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 - 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송기정 옮김 / 서울셀렉션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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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는 서울, 평양냉면

빛나-서울 하늘 아래, J.M.G. 르 클레지오, 서울셀렉션, 2017.


  왜 서울일까가 가장 궁금했다. 르 클레지오가 친한(?) 작가라는 이야기는 접했기 때문이라고 할지라도 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한국인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썼을 때는 그렇게 써야만 하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한때 알던 이의 이름인 ‘빛나’라는 소녀가 등장하는 이 소설이 ‘서울’이어야 하는 ‘빛나’여야 하는 이유를 알기 위해 책장을 넘겼다.

  소설에서 르 클레지오가 저자라는 사실을 지운다면 외국 작가가 썼다는 것을 알지 못할 정도로 거리 풍경과 사람들의 묘사는 익숙하다. 다르게 얘기한다면 굳이 ‘서울’이어야 하는 이유나 ‘빛나’여야 하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배경을 뉴욕으로 바꾸고 소녀를 ‘제인’이라 불러도 이 이야기가 가진 차별성이 있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굳이 노벨상 수상작가가 ‘서울’을 배경으로 썼다는 이 소설에서 ‘서울’이 가지는 의미는 크게 다가오지 않았다. 익숙해서 그 배경에 대한 묘사에 무뎠을지도 모르겠다.

  하나, 어쩌면 한국이란 나라, 서울이라는 배경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다면 비둘기를 키우는 ‘조한수 아저씨’가 아닐까. 그의 어머니는 전쟁때 할아버지가 키우던 비둘기 한쌍을 데리고 38선을 넘어왔다. 어머니는 언젠가 그 새들이 고향으로 날아가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기를 키우지만 꿈을 이루지 못했다. 조씨는 비둘기가 임무를 완성할 수 있도록 수위로 일하는 아파트 건물 Good Luck! 옥상에서 북에서 온 비둘기 자손을 키운다. 

  분단국가라는 특수한 상황을 가진 한국. 당연 외국인들에겐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들의 사연들이 남다르게 다가오지 않을까. 이 이야기는 현재의 한국이 가진 서사이니까. 클레지오는 한국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 속에 분단국가의 상황을, 고향을 그리는 실향민의 이야기를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고향의 가족을 향해 날리는 메신저 비둘기들의 여행은 환상적이면서도 마음졸이게 된다. 마침내 그 이야기들이 희망을 전하는 이야기로 대체되면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인데 생각하게 된다.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날이라서가 아니라 평화의 상징은 이제 비둘기가 아니라 ‘평양냉면’이라는 글들이 뭔가 벅차오름을 느끼게 하는 날. 이러한 일들이 이어지면 이제 한국에 대해서 서울에 대해서 또다른 이야기가 만들어 질 것이다. 향수에 젖은 그리움 가득한 분위기만을 담지 않은. 비둘기가 날아가며 느껴지는 꿈과 희망을 생각하게 하며 동화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형태의 그런 빛깔로.

  조씨의 이야기는 빛나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의 하나다. 빛나는 전라도 어촌에서 살다 교육은 서울에서 받으라는 부모님으로 인해 서울 고모댁에서 자란다. 고모와 사촌에게서 갖은 구박을 받으며 산다. 우연히 복합부위통증증후군을 앓는 살로메, 김세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는데 빛나가 만들어낸 이야기를 들으며 살로메는 바깥세상을 보고, 상상의 여행을 한다. 소설은 빛나가 들려주는 다섯 개의 이야기로 펼쳐진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는 나도 그들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잘 몰랐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훨씬 명확해 보인다.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서로 연결된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탔던 사람들이 언젠가는 서울이라는 대도시 어디에선가 다시 만날 운명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살로메를 위해서이기는 하지만 그에 따른 수당을 받는 이야기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하는  듯했지만, 이 가상의 이야기들은 빛나가 말하듯 연결되어 있다. Good Luck!아파트에 살고 있다는 연결이 되기도 하겠지만 이야기들을 가만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과 함께 윤회 사상이 전제되어 있다. 대도시 서울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사는 만큼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처하고 있는 상황도 그들 면면도 다르지만 도시 속에서 겪을 수 있는 익숙한 이야기가 현실과 환상의 교차로 진행된다. 빛나는, 이 소설은, 빛나기보다 쓸쓸하고 슬프다.


