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의 저택 폴라 데이 앤 나이트 Polar Day & Night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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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무르다

시월의 저택, 레이 브래드버리, 2018-01-22.


  환상적이고 서정적이다. 시각적 이미지로 구현된 소설의 풍경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 버튼 감독의 영화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싶은 기이한 매혹이 있다. 오랜 시간 씌여진 연작소설이라지만 『시월의 저택』이란 제목 아래 일렬로 모이기에 어색함은 없었다. 워낙 기이한 인물들이 드나들기에 이야기의 전개가 느슨하거나 건너뛰더라도 상상력으로 메꾸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게 된다. 다만, 상상의 나래가 작가가 제시하는 것에 비해 모자랄 뿐.

  다양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시월의 저택으로 모이는 것은 가족들의 파티를 위한 것이지만 그들이 ‘기록’되기 위함이다. 무수한 시간을 사는 이들, 그들은 그러니까 유령이고 오랜 시간 살아 있어 결코 끝나지 않을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의 이야기가 기록되려면 하나의 마침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유령들이 머문 공간, 시월의 저택이 존재했다가 사라지고 그 모든 것을 그려낼 존재로 유한한 인간인 티모시가 등장하는 것이 그래서 필연적으로 느껴진다.


넌 찾아온 게 아니란다. 우리가 너를 찾아냈지. 셰익스피어로 발을 싸고, 포의 어셔 가를 베개 삼아 바구니 안에 들어 있었단다. 네 윗도리에는 ‘역사가’라는 쪽지가 핀으로 꽂혀 있었지. 너는 우리에 대해 적으라고, 목록을 만들라고, 태양에서 날아 내려오는 모습과 달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록하라고 보낸 거란다. 하지만 어쩌면 너도 저택이 불렀다고 할 수도 있겠구나. 너는 글을 쓰고 싶어 조바심치며 작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으니 말이다.


  신성한 빛과 생명의 언약에 대해 말하던 성인 티모시의 이름을 부여받은 필멸의 존재인 티모시가 시월의 저택의 가족들에게 스며들어 어떻게 시월의 저택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가족들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기록한다. 마음으로의 가족뿐만이 아니라 신비한 능력을 지닌 그들처럼 되고 싶은 티모시는 유한한 존재인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며 내내 불멸과 필멸, 삶과 죽음이라는 고뇌를 생각하게 이끈다. 어쩔 수 없이 인간이기에 티모시에 동화되어 자유롭게 날거나 타인의 생각속을 넘나들거나 벽을 뚫고 들어오거나 나무 위에 살거나 땅속에 살다가 17년 만에 비가 내리면 물을 타고 흘러나오기도 하고 무리를 지어 뛰어나오기도 하는, 먼 옛날 이미 죽었거나 어떻게 해도 죽을 수 없는 이 유령가족들을 신비롭게 바라보며 동경한다. 결국엔 죽지 않는 삶에 대한 동경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령 가족들은 말한다. ‘삶을 서두르라‘고. 죽음은 신비로운 것이라고.

 

“삶은 방문일 뿐이며, 잠으로 완결되나니. 나는 죽음이라는 잠에서 찾아왔으니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거야. 생명이라는 잠 속에서 쉬기 위해 바삐 달려가는 거지. 내년 봄이 오면 나는 누군지 모를 아가씨나 부인의 벌집 속에 깃들인 씨앗이 되어, 생명을 받아 영글기를 기다리게 될 거야.”  


  그들은 분명 떠나갈 것이니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위로처럼 삶에 대해 말한다. 현실과 환상 속을 넘나드는 이야기에서 유령의 시선으로 보면 죽음을 아는 것이 환상이 되는지도 모른다. 현재의 삶에 충실하라고, 유한한 삶을 즐기라고 말하는 그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안인지도 모른다.


“천국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 도착한 죽은 이들에게, ‘살아 있는 동안 그대는 열정을 알았는가?’라고 질문을 던지는 작은 목소리라고 적어라. 만약 답이 ‘그렇다’라면 그는 천상에 들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고 답하면 지옥에서 불타오르게 될 것이니.”


