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지음, 최필원 옮김 / 북폴리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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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빌라는 죽고 싶다고 했다


시간을 멈추는 법, 매트 헤이그, 2018.


   이야기의 구성 때문에 타임슬립처럼 느껴지는 소설이다. 동화로 유명한 상을 수상한 작가의 이력이 동화느낌도 나게 한다.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주연으로 영화 제작이 확정되었다고 하니 이런 이야기가 소위 ‘먹히는’ 이야기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타임슬립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는 것만 봐도. 이 소설은 시간여행자의 이야기라기보다 그저, 너무 오래 사는 사람의 이야기다. 너무 오래, 한 천년 정도? 그런 이가 절대 해서는 안되는 한가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이란 규칙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절대 해서는 안된다라고 할 때 목적어는 무엇일까. 무엇을 위해 절대 해서는 안되는 것을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말하는지 그것은 ‘너무 오래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일까. 사람이 살아간다는 건 먹고 자고 사랑하고 그런 일들일텐데 사랑하지 않아야 하는 삶이란 일상의 삶을 살지 말라는 말과 같지 않은가. 그렇다면 삶처럼 살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서 왜 그토록 오래 살아가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든다.

  보통 사람보다 15배 느린 성장속도를 가진 1581년생 톰 해저드는 다른 이들에게 40대로 보인다. 톰 해저드가 전하는 이력서를 검토해보자. 과연 무슨 일들을 했는지. 21세기 현재 그는 런던의 중고등학교 역사 선생이다. 오래 살아온 그의 이력을 볼 때 직접 경험한 역사를 전할 수 있으니 탁월한 직업선택이 아닐까 한다. 역사에는 전쟁이 있고 중세의 마녀사냥이 있다. 마녀사냥이라는 큰 타이틀로 묶일 이야기 속에 톰의 이야기가 있다. 아들보다 늙어 보이는 엄마는 당연하지만 그 아들과 나이차가 너무 나 보인다면 아들이 늙지 않는 것이고, 그렇다면 그 엄마는 마녀다. 늙지 않은 아들이 악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엄마가 마녀가 된다. 엄마가 아들을 늙지 않게 마법을 걸었으니까. 왜? 엄마는 마녀니까.

  “살아남으라.” 물속에 던져진 엄마의 유언이었다. 살아남은 톰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 여지없이 늙지 않는 남편이 된 톰은 또다시 고통을 겪는다. 딸이 자신과 같다는 사실을 알게 된 톰의 딸을 찾기 위한 여정에는 다양한 시대와 나라를 오가는 톰의 삶이 이어진다. 딸과 자신처럼 늙지 않는 병을 가진 사람들, ‘소사이어티’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8년마다 완전히 정체를 바꾸며 사는 소사이어티의 일원으로 딸을 찾기 위해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함께 하는 톰. 소사이어티의 두려움은 과거의 마녀사냥처럼 현대에서 생체실험 대상자가 되는 것이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를 지배하는 엄청난 무언가의 존재를 믿게 돼. 우리 마음속에 갇혀 사는 무언가를. 그건 우리를 도울 수도 있고, 망쳐 놓을 수도 있어. 우리는 우리 자신들에게조차 수수께끼로 남아 있잖아. 과학조차도 그걸 인정하고. 인간의 정신이 어떻게 작동되는지 우린 아직도 모르고 있어.


  소사이어티가 금지하는 규칙. 사랑에 빠지지 말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생각,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내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삶, 시간이란 무엇인지 산다는 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고뇌를 거듭함에도 톰은 다시 사랑에 빠지려 하고 있다.


나처럼 오래 살다 보면 세상에 변치 않는 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오래 살면 모두가 난민이 되어 버린다. 국적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오랫동안 고수해 온 자신의 세계관이 틀렸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을 정의하는 건 오로지 인간으로 사는 것뿐이라는 사실도 깨닫게 되고.