그녀는 내가 가진 욕망과 이야기에 좌우되면서 구불구불한 상상의 세계를 따라 맹목적으로 나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그녀의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면서 죽음의 시간을 늦추게 하는 에너지가 계속 흐르게 할 수도, 그 흐름을 멈추게 할 수도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다.


  삶과 죽음과 고통과 희망들이 교차하는 살이. 애정이 교차하고 만남과 헤어짐이 이어지는 살이. 살로메의 죽음 후에 더 이상 빛나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게 됐지만 빛나는 “해방될 것 같다”라고 말한다. “현재만 중요하고 산 사람만 중요한 이 큰 도시에서, 이제는 나 자신을 위해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빛나에게 이야기는 살로메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빛나 자신의 세상살이를 견뎌내는 힘이기도 했다. 많은 이야기들 속에서 빛나가 찾아낸 이야기들은 죽음을 앞둔 살로메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얘기이기도 하고 현재를 살아가기 힘들었던 스스로를 먼 미래를 생각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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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의 유령들 - 제2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황여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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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기억

알제리의 유령들, 황여정, 문학동네.


  마르크스가 독일 화폐 모델이 되었다. 통용되기 위해선 가격이 있어야 하지만 0유로. 자본과 적대적이었던 마르크스를 충실히 대변하는 기념 지폐다. 이 세상에서 참 불편한 이름의 대표격이기도 한 마르크스의 얼굴이 10만원권 지폐에 그려진다면 마르크스에게 가지는 불편한 시선들이 거두어질까 궁금해진다. 안타깝게도 마르크스가 한국 지폐 모델이 될 리가 없다. 특정 정당이 거품 무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쨌든 마르크스는 수많은 이들의 경외의 대상이기도 하면서 삶을 힘겹게 만든 탁월한 존재였다. 히틀러와는 차원이 다른 형태이긴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현재진행형이면서 히틀러급으로 반응하기도 하다. 그리고 소설『알제리의 유령들』에서도 사람들을 힘겨운 삶으로 이끄는 존재감을 보여준다. 연애소설처럼 그려진 징과 율의 이야기가 어떻게 마르크스에게 가 닿는가. 가볍게 단문으로 쳐내는 글들은 마르크스가 지닌 존재감처럼 묵직한 이야기를 전한다. 과연 이 이야기를 믿어도 좋은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연극이 끝난다. 마르크스가 쓴 유일한 희곡의 막이 오른다.

  시공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는 유령을 마주한 듯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린다. 몇 번이나 반복재생된 희곡 <알제리의 유령들>이 마르크스 저작이란 이름을 달고서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도드라지게 드러난다. 아니, 마르크스란 이름만 보면 부르르 떠는 권력이 존재하는 건가. 시절의 음률을 함께 나눈 관계들이 고통받고 상처받으며 서로에게 파괴된 음들을 던진다.


시대는 운명을 다한 것들을 돌아보지 않는다. 흔적을 추슬러 그것들을 잊지 않게 만드는 건 언제나 몇몇의 개인들이며, 그들조차도 기력이 다할 때가 온다. 비단 연극판의 일만은 아닐 것이었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현실은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도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기적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기적을 만드는 건 언제나 사람이며, 그래서 결국엔 헷갈리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는, 사회주의는 운명을 다했나. 다해가는가.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더욱 민감하게 이 단어들에 반응하는 나라로 대한민국만한 데가 있을까. 대학생들의 연극적 상상력이 만든 연극을 놓고 진실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권력이 원하는 이념의 잣대로 존엄을 말살하고 생명을 파괴하던 시대는 소멸되었나. 새로운 흐름들이 분명 이어지고 있으니 달뜨는 마음이야 당연하지만 좀처럼 편하게 받아들이기엔 여전한 이념용 말들이 곳곳에서 난동을 부리는 것도 듣고 있어야 한다. 종북과 좌파라는 단어만 붙이면 진실은 상관없는 이들이 있으니 세상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진실에 눈감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사는 이들의 세상은 얼마나 좋으려나.