   그 삶이 행복한가. 영원한 그 삶, 그에 대한 대답은 ‘기억’이란 측면에서 대답된다. 그들은 시간은 무거운 짐이라고 말한다.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무수한 전화의 현장을 분노와 파괴와 공포의 시대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이야기와도 같다. 또한 이미 죽어 있는 세계일뿐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신비하거나 기괴한 능력을 가지고 사는 그들은 이미 삶과 죽음의 세상을 넘나들은 그들은 끊임없이 티모시에게 살아 있기를, 죽더라도 살아 있는 삶을 주문한다. 워낙 신비로운 환상의 세계처럼 펼쳐져 유령가족들, 일족들의 삶에 혹하지만 신비롭다는 것 속에 왜인지 모를 슬픔이라 느낌이 사그라지지 않는다. 아주 먼 뒷날 방문한 오래 묵은 집을 바라보는 것처럼 진한 향수와 서글픔이 공존하는 시월의 저택에서 시간이 주는 쓸쓸함을 곱씹게 된다. 이상하게도 책을 덮고 나면 한번의 삶이 훅, 지나가버렸다는 느낌이 든다. 지난 사진첩을 들춰보고 있었던 듯이. 아직 남은 삶을 향해 행복의 시선을 돌리고 싶지만 아직 남은 사진첩이 남아 나를 끌어당기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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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 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곰돌이 푸 시리즈
곰돌이 푸 원작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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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우~잔소리


곰돌이 푸,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아직 행복을 기다리는 우리에게 


  어린 시절의 동화, 만화를 다시 보는 일은 옛 기억이 떠올라서, 그때의 감정에 젖고 싶어서일지 모른다. 곰돌이 푸에 관한 관심은 그 연장선이었을 거다.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책이었지만, 생각했던 것에 미치지 못해서 ‘멈춤’보다는 주루룩 책장이 넘어간 책. 다만, 곰돌이 푸와 친구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위로받았다. 그림책마냥 그림들이 좋았다.

  하필이면 이 책을 읽기 전 『긍정의 배신』을 읽은 것이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모르긴 해도 그럴 것이다. 게다가 긍정적이기보다는 차라리 부정적인 편이니 행복한 일은 매일 있다는 곰돌이 푸와 만나 대화를 한다면 우리의 대화는 ……이 길어질 것이다. 그래도 한번쯤은 곰돌이 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공감하기도 하겠고 또 때로는 딴지를 걸기도 할 것이다. 어쨌든.

  이 책은 스토리가 있지 않았다. 그냥 곰돌이 푸의 그림을 배경으로 어쩌면 익히 아는 에피그램을 시화전처럼 담았다. 그렇기에 왜 곰돌이 푸가 하는 말인지는 모르겠고 페이지마다 담긴 문구들은 그냥 보기에 좋은 말 정도로 여겨졌다. 어쨌든 이런 문구들은 마음에 확 와닿아 실천해 나가면 좋은 것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면 ‘잔소리’와 다를 리 없는 것 아닌가. 나이를 먹어서만은 아니겠지만 좋은 말도 쇠귀에 경읽기와 같음을 오래도록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아, 하며 감탄하게 되는 경구들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앞에 한 말들에 대해 다른 문구가 나와 앞의 말을 반박하는 형태가 된다. 매일 행복하게 살기 위해 그런 자세를 견지하기 위한 좋은 생각들을 일러주는 방법이라도 상황이 늘 같지 않을 터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봐야 할까. 그러나 여기, 상황은 주어지지 않았으니 인생은 이런 건가 싶어진다. 언제나 갈등이 존재하고 상반된 견해가 존재하고 있는. 어쩌면 절대적으로 딱 들어맞는 문구란 없는 것인지도.

  삶의 방향을 설정하고 태도를 설정하는 힘이 굳건하다면 흔들리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아서인지 마냥 좋게 말하는 이 메시지에서 웃음이 난다. 아니, 어릴 때였다면 좋았으려나. 나이듦은 온갖 좋은 말에도 딴지걸고 싶은 건지, 그렇지 못한 생에 대해 한탄하고 싶은 건지, 곰돌이 푸의 마음을 기꺼이 받아주지 못해 미안해지기까지 하다.

  전체적으로 행복을 위해서 보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라는 메시지가 들린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아닌 타인의 의견과 타인의 상황에 귀기울이고 받아들이라는 반복된 메시지를 보낸다. 그렇지. 세상살이는 타인과의 관계맺음에서 오는 경쟁과 갈등과 어울림이니까.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말 행복한 일은 매일 있는가라는 물음보다도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야 하나, 그러니까 하루를 소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며 살아야 하는가 싶다. 그러니까 내 스스로 생각하는 ‘행복’이란 기준이 무엇이든 좀더 오바스럽게 ‘행복’거리를 만들고 강박적으로 행복하다 생각하면, 정말로 그 하루는 행복한 것인가 싶은.