  시간을 오래 살아가는 톰의 고뇌는 사람들이 살면서 행하는 생각과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그 생각이 15배쯤 더 길고 오래 한다고 봐야할까. 결국 시간이란 굴레에서 인간의 해답은 그것을 의식하지 않는 삶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현재는 매 순간 속에서 영원히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아직 살아야 할 현재가 많이 남아 있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얼마든지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시간의 지배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면 비로소 시간을 멈출 수 있다는 것을. 더 이상 나는 과거에 사로잡히지 않을 것이다. 미래를 두려워하지도 않을 거고.


  영화는 어떻게 표현될지 모르겠지만 소설속 고뇌는 익숙하고 결말은 식상하다. 시간에 대한 인식은 새로운 무언가를 제시하기엔 ‘현재’를 소중히 하라는 말 외엔 없는 모양이다. 그리스신화에서 시빌라는 아폴론이 한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자 손으로 모래한줌 움켜쥐고 그만큼 살게 해달라고 했다. 젊게 해달라는 것을 잊었기에 늙고 쪼그라들며 천년을 살아간 시빌라에게 아이들이 무엇을 원하냐 물었다. 지칠대로 지친 시빌라는 “죽고 싶어”라고 대답했다. 톰이 시빌라에게 자신의 고뇌를 전해주었다면 시빌라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톰은 늙지 않고 웬만한 병은 걸리지 않는 신체를 지녔으니 시간을 생각하는 데 있어서는 시빌라에 비해 여유롭지 않을까. 그렇지 않고 시간이란 누구에게나 같은 무게로 다가오는 걸까.


시간이란 그런 거야. 늘 한결같지 않지. 살다 보면 공허하게 느껴지는 날들도 있잖아. 그게 몇 년이나 몇 십 년 동안 지속될 때도 있고. 괴어 있는 물처럼 무의미한 시간들. 그러다가 아주 특별한 해를 맞게 되지. 그건 딱 하루일 수도 있고, 오후의 짧은 순간일 수도 있어. 모든 게 갖춰진 완벽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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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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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2018.


  아랍의 카프카로 불리는 작가의 이 소설은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비교되는데 등장하는 괴물 역시도 무명이다. 무명씨의 활약을 보는 것만큼이나 탄생이 흥미롭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판타지 분위기는 이라크, 바그다드라는 도시와 연결되며 현실처럼 여겨진다.

  폭발이 끊이지 않는 미군 점령하의 바그다드에는 파편이, 시체가 넘쳐난다. 때로는 팔 하나, 다리 하나, 몸통이 하늘로 솟구쳤다 모일 곳을 찾지 못하고 흩어진다. 죽은 영혼은 흩어진 제 몸을 찾아 떠돈다. 그곳으로 사람들은 걸어 다니고, 밥을 먹고, 이라크와 이란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기다리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등쳐먹으려 안달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동네 깡패같기도 한 폐품업자 하디가 폭발로 흩어진 시체의 부위를 하나씩 주워 모으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렇게 모아진 시신의 형태를 꿰매는 건 그렇게 해두면 누군가가 장례를 치러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난폭하고 도둑놈 심보를 보이는 하디를 사람들은 한때, 누구도 상대하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 나헴의 죽음 이후로 성격이 변했다고 했으니 하디의 심성은 처음부터 공격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폭발이 일상화된 곳에서 살지만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함께 하던 동료 나헴의 죽음에서, 어느 살점인지 분간할 수 없게 폭발해 버린 나헴이 죽던 그날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하디의 마음이 무명씨를 낳았다.

  세상에 온갖 죽음의 현장이 된 곳엔 갖가지 유령들의 소문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바그다드의 골목골목엔 폭발로 죽을 때 온전한 제 시신에 안착하지 못한 영혼들이 떠다닌다. 호텔 경비원 자파르도 자살폭탄 테러로 죽어 제 몸을 잃은 영혼이다. 그런 자파르의 영혼이 꿰맨 시신으로 쏘옥 빨려 들어가 자리잡을 때, 이 시신은 자파르일까. 각 부위의 주인일까, 새로운 인물일까. 무명씨, 그렇게 지칭된 이 시신이 살아 움직이면서 바그다드에는 폭탄 발생 빈도만큼이나 기이한 죽음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생애를 바탕으로 한 산 사람들의 평가. 


