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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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러진다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문학동네, 2011.


  『필경사 바틀비』는 내가 가진 전형성을 발견하고 충격받은 책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처음 읽었던 때의 감정이 기억나 여전히 그 상태일까 다시 들쳐보는데 주저하게 된다. 고작 몇 년 사이 특별히 달라질리 없을 것이기에 이 책은 감동적인 책 카테고리가 아니라 미련이 남는 카테고리에 담겨있다. 그때의 감정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걸까, 작가의 의도나 평론가의 평과는 다른 내 느낌이 마치 정답을 비껴간 것 같아서일까, 생각하곤 한다.

  최근 문득문득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문장이 자꾸 떠오른다. ‘하기 싫어’라는 농담조의 말과는 확연히 다른 무게로 이 말을 거듭 떠올리는 요즘엔 바틀비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 책을 처음 읽었던 그때의 나는 화자의 감정에 더 이입했다. 화자인 변호사에 감정이입된 나는 당혹과 화가 온몸을 휘감을 때 알았다. 순종적이고 소극적인, 관습에 빗겨가는 것을 적극 지지한다 생각했음에도 바틀비가 행하는 저항에 이의와 의문을 가진 그런 직장인의 모습을 보았다.

  『필경사 바틀비』의 상징성을 무엇인가 하는 것은 이차적인 것으로 책을 읽은 순간의 즉각적이고 직관적인 부분에서의 감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어쩌면 ‘바틀비와 같은 사람’과 함께 일하는 직장인을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바틀비가 아니니 바틀비를 대면해야 하는 사람으로서의 입장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겠다. 책임감과 성실함은 중요한 가치이지만 ‘무엇에 대한’ 것인가로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 같다. 바틀비에 대한, 바틀비가 하는 행동에 대한 규정 말이다. 

  바틀비는 월 스트리트의 변호사가 고용한 필경사이다. 화자인 ‘나’는 “야망없는 변호사 축에 속하며 편안한 은신처가 주는 유유한 평화로움 속에서 부자들의 채권이나 저당권, 등기필증을 다루며 안락하게 살 수 있을 정도의 벌이를 하며” 신뢰있는 인물의 평을 빌려 자신을 “신중함과 체계성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럼 바틀비는 어떤 사람인가.


바틀비는 처음에는 놀라운 분량을 필사했다. 마치 오랫동안 필사에 굶주린 것처럼 문서로 실컷 배를 채우는 듯했다. 소화하기 위해 잠시 멈추는 법도 없었다. 낮에는 햇빛 아래, 밤에는 촛불을 밝히고 계속 필사했다. 그가 쾌활한 모습으로 열심히 일했다면 나는 그의 근면함에 매우 기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했다.


  온통 하얀 건물만이 가득한 월 스트리트 또한 필사하는 바틀비-묵묵하고 창백하고 기계적인-처럼 보인다. 바틀비 역시 동화되어 간 것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바틀비는 출근 사흘째에 필경사가 행하는 필사 검증업무를 거부한다. 필경사는 필사본의 정확도를 한 자 한 자 검증하며 서로 검증을 돕기도 하는데 이 업무 지시에 대해 바틀비는 이렇게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바틀비는 ‘나’의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서도 필사 검증을 거부하는 그 어떤 이유도 말하지 않는다. 다른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사무실을 떠나달라는 요구에도 “그러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만 할 뿐이다. 바틀비는 “신사처럼 흐트러짐 없지만 주검 같은 느낌을 주는 확고하고 침착”하다. 휴일에도 사무실을 무단 점거·기거하며 오로지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하는 바틀비에게 ‘나’는 기묘함과 연민과 동정을 느낀다. 결국은 ‘니’가 자신의 사무실-바틀비가 기거하는, 바틀비는 두고-을 옮겨 이사하게 되지만 말이다.


소극적인 저항처럼 열성적인 사람을 괴롭히는 것도 없다. 그 저항의 대상이 되는 사람의 성격이 비인간적이지 않다면, 그리고 저항을 하는 사람의 소극성이 전혀 무해하다면, 전자는 기분이 나쁘지 않을 경우 자신의 판단력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하다고 판명되는 것을 상상력으로 관대하게 추론하고자 애쓸 것이다.


