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 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셰릴 스트레이드 지음, 우진하 옮김 / 나무의철학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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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의지를 상실하려는 의지에 맞서


와일드-4285km, 이것은 누구나의 삶이자 희망의 기록이다


  PCT라 하면 PCT활용능력이 먼저 떠오르는 사람으로서 인상깊게 본 다큐 <순례> 시리즈에서 마지막 4편의 예고를 보면서는 건너뛰어야지 생각했다. 어쩌다 보게 되고서는 PCT 찾기에 혈안이 되어 한동안 PCT 앓이를 했다. PCT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캘리포니아 주 멕시코 국경에서 시작해 캐나다 국경 너머까지 아홉 개의 산맥을 따라 펼쳐지는 4,285km의 도보여행 길을 말한다. 이 길을 걸으려면 적어도 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이 여정을 지나는 동안 사계절을 만나게 되고 사막과 산맥, 여행자들에게 위협이 되는 곰과 뱀, 퓨마 들이 서식하며 출몰하기도 한다.

  길이란 이어지는 것이고 그냥 존재하는 것이니 이 코스에 대한 명칭이 존재하고 관련 안내서적이 있다는 것은 최초 누군가의 시도 이후 오랫동안 이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았음을 보여준다. 저자 셰릴 스트레이드 역시 이 여정에 도전하는 스물 여섯의 여성이다. 저자의 자전적 에세이로 PCT 여정을 떠나게 된 배경과 그 여정을 담고 있다. 여정 중간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이 길을 걷는 이유가 엄마를 잃은 후 처절하게 무너진 자신의 절망과 상처 회복을 극복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다 아버지의 학대와 가난하고 불우한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엄마에 대한 분노에 감정을 보이기도 한다. 시종일관 반복되는 엄마 때문이라는 말, 엄마로 인해 자신의 삶이 무너졌고 회복불능이라는 말이 안타까이 느껴지면서도 엄마가 돌아가신 상실감에 약물과 불륜을 반복지속하며 자신을 놓아버렸다는 저자의 얘기에 드문드문 의아한 마음을 가지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는 일에 대한 의문, 그 순간들에 대한 의문들이었다. 손쓸 수 없이 무력하게 되는 항거불능의 상황이겠지만 드문드문 셰릴이 부러 의지를 상실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우연히 PCT를 알게 되어 이 여정을 가겠다고 결심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미 저자는 ‘의지를 상실하려는 의지’를 놓아버린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이 여정의 성공 여부는 저자의 감정 정화의 여정이 될 수 있었다고 본다. 셰릴 자신도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여정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자신을 놓아버릴 때처럼 자신을 붙잡으려는 명분이라는 생각을 언뜻 했다.


나는 변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 계획을 세우는 몇 개월 동안 나를 밀어붙이는 힘이 되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신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예전 모습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강한 의지와 책임감, 맑은 눈을 가진 사람. 의욕이 넘치며 상식을 거스르지 않는 그냥 보통의 좋은 사람. PCT는 나를 그렇게 만들어줄 터였다. 그곳을 걸으면서 내 인생에 대해 전체적으로 다시 생각해볼 참이었다. 인생을 이처럼 우스꽝스럽게 만들어버린 모든 것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채, 내 의지와 힘을 다시 찾을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여기 이렇게 PCT에 서고 보니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다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비록 조금 다른 형태이긴 했지만. 여행 첫날부터 이렇게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웅크린 채 걷고 있는 모습이라니.


  셰릴은 엄마에 대한 집착적인 감정과 엄마의 죽음으로 인해 자신이 망쳐버린 가정을,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대해 걸으면서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면서 괴롭고 상처받은 감정들은 현실적인 ‘생존’이라는 상황 앞에서 조금은 작게 보이고 부차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정신적인 피폐함이 육체의 피폐함 앞에서 뒤로 물러나며 아물어지기도 했고 아름답고 경이로운 자연의 경관 앞에서 인생에 대한 숙연함을 느끼기도 하면서 셰릴은 이 험난한 여정의 끝에 다다른다. 이 도보여행을 함께 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기고 주기도 하고 그러나 더 많은 나날 홀로 외로움과 추위와 배고픔과 고통, 두려움을 이겨내고 찾아낸 것은 환희였으니 그것은 셰릴이 앞으로 살아나갈 인생에 대한 깨달음과 의지를 얻어낸 덕분이고 힘든 여정을 마침내 완전히 제 힘으로 해냈다라는 의미였다.