죽음은 죽은 자에게 존엄의 아우라를 선물한다. 산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미안한 마음에 죽은 자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 사람만은 절대 아부 자이둔을 용서하지 않았다. 유보된 정의된 개소리에 불과하다. 정의는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나중에는 오로지 복수의 시간뿐이다. 정의로운 신이 행하는 고문, 영원의 고문이 있을 뿐이다. 복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반면에 정의는 이곳 지상에서, 그것도 증인 앞에서 이루어질 때만이 의미가 있다.


  분명 죽음은, 더구나 전쟁에서 폭탄이 난무하는 나라에서의 죽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 의한 죽음이라면 죽은 것이 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로 미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정의일까. 괴물은 정의의 다른 이름이 되는 건가.

  분명 무명씨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살해용의자가 아니라 ‘정의’라고. 이 땅은 이미 탐욕, 야망, 과대망상, 무참한 폭력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대신한 복수, 그를 통해 정의를 이루려 한다고. 아부 자이둔에 의해 억울하게 전쟁터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을지 모르는 아들을 수십년 동안 기다리는, 아부 자이둔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엘시바에게는 이 괴물의 정의가 닿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무명씨에게 조각난 시신의 살점을 계속 가져다주는 추종자들에게도.

  법의 판결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다. 턱없이 낮은 형량, 온갖 이유로 감형되거나 가석방되는 일 등은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 차라리 분노만큼이나 자력구제하고파 지는 일이 너무 많은데 무명씨는 그런 분노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존재다.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기워진 신체의 주인들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살인하는 무명씨에 의해 자살테러범이 죽고, 모집책이 죽고, 트럭 폭탄의 알카에다 지도자 등이 죽어 나가니 어쩌면 그래도 정의가 흐른다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명씨가 행하는 일들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무명씨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신체부위에 해당하는 사람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부위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수를 완수한다 해도 피해자의 부위는 어쨌거나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무명씨가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온전한 시신의 모습을 하기 위해선 결국 복수와 정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죽지 않을 사람은 없다. 테러가 진행되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복수할 대상이 멈춰질 수 있단 말인가. 개개인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사사로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과연 있는가. 무명씨의 살인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묻게 된다. 그런데 무명씨는 왜 온전한 시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거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괴물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러니만큼 괴물 이야기를 쫒는 기자의 등장이 현실성을 부여잡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당국이 등장하고 점성술사가 등장하고 온갖 미신들이 난무하며 거짓말쟁이가 목격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하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도 모른 채 이라크에서라면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게 된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살점을 받아 생을 이어가는 무명씨. 각기 다른 이들의 신체부위로 형성되는 무명씨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나. 매일 바뀌는 얼굴이 무명씨일까. 신체 부위가 무명씨일까. 결국 무명씨는 모든 죄를 진 자의 얼굴을 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범죄자가 행하는 복수는 과연 정의인가.

  이 책은 2018년 한강 작가가 수상한 맨부터 인터내셔널상 최종후보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영국 영화사에서 영화화된다고 하니 시각적으로 표현된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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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 2009 용산참사 헌정문집 실천과 사람들 2
작가선언 6·9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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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게 세우고


지금 내리실 역은 용산참사역입니다, 작가선언 6·9, 200.


   비정한 나라에 무정한 세월이 흐른다.

   이 세월을 끝내야 한다.

   사람의 말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2009년 출간된 이 책을 2014년의 어느 날 들춰보다가 첫 페이지 이 단락에 너무 놀랐다. 처음에는 은유로 보았을 그 글귀가 다른 의미로 다가와서 더 아프게 다가왔다. 모든 것이 제대로 해결치 않았고 이제 진도 팽목항 분향소는 철거되고 경찰청 인권침해 진상조사위원회의 용산참사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그때 제기된 여러 문제들을 입닫고 있던 언론은 마치 처음 드러난 일인 양 정부가 한 일을 보도했고 책임자들은 여전히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곳곳에서 건물이, 담이, 무너지고, 토사가 유실되고 또 곳곳에서는 건물을 세우겠다고 아우성이다. 무너지고 세우고, 무너지게 세우고….  


