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지음, 이진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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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포의 삶


우리에겐 새이름이 필요해, 노바이올렛 불라와요, 문학동네, 2016-02-01.


  소설 속 이야기는 1960~70년대 모습을 연상시킨다. 여전히 아프리카에는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장기독재로 인해 꿈꾸기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나라가 있다. 짐바브웨가 그렇다. 1980년에야 영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짐바브웨는 앞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나라들이 겪었던 실상을 고스란히 따른다. 게다가 현재까지도 장기집권하고 있는 독재자로 인해 짐바브웨는 피폐해져 가고 전세계 사람들의 동정어린 시선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짐바브웨 사람들의 희망은, 꿈은 무엇일까. 짐바브웨 출신 미국 이민자인 작가 노바이올렛 불라와요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녹여 짐바브웨의 현실과 꿈, 희망들을 써내려갔다. 식민지배 전후의 상황이 담긴 소설들은 대체로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읽어본 책을 기준으로 한 판단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전반적으로 그렇다. 아프리카든 인도이든 그것은 식민 전후의 상황 자체의 유사함에서 기인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우리에겐 새 이름이 필요해』가 같은 식민지배 후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도 차별적일 수 있는 것은 아이의 시선으로 상황을 바라보는 것에 있다. 소설의 전반부는 달링의 짐바브웨에서 보낸 유년기 삶을 후반부는 미국에서 보낸 청소년기 삶을 펼쳐보인다. 아이의 눈으로 바라본 짐바브웨의 절망적인 상황과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 그리고 희망과 절망이 아이다운 솔직함으로 서술된다. 어쩌면 의뭉스러울 정도로 날카롭게 상황을 전달하며 이야기하는 아이의 목소리는 뜨끔뜨끔하다. 불편함도 지속된다. 아이가 느끼는 만큼의 슬픔과 절망을 느끼게 된다. 

  치포. 치포. 달링.

  패러다이스에는 달링이 산다. 치포가 산다. 배스터드, 갓노우즈, 스브호, 스티나도 산다. 뜻도 모르는 영어 이름을 갖게 된 여섯 아이들은 맨발로 달린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구아바를 훔치고 신발이 없어 맨발로 흙길을 달리고 엉덩이가 보이는 헤진 옷을 입으며 아이들은 달린다. 배가 불러 자꾸만 뒤처지는 치포 때문에 멈춰지지만 그래도 쉬어 가며 열한 살 치포와 함께 달린다. 치포의 뱃속에 아기를 넣은 것이 누구인지, 어떻게 넣었는지, 언제 나오는지 궁금해 하며 아이들은 달리고, 나무에 목을 맨 여자의 시신을 발견하고 놀라지만 이내 돌아와 여자의 구두를 팔아 빵을 사 먹을 수 있으리란 생각에 웃고 웃으며 달린다.

  학교도 없고 선생님도 없고 경찰들이 불도저로 집을 밀어 양철집에서 사는 아이들이 즐겨 하는 나라놀이에서 선호하는 나라가 미국, 영국, 캐나다인 것처럼 달링은 미국에서 살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곳에 가면 굶주리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게 풍요로울 테니까. 어른들도 희망한다. 변화를 꿈꾸며 투표를 한다. 독립한 나라 짐바브웨에서 잘 살기를 꿈꾸지만 여전히 변화없는 독재 정권의 집권. 희망은 절망이 되고 가난은 가난만을 끌어 들였다. 빈부 격차에 폭동이 일어나고 일을 찾아 떠난 이들은 병만을 얻어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달링의 희망은 이루어졌다. 친구들과 헤어져 미국으로 간 달링은 배부르게 먹고, 학교도 다니고, 쇼핑도 즐기는 생활을 한다. 언어와 다른 문화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문득문득 짐바브웨가 친구들이 그립다. 그러나 방문비자로 미국으로 들어온 달링은 기간이 만료되어 불법체류자, 짐바브웨로 가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올 수 없다. 밤낮없이 일하는 포스털리나 이모에게 짐바브웨 식구들은 늘 돈을 부치라는 요구만 한다. 달링도 이제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짐바브웨에 돈을 보내야 하지만, 어릴 적 꿈꾸었던 동경의 나라와는 거리가 멀다. 뉴스 속 짐바브웨 상황을 보면 안타깝지만 자신은 짐바브웨의 전통도 잊어가고 말도 잊어가고 그러나 미국에선 완전한 미국인도 아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달링은 살아가고 있다.

