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이 말은 체념, 포기, 전진 중 어디에 더 가까운가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어쩌면 망각하라는, 이 말은 정녕 효과적인가. 효과적이란 건 또 뭔가. 말을 한 이의 위로라는 진심에 방점을 두고 의미는 관용어로 제쳐둔다고 해도,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말은 늘 헷갈릴 수밖에 없는 문장이었다.

  그러나, ‘조국의 시간을 통해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의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 ‘시간어떻게 수용하고 활용하는가는 결국 위로받는 이가 해야 할 몫이라는 걸.

 

 

2021년 출간된 이 책은 2019년부터 벌어진 검찰개혁사태에 대한 기록, 사건일지다. ‘검찰개혁에 대해 광기처럼 쏟아졌던 기록보도를 대척점에 두고서 공권력의 가감없는 조작과 기본적인 사실조차도 서술하지 못하는 언론의 행태를 고스란히 알려주고 있다. 개혁에 선봉에 선 이를 소멸시키면서 조작이 어떻게 가능한지, 얼마나 잘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세상에 일이 그것뿐인 양, 세상이 무너질 일인 것마냥 속보 전쟁을 벌이던 언론이 최근 사실진실에 여전히 입닥치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이 해결의 첫 걸음은 사실에 대한 기록이 첫 걸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도 잊혀지기 전에 어떤 상황에 대한 것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복기하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될지라도, ‘거짓말왜곡’, ‘조작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하는-누군가에 대해, 그것이 어떻게 쓸 거라는 것은 우선 제쳐두고- 무식한 이를 위해서.

 

나는 죽지 않았다. 죽을 수 없었다.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 나의 흠결을 알면서도 응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생환(生還), 그것이면 족했다.

 

  ‘공소권 없음으로 상황을 종결지으려는 이들이 있다는 이야기에 이 구절은 떨리는 문장이 되었다. ‘죽지 않았다는 것. 죽을 수 없었다가 더 맞을 듯하지만, 이런 일련의 사태를 겪은 이를 나로 대체한다면 나는 과연 버틸 수 있었을까.

 

수모와 모욕을 당한 후 기소가 이루어지고 여전히 재판을 받고 있지만, 김주대 시인이 저를 위해 쓰고 그린 문인화(文人畵) 속 글처럼,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공소권 없음을 바랐던 사람들의 은밀한 희망과 달리, 죽지는 않았습니다. 촛불시민 덕분입니다. 날벼락처럼 들이닥친 비운이지만, 지치지 않고 싸우겠습니다.

  저자는 광복절 특사로 사면되었지만, 검찰의 조작으로 이어지고 연결된 이 사건은 사면으로는 부족함 또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사안을 판단하는데 있어 조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사람의 사실과 진실에 대한 정보 수집 능력,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 능력과 의지를 볼 수 있게 된다. 한마디로 입만 나불대는 인간인가, 아닌가. 정녕 분노해야 할 때가 언제인지는 제대로 아는 자인지, 내뱉는 정의가 얼마나 가소롭고 편협한지를. 또한 잘 몰라서라고 하면서 끊임없이 잘못된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평가하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잘 몰라서가 아니라 잘 알아도조국뿐만 아니라 모든 사안에 대해 그렇게 판단하고 평가한다. 그들 마음 속에 정의라는 것은 비틀려 있거나 애당초 내게 이익이 되는 것, 내가 손해되지 않는 것이라고 정의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래 문단처럼, 보수인사들의 부정과 비리에 그토록 관대한 것은, 결국 그들 자신과 같기 때문 아니려나.