끊임없이 무엇인가 세워지는 곳에 사는 일은, 폐허에 사는 일보다, 더 고통스럽다.


  이 책은 192명의 문화예술인의 ‘용산참사’를 겪으며 기고한 작품 모음집이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예술인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철거민들의 어려움과 아픔, 용산참사에 희생된 이들에 대한 애도, 용산참사 사건을 일으킨 가해자들과 정의를 모르는 정권에 대한 분노와 비판 등이 시와 산문, 사진과 그림, 판화로 표출되고 있다.

  나희덕 시인의 「신정 6-1지구에서 용산 4지구까지」의 위 문장처럼 아파트공화국, 건물주의 나라에서 사는 일은 고통스럽다. 새소리를 들으려 하면 여지없이 들리는 망치질소리에 하늘을 보려 하면 여지없이 가려버리는 건물을 보며, 그럼에도 살 곳이 마땅치 않다는 것을 실감할 때면 말이다. 일년에 3일 자기도 힘든  123채를 가진 전직 검사는 여전히 집이 123채일까, 1234채일까. 가진 거라곤 집 한 채가 전부라는 죄인이 그 한 채의 집을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을 무너뜨렸는지, 그 집에 수많은 이들에게서 강탈한 것을 채워놓았는지 모르지 않는데 뻔뻔함을 세우고 있다.

  오랜 동안 이 나라가 정의와 행복을 세우는 일보다는 무너뜨리는데 힘쓰며 오로지 건물 세우기에 혈안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건물을 세우는 일이 가능한 것을 보면, 무너뜨릴 것이 아직 많다는 이야기같다.

  한지혜 작가는 「누가 망루에 불을 붙였는가」라는 글에서 문예창작 전공 시절의 이야기를 적었다. 학기마다 써내는 글의 주제가 ‘철거’였다고. 그에 대한 평가는 좋지 않았다고, “다 지나간 시대를 붙잡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했다. 현실을 외면 혹은 왜곡한 감상주의라는 비판까지 받았다는데, 나도 작가처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알면서도 자꾸 눈물이 났다. 나는 하루 종일 강의실 복도에 앉아 울었다. 억울했다. 내가 쓴 글이 다 지나간 시대요, 왜곡된 감상이라니 방학 내내 쿵쿵 울리는 벽에 등을 기대고 있던 내가 다 허상같았다. 그리고 당황스러웠다. 무너지는 집에 앉아서도 무섭지 않았는데. 내가 처한 현실과 전혀 다른 동시대가 존재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내 현실의 고통이나 분노는 가상세계와 마찬가지일 수도 있는 사실을 깨닫자 비로소 두려웠다.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지워지지 않을 시대의 일들이 묻히고 덮일까봐 걱정스럽다. 아직도 철거라는 게 현실에서 보이는 일인데, 그것이 ‘시대를 벗어난 이야기’라는 생각 자체가 현실을 왜곡한 감상주의라는 비판 자체가 얼마나 끔찍한 시대를 살았는지를 더욱 각인하게 한다.    

  비정한 나라에 무정한 세월이 흐른다. 이 세월을 끝내야 한다.

  용산참사의 일을 가해자와 언론이 모르쇠 하는 동안 사건의 진상조사도 처벌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그렇게 비정한 나라가 계속되어 세월이, 되었다. 많은 것이 감춰지는 나라에서 그것을 들추어 소리높이던 이들도 블랙속으로 들어가야 했다. 달라질 세상에 기대와 희망을 가졌지만 모르쇠의 무리들은 그들의 세를 쌓아올리며 승자의 기록이라고 외치고 있다. 백무산 작가의 말처럼 ‘승자의 담론 개발윤리’로 이 세상을 일구고 일궈온 이들이 그동안 ‘무너지게 세운 것‘이 나올 때마다 달라질 세상을 보기 위해선 더 달려야 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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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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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야의 주장


베어타운, 프레드릭 배크만, 2018.