PCT를 걸어갈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달려 있지, 흉측한 내 발에 달려 있지 않았다. 온갖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가려는 강한 의지 말이다.


  셰릴이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놓아버렸던 만큼이나 다시 감정을 부여잡고 길을 떠나 완성하는 과정은 놀랍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거듭 가지게 했다. 수많은 사람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이 도보여행에 도전하고 실패와 성공을 반복한다. 다큐에서 이 여정에 참여한 몇몇과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전쟁에 참전한 경험을 가진 이들을 보았다. 여성군인도 있었다. 이들이 신체적으로는 어느 정도 단련되어 있겠구나 싶었지만 그들이 이러한 여정을 떠나는 것이 단시 신체훈련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쟁터에서 겪은 일에 대한 정신적인 회복 욕구가 더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고난을 통해서 고난을 잊고자 하는 이들의 노력에 응원이 더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마냥 걷고 싶은 기분이 들거나 잡다한 일에 매몰될 때마다 정신이 혼란스러웠던 기억들을 생각해보면 이 도보여행에 대한 끌림이 우연은 아니구나 싶었다.

  변화하고 자신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를 채운 셰릴이 이 여정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그녀의 아이들에게 도보여행에 성공한 장소에서 자신의 여정을 이야기해주는 모습은 아주 평화로운 풍경으로 보였다. 감정의 격량을 잠재우고 의지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자의 여유로움이 보였다고나 할까. 이 여정을 걸어나가는 의지 이전에 이 여정을 하겠다는 의지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 와일드가 내게 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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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 우리 주변에 널린 자연의 신호와 단서들을 알아보는 법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1
트리스탄 굴리 지음, 김지원 옮김 / 이케이북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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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로망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


  1971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아마존 상공에서 여객기 공중 폭발에서 열일곱의 줄리안 케프케만이 폭발 직전 좌석이 분리되어 살아남았다. 홀로 정글에 추락한 케프케는 사고후 11일만에 원주민에 의해 구조되었는데 그 기간 동안 생존을 위해 줄리안이 한 일은 놀라웠다. 나무의 나이테를 파악해 북쪽 방향을 향했고 갑각류가 살고 있는 물과 식용 가능한 식물을 골라 먹었다. 밤에는 모닥불로 불을 피우기까지 했다하니 본능적인 생존의 기술인가 싶었지만 생태학자인 줄리안의 아버지는 평소 외딴곳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것을 잊지 않고 활용하며 그 고통의 날들을 견뎌낸 것이다. 더구나 허벅지 상처에 구더기가 생길 정도의 극심한 상태였는데 버려진 오두막에서 석유를 부어 응급처치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또 마을을 찾아 강가를 걷고 건다가 쓰려진 상황에서 원주민에 의해 구조되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이 다가오면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이 마비될 것 같은데 자연에 대한 기본 상식도 없는데도 오지탐험에 대한 갈망은 주기적으로 살아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오지탐험은 로망이다. 오지탐험이 일반적인 여행이나 관광과는 확연히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갈망이 있는 것은 자연·원시적 생태에 대한 로망과 맞먹는 문명사회에 대한 회피 욕망이기도 할 것이다. 그속에서 살아가다보면 역시 고난과 환멸을 겪게 되겠지만 현실세계만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로망을 부추기는 이유일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20년이 넘는 야외 탐험과 연구로 자연 탐험의 기술들을 터득하고 있다. 오지에서 저자의 생존력에 대한 부러움을 가득 안고서 가벼웁게 《산책자를 위한 자연수업》을 보면서 마냥 생존방법을 터득하는 책인양 보고 있다.

  이 책은 조금만 밖으로 나가면 볼 수 있는 자연에서 특정한 신호와 단서를 알아내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하늘의 별과 나무뿌리의 선을 통해 방향을 숙지하는 법, 구름과 무지개 식물 등을 통해 날씨를 읽어내는 법, 동식물을 통해 지대를 읽는 법 등등 재밌고 의미있는 관찰의 결과를 알려준다. 가벼운 산책을 더할 수 있는 흥미와 함께 길을 잃어버린 경우 유용함을 줄 수 있기도 한 방법들이다. 특히 저자는 인도네시아 고립된 지역에 살고 있는 다약족과 함께 자연의 단서로 살아가는 모습에 관해서도 들려주고 있다. 그리고 다약족뿐만 아니라 어느 시대에서든 오랜 삶의 경험으로 터득한 자연현상을 읽어내는 방법들이 노래형태로 사람들에게 전해지고 전해진다.


