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황금방울새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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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초인종을 울려라


황금방울새, 도나 타트, 허진 (옮긴이), 은행나무, 2015.6.


  도나 다트를 알게 된 것은 『황금방울새』가 퓰리처상 수상작이었기 때문이다. 수상작이라는 홍보 덕분에 작품을 접할 기회가 많아지니까. 이후 문학상 수상작가라는 타이틀과 함께 작가의 초기 작품들이 연이어 번역·재출간된 것을 보건대 역시 공신력있는 상의 위엄이 작품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걸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도나 다트는 과작 작가로 10년 간격으로 세 작품을 출간했다. 작년 번역출간된 『작은친구들』을 도나 나트의 최신작인 줄 알고 읽었건만 도나 다트의 최신작은 『황금방울새』다. 이 책을 읽고서 도나 다트를 알게 되었지만 도나 다트에 대한 인상은 강하게 자리잡았다. 읽을 작품도 얼마 없는 작가인데도 도나 다트의 신간을 기다린 것은 두 작품에 대한 인상 이외에도 작가 자체에 대한 매력 때문이었을 거다. 어쩌면 이것도 출판사의 홍보 전략 덕분일지도 모르겠다만.

  도나 다트에 대한 수사는 ‘천재 작가’로 시작한다. 고전의 작가들에게서 이 수식어를 종종 보기는 했지만 현대 작가들에게 이런 수식어가 있었던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거침없이 ‘천재 작가’로 불리는 도나 다트에 대한 궁금증이 그리고 작가의 기이한 성격의 묘사가 작가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불러일으켰다. 언뜻 작가의 소설 『비밀의 계절』 속 등장인물의 성격들을 모두 조합한 캐릭터로 느껴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면서 날카롭고, 냉정하고 이지적인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인상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비밀의 계절』의 느낌이 강한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전히 작가에 대한 인상은 강렬하다.

  이런 강렬한 작가의 소설 『황금방울새』는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연을 쫓는 아이』가 생각나게 했다. 작가의 전작 광기가 많이 빠진 느낌으로 삶에서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소년이 등장하기 때문이었을까. 이 소설은 카렐 파브리티우스의 실제 그림 <황금방울새>를 소재로 하고 있다. 횃대에 발이 묶인 갈색의 새 한 마리의 모습을 그린 그림이다. 명화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그림이 그려지는 상황이나 그림의 장면과 같은 모습이 묘사되는 그림을 소재로 한 소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그림을 소지한 상황에서 시작되고 그림의 내용보다는 소유한 상황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미술관 폭탄 테러로 엄마를 잃고 홀로 살아남은 열세살 소년 시어도어 데커는 우연히 손에 쥐게 된 그림과 함께 미술관을 빠져나온다. 술주정뱅이 아버지는 집을 나갔고 엄마를 잃은 소년 시오는 친구 집에 맡겨지면서 새로운 인생이 전개된다. 소년 시오의 성장의 이야기는 사고의 기억과 상실감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순탄치 않을 것임을 짐작케 한다. 방황하고 방랑하는 시오의 이야기는 그날 폭발한 미술관엘 가게 된 것이 전시된 황금방울새 그림을 엄마가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었음을 안다. 비가 오기 때문에 미술관엘 들렀기 때문이 아님을 안다. 그가, 학교에서 흡연으로 정학을 당했고 엄마와 함께 학교에 가는 길이었다는 것이 먼저임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모두가 찾고 있는 명화의 절도범이라는 죄책감과 불안, 두려움까지. 그리고 불행가운데 행복하게 살아가려는 시오를 사랑이 아닌, 돈을 이유로 함께 하려는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등장까지. 소년 시오는 미국인들의 반항하고 방황하는 전형적인 십대들의 모습 그대로 술, 마약, 도둑질에 빠진채 살아간다. 악의가 가득한 모습이 아니라 그저 한없이 흐느적거리는 그런 상태로 말이다.