  베어타운에서 벌어진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이야기하기 위해 베어타운이 존재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굳이 베어타운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사건도 마을도 모두 베어타운이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세상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아이스하키의 명성만이 존재하는 소도시, 베어타운은 그저 세상을 조금 축소해 놓았을 뿐이다.


모두들 문화를 운운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아무도 설명하지 못한다. 모든 조직이 다들 자기들은 문화를 창조하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오직 하나, 승리하는 문화뿐이다. 수네도 알다시피 모든 세상이 마찬가지지만 소규모 공동체에서는 더욱 두드러진다. 우리는 승자를 사랑한다. 딱히 호감이 가는 부류가 아니더라도 그렇다. 승자들은 대개 강박적이고 이기적이며 배려심이 없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우리는 그들을 용서한다. 이기기만 하면 그들은 좋아한다.


  작은 마을일수록 공동체가 강하다고 하지만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가에 따라  결속의 양과 질이 차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공동체 구성원 하나하나의 삶이 곧 공동체와 동일시될 때 구성원이 아니라 공동체 자체를 고수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한 마을을 옮겨다 놓은 만큼 베어타운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생생한 캐릭터의 향연이 맛깔스럽게 펼쳐지며 마을의 이야기를 풍부하게 전한다. 베어타운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니 각종 사회문제들이 산재하고 사람들 사이 우정과 사랑, 음모와 배신의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성폭력도.       


가해자에게 성폭행은 몇 분이면 끝나는 행위다. 피해자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고통이다.


그녀는 열다섯 살이니 부모의 동의 없이 성관계를 맺을 수 있는 나이라고 하고, 그는 열일곱 살이지만 다들 ‘어린애’라고 표현한다. 그녀는 ‘젊은 아가씨’다.


  가해자와 피해자인 청소년들을 대신해 부모와 마을 어른들의 대리전으로 이루어진 싸움은 ‘어른’의 정의와 상식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왜 공동체는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감정이입을 하는지, 정의와 윤리와 상식으로 이야기하지 않고 권력과 이익의 관점으로 보는지. 가해자가 공동체의 지지에 힘입어 어떻게 당당하게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아니 아예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지의 반대편에 피해자에 대한 사람들의 시선이 절대적인 악을 본 것처럼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여자아이들이 ‘기분 전환용’이라거나 오로지 ‘떡치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학습하게 함으로써 잠재적 가해자와 피해자를 만들고 있음을 보여준다. 왜, 이렇게까지 묻는다면 글쎄, 집단사이에 갈등이 벌어졌으니 더욱 집단을 똘똘 뭉치게 하기 위해서라고, 공동체를 회복하기 위해서라고 말하면 될까. 그것을 위한 가장 쉬운 방법이 사랑이 아니라 증오라고 베어타운은 보여준다. 아이스하키의 마을 베어타운은 아이스하키 우승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적이라 간주하고 그에 맞추어 사고한다. 마을의 변화와 성공이 아이스하키 우승이라면 아이스하키를 가장 잘 하는 선수는 마을을 구제할 영웅이므로 영웅은 절대로 가해자여서는 안되는 상황을 보여준다.


‘의리‘처럼 설명하기 힘든 단어도 없을 것이다. 의리는 항상 좋은 걸로 간주된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베푸는 수많은 호의가 의리에서 비롯된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문제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저지르는 가장 나쁜 짓도 바로 그 의리에서 비롯된다는 거다.


