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지음, 이수연 옮김 / 뮤진트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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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자화상

스웨덴 장화, 헤닝 만켈, 2018.


  스웨덴의 한 섬에서 살고 있는 일흔살 프레드리크 벨린의 집은 어느 가을 밤 불타버린다. 이웃 섬과 본토에서 한밤중에 불을 끄러 왔지만 제대로 된 고무장화 하나 건지지 못한 채 모든 것이 불타고 그는 겨우 목숨을 건진다. 외과의사로 의료사고를 낸 후 오랜 시간 홀로 살고 있던 그는 자신의 집 방화범으로까지 의심받는 신세가 된다. 의사이던 시절에도 인생의 무상함과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던 벨린에게 화재로 모든 것을 잃은 상황은 상실감과 인생의 회한을 느끼게 하기 충분했다.

  그의 삶은 환자의 엉뚱한 팔을 자르고 난 후 도망치듯 섬으로 들어와 섬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래도록 교류한 섬사람들은 특별히 그와 잘 지내지 못할 이유가 없었고 벨린의 삶에 크게 영향을 끼칠 만큼의 성향도 아니었다. 하지만 화재와 함께 찾아온 딸 루이제와 취재차 온 어린 여기자 리사 모딘은 그의 삶을 결코 평온케 만들지 않는다.

  그는 리사 모딘에게 이성적으로 끌리며 사랑을 꿈꾸고 존재조차 몰랐던 딸의 황당한 행동에 힘겨워하면서도 딸 루이제를 챙기고 보살피려 애쓰며 섬 곳곳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는 화재의 용의자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이렇게 화재 후 살아나던 상실감과 인생에 대한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감정 위에 애정과 분노, 희망 등을 섞으며 섬에서만 살던 삶의 패턴을 바꾸기도 하지만 떨쳐버릴 수 없는 노년이란 생물학적 나이는 그를 욕망에 충실하게끔 놔두지 않는다. 노년이란 죽음에 관한 빈도와 깊이를 더하게끔 하니까.


그렇게 곧 죽게 될, 그리고 죽기 전에 다시 한 번 렘브란트의 그림들을 보고 싶은 소망을 가진 중환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그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거죠. … 그 사람들 대부분이 꼭 보고 싶어 하는 게 렘브란트의 자화상이에요, 그중에서도 특히 늙었을 때의 자화상. 눈과 눈이 마주하는 그 만남이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을 좀 덜 고통스럽게 만들어주죠.


  마을 사람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과 감정들 또한 쌓아간다. 외딴 폐가에서 수집벽을 갖고 살거나, 습관적으로 술을 마시거나,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거나, 그들 또한 섬에 찾아든 자신처럼 고독과 두려움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음을 이해해 간다. 벨린에게는 마을 사람들이 미술관에서 보고싶은 렘브란트의 자화상과 같았다. 


그 사람들에게서 나는 나 자신을 보았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내게서 그들 자신을 보아왔다는 사실을 이해 봄과 여름 동안 깨달았다.


어두운 현관복도에 가만히 서 보았다. 혼자 사는 사람의 고독에 항상 따라붙는 어떤 떫은 냄새가 분명히 느껴졌다. 불이 나기 전의 내 집에서도 같은 냄새가 났었을까?


  스웨덴 장화는 뭔가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는 줄 알았다. 장화가 스웨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 역사를 가지고 있다거나 장화의 최대 생산국이 스웨덴이라거나 그런 이야기라도. 하지만 스웨덴 장화에 대한 주목할 만한 특징을 찾지 못했고 작가와 소설 배경이 스웨덴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냥 평범하기 그지없는 장화. 노년이란 그냥 장화같은 것 아닐까.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고 가지고 있을 장화처럼 곁에 있는 것. 그런 장화지만 화재가 난 이후로 제대로 장화를 구할 수 없었던 벨린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이고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것이지만, 항상 그것을 맞을 준비는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 때로는 거부하고 싶기도 한 것이다.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잘 몰랐던 마을 사람들처럼 오랜 인생을 살아본 뒤에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을 제때 구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처럼 자신이 누구인지 안다는 것 역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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