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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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힘이 강하다


운명과 분노, 로런 그로프, 문학동네, 2017.


  남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운명과 여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분노로 나뉘어진 이야기는 분노의 힘이 강했다. 쉽고 빨리 읽히긴 했지만 운명을 읽기까지는 단조롭고 조금 지루한 기분이 있었다. 그러니, 끝까지 읽어야 한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케케묵은 방식이 지긋지긋했다. 닳고닳은 길을 따라가는 내러티브, 익숙한 플롯의 덤불, 비대한 사회소설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더 복잡하게 얽혀 있고 더 날카로운 것, 폭탄이 터지는 뭔가였다.


  그랬다. 마틸드가 느끼는 것처럼 운명엔 ‘날카로운 것, 폭탄이 터지는 뭔가’가 없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스타일을 따른다. 남녀가 만나 첫눈에 반해 사랑하고 결혼하고 남자에게 여자는 이상적인 아내이자 환상의 뮤즈인 이야기. 운명을 읽을 때만 해도 너무나 이상적이어서 지루했다. 타인의 사랑이야기, 결혼이야기는 사실 폭탄이 터져야 읽을 맛이 난다. 타인의 불행에서 즐거움을 찾다니, 너무 꼬였나.

  결혼한 이들의 운명과 사랑에 관한, 부부의 진실함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운명과 분노를 표현하는데 너무 모자라다. 물론 알랭 드 보통의 <나는 너를 왜 사랑하는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 언뜻 떠오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부분에 마음이 갔다. 모두 분노의 힘이다.

  운명이 한남자의 일생을 보여주며 오로지 이상에 기대어 환상과 낭만화된 이야기라면 분노는 한여자의 일생을 보여주며 철저한 계획과 의지로 생을 살아가는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남자는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날 때부터 가진 그 부유함에 휩싸여 세상에 대한 어떤 걱정도 없이 살아간다. 미국의 특성이라고 하기에도 그런, 온갖 종류의 범죄들을 일삼으며 청소년기를 보낸 랜슬럿, 로토라 불리는 남자는 현실감각은 무시한 채 마냥 어린 아이의 행동으로 낭만과 환상에 더 집중한다. 그리하여 첫눈에 반해 처음 본 여자에게 청혼하거나 수입이 없는 중에도 친구들을 불러 파티하는 일에 대해서도 괘념치 않는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준 아내 마틸드의 격려에 힘입어 천재적인 극작가의 능력을 발휘하며 늘 낙천적으로 생을 살고, 늘 아내 마틸드의 모든 것을 이상화한 남자 로토. 그러나 그는 결혼 전 아내의 남자관계에 대해 치를 떨며 그것을 참아내지 못한다. 거짓말이라 몰아가며 그동안의 모든 결혼생활과 이상화한 아내의 모든 것을 일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떤 행동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고 행동마저 연극적인 배우이자 작가, 로토의 생은 그 외형을 보았을 때 내면을 보았을 때도 충분히 성공적이었다. 다만 그 자신이 마지막에 알게 된 마틸드의 남자 얘기에 모든 것이 거짓의 연극으로 그 자신이 만들어 버릴 뿐.

  다 이해해, 그러니 결혼 전 남자관계를 얘기해봐 해놓고 찌질하게 몰아붙이는 남편들처럼 제가 한 모든 난봉의 행적들은 생각지 않는, 처녀성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기성의 극을 보여주었다.

  마틸드에게 연민하게 되는 것은 그 삶이 익숙한 플롯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진 자의 난봉질은 미화되고 삶을 위해 단한번 ‘비즈니스’적 관계를 맺은 마틸드의 삶은 ‘창녀’라는 비난을 받는다. 운명에서 남편 로토가 묘사했던 이상적인 여인, 마틸드의 모습은  부단한 노력의 결과였다. 마틸드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매춘부인 할머니에게서 자라고 또다시 범죄자인 삼촌의 손에 길러지며 스스로 생존을 배워야 했다.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기억이, 감정이 삶을 지배하며 살기 위해 삶을 철저히 계획하는 마틸드의 모습은 무섭기도 하지만 결국엔 이해와 연민을 향해 나아간다. 강에서 수영하다 허벅지에 붙은 거머리 한 마리를 친구인양 여기다 자신의 발에 박혀 죽은 거머리 때문에 우는 한 아이에게 어찌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가.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 관점의 차이.”