모든 이야기에는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걸 보고 들어도 각자에게 들어보면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지. 내가 보고 듣고 겪은 일도 어떤 땐 사실이 아닐 때도 있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 채 겪었거나 잘못 기억하고 있거나. 거짓이 사실이 되는 경우도 있지. 누군가 그걸 사실로 믿을 때. 속았을 수도 있고 그냥 믿었을 수도 있고 속아준 것일 수도 있고 속고 싶었을 수도 있고. 한마디로 경우의 수가 너무 많아. 애초에 자네가 판단할 수 없는 문제라는 거야. 그렇다면 애초에 판단할 수 없는 문제이니 판단을 안 할 건가?


  실제인지 허구인지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헤아리는 동안 거짓이 진실을 파괴하고 진실이 필요치 않은 형태를 만들기도 한다는 것을 소설은 보여준다.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것도 사람 진실에 상관없이 구는 것도 사람. 그리하여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은 사람. 그 잔인하고 처절한 유린에 유령처럼 생을 배회하는 일들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져 생에 긴 파국을 남기고 쓸쓸함을 남긴다.


기억으로 인해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이 변해도 계속해서 자기를 일관된 자기로 느낄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의 가장 큰 피로감은 바로 그 자기감에서 벗어날 도리가 없는 데서 오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알제리에 갇힌 것이 아니라 자기라는 폐쇄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자유는 아니었다. 자유는 역설적이게도 다시 그 시간 속으로 들어가야 얻어질 수 있는 것, 자기가 이전의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자기로 존재했던 기억을 가지고 다시 이전의 자기로 합류할 때 비로소 자기와 비자기에 폐쇄되었던 자기가 자기이기도 하고 자기가 아니기도 한 자기가 될 수 있고, 그때 경험되는 것이 자유였다.


  부모들이 겪은 일들로 어릴 적부터 잘 지내온 징과 율이 오랜 시간을 서로 그리움을 간직한 채 서로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것이 회복되지 않은 상처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그토록 세상을 서로를 배회하고만 있는 것은 물음을 갖게 했지만 생이란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니까. 부모들처럼 징과 율은 자기라는 폐쇄된 시간 속에서 빠져나오기 위한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인지도. 시대가 겪은 기억이 세대에게 전해질 때에 그것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필요한 것인지도. 종북과 좌파라는 두 단어로 진실과 거짓에 공간에 빠지는 이들이 다음 세대들의 자유를 왜곡시키고 말살시킬 때마다 청춘의 세대들의 정신이 회복되는데 무한한 시간이 필요로 된다는 아는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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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다빈치 art 18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신성림 옮김 / 다빈치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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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을 보는 시선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J.M.G. 르 클레지오 저, 다빈치, 2008.


  프리다 칼로의 바비인형이 제작되었다는 뉴스를 보았다. 칼로의 인형은 칼로가 입었던 옷을 입고 칼로의 상징인 눈썹을 하고 닮은 듯 아닌듯한 자태로 서 있다. 3월 8일 여성의 날을 맞아 미국 완구회사가 제작했다는데 현재는 가족들의 초상권 제기로 판매금지 상태라고 한다. 가족이라는 얘기에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자녀를 먼저 생각했다. 그들에게 자녀는 없고 그들의 부모도 형제들도 사망했을 테니까. 기사엔 칼로의 조카딸과 가족이 초상권을 독점 소유하고 있다고 되어 있다.

  칼로가 살아있다면 어떻게 했을까. ‘영감을 불어넣는 여성’으로 선택되어 자신을 닮은 바비인형의 탄생을 어떻게 바라봤을까. 초상권 제기로 인해 판매 금지가 되었다는 한국 기사엔 ‘여류 화가’라고 강조되어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까. 여성을 억압한 관습에 저항한 페미니스트라 소개하면서 ‘여류 화가’임을 절대 놓치지 않는 기사를 보면서 칼로는 뭐라고 말했을까.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클레지오는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기술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지만 무게중심은 프리다 칼로 쪽으로 기운다. 프리디 칼로의 전생애를 중심으로 한다면 리베라는 연인이자 남편으로 등장하고 있다. 물론, 그 영향력은 무시못할 만큼이긴 하다. 화가로서 프리다 칼로의 그림도 책속에 나타나는데 그림 때문에라도 프리다 칼로에 대한 인상이 강하게 남는다. 프리다가 자화상을 주로 그렸기 때문이다. 화가로서는 칼로보다는 디에고의 활동이 방대하고 ‘화가’로서의 명성이 큰 것 같다.