  소설 속 묘사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몇장면이 있다. 소설 전체를 통틀어 몇 번을 보아도 가장 마음이 아린 장면은 아이들이 ‘치포의 배를 없애주려’는 장면일 것이다. 아이를 낳다 죽기도 한다는 이야기에 아이들은 옷걸이를 이용해 어떡하든 치포의 배를 없애기 위해 이리저리 방법을 써 보지만 실패하고 어른 마더러브에게 들킨다. 마더러브에게 혼날까 걱정하는 아이들을 끌어안는 아이들과 당황하는 아이들, 그리고 치포의 머리 위에 내려앉는 나비의 모습은 처연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전 단지―우린 치포의 배를 없애주려 한 것뿐이에요. 포기브너스가 은트사로를 내려다보며 말하고는 울음을 터트린다. 치포는 아예 대놓고 엉엉 운다.

마더러브는 고개를 젓다가, 포대자루처럼 털썩 주저앉는다. 화가 난 게 아니다. 소리를 지르지도 않는다. 우릴 때리지도, 귀를 잡아당기지도 않는다. 너희들 이제 죽었다고, 엄마들한테 이를 거라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마더러브의 얼굴을 본다. 지금껏 본 적 없는 섬뜩한 얼굴이다. 그 낯선 얼굴엔 고통의 표정, 누군가 죽었을 때 어른들이 짓는 표정이 서려 있다.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다. 그녀는 마치 안에서 불길이라도 일어난 듯 가슴을 움켜쥐고 있다.

그러더니 마더러브가 팔을 뻗어 치포를 안는다. 우리는 어쩔 줄 몰라하며 가만히 지켜본다. 어른이 울 땐 왜 우느냐고 물을 수도 없고, 뚝 그치라고 말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른이 울 땐 할말이 없다. 치포가 울음을 그치고 마더러브의 허리를 끌어안는다. 치포의 두 팔로 허리가 다 둘러지지도 않는데. 행운의 보랏빛 나비가 치포의 머리에 내려앉는다. 나비가 날아가자 포기브너스가 뒤쫓아간다. 스브호와 내가 포기브너스를 따라 달려가고, 어느 순간 우리는 모두 나비를 쫓으며 행운을 잡기 위해 소리를 지른다.


  절망의 나라에서 치포는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떠나간 친구 달링을 그리워하며 아이에게 달링이란 이름을 붙인다. 치포의 옆엔, 또다른 달링이 있는 것이다. 열한 살의 치포. 그때 임신했으니 열두 살 즈음 달링의 엄마가 되었을 지도. 그리고, 다른 아이들도 모두 다른 나라로 떠나고 짐바브웨에는 치포만이 남았다. 달링은 혼자 남은 치포가 안됐고 짐바브웨의 상황에 대해 분노하고 ‘우리’ 나라의 상황에 대해 가슴아파하지만 치포는 차갑게 말한다.


그 고통을 네가 겪는 건 아니잖아. BBC를 보면서 상황을 이해한다고 생각해? 아니, 친구야. 넌 몰라. 고통의 질감을 아는 건 상처뿐이야. 여기 남아서 그 고통을 실제로 느끼는 사람은 우리야. 그 고통에 대해서 말할 권리가 있는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뿐이야.


  치포의 절규가 메아리쳤다. 짐바브웨에서 끝까지 남아 있던 건, 치포의 의지였을까. 그곳에서 고통을 겪으며 상처를 쌓으며 고통에 대해서 말하는 치포. 달링이, 제 아이 달링이 치포를 짐바브웨로부터 떠나는 데 ‘방해’가 되었을까. 머물게 하는 ‘요인’이 되었을까.

  피폐한 나라에서 살다가 풍요의 땅 미국에서 이민자의 정체성을 겪는 달링의 안타까움도 절절했지만, 어느덧 이 절규의 끝에 치포의 삶이 궁금해졌다. 치포의 삶은 고스란히 짐바브웨 아이들이 겪는 삶을 보여주고 있으니까. 그곳에서 고통을 겪으면서도 벗어나지 않은 채  “조국이면 떠나지 말고 끝까지 남아 사랑했어야 된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잡으면서 살았어야 한다”고 외치는 치포. 그렇다면 치포는 제 스스로 짐바브웨를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슬픔과 아픔과 절망의 상처를 짊어진 채, 끝까지 짐바브웨의 절망을, 고통을 바로잡으며 살아가려 노력하는 치포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린다. 치포의 머리 위에 행운의 보랏빛 나비들이 얼른 내려앉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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