 

    왜 언론은 보수인사들의 부정과 비리에 이토록 관대한가. 왜 진보인사는 배우자와 자녀는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털려가며조리돌림을 당하는가. 언론들이 보도 경쟁을 하며 전국적인 사안이 되는 경우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 가릴 것 없이 다 함께 뛰어들 때다. 그런데 보수언론은 진영논리라는 개념조차 없어서 보수인사의 부정비리에는 쉽게 눈감고, 진보인사의 부정비리에는 사력을 다해 달려든다. 진보언론은 진보인사의 부정비리를 보수인사의 그것과 똑같이 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진보인사의 부정비리는 보수언론과 진보언론이 합세해 금세 전국적 사안이 되지만, 보수인사의 그것은 묻혀버린다. 족보를 뒤지는 연좌제 성격의 추국행 보도는 보수언론의 전매특허이므로 보수인사에게는 적용될 일이 없다. 보수언론의 파렴치와 진보언론의 염치가 언론 보도 불균형의 주요 원인이다. 뻔뻔한 보수보다는 부끄러워할 줄 아는 진보가 때렸을 때의 타격 효능감도 더 클 것이다.˝

   

- 이재성, #그런데 윤석열 장모와 부인은?, 인권연대, 발자국통신(2020.5.28.)

 

  저자의 새로운 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의 출발점에서 온전히 해결되어야 하고, 이해되어야 하는 시간이 바로 조국의 시간아닌가 싶다. 2025년의 8.15는 새롭게 다가오는데 끔찍했던 최근 몇 년 동안이 쉬이 보상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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벗었다고?

 

 , 임금님은 벌거벗었다!

 어떤 이야기들은 옛날 옛적에로 시작한다. 하지만, 현재진행형인 이야기를 알고 있다. 이 이야기도 시간이 지나면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며 전해질 것이다. 다만 동화가 아니라 사실’, ‘실제 사건이라는 전제를 달고서. 그럼,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이 되는 건가?

  어릴 적부터 그림책, 동화책, 애니메이션 벌거벗은 임금님을 봐 왔지만 제목에 맞게 임금님은 완전히 벌거벗은 적이 없었다. , 팬티 하나는 걸치고 있었다…….

  그동안 벌거벗은 임금님에 맞는 적절한 캐릭터를 찾지 못했는데, 마침내 완벽하게 딱 맞는 인물을 찾아냈다. 안데르센의 동화가 허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얼마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예언서인지 새삼 깨달으며. 1837년 작(원제, Kejserens nye Klæder)이라는데 2025년에 벌거벗은 임금님을 맞닥뜨릴 줄이야.

 

  그 옛날 우리의 임금님은 참으로 무능하고 사치스러웠고 나랏일에는 관심도 없었다. 관심을 가진다고 나랏일을 잘하는 건 아니어서, 관심을 가지고 한 일은 특히 더, 망하게 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그런 임금인지라 온갖 것을 끌어모아 제 주머니를 채우기에 급급했는데, 입어도 티도 나지 않는 명품옷도 해당되는 품목이었다. 제가 임금이니만큼 그 권위를 위해 명품 옷을 주문했다. 평소 임금이 하던 것처럼 삥땅에 최적화된 재단사가 선택되었고, 필연인지 채택된 브랜드명은 멍청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이었다. 재단사는 옷을 만드는 시늉만 하다가 옷을 완성했다고 내밀었다.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점검한 그 누구도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했고, 마침내 완성된 옷이라고 내밀어진 옷을 본 임금과 그 주위 관료들은 보이지 않는 옷을 칭찬해대다 제 멍청함을 감추려한 것인지 드러내려 한 것인지 전국민에게 명품 옷을 선전하기 위해 행사를 기획했다. 멍청한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옷이라니, 임금의 옷을 보지 못한 그 누구도 자신의 멍청함을 드러내지 못하고 환호만 질러댔다. 이때, 어떤 꼬마가 말했다. “어랏, 임금님이 옷을 벗었네?“

   몇 개월 전이었다면 이 꼬마는 잡혀갔다. 보이지 않는 옷을 볼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능력자가 넘쳐나는 세상이었을 테고, 꼬마의 석방을 외치며 임금 네 옷뿐만 아니라 너 또한 명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들은 고난을 겪고 있을 세상. 거짓 명품, 짝퉁의 시대에 네네, 옷이 보입니다요라고 말하는 이들이 줄줄이 비엔나처럼 끊이지 않고 나오는 것을 본 건 충격이었다. 여전히 그들은 존재하고, 아직도 옷이 보인다고 외치고 있다. 이들을 벌거벗은 임금님 속 그 신하라고 생각하며 답답함을 좀 털어내고 적잖은 조롱을 섞어 웃어본다.

