 눈 속에 파묻힌 채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여. 비록 전망은 앙상했지만 그래도 생은 아름답지 않았는가. 


   비가 오지 않는 오랜 가뭄의 날들. 발저의 글을 들여다볼수록 왜인지 서러운 울음이 나는 듯했는데 눈이 쌓여 있지 않기 때문일까. 나는 이 세상에 불만도 불안도 많고 어쩔 땐 전혀 원하는 것이 없기도 어쩔 땐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분노에 휩싸이기도 한다. 한동안은 계속 그랬고, 지금도 역시 분노를 버리면 안 되겠구나, 하며 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잡고 있는 것도 없으면서 놓아버리고 싶은 기분에 들 때가 있는데…발저처럼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지 않을 날이 올까. 아직, 확신할 수 없어서 더 서글픈지도 모르겠다.


세월 저편으로 사라져간 아름다움의 색 바랜 고결한 그림이여, 감미롭구나.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지금 이 세상과 이 인간들에게 등을 돌려버리는 것 또한 합당하지 않으니, 그 누구도 역사의 사색에 잠겨 있는 자신의 기분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른 인간과 제도에 원한을 품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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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를 보았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 공지영, 해냄, 2017-04-03.


  작가가 13년 만에 펴내는 단편소설 모음집이라고 하는데 수록된 다섯편의 글을 보면서 소설과 수필 사이에서 갸우뚱했다. 마지막 수록된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2011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일 때 읽었던 것이라 단편소설상을 받은 만큼, 소설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때도 수필 느낌을 더 받았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외에는 대체로 수필로 느껴졌는데 그건 특히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 여겨지는 내용과 작가의 등장 때문일 듯하다. 장르가 글을 읽는데 어떤 영향이 있느냐 할지 모르겠지만 꼬집어 말할 순 없어도 읽을 때의 느낌이나 방법에서 나름 차이가 있다고 여겨진다. 상상의 면에서도 다르다고 해야 할까. 어쨌든 글은 상당히 속도감 있게 읽혔다. 수록된 단편이 적은 분량이긴 했지만 산문집을 보는 듯한 편집의 영향도 있었다.

 「할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출간 소식을 들었을 땐 고령화시대의 노인들의 연륜을 긍정적으로 이야기하거나 탄핵 사건을 계기로 노인세대에 대한 비판의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작가의 성향을 보건대 후자쪽으로 더 기울었다. 막상 읽어보니, 이 장르를 뭐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는 현대 과학을 다 동원해 의사가 예측한 대로 일 주일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돌아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는 숯덩이 같은 빛깔의 얼굴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할머니의 숨소리는 정신 나간 거위가 꽥꽥거리는 것처럼 커서 가끔 할머니의 용태를 확인하러 집에 들르던 친척들은 할머니 방에 얼씬하지 않고도 거실에서 느긋하게 햄과 치즈 그리고 연어 따위를 안주삼아 위스키를 마시면서 골프 이야기를 했다. 할머니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곤 아마 “저 양반 참 오래 버티시네…… 당신을 위해서라도 이제 고만 가셔야지.”라고 모든 것이 할머니를 위한 생각이라는 듯, 스스로를 매우 선량하게 여기는 얼굴로 말했던 것뿐이었다.


  가진 것은 돈밖에 없는 할머니의 죽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쩌면 기다리고 있을 때 할머니는 당신 자신의 자식을, 며느리의 죽음을 겪고 생생하게 살아난다. 이후에도 할머니의 마지막 순간이 왔다고 기다리면 어김없이 다음날 할머니는 생생한 모습으로 살아났고 그 대신 다른 생물들이 어김없이 죽었다. 생생한 몸을 일으키며 미음을, 밥을, 갈비를 뜯어먹는 할머니에게 ‘나’는 경악하지만 ‘나’가 목격한 것은 할머니의 죽음의 순간 강렬하게 내뿜는 할머니의 기운이었다. 그리고 ‘나’는 자신을 옭아매려던 기운에 소리쳐 반항하며 빠져나왔다. 여전히 할머니는 죽을 때가 되었다가 다른 생명의 죽음과 함께 생생히 살아나 밥을, 갈비를 먹고 있다.