   참나무를 조심하라, 벼락을 끌어들인다.

   물푸레나무를 피하라, 번개를 유혹한다.

   산사나무 아래로 들어가라. 그러면 해가 없을 거다.


  전혀 생각지 못한 단서는 네잎클로버가 주는 단서다. 당연 네잎클로버 군락지를 보면 이런 더할나위없는 행운에 기뻐하겠건만 저자는 네잎클로버 여러 개가 한군데 모여 있다면 그것은 제초제를 뿌렸다는 징후라고 말한다. 제초제와 식물 비정상적으로 자라게 한다는 점, 그리고 네잎클로버가 비정상적이었기에 나폴레옹 역기 그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새삼 네잎클로버가 클러버의 돌연변이 형태라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 인간이 뿌린 농약이 가세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네잎클로버가 한무더기 피어 있는 것을 보면 좋다고 달려가 마구 뜯거나 그 위에 드러누울 듯한데 그곳이 농약 한무더기 뿌려진 곳이라니.

  하지만 저자가 알려주는 방법들을 머릿속에 깊이 각인하지는 못했다. 그렇기에 동네 산책을 나가며 이 단서들을 파악하고 확인하리라 하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알지 못하지만 마냥 눈여겨 관찰하기는 할 지도 모르겠다. 이건 왜 이렇지라는 생각으로 흘낏.

  저자는 하늘의 별과 달, 해를 읽는 방법에 대해서도 기술하고 있다. 당장 오늘밤 35년여 만에 펼쳐지는 '슈퍼 블루문 개기월식'이다. 오늘이 지나면 19년 뒤에야 이 현상을 볼 수 있다는데 나는 이 책의 지식으로 이 현상을 잘 관찰할 수 있을까. 북극성, 북두칠성을 찾던 어린시절에도 내가 찾은 것이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 별을 바라봤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다. 제대로 북극성과 북두칠성을 찾은 것인지. 산책을 가든 등산을 가든 정상에 오르는데만 급급하고 산책을 하면서는 세밀하기 보다는 꽃이 폈네, 바람이 부네, 사람이 많네, 이런 정도로만 바라보면서 오지탐험에 대한 열망을 꿈꿀 때마다 우스워지곤 한다. 정말 바라는 것이 오지를 향한 여성이 아니라 현실을 탈피하고픈 욕망이라면 그속에서인들 기꺼이 산책하는 일이 이루어질 수는 있을런지 싶어서.

  한편으로 이 책이 산책의 욕구를 활활 타오르게 하기보다는 수그러지게 만들었다. 날이 추워서가 아니라 순간 ‘너무 머리가 아파서’. 자연학습 테스트처럼 이것을 다 알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들자 한숨부터 나왔던 까닭이다. 간사하고 모순에 가득찼다. 그러면서도 다약족과 함께 도보여행을, 그것이 생존의 방식이라고 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아무것도 모르면 고난이고 누군가에겐 짐이 될 테인데도 다약족의 도움을 얻어서, 내가 가진 지식이 없더라도 누군가의 지식과 경험을 얻어서 그곳을 살아보고픈 욕구. 나같은 사람이 많아서 오지탐험, 정글의 법칙같은 프로가 장수를 누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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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빌리의 노래 -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J. D. 밴스 지음, 김보람 옮김 / 흐름출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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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노래의 도돌이표


