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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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힘이 강하다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문학동네, 2017.


  남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운명과 여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분노로 나뉘어진 이야기는 분노의 힘이 강했다. 쉽고 빨리 읽히긴 했지만 운명을 읽기까지는 단조롭고 조금 지루한 기분이 있었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야 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케케묵은 방식이 지긋지긋했다. 닳고닳은 길을 따라가는 내러티브, 익숙한 플롯의 덤불, 비대한 사회소설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더 복잡하게 얽혀 있고 더 날카로운 것, 폭탄이 터지는 뭔가였다.


  그랬다. 마틸드가 느끼는 것처럼 운명엔 ‘날카로운 것, 폭탄이 터지는 뭔가’가 없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른다. 남녀가 만나 첫눈에 반해 사랑하고 결혼하고 남자에게 여자는 이상적인 아내이자 환상의 뮤즈인 이야기. 운명을 읽을 때만 해도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지루했다. 타인의 사랑이야기, 결혼이야기는 사실 폭탄이 터져야 읽을 맛이 난다. 타인의 불행에서 즐거움을 찾다니, 너무 꼬였나.

  결혼한 이들의 운명과 사랑에 관한, 부부의 진실함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운명과 분노를 표현하는데 너무 모자라다. 물론 알랭 드 보통의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언뜻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부분에 마음이 갔다. 모두 분노의 힘이다.

  운명이 한남자의 일생을 보여주며 오로지 이상에 기대어 환상과 낭만화된 이야기라면 분노는 한여자의 일생을 보여주며 철저한 계획과 의지로 생을 살아가는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날 때부터 가진 그 부유함에 휩싸여 세상에 대한 어떤 걱정도 없이 살아간다. 미국의 특성이라고 하기에도 그런, 온갖 종류의 범죄들을 일삼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랜슬럿, 로토라 불리는 남자는 현실감각은 무시한 채 마냥 어린 아이의 행동으로 낭만과 환상에 더 집중한다. 그리하여 첫눈에 반해 처음 본 여자에게 청혼하거나 수입이 없는 중에도 친구들을 불러 파티하는 일에 대해서도 괘념치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준 아내 마틸드의 격려에 힘입어 천재적인 극작가의 능력을 발휘하며 늘 낙천적으로 생을 살고, 늘 아내 마틸드의 모든 것을 이상화한 남자 로토. 그러나 그는 결혼 전 아내의 남자관계에 대해 치를 떨며 그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거짓말이라 몰아가며 그동안의 모든 결혼생활과 이상화한 아내의 모든 것을 일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떤 행동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행동마저 연극적인 배우이자 작가, 로토의 생은 그 외형을 보았을 때 내면을 보았을 때도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다만 그 자신이 마지막에 알게 된 마틸드의 남자 얘기에 모든 것이 거짓의 연극으로 그 자신이 만들어 버릴 뿐.

  다 이해해, 그러니 결혼 전 남자관계를 얘기해봐 해놓고 찌질하게 몰아붙이는 남편들처럼 제가 한 모든 난봉의 행적들은 생각지 않는, 처녀성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기성의 극을 보여주었다.

  마틸드에게 연민하게 되는 것은 그 삶이 익숙한 플롯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진 자의 난봉질은 미화되고 삶을 위해 단한번 ‘비즈니스’적 관계를 맺은 마틸드의 삶은 ‘창녀’라는 비난을 받는다. 운명에서 남편 로토가 묘사했던 이상적인 여인, 마틸드의 모습은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마틸드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매춘부인 할머니에게서 자라고 또다시 범죄자인 삼촌의 손에 길러지며 스스로 생존을 배워야 했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기억이, 감정이 삶을 지배하며 살기 위해 삶을 철저히 계획하는 마틸드의 모습은 무섭기도 하지만 결국엔 이해와 연민을 향해 나아간다. 강에서 수영하다 허벅지에 붙은 거머리 한 마리를 친구인양 여기다 자신의 발에 박혀 죽은 거머리 때문에 우는 한 아이에게 어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 관점의 차이.”

  “비극, 희극. 그것은 오로지 관점의 문제다.”

  작가가 운명과 분노를 관통해 거듭하는 말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관점의 차이다.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가 운명을, 분노를 결정지었다.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도 독자의 관점에 달렸다.