  여러 보도를 보건대, 임금님이 옷을 벗었다는데 옷만 벗은 게 아니라 바닥에 드러누워 난동까지 피웠다는데, 생각할수록 피식피식 웃음이 났다. 그 모습을 굳이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벌거벗은 임금님이란 동화가 생각이 나, 다행히 순화된 그림으로 그 모습을 대체하며 웃음 짓는다.

  


  특정한 누군가로 인해 이 버전 그림책 표지가 제목이란 너무도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데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임금의 행차에 오토바이와 차량이 등장하는 바로 이 장면옛날 같으면 마차와 말들이 등장했겠지만요즘은 이 모습이 맞겠지벌거벗은 임금님을 태운 차가 요란하게 지나가는 이 그림이 눈에 익다.





   정시 출근한 건 이틀밖에 안된다는 어느 임금 기사에 기가 찼었는데 그 많은 나날들을 빈 차들만 보냈다는 기사들이 생각난다. , 알면서 그런 것은 제대로 제 때에 보도하지 않는 건가. 그 많은 신하들과 다를 리 없는 언론종사자들! 그들은 임금님의 옷도 보이고 진정 임금도 볼 줄 아는 능력자들이었던가. 생각하니 전해져야 하는 이야기 버전은 이 그림처럼 차량에 없는 임금이 그려진 모습이어야 하겠다.

  정당한 절차와 체계를 망가뜨릴 줄 아는 임금은 역시나 끝까지 할 줄 아는 것만 하는구나 싶어, 안쓰러움도 더한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내 몫으로 두지 않으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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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공교롭게도, 마지막 리뷰로 올린 책이 필경사 바틀비. 글이 게재된 때가 20205월이니 지금으로부터 5년 하고도 2개월 전이다.

  왜 하필 그 책이었을까. 왜 리뷰 제목은 스러진다였을까. 운명론자는 아닌데. 그런 물음을 묻고 나면 대답은 정해진 것처럼 나온다. 마치 운명을 예언하는 것처럼, 바틀비처럼 그렇게 나는 스러졌던 건가. 5년의 시간, 책리뷰 하나 올리지 못한 삶이 어땠을지 생각할수록 지난 나의 시간이 아쉽고, 안쓰럽다.

  너무 오래 글쓰기를 하지 못하고 길어진 시간, 다시 시작하는 글은 정의를 말하는 책이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2019년을 겪고도 2022년 푸르른 5월의 선택이 그렇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워 말문이 막혔는데, 비단 막힌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던 터라. 나 또한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로 살아지게 된 것이려나.

  오래도록 분노와 무력과 환멸이 휘감는 삶에서 명확하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세상에는 제 자신을 위해, 타인을 죽이려는 인간들이 생각보다 아주 가까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을 동조하는 세력이 또한 많다는 것 또한. 12월의 밤에 겪었다시피 말이다. 여전히 그 여파가 해결되지 않은 채 있지만, 해결되기 위한 한걸음이 시작되었으니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되려나.

  그러나 그건 그것으로 흘러갈 것이고, 주위에 있는 그러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나. 옛날 전설따라 삼천리식이라면 그건 하늘이 알아서 벌을 내린다는 인과응보, 사필귀정으로 귀결되는데, 요즘 세상이란 알 수 없다보니 마냥 하늘이 어떠한 정의를, 인과응보를 실현해 주리라 믿을 수도 없다. 기다릴 수도 없다.



  뜬금 어지러운 머릿 속에서 이상하게 돈키호테가 생각이 났다풍차를 향해 달려드는 돈키호테햄릿과 대비되는 인간상으로 그리고 비교적 긍정적이 아니라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평가받았던 돈키호테돈키호테에 대해 한발짝 마음이 다가서게 된 것은 스페인 여행을 하면서이긴 하지만.....햄릿형의 인간이나 책이 아닌 돈키호테를 떠올리며 마음이 가는 것은 지금 내게 돈키호테의 무언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새삼 돈키호테를 새롭게 만나는 여정이 설렌다이제마지막을 뒤덮은 새로운 제목은 스러진다에서 무엇이 될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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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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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진다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문학동네, 2011.