  곰돌이 푸는 내게 긍정을 심어주고 더 좋은 하루를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텐데 그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서, 그냥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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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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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스토너, 존 윌리엄스, 2015-01-02.


  “평온 속에 숨을 거뒀다.”

  그렇다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생각에 빠졌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평온’하다고 말하는 건 ‘보기에’ 평온함을 말하는 건가, 당사자의 언어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저 말은 안락사 기관 창립자의 말이었다. 말한 이의 직업을 연계해서 생각하니 수술 후 의사들이 항상 먼저 하는 말, “수술은 잘 됐습니다”가 떠올랐다.

  한 과학자가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기사를 스치듯 보고 인터넷에 구달 박사가 오르내릴 때  침팬지 박사 제인 구달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사진이 나온 기사를 보면서도 제인 구달 박사의 안락사를 도와준 사람인가 생각할 정도로 오로지 제인 구달만 떠올라서 『희망의 이유』에서 밀림생활 속 영성을 얘기하던 구달 박사의 선택에 생이란 그런 것인가, 노령이란 그런 것인가, 의아함과 쓸쓸함이 고조되었다. 기사를 제대로 읽고 나서야 제인 구달이 아닌 104세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선택’을 알게 되었고 역시 아는 대로만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반성했다. 하지만 제인 구달에서 데이비드 구달로 바뀌었다고 한들 기사를 보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이 바뀔 리는 없었다. 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파고속으로 출렁이며 20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며 삶을 끝낼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는 안락사를 실행한 생태학자의 말,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때까지 앉아 있다. 그러고 나서 점심을 약간 먹고 다시 앉아 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 을 뚫어져라 보며 소설 속 인물 스토너와 현실 속 인물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조용하게 뒤따르는 시선은 담담해서, 그의 생은 너무 우직해서 보는 이의 마음의 무거움을 길게 가져간다. 스토너의 생을 평범하다고 실패한 생이라고들 말하기에 ‘평범한 스토너의 삶’이란 말에 이의를 제기하며 평범과 실패를 가늠하는 시선이 무얼까 싶었다. 농업을 배우던 그가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알게 되고 문학을 사랑하는 학자로 삶의 길이 바뀌게 되는 일이 소설이라 ‘평범’치 않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은 우리 삶에서 사실 비일비재함에도 판타지처럼 여겨졌다. 무언가에 대해서 강렬함을 느끼고 그것을 선택하고 매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판타지이고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비현실적인 요소가 가득한 게 아닌가. 그의 생이 평범한 것이라면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사람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친구가 말하지 않았던가. 스토너를 향해 “몽상가이자 광인”이라고.

  항상 스토너는 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를 둘러싼 상황들만 휘이휘이 돌아간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지만 1년도 안돼 아내는 떠나가고 교수가 되고 학문에만 열중하지만 학교에서는 늘 밀려나는 신세가 된다. 그것도 친구에 의해서. 그가 한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혼란을 보냈고 그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세상에서 고립되며 병에 걸리며 또다른 사랑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삶에서 스토너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던가. 자신을 위해서, 분노를 쏟아낸 적이 있던가. 아닌 듯해도 스토너는 표면적으로는 늘 일정한 음을 내고 있었다.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세상에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는 스토너였으니 미치게 흘러가는 세상에 억울한 일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분노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의 심리를 알아가는 독자는 더 연민하고 더 아파하게 된다. 끝이 없이 조용히 죄어오는 이 감정이 판타지가 끝났음을 알리는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공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생의 모든 순간 살아 있었던 스토너의 인생이 이쯤되면 부러워진다. 그리고 스토너는 마지막 순간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회한에 대해서도 초연한 스토너는 죽음의 순간 홀로였다. 그의 생의 대부분이 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은 이기적이며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한다라고 생각했으니 끝끝내 이기적이었던 그의 마지막 순간을 굳이 위로하지는 않으련다. 위로는 오히려 내게 필요하다. 그럼에도 슬픔과 쓸쓸함을 느끼는 내게. 돌아볼 내 인생의 나날들에 스토너처럼 생각되지 않을 내 생애들에.