  이 소설은 특히 운명에서 더 그렇지만 낭만적이다. 고전적이다. 그리스로마신화와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거듭 인용되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보이는 코러스가 사용된다. 파우스트의 느낌처럼 웅장한 느낌도 든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서사의 힘이 이끈다. 각각의 생애 대한 로토와 마틸드의 생각과 행동들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주는 운명과 분노는 결혼생활에 관한 운명을 이야기하기도 하겠지만,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도 내면아이가 존재한다. 한 아이의 성장에 미치는 부모님과의 관계, 그리고 가정배경들.

  돈많은 아들이 가진 것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는 어머니의 노력은 눈물겹다. 그리고 그 도전에 응한 마틸드의 대응도 놀랍다. 인상적인 것은, 마틸드에 대한 로토의 이모 샐리와 로토의 동생 레이첼의 태도다.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주욱 마틸드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심의 행동이었고 그것은 마틸드에 대한 뒷조사를 통해 마틸드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유지되었다. 이들의 연대가 새롭게 느껴졌다. 

   

그녀의 삶이 크게 베여나간 자리들은 남편에게 흰 공간으로 남았다. 그녀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말한 것과 산뜻한 균형을 이루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실이 아닌 말과 진실이 아닌 침묵이 있었고, 마틸드는 절대 말하지 않음으로써 로토에게 거짓말을 한 것뿐이었다.


  진실과 거짓말의 차이가 무엇일까. 결혼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굳이 말하지 않을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모두 관점의 차이. 그리고 이것은 각자 관계맺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같은 논리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영원히 관점의 차이. 내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가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 생애에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관점을 두고 있는 걸까. 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무엇일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다른 이들의 삶은 파편들처럼 한데 모아진다. 하나의 분리된 이야기를 비추던 조명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던 또하나의 이야기를 밝힐 수 있다. 뇌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피조물이다. 파편들은 제 힘으로 한데 모여 전체를 만든다.


  마틸드는 운명처럼 휩쓸린 기억 이후에는 모두 자신의 의지의 실행이었다. 삶의 매순간이 분노였으며 로토가 죽은 뒤 더욱 극에 달했던 마틸드는 “늘 주먼 쥔 손이었지만 로토에게만 편 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틸드의 인생은 곳곳에 너무 반전들이 많아서 그 순간순간마다 안타까왔다.  

  최근 우리 문학계는 중경량의 소설 출간이 더 많고 판매율도 좋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의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긴 호흡의 장편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아니, 그쪽 출판계를 잘 모르니 정확하진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 출판계에 번역되는 책들만 보면 미국 서점계를 휩쓰는 소설들은 모두 매우 긴 소설들이다. 보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런 것은 독자의 요구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출판계의 마케팅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때론 이런 호흡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다른 나라의 출판시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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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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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포의 삶


우리에겐 새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문학동네, 2016-02-01.


  소설 속 이야기는 1960~70년대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전히 아프리카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장기독재로 인해 꿈꾸기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나라가 있다. 짐바브웨가 그렇다. 1980년에야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짐바브웨는 앞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나라들이 겪었던 실상을 고스란히 따른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장기집권하고 있는 독재자로 인해 짐바브웨는 피폐해져 가고 전세계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짐바브웨 사람들의 희망은, 꿈은 무엇일까. 짐바브웨 출신 미국 이민자인 작가 노바이올렛 불라와요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녹여 짐바브웨의 현실과 꿈, 희망들을 써내려갔다. 식민지배 전후의 상황이 담긴 소설들은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읽어본 책을 기준으로 한 판단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반적으로 그렇다. 아프리카든 인도이든 그것은 식민 전후의 상황 자체의 유사함에서 기인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가 같은 식민지배 후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도 차별적일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달링의 짐바브웨에서 보낸 유년기 삶을 후반부는 미국에서 보낸 청소년기 삶을 펼쳐보인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짐바브웨의 절망적인 상황과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 그리고 희망과 절망이 아이다운 솔직함으로 서술된다. 어쩌면 의뭉스러울 정도로 날카롭게 상황을 전달하며 이야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뜨끔뜨끔하다. 불편함도 지속된다. 아이가 느끼는 만큼의 슬픔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치포. 치포. 달링.