  반면에 프리다 칼로는 그림보다도 자신의 생애 자체로 회자된다. 프리다는 한순간도 편치 않고 급박한 삶속에 있었다. 프리다가 살아간 시대는 1907~1954년의 멕시코. 프리다는 화가로서의 명성보다는 유명한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끔찍한 사고 후에도 굳건히 생을 살아간 여성으로 위치되었던 삶이기도 했다. 이런 프리다에 대한 평가는 차츰 변화되어 혁명가로서 페미니스트로서 강렬한 인상을 전한다.


이십 년이 지난 뒤에도 프리다 칼로는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 기막힌 시절 자신이 믿었던 모든 것, 만났던 모든 이들, 그들이 투쟁하던 이상을 고스란히 기억 속에 간직했다. 사실 그녀의 그림은 혁명적이지 않고 벽화주의 화가들의 웅장한 작품처럼 정치적 참여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혁명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그녀의 예술은 참여예술이 아니다. 그녀의 투쟁이 내면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일상과 그녀의 고독한 삶에 대해, 고통의 감옥에 대해, 그녀의 자존심이 입은 상처에 대해, 그리고 남성이 지배하는 멕시코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섯 살에 소아마비로 인해 장애를 갖고 있는 프리다가 18세에 겪은 버스 사고는 ‘끔찍했다’는 한마디 말로 하기엔 프리다의 고통을 너무나 가볍게 만드는 것 같다. 버스와 전차가 충돌하며 금속 기둥이 프리다의 몸을 관통했고 폭발한 버스의 잔해가 프리다의 몸속에 박혔다. 수술은 끝이 없이 반복되었고 회복은 더뎠고 소녀가 가진 꿈도 날아가 버렸다. 늘 침대에 있어야 했던 프리다는 자신의 고통을 그림으로 그리며 삶을 위한 투쟁을 벌였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프리다가 화가인 디에고와 결혼하는 일은 없었을지 모르겠다. 프리다에게 있어 그림이 고통을 견뎌내는 힘이었다면 프리다의 그림을 알아봐준 디에고에게서 고통을 나눌 위안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스물 한 살 연상의 바람둥이 화가에 대한 끌림은 의지하고픈 마음과 자유스럽지 못한 자신의 상황을 투사한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 아닐까 생각하기도 한다. 어쨌든, 내가 어찌 그 심정을 알겠으며 프리다가 끝없이 한 남자로서 ‘사랑’했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사랑이 고통을 더하는 데 결코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디에고의 심각한 여성 편력과 동생과의 불륜을 끝없이 참은 것이 사랑의 힘이었을까. 신체적 고통을 넘어선 정신적 고통을 주는 존재, 디에고 리베라. 프리다 칼로의 남편. 왜 프리다는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 역할을 놓지 못했을까. 상처입은 프리다의 자존심도 고통을 이겨낼 의지도 모두 프리다의 내면에서만 일어나고 있었다. 프리다는 계속 ‘디에고의 여자’를 놓지 못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프리다는 심각한 몸 상태에도 몇 번의 유산에도 아이 갖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또다시 상처받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 것에. 프리다가 디에고를 떠났을 때는 유산 후였고 여전히 디에고는 자신의 습성을 버리지 못했으니 프리다의 인내심이 다한 것은 디에고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자기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혼과 재결합을 제시한 것은 항상 디에고였다. 그래서인지 프리다 칼로의 ‘페미니스트’로서의 부각은 강한 울림으로, 느낌으로 와 닿지는 않는다. 하긴 프리다 스스로 페미니스트라 자처한 적은 없다.