  104세. 마지막까지 말짱했던 구달 박사의 정신과 ‘안락사’라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부러움을 가진다. 어쩌면 이것은 구달 박사와 같은 신체 상태를 지닌 채이지만 한순간 놓아버린 정신 상태를 지닌 할머니의 모습으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일지 모른다. 어느날이던가,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다가 이 나라 근 100년의 역사가 결코 순탄치 않았을진대 그 속에서 살아야 했을 삶이 어찌 평범할 수 있으랴 싶었다. 할머니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의 열정은 어떤 형태였을까. 좋은 것을 느끼고 ‘선택’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속에서 살아내야 했을 삶이라 여겨져 마음아린 삶. 비록 신체는 노쇠하더라도 생을 마감하는 단 며칠전까지 정신만은 온전하기를 바라건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은 삶.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회한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남기지도 못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거나 선택할 상황도 맞지 못한 채로 있다. 가슴에 쌓인 한도 제대로 풀어볼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치매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를 향하 위로일까. 어버이날을 맞아 먼 곳에서 온 자식들은 치매노인의 마른 몸을 보며 눈물바다지만 이틀에 한번 보는 입장에선 어제보다 괜찮은데요라는 말만, 눈물 흘리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분명 스토너를 처음 읽었을 때 오래도록 마음 아렸고 그 여운이 길게 남아있는데 지금은 스토너의 삶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그 여운이 환상이었다 여겨진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한 인간 스토너의 생을 본 것이 아니라 인생이 어떻게 판타지일 수 있는지를 본 듯하여 현실로 넘어오고 싶지가 않다. 스토너의 인생을 쓸쓸히 여기면서 부러워하고 그의 태도를 동경하면서도 연민한다. 스토너와 내 생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보니, 훗날 나는 내 생을 돌아볼 때 스토너처럼 생각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이라서 거기에서 오는 슬픔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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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지음 / 창비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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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사회


불편한 미술관-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8-01-08.


  오늘 하루도 인터넷 포털 실시간 검색어와 상위에 랭크되는 기사는 온통 부정적인 내용 일색이다. 몰카 유출 사건이 세 건이나 되고 성폭력과 폭력과 살인은 빠짐없이 일어나고 있는데다 폭력과 살인의 이유는 너무나 어이없어서 할말을 잊게 한다. 더구나 코미디를 넘어선 짜증나는 정치권 의원, 경쟁이라도 벌이듯 다양한 갑질 레파토리를 내보내는 재력가들의 기사가 체한듯 속을 답답하게 한다. 그 와중에 체증이 내려갈 듯 긍정적인 기사 하나가 눈에 띈다. ‘배려’다.

  대통령의 배려. 업무를 위한 이동임에도 교통통제로 출퇴근 시민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려 야간 헬기 이동을 했다는 기사다. 벌써 대통령 선거를 한지 1년이 지났다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정권으로부터 ‘시민들을 위한 배려’로 정권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일을 본 적이 있었던가. 무엇보다 이런 일화를 종종 접했기에 일회성이 아니라 진정성과 지속성이 있음을 믿게 된다. 그동안 도넘은 ‘권위주의’에 매몰되었던 권력자들로 인해 국민이 존중받고 배려받아야 할 존재라는 당연함이 무너진 세상에서 살았다.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배려’라는 메시지가 얼마나 필요했는지, 필요한지 생각하게 된다. 


착하다거나 나쁘다거나 흑백논리를 들이대봤자 의미가 없다는 것이 정답이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마주치는 인권의 문제는 선과 악의 대립보다 ‘배려하는 생활’ 대 ‘무신경한 태도’라는 구도로 보아야 할 때가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앎과 모름의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혐오표현의 경우가 그러한데, 어떤 말이 상처를 주는지 미리 알면 가해자가 되지 않지만 잘 모르고 있다가는 가해자가 되기 십상이다.


  『불편한 미술관』은 그림을 통해 보는 ‘인권’이야기다. 저자의 말처럼 인권에 대한 문제는 배려하지 않음에서 일어난다. 물론 선악이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 볼 수 없다. 하지만 절대 악이 아니라 무신경함으로 모름으로 인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면 정말 심각하지 않은가. 작가는 이것이야말로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이라 말한다.