반항. 공허하고 헛되고 견딜 수 없는 삶. 내가 삶에 충실해야 할 이유가 뭘까? 하나도 없다. 운명을 먼저 한 방 먹이면 어떨까? 책을 불 속에 내던지고 끝장내면 어떨까? 현재의 공포는 끝이 보이지 않았고, 내 안에서 비롯된 공포만이 아니라 외부적이고 경험적인 공포들이 줄지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약은 충분히 있으므로 약을 두껍게 늘어놓고 흡입한 다음 행복하게 쓰러질 수도 있었다. 고결한 어둠, 별들의 폭발.


  미술관 폭발 현장에 있던 어떤 노인이 죽기 직전 잘 지켜달라며 부탁한 그림을 마치 엄마의 분신인 양 여기며 살아가는 시오의 그림에 대한 집착만큼이나 명화 황금방울새를 찾기 위한 미술관과 언론, 경찰의 움직임도 지속적이다. 뺏기지 않으려는 자와 찾으려는 자 사이의 대립이 예술품 암시장과 얽혀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린 소년 시오의 상실감과 좌절이 시오의 생각과 행동을 어떻게 만들어 가는지를 보는 것은 슬프고 안타까우면서도 흥미롭다. 왜 수많은 그림들 중에서 작가가 <황금방울새>를 선택했는지, 그림의 내용과 이야기의 상관성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바꾸게 한다. 소설을 읽고 나서 다시금 그림을 보면 홰에 갇힌 방울새의 모습에서 소년 시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황금방울새가(다른 그 어떤 새도 아니고 오직 이 새가) 잡히거나 잡힌 채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파브리티우스가 볼 수 있는 어느 집에 장식되어 있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이 새는 왜 자신이 그토록 불행하게 살아야 하는지, (내가 상상하기로는) 소음에 깜짝 놀라고, 연기와 멍멍 짖는 개들, 음식을 만드는 냄새에 괴로워하면서, 술주정뱅이와 어린애들에게 놀림을 당하면서, 더없이 짧은 사슬에 묶여 날지도 못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아이라도 이 새의 존엄성을, 아주 자그마한 용감함을, 솜털과 연약한 뼈를 볼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고, 절망조차 하지 않고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새. 세상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하는 새.


  ‘초록색 초인종을 울려라‘. 시오가 미술관 폭발 현장에서 맞이한 운명의 순간에 그림을 안겨준 노인이 한 말이다. 미술관 폭발로 인해 삶의 변화를 겪게 된 시오에게 초록색 초인종을 누르는 일 역시도 삶의 변화를 바꾸는 숙명이 된다. 황금방울새의 운명처럼 시오가 살아가고 있다면 누군가는 그런 시오의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그 속에서 빠져 나오기를 도와주는 이들이 있다. 불행 가운데에서도 수없이 만나게 되는 인연 중에서도 초록색 초인종이 울린 후 만나는 이들이 시오의 또다른 인생을 가능케 해주는 존재들일 지도 모른다. 물론 초인종을 울려야 알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은.

  묶인 발을 풀고자 한다면 그들의 손을 붙잡는다면 시오의 생이 또한번 달라질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일들은 단한번으로 되지 않기도 하거니와 지속적인 애정이 필요한 일이다. 비극의 상황 속에 빠지는 것은 충격적 사건을 경험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상황을 타개하도록 이끄는 존재가 부재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성장기의 청소년들은 그들에게 금지된 약물에 탐닉하고 나락으로 빠지는 전형적인 일탈과 방황의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이들이 이 상황에서 벗어나도록 이끄는 것은 늘 애정어린 구원자라는 전형적인 등장이 필요하다. 삶에 허우적거리는 이들의 마음을 돌려줄 것은 언제나, 지속적인 애정으로 이끌어 줄 존재가 필요하다.


나는 자신의 불행에만 몰두하던 마비 상태를 벌써 몇 년 전에 벗어나 있었다. 아노미와 의식의 소멸, 관성과 마비 사이를 오가며 나 자신의 심장을 갉아먹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내가 몰랐을 뿐 그 사이사이에 작고 편안하고 일상적인 다정함들이 수없이 많이 있었다. 다정함이라는 말 자제가 무의식적으로부터 떠오르는 것과 같았다. 병원에서 수많은 디지털 기계들 사이로 목소리를, 사람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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