  초기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활동 또한 디에고를 위해, 디에고에 의해서인 것도. 프리다 칼로를 처음 마주했을 때는 프리다에게 강렬하게 매료되었던 것 같은데 프리다의 그림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시선을 끄는 힘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쩜 프리다에 대한 매혹은 프리다 생애 자체가 주는 스토리에 대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새삼 다시 이 책을 훑어보며 처음과는 달리 프리다의 ‘주체적’인 면을 찾게 된다. 디에고의 엄청난 ‘성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그의 명성은 줄어들지 않았고 디에고는 그런 일로는 화가로서 혁명가로서 달리 평가받는 일은 없었다. 오로지 그의 아내 프리다만이 상처입었을 뿐이다. 

  그런 상처를 프리다는 그림으로 그렸다. 한편으로는 디에고로 인해 상처와 고통받은 아내로서, 여성으로서, 인간으로서의 고통을 그림으로 형상화낸 것이 의지와 주체적인 표현이기도 하겠다. 이런 면에서 예술이 가진 힘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말할 것을 알았던지 프리다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다. 프리다가 ‘원하는 여인’은 어떤 상이었을까. 프리다는 무엇을 위해 싸웠는가.


광기의 장막 저편에서는 내가 원하는 여인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난 온종일 꽃다발을 만들고 고통과 사랑과 다정함을 그리면서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그러면 모두들 말하겠지. 불쌍한 미친 여자라고(난 무엇보다 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리라). 나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겠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모든 세계와 조화를 이루리라. 내가 살아갈 날과 시간과 분은 내게 속한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속하겠지. 나의 광기가 작업 속으로 도주할 수단이 되지 못할 테니, 다른 사람들이 나를 그들 작품의 포로로 가둘 것이다. 혁명이란 형태와 색채의 조화이며, 모든 것은 생명의 법칙에 따라서만 움직이고 머문다. 누구도 다른 누군가와 헤어질 수 없다. 누구도 자기 자신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는다. 만물은 전체인 동시에 하나이다. 불안, 고통, 쾌락, 죽음은 존재를 유지할 유일한 방법이고 결국은 하나이다.


  쉬이 무너지지 않고 초기 생의 고통을 예술혼에 투영하였던 프리다의 삶은 경이롭다. 아마도 그렇기에 프리다의 삶이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들 두 화가의 삶이 너무나 비교된다. 내가 그들의 삶을 모르기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하는 이 책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클레지오 작가는 이들의 삶을 한편의 소설처럼 엮어 놓은 솜씨가 있다. 실존 인물의 삶을 전하는 클레지오의 시각에 영향을 받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프리다의 힘겨운 삶과 그 고통의 면면들이 연민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반면에 디에고는 너무도 열정적이고 천재적인 화가이자 혁명가로 부각되는데 프리다는 늘 디에고에 대한 사랑에 목말라 하는 존재로 그려져 있는 것도 같다. 제 아무리 디에고를 언제고 사랑했다 하지만 늘 디에고로 귀결되는 이 집착과도 같은 사랑은 아름답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다가오기 보다는 환멸스러움을 더하기도 한다. 어쩌면 불편하고도 짠한 이 연민은 이렇게 묘사한 작가의 언어때문 아닌가 싶기도 하다.

  부부 예술가의 삶은 전문가적인 역량에선 늘 여성이 남성보다 ‘못한’ 것으로 표현되는 듯하다. 여성의 예술혼은 늘 남성에 ‘의해’ 강화되는 것으로 만든다. 늘 고정적으로 묘사되는 예술가로서의 남성과 여성, 부부들. 그것이 사실일 수밖에 없는 요인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더불어 늘 ‘그렇게 보는’ 시각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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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소문…?


언어의 온도-말과 글에는 나름의 따뜻함과 차가움이 있다, 

이기주, 말글터, 2016년 8월.