힐빌리의 노래- 위기의 가정과 문화에 대한 회고


  아무런 정보없이 이 책을 읽은 저녁 일찌감치 차지한 것은 할머니에게, 늙어가는 엄마, 아빠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더 잘해야겠다의 구체적인 내용은 설정하지 않았으니 책을 읽으면서의 반사적이고 수사적인 생각이었겠지만 또한, 다짐이기도 했다. 할모, 할보라는 호칭에 대응해 나의 할매와 할매와 할배로 불리는 부모님에 대한 생각, 나이든다는 생각,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 속에 머물러 있을 때 울려대는 전화는 내 다짐이 얼마나 실행력 있는지를 확인하겠다는 듯, 늦은 건 아니냐는 듯 불안하게 들렸다. 이럴 때면 영화나 드라마에선 불길한 음악이 삽입되며 긴장을 조성하는 연출을 했다. 다음 장면에서 중환자실에 앉은 나는 다시금 깨달음은 항상 늦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병원을 오가며 긴장과 불안 상태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저자의 할모와 할보처럼 나의 할매의 굴곡진 삶에 대해 생각했다. 선거 때면 각자의 주장에 소리높였던 때를 떠올리기도 했다. 자식, 손주들의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지지하면서도 자신이 지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정치인에 대한 비판에 결코 여유롭지 못했던 할매가 삶의 위기를 넘나들다 기억의 끈을 놓는 시간 동안 할매의 기쁨이 되는 자식들이 연이어 방문했다. 하나같이 연로한 노인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고 아프다는 말에 대해 일상적으로 반응한 것을 자아비판하는 동안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위태로운 순간 그 사람의 생애를 거듭 회고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살아낸 할매가 가질 수밖에 없던, 그렇게 형성된 가치관을 이해하지만 수용하지 못한 비판과 함께 다음 선거에는 할매랑 그런 일로 투닥투닥하진 않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이 책에 대해서도 뭔가 모르게 불편한 느낌을 가지고 감정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비판을 찾고 있었을 테다. 이해는 되지만 수용하기엔 마냥 탐탁지 않은 것은 무얼까 생각하며 저자의 말대로 논문이 아니니까 저자가 겪은 일들에 대해 일단 위로와 공감을 표하며 어쩌면 ‘성공한 삶’이라 불리는 그의 인생에, 힐빌리 문화에서 탈출한 것에 적지않은 박수 또한 보냈다.     

  이 책의 흥미 요소는 이른바 슬럼가로 묘사되는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특성, 특히 저자의 조부모님과 같은 쉽게 볼 수 있는 독특한 캐릭터의 향연이다. 저자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재밌는 캐릭터들의 이야기가 초반 이 책을 흡입력있게 몰아갔고 또한 내 조부모님과 부모님에 대한 생각이 더해져 애틋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을 벗어나는 후반부의 이야기, 어쩌면 저자의 생각이 더해지고 설교조처럼 이야기하는 후반부에서는 흥미와는 다른 감정이 들 수밖에 없었다. 조금 더 논쟁적이 될 수밖에 없는 생각들이 펼쳐졌고 복지와 정책, 정치 등의 쟁점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저자가 자신의 삶을 겪으며 가지는 시각에 대해 자꾸 거리낌이 느껴졌다. 저자의 인식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하지 못하는 나의 감정을 느꼈고 저자의 생각에 불안과 위험, 불편함이 들었다. 나에게는 무엇이 그토록 와닿지 않았던 걸까. 모든 생각들에 대해 반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 부분 부분 맞다고 수긍하는 점은 있었다. 다만, 그것을 전체적으로 관통하는 시선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고 있는 나를, 그리고 감정적인 것을 떠나서 이성적으로도 명확한 근거와 가치관으로 설득하고픈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이래저래 지친 상태로는 ‘그것은 아닌데’ ‘위험한 생각인데’라는 말만이 머릿속에서 어지러이 흩어졌을 뿐이다.

  복지 문제 또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모든 정책은 정치행위와 연관되어 결정되니까. 다만 그 정도가, 그것의 기본 바탕에 대한 합의와 추구해야 할 것은 지켜져야 함에도 그렇지 못한 것이 문제다. 그렇기에 정치적인 형태로, 아니 무조건적으로 복지정책이 나올 때마다 제 것을 뺏긴 양하며 공산주의를 외쳐대거나 복지대상자에 대한 맹렬한 비난이 형성되는 것은 문제일 수밖에 없다. 이 책 속 저자가 가난과 마약과 폭력이 가득한 그들 힐빌리 문화에서 자신은 벗어났다고 말하며 혐오가 담긴 시선을 건네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왜일까. 개인의 힘으로, 의지로 벗어나 그곳을 바라보며 지긋지긋함을 느낄 수는 있겠다 싶기도 했다. 그런데 이 저자에게서 우리나라 6~70년대, 80년대에도 가난한 시골에서 힘겹게 살다가 가족들의 희생을 업고 서울로 공부하러 가 출세한 자가 제 가족과 고향마을에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특유의 시선이 느껴졌다. 드라마 속에서 자주 다루던 ‘나는 내 가족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를 강조하는 주인공들의 모습. 대개는 법학을 공부하지만 기업쪽으로 빠지기도 하는. 그런 주인공들. 너희들의 그 가난하고 힘겨운 삶은 모자라 머리와 못난 몸뚱아리 때문이라 말하는 그런 주인공들의 모습이, 언뜻.


우리 집안에서 성공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가족들은 하나같이 다른 배경을 지닌 배우자와 결혼한 사람들이라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다.