  패러다이스에는 달링이 산다. 치포가 산다. 배스터드, 갓노우즈, 스브호, 스티나도 산다. 뜻도 모르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된 여섯 아이들은 맨발로 달린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구아바를 훔치고 신발이 없어 맨발로 흙길을 달리고 엉덩이가 보이는 헤진 옷을 입으며 아이들은 달린다. 배가 불러 자꾸만 뒤처지는 치포 때문에 멈춰지지만 그래도 쉬어 가며 열한 살 치포와 함께 달린다. 치포의 뱃속에 아기를 넣은 것이 누구인지, 어떻게 넣었는지, 언제 나오는지 궁금해 하며 아이들은 달리고, 나무에 목을 맨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고 놀라지만 이내 돌아와 여자의 구두를 팔아 빵을 사 먹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 웃고 웃으며 달린다.

  학교도 없고 선생님도 없고 경찰들이 불도저로 집을 밀어 양철집에서 사는 아이들이 즐겨 하는 나라놀이에서 선호하는 나라가 미국, 영국, 캐나다인 것처럼 달링은 미국에서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곳에 가면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게 풍요로울 테니까. 어른들도 희망한다. 변화를 꿈꾸며 투표를 한다. 독립한 나라 짐바브웨에서 잘 살기를 꿈꾸지만 여전히 변화없는 독재 정권의 집권. 희망은 절망이 되고 가난은 가난만을 끌어 들였다. 빈부 격차에 폭동이 일어나고 일을 찾아 떠난 이들은 병만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달링의 희망은 이루어졌다. 친구들과 헤어져 미국으로 간 달링은 배부르게 먹고, 학교도 다니고, 쇼핑도 즐기는 생활을 한다. 언어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문득문득 짐바브웨가 친구들이 그립다. 그러나 방문비자로 미국으로 들어온 달링은 기간이 만료되어 불법체류자, 짐바브웨로 가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 밤낮없이 일하는 포스털리나 이모에게 짐바브웨 식구들은 늘 돈을 부치라는 요구만 한다. 달링도 이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짐바브웨에 돈을 보내야 하지만, 어릴 적 꿈꾸었던 동경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뉴스 속 짐바브웨 상황을 보면 안타깝지만 자신은 짐바브웨의 전통도 잊어가고 말도 잊어가고 그러나 미국에선 완전한 미국인도 아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달링은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묘사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몇장면이 있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몇 번을 보아도 가장 마음이 아린 장면은 아이들이 ‘치포의 배를 없애주려’는 장면일 것이다. 아이를 낳다 죽기도 한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옷걸이를 이용해 어떡하든 치포의 배를 없애기 위해 이리저리 방법을 써 보지만 실패하고 어른 마더러브에게 들킨다. 마더러브에게 혼날까 걱정하는 아이들을 끌어안는 아이들과 당황하는 아이들, 그리고 치포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나비의 모습은 처연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전 단지―우린 치포의 배를 없애주려 한 것뿐이에요. 포기브너스가 은트사로를 내려다보며 말하고는 울음을 터트린다. 치포는 아예 대놓고 엉엉 운다.

마더러브는 고개를 젓다가, 포대자루처럼 털썩 주저앉는다. 화가 난 게 아니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우릴 때리지도, 귀를 잡아당기지도 않는다. 너희들 이제 죽었다고, 엄마들한테 이를 거라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마더러브의 얼굴을 본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섬뜩한 얼굴이다. 그 낯선 얼굴엔 고통의 표정, 누군가 죽었을 때 어른들이 짓는 표정이 서려 있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그녀는 마치 안에서 불길이라도 일어난 듯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더니 마더러브가 팔을 뻗어 치포를 안는다. 우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가만히 지켜본다. 어른이 울 땐 왜 우느냐고 물을 수도 없고, 뚝 그치라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른이 울 땐 할말이 없다. 치포가 울음을 그치고 마더러브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치포의 두 팔로 허리가 다 둘러지지도 않는데. 행운의 보랏빛 나비가 치포의 머리에 내려앉는다. 나비가 날아가자 포기브너스가 뒤쫓아간다. 스브호와 내가 포기브너스를 따라 달려가고,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나비를 쫓으며 행운을 잡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절망의 나라에서 치포는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떠나간 친구 달링을 그리워하며 아이에게 달링이란 이름을 붙인다. 치포의 옆엔, 또다른 달링이 있는 것이다. 열한 살의 치포. 그때 임신했으니 열두 살 즈음 달링의 엄마가 되었을 지도.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다른 나라로 떠나고 짐바브웨에는 치포만이 남았다. 달링은 혼자 남은 치포가 안됐고 짐바브웨의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우리’ 나라의 상황에 대해 가슴아파하지만 치포는 차갑게 말한다.