  작년 봄이었던가. 선물을 받았는데 1년이 지나도록 읽지 못했다. 책이란 소유하게 되면 어쩐 일인지 최대한도로 늦게 읽으려는 의지가 발동하는 것 같다. 어쩌면 뭔가 손이 가지 않은 이유가 은연중에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매번 이 책이 베스트셀러라는 광고를 마주하기도 했는데 얼른 읽을 생각을 하지 못한 이유가. 분명 그때에는 제목에 끌렸고 책을 감싼 보랏빛 디자인에 끌렸고 읽고픈 감정을 가졌다. 이 정도 페이지의 에세이는 한시간이면 읽게 되는 점을 고려하면 일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 책을 위한 그 한시간의 짬을 내지 못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일년의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에세이류를 넘어서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이 책을 이제는 ‘나도 읽었다’에 동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입소문으로 만든 베스트셀러’라는 문구를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다. 100만부를 돌파한 책이니 당연히 부럽지만 나는 또한 베스트셀러와 나의 궁합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좋다고 하는데, 나는 왜 아닌가. 나의 시선은 감정은 도대체 무얼까. 거기에 더해 도대체 ‘입소문’의 주체가 누구인지가 궁금해졌다. 희한하게도 책을 읽었다는 내 주위의 절대가 ‘좋지 않았다’라고 얘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들과 먼저 이야기했더라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아니면 어쨌든 베스트셀러라니 사람들의 소문으로 이룬 힘이니 그 힘이 궁금해 읽었을까.

  책을 읽고 난 후에 책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으니 그들의 관점은 내게 적용되지 않았다. 그러니 전반적으로 이 책에 대한 감상을 이야기했고 다른 이들의 감상을 들었고 좀더 깊이 들어가 작가에 대한 이야기와 뒷담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내가 이 책을 읽고 처음 느낀 감정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거였다. 정확히는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책이든 개인의 취향을 타겠지만 에세이는 저자의 생각과 실생활모습이 은근히 드러난다. 에세이가 주는 이야기들과 문장들이 감정을 더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의 끌림은 글을 읽고 난 후 절실하게 다가오는 진정성의 힘 아닐까. 알지도 못하는 저자의 글에서 뭔가 모르게 진솔하고 정겨운 기분이 아니라 한뜻 꾸며낸 듯한 기교가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가지지 않고 자꾸만 멀찍이 떨어져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를 느꼈다. 다른 이들과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까진 베스트셀러에 대한 나의 옹졸한 질투인가 생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난 꿋꿋하게 맘에 들진 않았다라고 말했고 다른 이들이 전해준 어떤 입소문에 대해 들었다. 작가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고 어쩌면 홍보라고 할 수 있는 방법들에 관한 것도 있었다. 정치적 성향에 관한 것이야 따질 일은 아니지만 닐로의 차트 석권, 국정원과 드루킹의 매크로 조작 등을 보면서 ‘언어의 온도’를 생각했다. ‘입소문이 만든 베스트셀러’. 나는 언어의 온도에 관한 입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가.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감정을 같이 느낀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내가 옹졸하게 베스트셀러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비판적인 시각을 보내려는 힘을 작동시키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어 안심했다.

  사람들의 취향이 다를 수 있음을 알면서도 가끔은 이렇게 소심해진다. 많은 이들이 좋아한 책이나 영화가 내 취향이 아닐 때면 말이다. 그러다가 취향 별나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굳이 기껍지도 않고 말이다. 더해서, 나는 좋다 좋다 하는데 그 좋음을 알리고 싶은데 뭔가 조~용할 때도 기꺼울리 없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이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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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구본형과 함께 일상에서 빛나는 나다움 발견하기 - 딸의 아름다운 변화 이야기
구해언 지음 / 예지(Wisdom)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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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를 헤매는 그대에게

 

아빠 구본형과 함께, 구해언, 예지(Wisdom), 2018.

 

   변화해야 할 때 변할 수 있음은 중요하다. 하지만 변화는 항상 급박하게, 원하지 않음에도 해야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온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변하지 않는 것에 더 많은 수식어와 무게감을 두었지 않은가 싶다. 변하지 않음이 지니는 가치처럼 변화의 가치 또한 진중한 무게를 지닌다. 무엇보다 변화라는 말은 실행력을 안고 있기에 무게감이 있다. 언제부터 사회가 ‘변화’에 대한 가치를 두게 되었을까.