이런 것들을 깨닫는 순간, 그동안 내가 내 삶이라고 생각했던 모습이 산신이 부서졌다. 머릿속에서 나는 과거보다 더 나은 사람이고 강한 사람이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동네를 떠났고, 해병으로 복무하면서 나라를 지켰으며,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명문 로스쿨에 진학했다. 내게는 나쁜 영향력도, 성격적 결함도, 어떤 문제도 없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행복한 배우자와 꾸리는 행복한 가정’이라는 가장 소중한 꿈을 이루려면 끊임없이 정신을 차리고 집중해야 했다. 내 자아상은 오만함이라는 가면을 쓴 괴로움에 가까웠다.


  힐빌리 문화에 속한 사람들을 자주 보았고 접하고 있기에 저자처럼 때로는 징글징글하다는 기분에 휩싸일 때가 있긴 하다. 하지만 저자가 생각하는 방식이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저자 자신도 느끼고 있듯이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이 아닌 것이 주요하게 작용하고 있지 않은가. 사회적 자본 말이다. 실력보다 운이 낫고 운보다는 인맥이 필요하다는 것 또한 저자의 경험이다. 이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 이 상황, 가진 자에게는 유리하고 가지지 못한 자에겐 불리한 형태의 방식을 유지하도록 달려갈 것이다. 거기에 맞서 적절한 인식과 대응으로 제동을 걸고 공평과 공정이라 불리는 가치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며, 그 체제를 만들어가기 위한 방안을 애써 나가야 하는데 이것이 당연하게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살고 있다.

  자칫 저자의 이야기는 ‘성공’의 힘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과 의지이며, 삶을 지키기 위해서는 이 거대한 사회의 흐름을 따라야 하리라 강조하는 듯이 보인다. 그 흐름이라는 것은 내게 불필요한 것에 대한 외면과 비난은 당연한 것이고 이익이 되고 필요한 것에 대한 줄잡기이고, 그것이 어떻게 불공정하게 이루어지든 상관없이. 그래서일까. 사람들이 힐빌리 문화에서처럼 복지의 대상자인 이들에게는 마구 비난을 퍼부으면서 부정과 사기로 권력과 재력을 형성하는 이에 대해서는 약하게 비난하거나 또는 비난없이 그들의 방법을 수용하는 것은.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시선은 이토록 다르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그 사람들의 무기력하고 의지없는 삶의 태도에 대해서는 비난하면서 부정과 거짓, 사기, 착취로써 삶의 권력과 재력을 형성한 이들에 대한 비난과 혐오는 없다, 혹은 약하게 있다.  

  힐빌리문화라 불리는 공간에서 성공한 하나의 사례로 얘기되는 저자의 경험담, 성공담에 굳이 열광하지 못할 것도 없긴 하다. 잘 살고 만족한다니 다른 이들 또한 자신과 같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 몇 주 사이 각지에서 모인 친척들의 견해와 친구들, 오다가다 만난 사람들의 힐빌리문화층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비난을 넘어선 혐오를 들으며,  책의 저자가 생각하는 힐빌리 문화와 복지를 떠올리며 이래저래 많은 생각들을 했다. 확실히 저자가 바라보는 복지정책의 시각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고에 가깝긴 하다. 사람들의 의견과 생각은 다양하고 한자기를 들어 정책을 수립하지는 않지만, 정치적 프레임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성을 따르기에 쓸데없이 우려가 된다. 이 책이 사례를 넘어선 대안으로 굳어질까,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가 된 이유, 트럼프가 당선된 것 등등 그리고 우리나라의 상황을 대입하게 되면서 이 책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거리를 안겨주었다.

  내가 정녕 못마땅한 것은 무엇일까. 힐빌리 특유의 문화적인 특성들이 일반적으로 만연된 빈곤한 자들의 태도들이라는 것은 대체로 수급자들에게서 보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것이 하루이틀 일이 아니라는 것 또한 알지 않는가. 전혀 몰랐다고 할 수 없고 늘 얘기되어 오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들에 대한 지지는 항상 정서적 지지가 함께 해야 한다고 강조되어 왔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마치 새로운 사실인양 하며 정치놀음에 끼워 맞추는 것이 마땅치 않은 걸까. 아님 삶에 대한 태도에 대한 비판이 가난한 이들에게만 가해지는 것에 대한 불만일까. 저자가 말하는 ‘성공’한 삶에 대한 의문과 회의 때문일까. 결론없이 되풀이되는 문제인식과 해결방안에 대한 답답함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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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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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초인종을 울려라


황금방울새, 도나 타트, 허진 (옮긴이), 은행나무, 2015.6.