  『필경사 바틀비』는 내가 가진 전형성을 발견하고 충격받은 책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처음 읽었던 때의 감정이 기억나 여전히 그 상태일까 다시 들쳐보는데 주저하게 된다. 고작 몇 년 사이 특별히 달라질리 없을 것이기에 이 책은 감동적인 책 카테고리가 아니라 미련이 남는 카테고리에 담겨있다. 그때의 감정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걸까, 작가의 의도나 평론가의 평과는 다른 내 느낌이 마치 정답을 비껴간 것 같아서일까, 생각하곤 한다.

  최근 문득문득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하기 싫어’라는 농담조의 말과는 확연히 다른 무게로 이 말을 거듭 떠올리는 요즘엔 바틀비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의 나는 화자의 감정에 더 이입했다. 화자인 변호사에 감정이입된 나는 당혹과 화가 온몸을 휘감을 때 알았다. 순종적이고 소극적인, 관습에 빗겨가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 생각했음에도 바틀비가 행하는 저항에 이의와 의문을 가진 그런 직장인의 모습을 보았다.

  『필경사 바틀비』의 상징성을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차적인 것으로 책을 읽은 순간의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부분에서의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바틀비와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직장인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바틀비가 아니니 바틀비를 대면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임감과 성실함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무엇에 대한’ 것인가로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 같다. 바틀비에 대한, 바틀비가 하는 행동에 대한 규정 말이다. 

  바틀비는 월 스트리트의 변호사가 고용한 필경사이다. 화자인 ‘나’는 “야망없는 변호사 축에 속하며 편안한 은신처가 주는 유유한 평화로움 속에서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하며” 신뢰있는 인물의 평을 빌려 자신을 “신중함과 체계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럼 바틀비는 어떤 사람인가.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온통 하얀 건물만이 가득한 월 스트리트 또한 필사하는 바틀비-묵묵하고 창백하고 기계적인-처럼 보인다. 바틀비 역시 동화되어 간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바틀비는 출근 사흘째에 필경사가 행하는 필사 검증업무를 거부한다. 필경사는 필사본의 정확도를 한 자 한 자 검증하며 서로 검증을 돕기도 하는데 이 업무 지시에 대해 바틀비는 이렇게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나’의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도 필사 검증을 거부하는 그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사무실을 떠나달라는 요구에도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만 할 뿐이다. 바틀비는 “신사처럼 흐트러짐 없지만 주검 같은 느낌을 주는 확고하고 침착”하다. 휴일에도 사무실을 무단 점거·기거하며 오로지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바틀비에게 ‘나’는 기묘함과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결국은 ‘니’가 자신의 사무실-바틀비가 기거하는, 바틀비는 두고-을 옮겨 이사하게 되지만 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그 저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성격이 비인간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의 소극성이 전혀 무해하다면, 전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경우 자신의 판단력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명되는 것을 상상력으로 관대하게 추론하고자 애쓸 것이다.


  ‘나’는 바틀비의 행동을 ‘소극적인 저항’이라 표현했고 그래서인지 ‘저항’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가 많다. 그러면 바틀비는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가. 그건 ‘저항’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불편한 것은 그것이었다. ‘저항’이라고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바틀비 외침의 그 어정쩡함,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함. 의지와 의미를 품고서 하는 말인지 모를 태도에 마침내 택한 ‘아무것도’라는 것은 선택인가. 바틀비는 무언가를 선택한 것인가 포기한 것인가.

  고용주의 필사 검증은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이자 “계약”에 의한 요구다. 필사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것까지가 필사 업무 종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나도 마찬가지로- 바틀비에게 왜 그러느냐 묻게 된다. 왜? 그에 대한 답없이 바틀비는 필사만을 할 뿐이면서 기거할 명분도 없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사무실을 떠나는 것도 거부하고 먹는 것도 거부하고 구치소로 연행된다. 구치소에 연행되어 갈 때 바틀비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생기도 없고 동요도 없는 그 특유의 태도로 그들을 조용히 따랐다.”고 한다.