그 고통을 네가 겪는 건 아니잖아. BBC를 보면서 상황을 이해한다고 생각해? 아니, 친구야. 넌 몰라. 고통의 질감을 아는 건 상처뿐이야. 여기 남아서 그 고통을 실제로 느끼는 사람은 우리야. 그 고통에 대해서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뿐이야.


  치포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짐바브웨에서 끝까지 남아 있던 건, 치포의 의지였을까. 그곳에서 고통을 겪으며 상처를 쌓으며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치포. 달링이, 제 아이 달링이 치포를 짐바브웨로부터 떠나는 데 ‘방해’가 되었을까. 머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까.

  피폐한 나라에서 살다가 풍요의 땅 미국에서 이민자의 정체성을 겪는 달링의 안타까움도 절절했지만, 어느덧 이 절규의 끝에 치포의 삶이 궁금해졌다. 치포의 삶은 고스란히 짐바브웨 아이들이 겪는 삶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곳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벗어나지 않은 채  “조국이면 떠나지 말고 끝까지 남아 사랑했어야 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잡으면서 살았어야 한다”고 외치는 치포. 그렇다면 치포는 제 스스로 짐바브웨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과 절망의 상처를 짊어진 채, 끝까지 짐바브웨의 절망을, 고통을 바로잡으며 살아가려 노력하는 치포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치포의 머리 위에 행운의 보랏빛 나비들이 얼른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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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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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고발자


굿바이, 콜럼버스. 필립 로스, 정영목 옮김, 문학동네, 2014.8.29.


  1933년생인 필립 로스는 많은 책을 썼다. 가만 보니 핍립 로스의 소설을 제법 읽었다. 어째 필립 로스가 많은 책을 쓴 것보다 그가 쓴 책들을 거의 다 읽었다는 사실이 놀랍게 느껴진다. 그만큼 필립 로스의 책을 좋아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좋아함의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확실한 건 필립 로스의 첫 번째 작품이자 청년기 작품인「굿바이, 콜럼버스」를 먼저 읽었더라면 그 뒤로 필립 로스의 책을 읽는 일은 더디게 이루어졌을 것이다.

  필립 로스의 문장과 이야기하는 방식과 이야기에서 받은 깊은 인상은 오랜 세월 다져진 필립 로스에게서 나온 진중함, 연륜에 있었나보다. 글이, 이야기가 몰입하게 하는 힘이 있어 반복된 주제의식에도 때론 비슷한 상황 설정에도 필립 로스의 책속으로 빨려가게 했다. 긴 호홉의 필립 로스의 글에 매료된 상황에선 청년기, 스물 여섯의 필립 로스의 작품은 재기발랄한 아이러니를 주긴 했지만 장년기 이후의 느낌보다는 확실히 가볍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이후 필립 로스에게 반복되어 나타난 유대인 문제에 관한 주제를 너무나 명확하게, 딱,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필립 로스의 소설 세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끔 되었다. 여전히 그의 글 속 등장인물들은 작가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듯하고.

  「굿바이, 콜럼버스」는 중편이고 이 책에는 다섯 편의 중단편이 더 실려 있다. 일평생 필립 로스는 유대인들의 비난을 받았는데 그의 작품의 주제가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풍자와 신랄한 비판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자신이 유대인이 아니었다면 더한 공격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유대인이기에 어쩌면 그 자신에 대한 정체성이, 자신을 규정하는 문화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글로 표현된 것이라 한다면 이 내부고발자적 시선은 그에겐 고통을 깊이 담은 고통의 글쓰기였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필립 로스의 주제의식에 힘입어 이 중단편 속에서 「신앙의 수호자」와 「유대인의 개종」이 그토록 눈에 띄었는지도 모른다. 담담히 읽은 다른 작품에 비해 「신앙의 수호자」에서는 나도 모르게 감정을 노출하기까지 했다.    

 「굿바이, 콜럼버스」는 필립 로스의 소설에서 더러 봐온 이야기였다. 한창의 젊은 남녀의 사랑이야기, 라고 해야 하나. 그리고 사랑하지만 유대교 교리에 따른 갈등과 계층의 차이를 느끼게 되는 그런. 게다가 잘 사는 쪽은 늘 여자이고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화자는 남자인. 그것은 청춘이 갖는 불안함인 걸까, 그들 세계가 주는 어쨌든 여기 등장인물들이 낯설지 않은데 이들이 자라, 결국 필립 로스의 다른 소설 속에 등장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오지가 알고 싶은 것은 늘 다른 것이었다. 오지가 처음에 알고 싶어했던 것은 「독립선언서」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나오는데 빈더 랍비는 어떻게 유대인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빈더 랍비는 정치적 평등과 영적 정통성의 차이를 설명하려 했지만, 오지는 자기가 알고 싶은 것은 다른 것이라고 계속 우겼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왔다.