  오래도록 병을 앓은 채 이제 죽음이란 문턱에 있던 노쇠한 할머니가 어느날 갑자기 생생해지는 모습은, 그 사이에 ‘다른 것이 (대신) 죽었다’가 삽입된 상황을 맞닥뜨리며 할머니에게서 구미호를 겹쳐보이게 한다. 매일밤 가축들을 잡아먹으며 아침이면 인간의 얼굴을 들이밀었을 구미호. 인간이든 동물이든 다른 것을 죽여 일상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얻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래도록 당연한 것으로 용인되었고 생명의 본질로 여겨졌다. 용인된 것과 용인되지 않은 것의 차이, 어떤 것이든 이 문명화된 사회에서 항상 문제는 그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든다.

  오래전 구미호를 보며, 읽으며 구미호에게 연민을 느꼈던가. 인간이 되고자 하나 하루를 착각해 결국 인간이 되지 못한 구미호에게 안타까움을 느꼈던가. 기껏해야 사람을 잡아먹는 여우가 인간이 되고자 하는 발버둥을 가소롭게 여겼던가. 여우가 인간이 됨을 타당하지 않다 여겼던가. 글쎄, 확실히 어린 날엔 전설의 고향 속 구미호가 무서워보기인 했을 지라도 결국 눈물 흘리며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한 구미호에게 마냥 안타까워했다. 지금은, 어떤가.


내가 아는 것은 그 힘이 분명 할머니에게서 왔다는 것뿐이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그 힘은, 그렇게까지 목숨 바쳐 자신만 생각하는 사람에게서, 가여운 사람을 가엾게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가난해서 마음을 굽혔던 것도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지만 힘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일도 사실은 자신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꼭 남을 해칠 필요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그런 사람에게서 나오는 힘이라는 것을……

  

  할머니가 죽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했다. 죽지 않는가, 죽지 못하는가를 생각할 때 무의식중에 쏟아 나오는 기운을 보건대는 분명 죽지 않는 것이다. 그 기운이 여전한 탐욕과 욕망이라 말한다면 자신보다 약한 생명들을 죽임으로써 살아나는 할머니의 생에 대한 욕구는 타당하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다가 할머니가 강자인가라는 질문을 했다. 할머니 대신 죽은 생물들은 약자라는 이 프레임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고양이가, 진돗개가, 까치가 그렇다고 치다. 할머니의 아들이, 며느리가 약자인가? 대체로 우리는 노인들을 사회적 약자로 간주한다. 그래, 분명 할머니는 사회적 약자다. 더구나 할머니는 병들었다. 이보다 더 약자인 경우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도 왜 할머니를 약자라 하지 않는가. 오로지 할머니가 가진 게 ‘돈’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돈’만 가지면 그저 세상의 강자로 바라보는구나. 이 서글프고 씁쓸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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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개와 늑대의 시간, 김경욱, 문학과지성사, 2016-04-15.


  아주 오래 전에 이 ‘사건’을 접했다. 파리 한 마리에서 시작된 이야기의 결말이 끔찍스러워 잠자는 이를 깨우는 것에 조심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은 프랑스 사람들이 해질녘을 표현하는 말이다. 해가 지고 점점 어두워지는 시간, 멀리서 보이는 짐승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려는 늑대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된 말이라는데, 참 탁월한 표현이다 싶었다. 우리나라엔 아마도 드라마 제목으로 유명해진, 그래서 더 널리 알려진 말로 안다. 이 멋진 표현에 끔찍한 우순경 사건이 겹쳐진다니 안타깝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 사건과는 안 어울리는 말이다. 개와 늑대의 시간에선 서정과 불안의 기분이 얹어지는데 우순경 사건에서와 같은 공포는 덜 느껴지니까. 선과 악이라는 프레임을 얹으려 해도 쓸데없이 꺼려지는 느낌은 악이라는 단어조차도 부족해 보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둠이 깊어져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서야 나는 그 기이한 감정이 실은 서글픔이었음을 깨달았다. 불빛은 너무나 취약했다. 들에 핀 꽃처럼 무심한 한 줄기 바람에도 목이 꺾일 수 있었다. 어쩌면 불가해한 어떤 악의(惡意)에 의해서도. 30여 년 전 ‘남한’의 벽촌에서 하룻밤새 동네 사람 쉰여섯을 총으로 쏴 죽인 순경은 불 켜진 집만 노렸다고 했다. 빛이 어둠을 불러들인 셈이다. 그래서였을까. 새까만 지평선에서 외로이 빛나는 불빛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노라면 장전된 총을 들고 빛을 찾아가는 하나의 그림자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림자의 실체는 대체 무엇이었을까? 나는 두려움 속에 자문하기 시작했다. 이 소설의 윤곽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p330