  베어타운이 아니더라도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행해진 성폭행이 얼마나 많았는가는, 그것을 어떻게 은폐하는가는, 한국에서 일어난 실제사건들이 보여주었다.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그 결과들을 가늠케 한다. 그렇다면 베어타운은, 베어타운에서는 어떻게 되었을까. 가상마을 베어타운처럼 결과 또한 가상 아니 환상이 아닐까. 삼월 말의 어느 날 야밤에 한 십대 청소년이 쌍발 산탄총을 들고 숲속으로 들어가 누군가의 이마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 일에서 시작한, 베어타운의 이야기….


나중에 검은 재킷의 사나이는 이런 생각을 할지도 모른다. 왜 그는 진실을 얘기하는 사람이 케빈인지 아니면 아맛인지 고민했을까. 왜 마야의 주장으로는 부족했을까.


  베어타운을 통틀어 이 문장에 이르러서야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베어타운이 아무리 마을 전체의 사람들 한명 한명에 서사를 부여하며 길게 이야기를 이어간대도 정체모를 검은 재킷의 사나이의 말이 의미하는 것만큼의 명료함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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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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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자화상

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2018.


  스웨덴의 한 섬에서 살고 있는 일흔살 프레드리크 벨린의 집은 어느 가을 밤 불타버린다. 이웃 섬과 본토에서 한밤중에 불을 끄러 왔지만 제대로 된 고무장화 하나 건지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불타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외과의사로 의료사고를 낸 후 오랜 시간 홀로 살고 있던 그는 자신의 집 방화범으로까지 의심받는 신세가 된다. 의사이던 시절에도 인생의 무상함과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벨린에게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은 상실감과 인생의 회한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의 삶은 환자의 엉뚱한 팔을 자르고 난 후 도망치듯 섬으로 들어와 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래도록 교류한 섬사람들은 특별히 그와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벨린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큼의 성향도 아니었다. 하지만 화재와 함께 찾아온 딸 루이제와 취재차 온 어린 여기자 리사 모딘은 그의 삶을 결코 평온케 만들지 않는다.

  그는 리사 모딘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며 사랑을 꿈꾸고 존재조차 몰랐던 딸의 황당한 행동에 힘겨워하면서도 딸 루이제를 챙기고 보살피려 애쓰며 섬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재의 용의자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이렇게 화재 후 살아나던 상실감과 인생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감정 위에 애정과 분노, 희망 등을 섞으며 섬에서만 살던 삶의 패턴을 바꾸기도 하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노년이란 생물학적 나이는 그를 욕망에 충실하게끔 놔두지 않는다. 노년이란 죽음에 관한 빈도와 깊이를 더하게끔 하니까.


그렇게 곧 죽게 될, 그리고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고 싶은 소망을 가진 중환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죠. … 그 사람들 대부분이 꼭 보고 싶어 하는 게 렘브란트의 자화상이에요, 그중에서도 특히 늙었을 때의 자화상. 눈과 눈이 마주하는 그 만남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을 좀 덜 고통스럽게 만들어주죠.


  마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감정들 또한 쌓아간다. 외딴 폐가에서 수집벽을 갖고 살거나,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거나, 그들 또한 섬에 찾아든 자신처럼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해 간다. 벨린에게는 마을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보고싶은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같았다. 


그 사람들에게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내게서 그들 자신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이해 봄과 여름 동안 깨달았다.


어두운 현관복도에 가만히 서 보았다.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에 항상 따라붙는 어떤 떫은 냄새가 분명히 느껴졌다. 불이 나기 전의 내 집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었을까?


  스웨덴 장화는 뭔가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는 줄 알았다. 장화가 스웨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거나 장화의 최대 생산국이 스웨덴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라도. 하지만 스웨덴 장화에 대한 주목할 만한 특징을 찾지 못했고 작가와 소설 배경이 스웨덴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화. 노년이란 그냥 장화같은 것 아닐까.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가지고 있을 장화처럼 곁에 있는 것. 그런 장화지만 화재가 난 이후로 제대로 장화를 구할 수 없었던 벨린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항상 그것을 맞을 준비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때로는 거부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몰랐던 마을 사람들처럼 오랜 인생을 살아본 뒤에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제때 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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