  도나 다트를 알게 된 것은 『황금방울새』가 퓰리처상 수상작이었기 때문이다. 수상작이라는 홍보 덕분에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이후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 연이어 번역·재출간된 것을 보건대 역시 공신력있는 상의 위엄이 작품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도나 다트는 과작 작가로 10년 간격으로 세 작품을 출간했다. 작년 번역출간된 『작은친구들』을 도나 나트의 최신작인 줄 알고 읽었건만 도나 다트의 최신작은 『황금방울새』다. 이 책을 읽고서 도나 다트를 알게 되었지만 도나 다트에 대한 인상은 강하게 자리잡았다. 읽을 작품도 얼마 없는 작가인데도 도나 다트의 신간을 기다린 것은 두 작품에 대한 인상 이외에도 작가 자체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을 거다. 어쩌면 이것도 출판사의 홍보 전략 덕분일지도 모르겠다만.

  도나 다트에 대한 수사는 ‘천재 작가’로 시작한다. 고전의 작가들에게서 이 수식어를 종종 보기는 했지만 현대 작가들에게 이런 수식어가 있었던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거침없이 ‘천재 작가’로 불리는 도나 다트에 대한 궁금증이 그리고 작가의 기이한 성격의 묘사가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언뜻 작가의 소설 『비밀의 계절』 속 등장인물의 성격들을 모두 조합한 캐릭터로 느껴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면서 날카롭고, 냉정하고 이지적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비밀의 계절』의 느낌이 강한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작가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다.

  이런 강렬한 작가의 소설 『황금방울새』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연을 쫓는 아이』가 생각나게 했다. 작가의 전작 광기가 많이 빠진 느낌으로 삶에서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소년이 등장하기 때문이었을까. 이 소설은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실제 그림 <황금방울새>를 소재로 하고 있다. 횃대에 발이 묶인 갈색의 새 한 마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명화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이나 그림의 장면과 같은 모습이 묘사되는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그림을 소지한 상황에서 시작되고 그림의 내용보다는 소유한 상황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술관 폭탄 테러로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열세살 소년 시어도어 데커는 우연히 손에 쥐게 된 그림과 함께 미술관을 빠져나온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엄마를 잃은 소년 시오는 친구 집에 맡겨지면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된다. 소년 시오의 성장의 이야기는 사고의 기억과 상실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방황하고 방랑하는 시오의 이야기는 그날 폭발한 미술관엘 가게 된 것이 전시된 황금방울새 그림을 엄마가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안다. 비가 오기 때문에 미술관엘 들렀기 때문이 아님을 안다. 그가, 학교에서 흡연으로 정학을 당했고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는 것이 먼저임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모두가 찾고 있는 명화의 절도범이라는 죄책감과 불안, 두려움까지. 그리고 불행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시오를 사랑이 아닌, 돈을 이유로 함께 하려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등장까지. 소년 시오는 미국인들의 반항하고 방황하는 전형적인 십대들의 모습 그대로 술, 마약, 도둑질에 빠진채 살아간다. 악의가 가득한 모습이 아니라 그저 한없이 흐느적거리는 그런 상태로 말이다.


반항. 공허하고 헛되고 견딜 수 없는 삶. 내가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가 뭘까? 하나도 없다. 운명을 먼저 한 방 먹이면 어떨까? 책을 불 속에 내던지고 끝장내면 어떨까? 현재의 공포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내 안에서 비롯된 공포만이 아니라 외부적이고 경험적인 공포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은 충분히 있으므로 약을 두껍게 늘어놓고 흡입한 다음 행복하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고결한 어둠, 별들의 폭발.


  미술관 폭발 현장에 있던 어떤 노인이 죽기 직전 잘 지켜달라며 부탁한 그림을 마치 엄마의 분신인 양 여기며 살아가는 시오의 그림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명화 황금방울새를 찾기 위한 미술관과 언론, 경찰의 움직임도 지속적이다.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사이의 대립이 예술품 암시장과 얽혀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린 소년 시오의 상실감과 좌절이 시오의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보는 것은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흥미롭다. 왜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작가가 <황금방울새>를 선택했는지, 그림의 내용과 이야기의 상관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바꾸게 한다. 소설을 읽고 나서 다시금 그림을 보면 홰에 갇힌 방울새의 모습에서 소년 시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황금방울새가(다른 그 어떤 새도 아니고 오직 이 새가) 잡히거나 잡힌 채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파브리티우스가 볼 수 있는 어느 집에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새는 왜 자신이 그토록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상상하기로는) 소음에 깜짝 놀라고, 연기와 멍멍 짖는 개들, 음식을 만드는 냄새에 괴로워하면서, 술주정뱅이와 어린애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 더없이 짧은 사슬에 묶여 날지도 못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라도 이 새의 존엄성을, 아주 자그마한 용감함을, 솜털과 연약한 뼈를 볼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조차 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새. 세상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새.