  “비극, 희극. 그것은 오로지 관점의 문제다.”

  작가가 운명과 분노를 관통해 거듭하는 말이다. 그렇다. 모든 것은 관점의 차이다.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가 운명을, 분노를 결정지었다.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보느냐도 독자의 관점에 달렸다.

  이 소설은 특히 운명에서 더 그렇지만 낭만적이다. 고전적이다. 그리스로마신화와 셰익스피어의 대사가 거듭 인용되고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보이는 코러스가 사용된다. 파우스트의 느낌처럼 웅장한 느낌도 든다.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서사의 힘이 이끈다. 각각의 생애 대한 로토와 마틸드의 생각과 행동들이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주는 운명과 분노는 결혼생활에 관한 운명을 이야기하기도 하겠지만, 한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도 내면아이가 존재한다. 한 아이의 성장에 미치는 부모님과의 관계, 그리고 가정배경들.

  돈많은 아들이 가진 것 없는 여자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는 어머니의 노력은 눈물겹다. 그리고 그 도전에 응한 마틸드의 대응도 놀랍다. 인상적인 것은, 마틸드에 대한 로토의 이모 샐리와 로토의 동생 레이첼의 태도다. 이 두 사람은 처음부터 주욱 마틸드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진심의 행동이었고 그것은 마틸드에 대한 뒷조사를 통해 마틸드에 대해 알고 있음에도 유지되었다. 이들의 연대가 새롭게 느껴졌다. 

   

그녀의 삶이 크게 베여나간 자리들은 남편에게 흰 공간으로 남았다. 그녀가 그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녀가 말한 것과 산뜻한 균형을 이루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진실이 아닌 말과 진실이 아닌 침묵이 있었고, 마틸드는 절대 말하지 않음으로써 로토에게 거짓말을 한 것뿐이었다.


  진실과 거짓말의 차이가 무엇일까. 결혼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지게 되는 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굳이 말하지 않을 것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모두 관점의 차이. 그리고 이것은 각자 관계맺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이지 같은 논리로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영원히 관점의 차이. 내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가 이야기의 방향을 결정한다. 이 생애에서 나는 어느 방향으로 관점을 두고 있는 걸까. 내가 삶을 바라보는 태도는 무엇일까. 이런 것을 생각하게 했다.


다른 이들의 삶은 파편들처럼 한데 모아진다. 하나의 분리된 이야기를 비추던 조명이 어둠 속에 머물러 있던 또하나의 이야기를 밝힐 수 있다. 뇌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피조물이다. 파편들은 제 힘으로 한데 모여 전체를 만든다.


  마틸드는 운명처럼 휩쓸린 기억 이후에는 모두 자신의 의지의 실행이었다. 삶의 매순간이 분노였으며 로토가 죽은 뒤 더욱 극에 달했던 마틸드는 “늘 주먼 쥔 손이었지만 로토에게만 편 손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틸드의 인생은 곳곳에 너무 반전들이 많아서 그 순간순간마다 안타까왔다.  

  최근 우리 문학계는 중경량의 소설 출간이 더 많고 판매율도 좋다고 한다. 하지만 외국의 소설들은 전반적으로 긴 호흡의 장편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 아니, 그쪽 출판계를 잘 모르니 정확하진 않을 수 있겠지만 우리 출판계에 번역되는 책들만 보면 미국 서점계를 휩쓰는 소설들은 모두 매우 긴 소설들이다. 보다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존하는 곳이니 그렇기도 하겠지만 이런 것은 독자의 요구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출판계의 마케팅 때문에 그런 것 아닐까. 때론 이런 호흡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베스트셀러를 차지하는 다른 나라의 출판시장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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