 「유대인의 개종」은 위와 같이 오스카 프리드먼의 궁금증에서 시작한다. 또한 유대인이 오직 유대인의 불행만을 슬퍼하는 것, 예수의 신성에 대해서도 궁금한 이 소년에게 랍비도 엄마도 아이의 뺨을 때리는 것으로 답한다. 이에 지붕으로 올라가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 “약속해주세요. 하느님 문제로 누굴 때리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약속해주세요.”라는 아이의 외침이 안쓰럽게 귓가에 남겨져 있다.

 「신앙의 수호자」자야말로 유대인에 관한 가장 풍자적이고 또한 비판적인 단편이 아니었나 싶다. 등장인물인 셸던의 행동과 말로 인해 몇 번을 가슴을 쳐야 했다. 답답함으로. 오직 유대인으로 살고자 하는 이 어린 장병에게서 시오니즘의 절정을 본 기분이었다. 이 위선적인 신봉자의 행태는 그곳이 군대였기에 더욱 더 정점의 감정을 느끼게끔 했다. 생각거리를 주는 것만큼이나 셸던의 철없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행태에 무조건적인 분노가 솟았다는 점에서 난 종교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구나를 느낌과 동시에 막스의 외할머니과는 아니구나를 함께 느꼈다. 그러니까 셸던의 행태에 대해 자비가 정의보다 우선한다라는 그런 생각을 가질 수 없었다. 군대에서 유대인의 전통과 교리를 들먹이며 유대인이 먹어야 할 음식을 요구하고 유대인의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며 외박을 끊어 중국집 요리를 즐기는, 자신의 인맥을 동원하여 부대 배치를 바꾸는, 그리고 그런 모든 일들이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라고 외치는, 그리고 그 행동에 아무런 거리낌없는 이 셸던에게서 많은 얼굴이 겹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엡스타인」의 결말은 웃프다. 글쎄, “사람들이 자기 걸 빼앗아 가기 시작하면, 누구나 손을 뻗게 돼. 움켜쥐게 돼…… 어쩌면 돼지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라고 말하는 루 엡스타인은 무엇을 빼앗기고 있다고 느꼈을까. 열심히 일했고 사업에 성공했지만 가업을 이을 아들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고 딸은 사회주의 운동이나 하며 말마나 ‘자본가’ 아버지를 비난하고 조카 녀석과 딸은 젊음의 몸매로 각자의 파트너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사랑에 몰두하는데 자신의 아내는 아름다움이 사라진 지 오래. 이웃집 여인에게서 품은 욕망이 자신이 움켜쥐고 싶은 것이었을까.

 「노래로 그 사람을 판단할 수는 없다」. 그렇다. 1950년대의 미국. 인간은 얼마나 개별적인가. 그러나 많은 이들이 누군가를 판별하는데 그렇게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단편적인 것들로만 판단하며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다 예단해 버린다. 이런 일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알면서도.

 「광신자 엘리」에서는 님비 현상을 느꼈다. 한뿌리인 듯한데, 이 종교의 갈라짐이 인간의 유대를 얼마나 막고 있는가 새삼 느껴진다. 공동체라는 것은 더불어 살아감이 아니라 그들끼리의 삶의 구축인듯하다. 공동체, 공동체 하면서도 갈등하는 집단 사이에서 미친듯한 이 엘리의 절규가 참 안쓰러웠다.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 속에서 인간의 이기심을 보게 된 것인가 싶다. 소설이 작가의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필립 로스가 얼마만큼의 갈등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글로 자신의 내면을 표출할 수 있었기에 후련한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만큼의 힘겨움도. 이러한 위선이나 허위들을 유대인이 아닌 이가 지속적으로 제기했더라면 그것은 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배타주의적인 사고 등등의 온갖 비난을 들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을 작품으로 보지 않는다거나 그 문제의식을 외면하는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문학성과 함께 이러한 ‘문제’들이 있음을 깊이 있는 성찰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깨닫고, 글로 써준 필립 로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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챈들리스크


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 외 8편, 레이먼드 챈들러, 현대문학, 2016-04-08.