  ‘초록색 초인종을 울려라‘. 시오가 미술관 폭발 현장에서 맞이한 운명의 순간에 그림을 안겨준 노인이 한 말이다. 미술관 폭발로 인해 삶의 변화를 겪게 된 시오에게 초록색 초인종을 누르는 일 역시도 삶의 변화를 바꾸는 숙명이 된다. 황금방울새의 운명처럼 시오가 살아가고 있다면 누군가는 그런 시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도와주는 이들이 있다. 불행 가운데에서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인연 중에서도 초록색 초인종이 울린 후 만나는 이들이 시오의 또다른 인생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들일 지도 모른다. 물론 초인종을 울려야 알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은.

  묶인 발을 풀고자 한다면 그들의 손을 붙잡는다면 시오의 생이 또한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들은 단한번으로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지속적인 애정이 필요한 일이다. 비극의 상황 속에 빠지는 것은 충격적 사건을 경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타개하도록 이끄는 존재가 부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성장기의 청소년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약물에 탐닉하고 나락으로 빠지는 전형적인 일탈과 방황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들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은 늘 애정어린 구원자라는 전형적인 등장이 필요하다. 삶에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마음을 돌려줄 것은 언제나, 지속적인 애정으로 이끌어 줄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자신의 불행에만 몰두하던 마비 상태를 벌써 몇 년 전에 벗어나 있었다. 아노미와 의식의 소멸, 관성과 마비 사이를 오가며 나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몰랐을 뿐 그 사이사이에 작고 편안하고 일상적인 다정함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다정함이라는 말 자제가 무의식적으로부터 떠오르는 것과 같았다. 병원에서 수많은 디지털 기계들 사이로 목소리를, 사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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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키호테를 따라간 스페인 - 윤준식.권은희 교수의 여행 에세이
권은희.윤준식 지음 / 꿈의날개(성하) / 2010년 11월
평점 :
품절


개미와 베짱이의 도시화


돈키호테를 따라간 스페인, 윤준식, 권은희 지음, 꿈의날개(성하출판), 2001.2010


  확실히 돈키호테를 따라다니는 스페인 여행은 다이나믹하고 흥미로울 것 같다. 얼만큼 그를 감당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되겠지만 소설속 돈키호테 옆에 있는 산초만큼이나 하면 되지 않으려나. 돈키호테가 흔적을 남긴 곳을 따라가는 것도 나름 재밌긴 할 거다. 맞닥뜨리는 것은 풍차와 여인숙이고 마냥 길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돈키호테를 따라간 스페인 여행은 수사적 표현이고 이 책은 스페인에서 생활한 저자들이 살면서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스페인의 유명한 관광자원뿐만 아니라 자연문화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스페인의, 스페인 사람들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스페인에 관해 알면 알수록 새롭고 재미있지만 계속 알고 싶어지기도 한다. 아랍, 유대, 기독교 문화가 공존했던 나라, 그로 인해 더욱 많은 이야기가 펼쳐져 있고 각각의 특색있는 문화유적이 남아 있는 곳. 자끄 아탈리의 소설 『깨어있는 자들의 나라』처럼 비밀스런 책을 찾는 이야기가 생겨날 수 있던 것도 이 세 종교가 어울러져 있었기에 그와 같은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었다.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는 아랍어 ’마헬리트‘에서 유래된 ‘물이 곳이는 곳’이라는 뜻이다. 또한 ‘산복숭아와 곰의 마을’이라고도 불린다는데 그것은 마을의 산등성이에서 나무를 잡고 열심히 열매를 따먹는 곰을 보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이 책은 스페인의 각 도시들의 역사와 유래를 잘 설명해주고 현재의 공간이 가지는 의미들을 설명해 주고 있다. 또한 스페인에서 유명한 하몽, 빠에야 등의 음식과 투우와 플라멩고, 스페인에서 예술혼을 불태운 예술가들에 대한 생애와 작품 설명 등 문화, 스페인에서 독립을 외치며 반목을 지속하고 있는 까탈루냐, 바르셀로나에 대해서 비교설명하고 있다. 비록 까먹기야 했지만 이 책은 출판일을 감안하고도 스페인 여행시에는 유용했다.