  저항은 전투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저항의 의미를 품고서 행하지 않은 것은 저항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전투적으로 나서 주는 사람을 원하고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바틀비의 행동이 ‘저항’이려면 바틀비의 행동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직장에서 동료가 벌이는 크고 작은 투쟁에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그의 일이 나의 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해와 지지가 형성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땅히 원하고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지지 또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내게 바틀비는 저항의 인물이기보다는 패배한 인간으로 보였다. 삭막한 자본주의 환경에 필사적으로 일만하다 병든 모습, 생각하는 것도 잃어버리고 기계화되고 피폐화된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바틀비가 보여주는 것이라면.


날 때부터 그리고 운이 나빠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상상해보면, 끊임없이 사서를 취급하고 분류해 불태우는 것보다 더 그 절망을 키우는 데 적합해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역시 1800년대의 자본주의의 최첨단인 월가나 지금이나 사회시스템은 그대로인 채 사람만이 병들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틀비에겐 존재를 알아 달라는 외침이었는지 그러한 사회시스템 속에서 소멸해가고 싶은 외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틀비의 “선택하지 않음”에 더 집중하며 그것이 선택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결정은 선택이 아니라고 주장했건만 바틀비의 경우로 사례가 달라지자 생각했던 것이 흐릿해졌다. “계약”과 “규율”에 따른 행동질서가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 속에 그 계약의 성립이 공정했는가를 잊어먹었다. 더 나아가 저항하는 바틀비의 태도에 대해 문제시하기까지 된다.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 바틀비의 외침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유를 이야기했다면 바틀비의 편에서 지지할 수 있었을까. 행동으로도 심적으로도 온전한 지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바틀비를 억압하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게 익숙했던 그리고 성취하고팠던 다양한 가치들이 상충한다. 이해의 순간과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떠오른다. 다른 말은 없이 저 말만 남은 바틀비의 외침을 반복되이 떠올리다보니 고용주의 입장에서 바틀비를 이해하지 못함에 좀더 기울어 있던 내게 이 책은 그냥 스러져가는 한 인간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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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기쁨과 슬픔 - 장류진 소설집
장류진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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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


일의 기쁨과 슬픔, 장류진. 2019.


  「일의 기쁨과 슬픔」이 신인상 수상작으로 SNS에 오르내릴 때 내가 떠올린 건 알랭 드 보통이었다. 보통 책을 다시 읽어 볼까.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집중할 때면 으레 그래왔듯이 이 소설에 대해선 잠깐의 호기심 후 뒤로 물러났다. 알랭 드 보통의 책 제목에 기대었음에도 구미가 당기지 않은 까닭이었다. 시간이 지나서 이 소설 하나를 읽게 되었는데 첫 느낌은 ‘이건 SF인가?’였다.

  당황한 건 이 소설에 대한 댓글 반응이었다. 소설이 현실을 바탕으로 한 상상의 영역이라지만 지극히 ‘소설’로 본 나에 비해 댓글은 현실적인 공감 반응이 많았다. 웹에서 읽은 터라 댓글을 많이 볼 수 있었으며 실제로 같은 경험을 했다는 글을 보았을 때, 나는 내 경험과 상상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제야 이 소설이 웹상에서 그토록 뜨거운 반응일 수 있었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판교 테크노벨리 스타트업 회사가 배경이다. 중고 마켓 회사 사원 김안나는 우수 이용객인 아이디 거북이알이 매번 새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꺼림칙해 문제가 될 것을 염려해 거북이알을 만나게 된다. 거북이알은 인근 카드사 회사원으로 회장에게 찍혀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고 있었다. 거북이알의 생존법은 포인트로 물건을 구매해 다시 현금화하는 것이었다. 이게 소설의 줄거리인데 4차 산업혁명의 산업 현장에서 실제 이런 경험을 한 이들이 많다니 이 미치도록 리얼한 소설을 어찌 나는 SF쯤으로 생각하였나 싶다. 나는 이 공간이 낯설었다.


