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무


동화처럼, 김경욱 저, 민음사, 2010.


  어른의 마음속엔 늘 내면아이가 있다. 「동화처럼」에서 거듭되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누구에게나 인생을 이끌어가는 내면아이의 활약에 따라 삶을 바라보는 자세와 문제에 직면했을 때의 대처방식이 달라진다. 「동화처럼」은 연애담처럼 성장담처럼 이야기되지만 한편으론 지극한 현실같고 또한편으로는 정말 동화같다. 아무리 연애와 결혼이 우연과 필연의 반복이라 하지만 한여자와 한남자가 만나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하고, 어쩌면 세 번의 결혼을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란 현실적이기보다는 동화같지 않은가. 아, 여기서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은 각자가 아니라 서로다. 한 사람과 두 번 결혼과 이혼 후 또다시 결혼할 것 같은 관계. 이십대에 시작한 만남은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이어진다. 우연과 오해가 만들어낸 필연이란 환상이 실망으로 이어지는 반복을 맞으며 말이다. 

  여기, 장미와 명제의 결혼과 이혼에 관한 기인 시간의 동화가 시작된다. 동화작가인 장미의 동화는 여러 이야기가 섞인 동화를 만들어낸다. 눈물공주와 개구리가 된 침묵왕자의 이야기는 현실에서 장미와 명제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결혼한 여자는 늘 눈물을 흘리고 결혼한 남자는 늘 입을 다물고 산다. 이것이 단지 그들의 관계에서만 형성된 그들의 ‘특징’이라면 이것을 풀어나가는 것도 그들 서로의 이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의 성장에선 무의식이라는 것이, 영향이라는 것이 있어 이들이 동화속 마녀의 주술로 인해 겪은 끝없는 눈물과 침묵은 그들의 가정환경에서, 부모에게서 영향받는 것이다.


침묵에 길들어진 명제는 말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 그랬다. 인간이 말을 만든 것은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감추기 위해서라고. 그 말만큼은 그럴듯했다. 명제는 눈물도 믿지 않았다. 눈물은 가증스럽고 요망한 것이었다. 진실이 아니라 감정을 강요하니까. p195


  계모라는 생각을 계속 하게 하는 장미의 엄마나 엄마 없이 자란 아이에게 무뚝뚝하고 말 수 없는 명제의 아버지는 성장한 장미와 명제의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원형이다. 장미와 명제가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동안 그들은 그저, 그들이 서로에게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거나 뭔가 어긋남이 있다고만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에게 너무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은 아련한 ‘첫사랑’이 서로가 아니라는 데서 오는 실망감, 다시 만나게 된 첫사랑에 대한 기대와 설렘, 이 모든 상황은 상대에 대한 단점만이 눈에 띄게 만들고 또한 그래서 상대방을 참을 수 없어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결과는 당연, ‘우린 서로 맞지 않아, 안녕’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동화의 해피엔딩은 늘 결혼에서 끝맺는다고, 그 이후의 삶을 보여주지 않는다고 진정한 해피엔딩일지 알 수 없다는 말 역시 농담처럼 이어져 왔다. 그들은 결혼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실제 결혼 후의 현실이 얼마나 ‘동화’와는 다른지를 알게 된 후 겪는 좌절과 분노 또한 잔혹 동화처럼 이어져 왔다. 왜, 연애와 결혼은 다른지, 결혼을 하고 나면 그토록 사랑하던 이의 모습이 개구리로 변해버리는 지 우리는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해결해가는 방법이 서툴거나 ‘나’의 모습을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의사는 말했다. 결혼은 두 사람이 모여 사는 게 아니라 네 사람이 모여 사는 거라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각자의 마음 속 아이. 네 개의 다른 별에 살건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 사는 거라고. p292


  시간이 또 흐르고 세월이 흐른다고 어른이 되었다 말하지만 어른이란 비단 몸의 성숙과 성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어른의 몸속에 어른의 생각과 사고를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찰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더구나 감추어진 저 내면의 모습을 끄집어내는 일은 더더욱 쉽지 않다.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기도 하고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그저, 그렇게 있다가 힘겨워지고 나도 모르게 답답해지고 무언가를 참을 수 없어 하는 나를 맞닥뜨릴 때. 장미처럼 자신도 모르게 자꾸 개구리 냄새를 맡게 될 때에야 ‘나’를 들여다보게 된다.


누군가 그랬다. 아이들은 동화를 읽지 않아도 용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고.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은 용의 존재가 아니라 용도 죽는다는 사실이라고. 엄마를 계모로 의심한 게 동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동화 속 악독한 계모가 원전에서는 친모였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알았으니까. 아이들은 동화를 읽지 않아도 안다. 모든 계모가 친절하지 않다는 것을. 정작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알게 되는 것은 친모도 계모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다. p330~331


  눈물공주와 침묵왕자의 마법은 풀린 것일까. 제 안의 용을 무찔렀다면 마법은 풀린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나의 정체성을 찾게 되면 나를 이해하고 그 바탕으로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는 한걸음으로 나아가게 된다. 장미는, 깨닫는다. 누가 마법을 걸었는지도 마녀가 누구인지도 알아버린다. 장미와 명제가 깨닫는 시간은 짧지 않다. 정말로 한 세월이 흘러가버릴 정도로 길다. 한사람이 성장한다는 것은 자신을 이해하는 일은 타인을 이해하는 일보다 어렵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제 속에 웅크려 숨어 있는 내면의 아이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라도 만날 수 있다면 그래서 그또한 행복한 동화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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