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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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 


스토너, 존 윌리엄스, 2015-01-02.


  “평온 속에 숨을 거뒀다.”

  그렇다 고개를 끄덕였다 곧,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생각에 빠졌다. 누군가의 마지막을 ‘평온’하다고 말하는 건 ‘보기에’ 평온함을 말하는 건가, 당사자의 언어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저 말은 안락사 기관 창립자의 말이었다. 말한 이의 직업을 연계해서 생각하니 수술 후 의사들이 항상 먼저 하는 말, “수술은 잘 됐습니다”가 떠올랐다.

  한 과학자가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기사를 스치듯 보고 인터넷에 구달 박사가 오르내릴 때  침팬지 박사 제인 구달의 이야기인줄만 알았다. 사진이 나온 기사를 보면서도 제인 구달 박사의 안락사를 도와준 사람인가 생각할 정도로 오로지 제인 구달만 떠올라서 『희망의 이유』에서 밀림생활 속 영성을 얘기하던 구달 박사의 선택에 생이란 그런 것인가, 노령이란 그런 것인가, 의아함과 쓸쓸함이 고조되었다. 기사를 제대로 읽고 나서야 제인 구달이 아닌 104세 데이비드 구달 박사의 ‘선택’을 알게 되었고 역시 아는 대로만 생각하게 되는 오류를 반성했다. 하지만 제인 구달에서 데이비드 구달로 바뀌었다고 한들 기사를 보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이 바뀔 리는 없었다. 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원론적인 파고속으로 출렁이며 20년 전부터 생각했던 일이며 삶을 끝낼 기회를 얻게 돼 기쁘다는 안락사를 실행한 생태학자의 말, “내 나이가 되면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고 점심때까지 앉아 있다. 그러고 나서 점심을 약간 먹고 다시 앉아 있다. 그게 무슨 쓸모가 있느냐”, 을 뚫어져라 보며 소설 속 인물 스토너와 현실 속 인물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자신의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


  윌리엄 스토너의 일생을 조용하게 뒤따르는 시선은 담담해서, 그의 생은 너무 우직해서 보는 이의 마음의 무거움을 길게 가져간다. 스토너의 생을 평범하다고 실패한 생이라고들 말하기에 ‘평범한 스토너의 삶’이란 말에 이의를 제기하며 평범과 실패를 가늠하는 시선이 무얼까 싶었다. 농업을 배우던 그가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알게 되고 문학을 사랑하는 학자로 삶의 길이 바뀌게 되는 일이 소설이라 ‘평범’치 않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순간은 우리 삶에서 사실 비일비재함에도 판타지처럼 여겨졌다. 무언가에 대해서 강렬함을 느끼고 그것을 선택하고 매진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생각보다 판타지이고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비현실적인 요소가 가득한 게 아닌가. 그의 생이 평범한 것이라면 스토너의 성격 자체가, 사람 자체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친구가 말하지 않았던가. 스토너를 향해 “몽상가이자 광인”이라고.

  항상 스토너는 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그를 둘러싼 상황들만 휘이휘이 돌아간다. 한 여자를 사랑하고 결혼하지만 1년도 안돼 아내는 떠나가고 교수가 되고 학문에만 열중하지만 학교에서는 늘 밀려나는 신세가 된다. 그것도 친구에 의해서. 그가 한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세상은 전쟁과 대공황이라는 혼란을 보냈고 그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세상에서 고립되며 병에 걸리며 또다른 사랑을 만나기도 했다. 그런 삶에서 스토너가 목소리를 높인 적이 있던가. 자신을 위해서, 분노를 쏟아낸 적이 있던가. 아닌 듯해도 스토너는 표면적으로는 늘 일정한 음을 내고 있었다. 그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결국 “세상에서 실제로는 있지 않은 것, 세상이 원한 적 없는 것을 기대”하는 스토너였으니 미치게 흘러가는 세상에 억울한 일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분노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그의 심리를 알아가는 독자는 더 연민하고 더 아파하게 된다. 끝이 없이 조용히 죄어오는 이 감정이 판타지가 끝났음을 알리는 현실로 돌아가기 싫은 공포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때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 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詩)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는, 생의 모든 순간 살아 있었던 스토너의 인생이 이쯤되면 부러워진다. 그리고 스토너는 마지막 순간 ‘이기적’이기까지 했다. 지난날을 돌아보며 회한에 대해서도 초연한 스토너는 죽음의 순간 홀로였다. 그의 생의 대부분이 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죽음은 이기적이며 죽어가는 사람은 혼자만의 순간을 원한다라고 생각했으니 끝끝내 이기적이었던 그의 마지막 순간을 굳이 위로하지는 않으련다. 위로는 오히려 내게 필요하다. 그럼에도 슬픔과 쓸쓸함을 느끼는 내게. 돌아볼 내 인생의 나날들에 스토너처럼 생각되지 않을 내 생애들에.

  104세. 마지막까지 말짱했던 구달 박사의 정신과 ‘안락사’라는 선택을 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을 만큼의 능력과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그의 생애에 대해서도 부러움을 가진다. 어쩌면 이것은 구달 박사와 같은 신체 상태를 지닌 채이지만 한순간 놓아버린 정신 상태를 지닌 할머니의 모습으로 인해 느껴지는 감정일지 모른다. 어느날이던가, 지극히 평범한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가 생각했다가 이 나라 근 100년의 역사가 결코 순탄치 않았을진대 그 속에서 살아야 했을 삶이 어찌 평범할 수 있으랴 싶었다. 할머니의 삶 속에서 순간순간의 열정은 어떤 형태였을까. 좋은 것을 느끼고 ‘선택’하기보다 주어진 상황속에서 살아내야 했을 삶이라 여겨져 마음아린 삶. 비록 신체는 노쇠하더라도 생을 마감하는 단 며칠전까지 정신만은 온전하기를 바라건만 그것도 허락되지 않은 삶.

  할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회한을 느낄 새도 없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자식들에게 남기지도 못하고,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하거나 선택할 상황도 맞지 못한 채로 있다. 가슴에 쌓인 한도 제대로 풀어볼 시간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치매로 가누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것이 더 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누구를 향하 위로일까. 어버이날을 맞아 먼 곳에서 온 자식들은 치매노인의 마른 몸을 보며 눈물바다지만 이틀에 한번 보는 입장에선 어제보다 괜찮은데요라는 말만, 눈물 흘리지 않은 지는 오래됐다.

  분명 스토너를 처음 읽었을 때 오래도록 마음 아렸고 그 여운이 길게 남아있는데 지금은 스토너의 삶에서 느껴지는 슬픔이, 그 여운이 환상이었다 여겨진다.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현실적인 한 인간 스토너의 생을 본 것이 아니라 인생이 어떻게 판타지일 수 있는지를 본 듯하여 현실로 넘어오고 싶지가 않다. 스토너의 인생을 쓸쓸히 여기면서 부러워하고 그의 태도를 동경하면서도 연민한다. 스토너와 내 생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보니, 훗날 나는 내 생을 돌아볼 때 스토너처럼 생각하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현실이라서 거기에서 오는 슬픔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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