  새정부 들어 공인탐정제에 대한 논의가 있다. 탐정은 어린 시절부터 읽은 셜록 홈스 덕분에 익숙하고 열광적인 직업으로 여겨진다. 아니, 직업으로서의 탐정을 생각해보진 않았기에 왠지 로망이 현실가 맞물려 어떤 형태가 될지 궁금해지긴 한다. 실제 존재한다면, 실생활에서 적용한다고 생각하면 소설 속에서 보던 그 낭만적인 느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탐정’의 형태가 흥신소의 고급 버전이니까. 흥신소가 갖는 그 불법적이고 불쾌하고 음침한 이미지가 ‘탐정’에 드리워질까 염려되는 점이 있다. 그래도 나날이 범죄가 증가하고 CCTV 보관기일의 한계로 단서를 놓치는 경우도 많으니 이 제도가 도입이 된다면, 어떤 형태로든 범죄수사에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물론 단점도 있을 테고 그 장단점이 잘 맞물려 해결되기를 희망할 뿐이다.

  범죄가 증가하는 것은 싫지만 범인을 잡고 사건의 해결하는 과정을 들여다보는 것은 분명 짜릿함 쾌감이 있다. 탐정소설,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이 인기있는 이유일 것이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이 탐정소설을 ‘문학’으로 이끈 작가로 유명하다. 또한 헤밍웨이체로 유명한 ‘하드보일드’를 장르화시킨 장본인이자 여타의 작가들-무라카미 하루키, 로스 맥도널드, 마이클 코넬리, 하라 료-이 그의 영향을 받았음을 얘기하고 있다. 1930~40년대의 미국의 분위기를 흠씬 드러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영화계에서도 크게 호응해서 그의 작품은 영화화된 것이 많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이 바로 탐정 필립 말로이다. 유명한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다.

  “하드보일드.” 이 말의 본뜻은 삶은 계란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푸욱 삶은 계란이다. 반숙이 아닌 완숙으로 팍팍하고 물기 없는 건조한 계란을 가리키는데 이 말이 소설과 영화로 넘어가면서 새로운 의미가 더해졌다. 바로 건조한 문체다. 수식이나 감정은 배제한 사실주의적인 표현을 쓰는 걸 가리킨다. 폭력의 잔인성 때문일까, 폭력적이니 주제에 주로 사용되어 오히려 더 공포감을 배가시키기도 한다. 당연, 탐정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고 레이먼드 챈들러가 이런 스타일로 탐정소설을 가볍게 읽고 넘기는 글이 아니라, 문학적인 경지로까지 이끌었다고.

  작가의 생애 또한 흥미롭다. 1932년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고 대중소설 잡지를 읽으며 지내다가 소설을 쓰고 마흔이 넘어서 작가로 데뷔한다. 하지만 대공황 이전에도 그는 특별히 ‘일’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진 않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지만 6개월만에 그만두고 몇 번의 일자리를 얻었지만 그때마도 불성실한 근무태도를 보였다. 전쟁에 참전하였고 18세 연상의 여인과 연애를 했고 어머니의 반대로 어머니의 사망 후에 결혼했다. 다른 여성들과의 염문 이야기도 흘러나오는데 아내의 죽음 이후에는 과음과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고 건강악화로 입퇴원을 반복했다. 그가 사망하던 해엔 비서에게 병원에서 청혼했다고 한다. 70평생의 그의 삶을 보건대, 어쨌든 자유로운 영혼이었다고 느껴진다.

  고전적인 느낌이 드는 그의 소설은 탐정소설임에도 그 건조한 문체에도 불구하고 낭만성이 풍긴다. 시대적인 분위기가 가미되어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확실히 ‘흥신소’에 일을 맡긴 것이 아니라 고급 탐정에게 일을 맡긴 기분이 든다. 잔인하고 악랄한 느낌보다 쓸쓸한 느낌이 먼저 다가온다. 어쩌면  사건보다 인물, 탐정 필립 말로에 중점이 두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날 밤 사막바람이 불었다. 고온 건조한 샌타애나의 전형적인 열풍이었다. 이 바람이 산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머리카락이 곱슬곱슬 말리고 피부가 가려워지고 괜히 초조해진다. 그런 밤이면 어느 술판이든 한바탕 싸움으로 끝난다. 유순하고 가냘픈 아낙네들은 식칼의 날을 만지며 남편의 목을 노려본다. 어떤 일이든 가능하다. 칵테일 바에서 거나하게 맥주를 걸칠 수도 있다.