     

한편, 보수와 진보의 양대 거대 세력들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면서도 바르셀로나는 경제력을 바탕으로 큰 목소리를 낸다. 공업과 상업, 그리고 금융업이 오래 전부터 발전되어 경제기반이 집중되어 있으므로 세금의 액수도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 그래서 생긴 말이 세비야 사람들은 춤추고 노래하면서 인생을 즐기지만,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일하면서 이들을 먹여 살린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까딸루냐 독립에 관한 투표와 관련 이야기가 뉴스를 장식할 때 난 이 책의 위의 글을 생각하며 씁쓸한 기분에 잠기곤 했다. 구걸도 직업이라 생각하는 스페인식 철학의 관점에서 보면 까딸루냐는 스페인의 정체성에서 너무 멀리 가 있다. 하지만 이 끝없는 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살아가기 위한 까딸루냐의 신철학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의 삶이란 세비야와 바르셀로나의 삶 두 가지가 모두 조화롭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니까. 개미와 베짱이의 도시화가 바르셀로나와 세비야라니.


독일의 우중충한 날씨가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내면의 세계에 대해 골똘하게 생각하는 시간적 여유를 제공하고 철학을 낳게 하였다면, 스페인의 강렬한 태양은 그 푹푹찌는 광야를 무방비로 걷고 있는 사람의 머리를 정면으로 강타하여 미쳐버리게 하였으니, 내면의 생각이고 뭐고 걷다가 포기하고 풀썩 주저앉거나 살기 위해 쉽게 흥분하는 가슴으로 돌진하는 것밖에는 다른 선택이 없을 것 같다. 


  스페인에 대해 반복적으로 갖는 이미지는 정열과 정념과 같은 강하고 화려한 단어다. 스페인을 얘기할 때면 붙는 수식어를 반복적으로 들어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을 지도. 그렇지만 그 모습을 찾으려 하기에 그 모습만 보이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돈키호테의 후손이자 수많은 광기와 정념의 예술가들을 생각하면 영락없이 그렇소, 할 수밖에는 없기도 하다. 그렇기에 스페인에설 살고 스페인에서 공부한 두 저자의 스페인에 대한 또다른 견해 또는 평판에 시선이 간다. 어느 나라든 세월은 흐르고 인간도 교류를 통해 다양한 시각을 가지기 마련인데 고착화된 이미지 하나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문화공존의 문화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에는 개인주의라 불리는 특성이 함께 했다는 것은 정열의 색과는 달라서, 또 생각하게 된다. 왜인이 정열은 개인주의보다는 함께, 다같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니까 말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고슴도치와 같아서 사회란 공간에서 살아가지만 자신을 그 사회에 끌어들이려는 순간에는 가시를 곤두세우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가 만들어서 내가 먹으면 된다는 식의 생각이 이들의 지배적인 가치관이다.


스페인인들의 개인주의는 개인이 자신이 편한 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뒀으며,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하고 원주민들과 자연스럽게 합해질 수 있었던 이유도 피부색과 문화의 차이를 두면서 정복해나갔던 영국인들과는 달리 스스로의 기분과 판단에 따라 이뤄진 개인주의의 결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에도 그렇소, 외에 달리 뭘 말해야 할까 싶다. 그런가?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렇‘소’하니 스페인의 검은 황‘소’가 생각난다. 스페인의 고속도로에는 아무 커다란 검은 황소 간판을 볼 수 있다. 이것이 스페인의 특성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겠거니 여겼건만 단지 개인회사 ‘오스보르네’의 셰리주에 대한 광고물이란다. 더구나 법적으로 철거처분을 받았음에도 회사 로고만 지운 채 그냥 서 있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면서 자연적으로 스페인의 상징물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투우 때문에 황소 간판이 스페인과의 연결고리가 되었으리라 생각하긴 하지만 11월 11일이 빼빼로 데이라는 기념일이 당연시되는 것처럼 상업적인 이유에 의한 억지스럽고 조작된 기념일, 상징은 달갑지 않다.

  검은 황소 간판이 스페인 사람들 스스로가 상징으로 내세웠다기보다 타국의 관광객들이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그렇게 인식하고 확산된 게 아닌가 싶다. 스페인 고속도로에 가면 온통 검은 황소 간판이 있으니 찰칵 인증샷을 남기라고. 상상이긴 하지만 인간세상은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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