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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지음, 조영학 옮김 / 더봄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당신은 나의 얼굴을 갖고 있다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 아흐메드 사다위, 2018.
아랍의 카프카로 불리는 작가의 이 소설은 메리 셜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비교되는데 등장하는 괴물 역시도 무명이다. 무명씨의 활약을 보는 것만큼이나 탄생이 흥미롭다. 소설 전반에 흐르는 판타지 분위기는 이라크, 바그다드라는 도시와 연결되며 현실처럼 여겨진다.
폭발이 끊이지 않는 미군 점령하의 바그다드에는 파편이, 시체가 넘쳐난다. 때로는 팔 하나, 다리 하나, 몸통이 하늘로 솟구쳤다 모일 곳을 찾지 못하고 흩어진다. 죽은 영혼은 흩어진 제 몸을 찾아 떠돈다. 그곳으로 사람들은 걸어 다니고, 밥을 먹고, 이라크와 이란 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기다리고,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등쳐먹으려 안달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동네 깡패같기도 한 폐품업자 하디가 폭발로 흩어진 시체의 부위를 하나씩 주워 모으는 장면은 뭉클하다. 그렇게 모아진 시신의 형태를 꿰매는 건 그렇게 해두면 누군가가 장례를 치러줄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이다. 난폭하고 도둑놈 심보를 보이는 하디를 사람들은 한때, 누구도 상대하지 않은 적도 있었는데, 나헴의 죽음 이후로 성격이 변했다고 했으니 하디의 심성은 처음부터 공격적이진 않았던 모양이다. 폭발이 일상화된 곳에서 살지만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함께 하던 동료 나헴의 죽음에서, 어느 살점인지 분간할 수 없게 폭발해 버린 나헴이 죽던 그날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한 하디의 마음이 무명씨를 낳았다.
세상에 온갖 죽음의 현장이 된 곳엔 갖가지 유령들의 소문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바그다드의 골목골목엔 폭발로 죽을 때 온전한 제 시신에 안착하지 못한 영혼들이 떠다닌다. 호텔 경비원 자파르도 자살폭탄 테러로 죽어 제 몸을 잃은 영혼이다. 그런 자파르의 영혼이 꿰맨 시신으로 쏘옥 빨려 들어가 자리잡을 때, 이 시신은 자파르일까. 각 부위의 주인일까, 새로운 인물일까. 무명씨, 그렇게 지칭된 이 시신이 살아 움직이면서 바그다드에는 폭탄 발생 빈도만큼이나 기이한 죽음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살아온 생애를 바탕으로 한 산 사람들의 평가.
죽음은 죽은 자에게 존엄의 아우라를 선물한다. 산사람들은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 미안한 마음에 죽은 자를 용서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한 사람만은 절대 아부 자이둔을 용서하지 않았다. 유보된 정의된 개소리에 불과하다. 정의는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한다. 나중에는 오로지 복수의 시간뿐이다. 정의로운 신이 행하는 고문, 영원의 고문이 있을 뿐이다. 복수란 바로 그런 것이다. 반면에 정의는 이곳 지상에서, 그것도 증인 앞에서 이루어질 때만이 의미가 있다.
분명 죽음은, 더구나 전쟁에서 폭탄이 난무하는 나라에서의 죽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에 의한 죽음이라면 죽은 것이 내가 아니라는 이유로, ‘내가’ 살아있다는 이유로 미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의 죽음은 어떤 의미일까. 정의일까. 괴물은 정의의 다른 이름이 되는 건가.
분명 무명씨는 그렇게 이야기한다. 자신은 살해용의자가 아니라 ‘정의’라고. 이 땅은 이미 탐욕, 야망, 과대망상, 무참한 폭력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대신한 복수, 그를 통해 정의를 이루려 한다고. 아부 자이둔에 의해 억울하게 전쟁터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을지 모르는 아들을 수십년 동안 기다리는, 아부 자이둔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엘시바에게는 이 괴물의 정의가 닿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무명씨에게 조각난 시신의 살점을 계속 가져다주는 추종자들에게도.
법의 판결에 만족하지 못할 때가 많다. 턱없이 낮은 형량, 온갖 이유로 감형되거나 가석방되는 일 등은 정의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마음이 들지 않게 한다. 차라리 분노만큼이나 자력구제하고파 지는 일이 너무 많은데 무명씨는 그런 분노를 스스로 해결하고 있는 존재다.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하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으로 기워진 신체의 주인들의 죽음의 원인을 찾아 살인하는 무명씨에 의해 자살테러범이 죽고, 모집책이 죽고, 트럭 폭탄의 알카에다 지도자 등이 죽어 나가니 어쩌면 그래도 정의가 흐른다고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무명씨가 행하는 일들이 공포와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할지라도.
무명씨는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신체부위에 해당하는 사람의 복수를 하지 못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부위가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복수를 완수한다 해도 피해자의 부위는 어쨌거나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다. 더 이상 필요가 없다는 뜻이겠지?
무명씨가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온전한 시신의 모습을 하기 위해선 결국 복수와 정의는 끊임없이 이어진다는 이야기다. 죽지 않을 사람은 없다. 테러가 진행되는 이 나라에서 어떻게 복수할 대상이 멈춰질 수 있단 말인가. 개개인에게 원한을 사지 않고 사사로운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과연 있는가. 무명씨의 살인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묻게 된다. 그런데 무명씨는 왜 온전한 시신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거지?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괴물의 이야기는 전개된다. 그러니만큼 괴물 이야기를 쫒는 기자의 등장이 현실성을 부여잡기 위한 장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부당국이 등장하고 점성술사가 등장하고 온갖 미신들이 난무하며 거짓말쟁이가 목격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하는 이 소설의 분위기는 무엇을 믿어야 좋을지도 모른 채 이라크에서라면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는 착각이 들게 된다.
끊임없이 누군가의 살점을 받아 생을 이어가는 무명씨. 각기 다른 이들의 신체부위로 형성되는 무명씨의 정체성은 어떻게 되나. 매일 바뀌는 얼굴이 무명씨일까. 신체 부위가 무명씨일까. 결국 무명씨는 모든 죄를 진 자의 얼굴을 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 범죄자가 행하는 복수는 과연 정의인가.
이 책은 2018년 한강 작가가 수상한 맨부터 인터내셔널상 최종후보작이었다고 한다. 또한 영국 영화사에서 영화화된다고 하니 시각적으로 표현된 바그다드의 프랑켄슈타인의 모습이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