  우리가 알아야 하지만 간과하는 기본적인 인권과 명확하게 답하기 어려운 인권 문제를 그림으로 풀어가고 있어서 이미지에 힘입어 강렬하게 다가온다. 미술책에서 본 고대 그리스의 그림과 조각들, 팝아트의 거장 앤디 워홀의 그림을 넘나들며 시대를 뛰어넘어 여성, 장애인, 인종, 성소수자, 이주민, 빈곤인 차별에 관해 이야기하고 표현과 신앙의 자유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지나친 미화 역시 일종의 차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인간으로 대하지 않고 대상화”하는 것이다. 타히티 섬에서 신비로운 원주민의 생활을 강렬하게 그린 화가로 평가받는 고갱, 그는 식민지 여성을 대상화한 그림을 그림으로써 같은 화가들에게도 욕을 먹었다 한다. 고갱처럼 그림 속에서 여성, 장애인, 노인, 흑인 등은 늘 과도하게 희화화하거나 미화되었다. 같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타자화, 대상화되었다. 고통받는 이들의 상황을 즐기며 간음의 시선으로 여성을 보는 그림들. 이런 시선들이 고착화되어 점점 ‘혐오’로 번져간다. 그런 시선을 두는 것을 당연시한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인생의 세 단계를 그리면 어떻게 될까. 친구가 이렇게 농담을 했다. “할아버지는 ‘태극기집회’, 아버지는 ‘깨시민’, 아들은 ‘일베’.” 섬뜩한 느낌이 들어 나는 웃지 못했다. 정치적 지향의 문제가 아니다. 세대 사이 적대감이 문제다. 아들이 일베를 하고 할아버지가 태극기집회를 나가는 이유는 어쩌면 아버지가 깨시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서로가 너무 싫은 나머지, 서로가 더 싫어할 일만 골라서 하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나도 이 말에서 끔찍함을 느꼈다. 하지만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우리 사회에 가족들 간에도 ‘배려’가 무너지고 있는 사실은 경쟁사회의 교육이 만든 비극이다. 차별을 당연하게 가르친 결과다. 같은 단지임에도 임대 아파트 주민은 놀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적은 평수,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어른들이 ‘배려’라고 가르칠까. 배려를 몸소 보여주었을까. 본 적 없는 ‘배려’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없다. 그러니 새삼 작은 ‘배려’ 하나하나가 주는 놀라움이 크다.

  난무하는 불편한 기사가 많은데 이제는 하다하다 그림을 보면서까지 불편해 해야 하느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도 모르게 길러지는 ‘시선’을 통해 우리는 불편함을 불편하지 않음으로 인식할 것이다. 제 권리만 주장하며 타인의 권리는 간과하는 이기심은 그렇게 길러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세상이 만든 비극이다. 이제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지 않은가. 배려가 난무하는 세상이라 끔찍한 기사가 나올 틈이 없는 세상을 보고프다면 익숙하게, 뿌리박힌 타인에 대한 ‘타자화’의 시선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사사건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트집’이기도 하지만 인권에 관한한 예민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언제나 작은 불편함이 큰 변화의 시작이었다.” 무엇이 불편함인지 느끼며 그 불편함을 없애기 위한 ‘배려의 사회’가 되기를 불편한 미술관에 들렀다 희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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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기술연구소 - 생활인을 위한 자유의 기술
제현주.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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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드기는 기술들

일상기술연구소-생활인을 위한 자유의 기술, 제현주·금정연, 어크로스, 2017-05-17.


  언제부터 일상이 흐트러졌는지 모르겠다. 일상의 게으름이 규칙적으로 안착되는 것도 참으로 끈질기다. 균열은 한번인데 파동은 징하다. 그렇기에 때때로 일상을 ‘잡아놓고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같다. 물론 꾸준히 지켜지지 않을 것들이다. 현안에 매몰되어 하려고 하는 모든 일을 없던 것으로 돌려놓았지만 어쩔 수 없는 찝찝함에 마치 새로운 결심이라도 하는 양 새로운 한 해의 시작을 맞이한 것인 양 하루하루를 계획적으로 사는 일에 대해 고민한다. 어쩌면 이런 반복은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련다와 나는 그렇게 못 살겠다는 것을 더욱 확고하게 굳혀 촘촘한 시간을 쓰려는 나를 해방시키려는 진득한 노력의 과정일 것이다. 맘과는 다른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주며 방어막을 형성하는 모습은 아닐까.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일정한 삶의 양식이 있잖아요. 그런 사회에서 내가 스스로 생각한 것을 실천하고 유지하면서 살려면 스스로 생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튼. 일상은 흐트러졌고 일은 미뤄놓았고 그렇기에 일은 쌓였고 난관을 파헤치기 위해서 규칙과 정리라는 단어를 일부러 끌어다 놓는다. 그래서 굳이 ‘일상기술'을 집어 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니까 나는 사회가 강요하는 일정한 삶의 양식을 잘 살고 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하면서 그것대로 살기 싫어 발광하는 것일 게다.