굴욕감에 침잠된 채로 밤을 지새웠고, 이미 나라는 사람은 없어져버린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되었다고. 그런데도 어김없이 날은 밝았고 여전히 자신이 세계 속에 존재하며 출근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마주해야 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거북이알이 포인트로 월급을 받고 굴욕감에 밤을 지새운 것처럼 미칠 것 같이 잊고 싶은 현실감, 미세하게 구질구질한 속내들을 이 소설집은 담고 있다. 「일의 기쁨과 슬픔」 외에 8편이 담겨 있는데 하나같이 드러내지 않고 있으나 머릿속으로 드러내며 보이는 사람들의 속마음 같은 것이 펼쳐져 보인다고나 할까. 그래서 한편으로는 소설같다기보다 일상을 기록한 녹취록 같다. 가장 가까운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 그러나 내면에만 머무는 것도 아니고 뚜렷하게 표현되는 것도 아닌 채 공간에 머물러 있는 어떤 불편한 심기들을 잘 뽑아내었다.


“그럼, 제니퍼부터 해볼까?”

제니퍼는 디자이너인데 한국 사람이다. 회사가 위치한 곳이 실리콘밸리가 아니라 판교 테크노밸리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영어 이름을 지어서 쓰는 이유는 대표가 그렇게 정했기 때문이다. 빠른 의사결정이 중요한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하여, 대표부터 직원까지 모두 영어 이름만을 쓰면서 동등하게 소통하는 수평한 업무환경을 만들자는 취지라고 했다. 위계 있는 직급체계는 비효율적이라는 말이었다.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다들 대표나 이사와 이야기할 때는 “저번에 데이빗께서 요청하신……” 혹은 “앤드류께서 말씀하신………” 이러고 앉아 있었다. 이럴 거면 영어 이름을 왜 쓰나? 문제는 대표인 데이빗이 그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 수평문화 도입은 핑계고 촌스러운 자신의 본명―박대식―을 쓰지 않기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 「일의 기쁨과 슬픔」


네 번째 아주머니의 첫인상은 별로 좋지 않았다. 내가 “저희 집은 설거지 안 하셔도 돼요. 식기세척기가 있어서”라고 하자마다 대뜸 내 팔뚝을 가볍게 때렸기 때문이었다.

“새댁, 설거지는 손으로 뽀드득하게 해야 하는 거야. 그건 기계가 따라갈 수가 없어요.”  ― 「도움의 손길」


  4차를 지나 5차, 6차 끝없이 N차의 산업혁명이 이야기되는 시대. 인간의 패턴의 묘하게 다른 지점들. 그럼에도 직장인이라 이름 붙였을 때는 여전히 고수되는 기류. 이 미묘한 상황이 만들어낸 현실의 지점들이 잘 녹아 있다. 세상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고 이것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져 있음을 알게 된다.


빛나 언니한테 가르쳐주려고 그러는 거야. 세상이 어떻게 어떤 원리로 돌아가는지, 오만원을 내야 오만원을 돌려받는 거고, 만이천원을 내면 만이천원짜리 축하를 받는 거라고. 아직도 모르나본데, 여기는 원래 그런 곳이라고 말이야. 에비동에 새우가 빼곡하게 들어 있는 건 가게 주인이 착해서가 아니라 특 에비동을 주문했기 때문인 거고, 특 에비동은 일반 에비동보다 사천원이 더 비싸다는 거.   ― 「잘 살겠습니다」


  이제 현재의 삶은 이런 형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미묘하게 다른 공간의 질서다. 거시적 세계보다는 미시적 세계의 일들에 대한 포착, 그것을 더욱 중시하는 듯이 아니 그 무엇에도 절대성을 갖지 않는 이들을 마주하는 느낌이다. 마냥 쭈구려 있지 않고 반사할 줄 아는 사람들의 모습이라 해야 할까. 잘 살기 위한 세상의 이치는 가게 주인의 마음씨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특 에비동에 맞는 현금을 지급할 때에야 새우 몇 개를 더 먹는 것처럼 그런 사실을 깨치면서 살아나가야 한다고 누군가에게 지적받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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