  ‘나’는 바틀비의 행동을 ‘소극적인 저항’이라 표현했고 그래서인지 ‘저항’에 대한 철학적인 논의가 많다. 그러면 바틀비는 무엇에 대해 저항하는가. 그건 ‘저항’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불편한 것은 그것이었다. ‘저항’이라고 완전히 동의하기 어렵다는 점. “하지 않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바틀비 외침의 그 어정쩡함, 하지 않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모를 애매함. 의지와 의미를 품고서 하는 말인지 모를 태도에 마침내 택한 ‘아무것도’라는 것은 선택인가. 바틀비는 무언가를 선택한 것인가 포기한 것인가.

  고용주의 필사 검증은 “상례와 상식에 의거한 요구”이자 “계약”에 의한 요구다. 필사를 제대로 했는지 확인하는 것까지가 필사 업무 종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나도 마찬가지로- 바틀비에게 왜 그러느냐 묻게 된다. 왜? 그에 대한 답없이 바틀비는 필사만을 할 뿐이면서 기거할 명분도 없는 사무실에서 기거하며 사무실을 떠나는 것도 거부하고 먹는 것도 거부하고 구치소로 연행된다. 구치소에 연행되어 갈 때 바틀비는 “전혀 저항하지 않고, 생기도 없고 동요도 없는 그 특유의 태도로 그들을 조용히 따랐다.”고 한다.

  저항은 전투적인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그 저항의 의미를 품고서 행하지 않은 것은 저항인가. 어떤 문제에 대해 전투적으로 나서 주는 사람을 원하고 패배하는 모습을 보고자 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바틀비의 행동이 ‘저항’이려면 바틀비의 행동을 응원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직장에서 동료가 벌이는 크고 작은 투쟁에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려면 그의 일이 나의 일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이해와 지지가 형성된다.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마땅히 원하고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지지 또한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내게 바틀비는 저항의 인물이기보다는 패배한 인간으로 보였다. 삭막한 자본주의 환경에 필사적으로 일만하다 병든 모습, 생각하는 것도 잃어버리고 기계화되고 피폐화된 모습을 상징하는 것이 바틀비가 보여주는 것이라면.


날 때부터 그리고 운이 나빠서 창백한 절망에 빠지기 쉬운 사람을 상상해보면, 끊임없이 사서를 취급하고 분류해 불태우는 것보다 더 그 절망을 키우는 데 적합해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역시 1800년대의 자본주의의 최첨단인 월가나 지금이나 사회시스템은 그대로인 채 사람만이 병들어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틀비에겐 존재를 알아 달라는 외침이었는지 그러한 사회시스템 속에서 소멸해가고 싶은 외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바틀비의 “선택하지 않음”에 더 집중하며 그것이 선택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것이라 이야기하기도 한다. 나도 한때는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의 결정은 선택이 아니라고 주장했건만 바틀비의 경우로 사례가 달라지자 생각했던 것이 흐릿해졌다. “계약”과 “규율”에 따른 행동질서가 타당하고 합리적이라는 생각 속에 그 계약의 성립이 공정했는가를 잊어먹었다. 더 나아가 저항하는 바틀비의 태도에 대해 문제시하기까지 된다. 그런 식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 바틀비의 외침이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유를 이야기했다면 바틀비의 편에서 지지할 수 있었을까. 행동으로도 심적으로도 온전한 지지를 보낼 수 있었을까.

  “안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하기까지 바틀비를 억압하던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동안 내게 익숙했던 그리고 성취하고팠던 다양한 가치들이 상충한다. 이해의 순간과 그럼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이 떠오른다. 다른 말은 없이 저 말만 남은 바틀비의 외침을 반복되이 떠올리다보니 고용주의 입장에서 바틀비를 이해하지 못함에 좀더 기울어 있던 내게 이 책은 그냥 스러져가는 한 인간만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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