 작가의 말을 통해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알게 되는데 이것을 보면 왜 제목을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 했는지 알듯하다. 「동화처럼」을 읽은 후에 「개와 늑대의 시간」을 읽은 터라 「동화처럼」의 동화같은 연애 이야기와 실화 사건 이야기의 간극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 사람이 하룻밤새 55명을 총기로 난사하는 이 이야기는 그날의 기록이다. 한마을을 휩쓸고 간 총성이 울리기 전부터의 마을 사람들의 삶을 보여주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는지를 사실과 상상을 더해 작가가 재창조하고 있다.

  1982년 4월 26일의 사건 속에서 술만 마시면 난폭해지는 성격이자 평소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던 우순경이 있다. 총기난사 사건이 될 수밖에 없었던 건 범인이 총기를 소지할 수 있었던 경찰이었다는 것이다. 낮잠을 자던 우수경의 가슴에 붙은 파리를 잡겠다고 동거녀가 가슴을 때린 것에서 싸움이 시작되고 이후 무기고를 탈취해 시간 간격을 두어 인근 4개 마을 사람들에게 총과 수류탄을 난사해 사망 56명, 부상 34명을 기록한 것이 이날의 공식적인 사건의 전모다. 우순경은 우체국으로 가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해 외부와 완전히 통신을 차단하게 하고 전깃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난사했는데, 당시 마을은 집장촌으로 대부분 서로가 친척 관계였다. 우순경 역시 마찬가지였다.  

  작가는 기사로는 알 수 없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에 담고 있다. 일상의 삶에 들이닥친 우순경이라는 실루엣에 그날그날의 충실한 하루를 살던 사람들의 생애가 어떻게 소멸되었는지를 세밀하게 보여주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비극의 난사가 더 가속화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사회에 자리잡은 관료주의와 권위주의가 따라온다. 살인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보고 체계를 가지고 따지는가 하면 나 혼자만이 살겠다고 숨어 버리는 책임자들, 반공 이데올로기가 꽉 붙들어 비극을 향해 달려간다. 항상 끔찍한 사건의 뒷배경으로 자리하는 이 모든 구조는 개개인의 삶에서 필요한 순간마다 얼마나 쉽게 내쳐버리는지를 보여준다.

  사건이 발생한 1982년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2년 후, 당시의 정권은 전두환. 사건 후 민심을 두려워 해 언론 보도 역시 통제했다. 범인 27세의 청년 우순경은 청와대 근무 이력이 있는 자로 청와대에서 좌천되어 의령으로 발령받았다. 이런 좌천에도 우순경의 열등감과 불만이 쌓여 있었는데 이러한 사건이 좌천되기 전에 벌어졌다면 하고 생각하는 나를 발견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게 끔찍하다는 것을 알지만 ‘차라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늑대의 시간을 만든 것, 늑대를 활개치게 한 것이 전두환이라는 이름이 만들어낸 그 모든 탐욕과 구조의 한 요소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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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나무


동화처럼, 김경욱 저, 민음사, 2010.