   변화를 위해서는 준비성이 필요함을 깨우쳐 능동적으로 행동하게끔 한 구본형의 ‘변화경영사상’은 업무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인간관계에서 유용하고 필요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변화’를 항상 급박하고 어쩔 수 없기에 하는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형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변화’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게끔 한, ‘변화’를 이루어내는 방법을 세상에 널리 알린 변화경영사상가 구본형의 5주기다. 그 사상이 현실에서 오롯이 이루어가는 과정을 지켜본 딸이 5주기를 맞아 기억의 책을 내었다.

   딸은 아빠와 함께 살던 집이 영원히 다른 사람에게로 가게 되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상실감을 가진다. 슬픔으로 침잠하는 대신 딸은 아빠와의 기억이 가득한 그곳을 되돌아보는 여정을 시작한다. 익숙했던 집을 하나하나 되새기며 기억 속 아빠와 함께 했던 날들을 떠올리는 그 과정은 애틋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집을 정리해야 하는 현실적 압박감을 가지며 ‘잊기 위한’ 과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떻게 살아갈까’에 관한 되새김의 과정이었다. ‘꿈과 현실, 그 사이의 깊은 심연에 건강한 다리를 놓아라.’ 아빠의 말씀처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미래를 굳건하게 살아가기 위한 자신의 가치를 세우는 과정이었다.

   딸은 맹목적으로 아빠의 말을 소환하지 않는다. 늘 보던 정원의 나무 마다마다, 함께 걷던 동네 산책길에도 아빠의 기억은 어리어있었다. 딸은 일상생활에서 실천하며 보여주었던 아빠의 메시지를 해석하고 다시 자신의 상황에서 재해석한다. 그렇게 자신이 살아가야 할 뿌리를 다지며 나만의 가치로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 책이 아빠의 이야기가 아니라 구본형의 딸이 아니라 ‘구해언’이라는 자신의 궤적을 그리는 모습으로 대치된다.

   이승욱과 김은산은 『애완의 시대』에서 “정서적인 지체와 정신적인 미숙함의 문제를 제대로 성찰해보지 못한 채 미성숙한 어른으로 살아가게 될” 세대들에 대해 걱정한다. 젊은 세대는 부모에게 ‘길들여진’ 존재이고 부모 세대는 그들 사회에 ‘길들여진’ 존재라고. 배불리 먹기 위해 ‘순응하는 국민’으로 살아온 세대들은 물질적 풍요로움을 유산으로 남겨주고 정신적인 유산을 남겨주지 못했다. 그런 면에서 저자는 남들보다 풍요로운 유산을 물려받은 셈이다.

   하지만 유산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전적으로 유산을 받는 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  저자는 자신을 소심하고 주눅들어 있던 아이라고 얘기한다. 다른 사람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조급함에 불안하고 초조해 하며 살았다고. 감정의 부침 또한 심해 자괴감에 빠져 있던 나날들 또한 많았다고 말한다. 그런 저자가 의지하던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깊은 우울에 빠지지 않고 이렇게 책을 낼 수 있었던 것을 보면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는지를 느끼게 한다.

 

꿈을 가지고 사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것은 사람을 살아 있게 하고, 일상을 전혀 새로운 날로 바꾸어 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증거가 필요한 존재다. 즉, 꿈을 이루기 위한 한번의 행동에는 유통기한이 존재하기 때문에 결과물을 만들어 낼 때까지 끊임없이 움직여야만 멋진 계획이 나의 현실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저주이자 희망이다.

 

   삶에서 어려움을 느낄 때마다 해결치 못한 고민에 힘겨울 때마다 딸은 아빠에게 의지했다. 아빠는 특별하게 가르치는 말 한마디 없이도 문제를 해결해가도록 이끌어 주는 존재였다. 이제 아빠를 잃은 딸은 아빠의 말 한마디를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삼아 이 세상의 미로를 당장 빠져나가려 애쓰지 않고, 그 미로를 탐색하며 즐기며 나아가고 있었다. 책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초조하지 않다. 다감하고 굳건하다. 

   아빠가 준 실타래를 쥐고서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며 탐색하며 삶을 다져가는 저자의 정신적인 성숙함을 보고 있으면 젊은 세대에게 가지는 불신의 눈을 거두라고 말하고 싶다. 또한 저자가 배우고 느낀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널리 퍼뜨리기를 응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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