  

  사건이 있었고 문제가 발생했고 그것을 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사건’보다 저런 묘사가 기억에 남는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이야기, 스토리를 이해하며 쫓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표현방식에도 눈길을 주고 있다는 걸 다시금 알았다. ‘챈들리스크Chandleresque’라 불리는 작가의 문체가 갖는 힘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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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는 중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 은유, 서해문집, 2016.12.26.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는 제목을 보면서 감정의 분출로 인해 그 순간의 속시끄러움이 조금은 해소가 되었다는 그런 의미를 생각했다. 싸웠다는 자체로 뒤늦은 후회가 밀려오긴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카타르시스가 작용할 테니. 물론, 일방적으로 깨지는 싸움이라면, 아무런 말도 못하는 거라면 전혀 카타르시스를 느끼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그렇기라도 하면 좋겠다는 생각과 함께, 제목이 좋다 생각했다.

  작가는 필명만큼이나 은유를 잘 다루는 것 같다. 수유너머에서 활동하고 있느니만큼 “수유너머향”이 글에도 풍긴다. 철학과 인문학의 접합, 니체향이 좀더 더해지고 일상의 행위와 사유에서 존재를 생각하는 것. 아무튼 글쓰는 일이 힘들다 하지만 삶의 희로애락을 다루는 방식이 글쓰기인 작가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사는 일이 힘에 부치고 싱숭생숭이 극에 달하는 날이면 글을 썼다. 오직 노릇과 역할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 성과와 목표로 한 생에를 평가하는 가부장제 언어로는 나를 온전히 설명할 수 없었다. 몸에 돌아다니는 말들을 어디다 꺼내놓고 싶었다. 꺼내놓고 싶은 만큼 꺼내놓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고유한 슬픔일지라도 언어화하는 순간 구차한 슬픔으로 일반화되는 게 싫었다. 우리가 입을 다무는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말할 수 있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던가. 말하고 싶음과 말할 수 없음, 말의 욕망과 말의 장애가 충돌하던 어느 봄날, 나는 이미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여자, 존재, 사랑, 일. 책속에서 다루는 네 가지 주제다.

  이 땅에서 여성이란 존재로 살아가는 일이란 특히 피곤한 일이라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언제나 그렇게 되어 버린다. 본질적인 자아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지만 여성이란 명명에 타인의 시선과 제도와 관습으로 인해 전진하지 못하는 일들이 존재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땅의 여성들의 이야기는 표현의 방식이 다를 뿐 같다. 여자라서 엄마의 삶으로 더 살아가야 하는 것, 육아와 가사와 삶, 직장일을 공존시키며 행복하고 평화로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의 힘겨움, 남편과 아이에 종속된 삶의 존재로서의 ‘나’, 사랑하는 일과 노동하는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한 생각들.

 수많은 개인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그들의 경험과 거기에서 느낀 감정은 너무나 같다. 그러니 특별히 공감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단지 너무 같은 이야기의 돌림이라 지겨울 때도 있다. 그럼에도 왜 여성들의 글쓰기를, 페미니즘이란 책을 계속 읽고 읽는 것일까. 명백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데도 왜.

  말하는 사람이 다르니까. ‘누가’ 이야기하느냐라는 점에서 접근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누구나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 각각에 대한 공감과 위로를 건네기 위함이 아닐까. 같은 이야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그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각각의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너의 생각이 이렇구나, 너의 경험에 네가 힘들었구나, 잘 버티어 주었다. 앞으로도 잘 버티어 나가자, 라고 말하기 위한 것 아닐까.

  

어디가 아픈지만 정확히 알아도 한결 수월한 게 삶이라는 것을,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 게 낫다는 것을, 시는 귀띔해주었다. “인간은 자기가 어떻게 절망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면 그 절망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벤야민의 말을 나는 시를 통해 이해했다.


  매번 이런 책을 찾아서 아픔의 지점을 확인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한결 수월하게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자 발버둥. 이러한 책들이 많아진다는 건, 아픈 이들이 많다는 얘기인가. 발버둥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이야기인가. 사는 일에 부칠 때마다 글쓰기라도 된다면 좋으련만. 글쓰기로도 무엇으로도 위로되지 않는 시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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