  어른의 마음속엔 늘 내면아이가 있다. 「동화처럼」에서 거듭되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이끌어가는 내면아이의 활약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대처방식이 달라진다. 「동화처럼」은 연애담처럼 성장담처럼 이야기되지만 한편으론 지극한 현실같고 또한편으로는 정말 동화같다. 아무리 연애와 결혼이 우연과 필연의 반복이라 하지만 한여자와 한남자가 만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하고, 어쩌면 세 번의 결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란 현실적이기보다는 동화같지 않은가. 아, 여기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은 각자가 아니라 서로다. 한 사람과 두 번 결혼과 이혼 후 또다시 결혼할 것 같은 관계. 이십대에 시작한 만남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다. 우연과 오해가 만들어낸 필연이란 환상이 실망으로 이어지는 반복을 맞으며 말이다. 

  여기, 장미와 명제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기인 시간의 동화가 시작된다. 동화작가인 장미의 동화는 여러 이야기가 섞인 동화를 만들어낸다. 눈물공주와 개구리가 된 침묵왕자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장미와 명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혼한 여자는 늘 눈물을 흘리고 결혼한 남자는 늘 입을 다물고 산다. 이것이 단지 그들의 관계에서만 형성된 그들의 ‘특징’이라면 이것을 풀어나가는 것도 그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에선 무의식이라는 것이, 영향이라는 것이 있어 이들이 동화속 마녀의 주술로 인해 겪은 끝없는 눈물과 침묵은 그들의 가정환경에서, 부모에게서 영향받는 것이다.


침묵에 길들어진 명제는 말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 그랬다. 인간이 말을 만든 것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라고. 그 말만큼은 그럴듯했다. 명제는 눈물도 믿지 않았다. 눈물은 가증스럽고 요망한 것이었다. 진실이 아니라 감정을 강요하니까. p195


  계모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하는 장미의 엄마나 엄마 없이 자란 아이에게 무뚝뚝하고 말 수 없는 명제의 아버지는 성장한 장미와 명제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원형이다. 장미와 명제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그저, 그들이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거나 뭔가 어긋남이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은 아련한 ‘첫사랑’이 서로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실망감, 다시 만나게 된 첫사랑에 대한 기대와 설렘, 이 모든 상황은 상대에 대한 단점만이 눈에 띄게 만들고 또한 그래서 상대방을 참을 수 없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는 당연, ‘우린 서로 맞지 않아, 안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동화의 해피엔딩은 늘 결혼에서 끝맺는다고, 그 이후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진정한 해피엔딩일지 알 수 없다는 말 역시 농담처럼 이어져 왔다. 그들은 결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실제 결혼 후의 현실이 얼마나 ‘동화’와는 다른지를 알게 된 후 겪는 좌절과 분노 또한 잔혹 동화처럼 이어져 왔다. 왜, 연애와 결혼은 다른지, 결혼을 하고 나면 그토록 사랑하던 이의 모습이 개구리로 변해버리는 지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해결해가는 방법이 서툴거나 ‘나’의 모습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는 말했다. 결혼은 두 사람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네 사람이 모여 사는 거라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각자의 마음 속 아이. 네 개의 다른 별에 살건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거라고. p292


  시간이 또 흐르고 세월이 흐른다고 어른이 되었다 말하지만 어른이란 비단 몸의 성숙과 성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른의 몸속에 어른의 생각과 사고를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더구나 감추어진 저 내면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있다가 힘겨워지고 나도 모르게 답답해지고 무언가를 참을 수 없어 하는 나를 맞닥뜨릴 때. 장미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꾸 개구리 냄새를 맡게 될 때에야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들은 동화를 읽지 않아도 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은 용의 존재가 아니라 용도 죽는다는 사실이라고. 엄마를 계모로 의심한 게 동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동화 속 악독한 계모가 원전에서는 친모였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으니까. 아이들은 동화를 읽지 않아도 안다. 모든 계모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정작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은 친모도 계모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p330~331


  눈물공주와 침묵왕자의 마법은 풀린 것일까. 제 안의 용을 무찔렀다면 마법은 풀린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찾게 되면 나를 이해하고 그 바탕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한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장미는, 깨닫는다. 누가 마법을 걸었는지도 마녀가 누구인지도 알아버린다. 장미와 명제가 깨닫는 시간은 짧지 않다. 정말로 한 세월이 흘러가버릴 정도로 길다. 한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타인을 이해하는 일보다 어렵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제 속에 웅크려 숨어 있는 내면의 아이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또한 행복한 동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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