  돈을 주고 배우라고 해도 배우지 않을 ‘기술’을 기우적거리며 관심있는 척했는데 이 책은 방학 생활계획표처럼 규칙적인 생활습관을 형성시키는 기술에 관한 책은 아니었다. 미래를 생각하면 답이 보이지 않고 불안하기에 일과 삶에 대해 가깝게 초점을 맞추어 하루를, 미래를 살기 위한 방편을 얘기한다. 오늘 하루를 잘 보내려 하다 보면 내일을, 한주를, 한달을, 점점 멀리까지도 잘 살아갈 힘이 생길 거라는 것이 좋은 일상을 만드는 구체적인 기술이라는 생각으로 이 책은 기획되었다.

  몸은 따라 주지 않지만 마음속에 한번쯤은 저장해 놓은 삶의 방식을 몸으로 행하고 있는 이들의 일상을 얘기한다. 각각의 이야기에 딱 맞는 사람이 돈관리, 일벌이기, 배우기, 운동하기, 독립하기, 함께 살기 등등에 자신의 방식을 소개하고 있다. 큰 일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데도 어떤 면에선 따라하기엔 너무 큰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여러 기술 중에서 “함께 살기의 기술”에 눈이 갔다. 셰어하우스처럼 공동주거생활을 하지만 공간나눔만이 아니라 경제와 생활까지도 공유하는 함께 살기의 유용성에 혹하기도 했다. “느슨한 관계”. 느슨한 공동체적 삶은 이상적인 환상인지 실천가능한 대안인지가 궁금해진다. 같은 취미나 신념을 공유하는 이들과 적당한 거리에서 관계맺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일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필수적인 개인적인 공간에 관한 욕망이 어떻게 조절될지는 겪어봐야 아는 것이니까. 


일에는 자아를 채워주는 일과 통장을 채워주는 일이 있다는 거예요. 자아를 채워주는 일은 페이가 좀 적어도 어떻게든 조건을 맞춰서 웬만하면 하고요. 통장을 채워주는 일인데 클라이언트가 딱 봐도 까다로울 것 같고 일정도 촉박하다 싶으면, 페이를 많이 요구해서 협상이 되면 그 일을 수락하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그 두 개를 동시에 할 때인 것 같아요.


  맞다. 일은 자아와 통장 모두를 채워줘야 만족된다. 이 책은 한편으론 어떻게 될지 모를 ‘직장인의 삶’에 대비하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도 같다. 삶에서 결코 빠뜨릴 수 없는 경제적인 면과 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삶을 위해 경제적인 면을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가 다양한 기술을 전수하는 사람들의 기본 전제로 깔려있다. 한편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이 직장인이기보다는 프리랜서 혹은 자영업자들이라는 점에서도 직장인이 아닌 삶을 준비하기 위한 기술책인 것도 같다. 왜 이토록 ‘직장인’ 아닌 삶을 원하는가 생각하면서 씁쓸하다. 취업난으로 직장인이 되지 못해 힘겨워하면서 직장인이 되어서는 만족하지 못하고 충족되지 못한 욕구에 힘겨워한다. 삶의 만족도를 높이고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선택한 이들의 결과물을 사람들은 궁금해하고 그 방법들을 알고자 한다. 소소하게 준비해야 할 것은 많다. 돈관리 방법도 알아야 하고 손기술을 익히는 것도 더 많은 것들을 배워나가야 하기도 하고 생각들을 끌어모아야 한다. 이 어렵고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을 한 사람들은 “꼬드기고” 이런 일들이 궁금한 이들은 “또 기꺼이 꼬드김을 당하려” 한다.

  책을 보다 보면 기술을 터득한 이들의 삶은 모두 좋아 보이고 내게는 어떤 기술이 있나 두리번거리게 된다. 사는 일이란 늘 이렇게 남이 하는 일엔 끌리면서 내가 하는 일은 비루해 보이나 싶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들이 꼬드긴 기술들에 쉬이 꼬드김 당하지 않으려면 내 삶의 방식을 잘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내 삶의 태도와 취향을 잘 알아야 얇은 귀가 벌인 일로 실패하지 않는 확고한 내 삶의 완성을 이루어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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