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바리안 데이즈 - 바다가 사랑한 서퍼 이야기
윌리엄 피네건 지음, 박현주 옮김, 김대원 용어감수 / 알마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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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또는 허풍

바바리안 데이즈-바다가 사랑한 서퍼 이야기, 윌리엄 피네건, 2018.


  태풍 소식과 함께 비바람이 몰아친다. 산 이름이라는 태풍 콩레이가 바다에 거대한 파도를 남긴다. 제주도에 몰아치는 파도 사진을 보다가 이 위험상황에 안전을 대비해야 함에도 밖으로 나가고 싶어진다. 갑자기 가슴 떨림을 느낀다. 이런 기분은 어쩌면 파도를 타는 서퍼의 이야기, 『바바라인 데이즈』때문이 아닌가 싶다. 파도를, 물을 무서워하는 내 마음에 파도에 대한 환상과 도전의식을 함께 심어준.

[태풍 콩레이가 몰고 온 파도/ https://news.v.daum.net/v/20181005111056827]


  이런 마음으로 바다에 나간다거나 황홀경에 잠겨있다면 나도 자르징 노파에게서 저주를 들을지도 모른다.


“당신들 서퍼는 부모님에 대한 존경도 없고 가족이나 친구들에 대한 존중심도 없어. 저런 바다에 나가서 목숨을 걸어? 뭐를 위해서? 이 마을에 대한 존경심도 없는 거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수 세대에 걸쳐 바다에 목숨을 걸어온 어부들을 존중하지 않는 거야. 여기 사람들은 이 바다에서 자기 목숨을 잃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었어. 당신들은 그런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이 없다고!”


  누군가에게는 생활의 터전인 곳, 그렇기에 위험에 맞서는 곳에서 목숨을 건 유희를 벌이는 서퍼들이 낭만적이지도 아름답지도 대단하게도 보이지 않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파도를 타는 일이 살아가는 힘이고 존재를 상기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이 책의 저자와 그와 함께 한 서핑 동료들이 그렇다.

  2016 퓰리처상 수상작인데다가 ‘버락 오바마가 선택한 책’이란 수식을 받는 이 책은 저널리스트인 작가의 서핑과 함께 한 삶의 이야기다. 수영장에서도 허우적이는 내게 파도를 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이 세계에 빠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파도를 타는 것 자체보다 수려한 이국의 해변풍경, 남태평양, 오스트레일리아, 아시아, 아프리카, 페루 등 작가가 간 모든 장소에 때한 끌림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거침없이 파도를 탈 때의 그 기분을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진다. 한동안은 이 파도타기를 앓을 듯하다.


커다란 파도 속으로 나아가는 건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공포와 황홀이 사물의 가장자리 주위를 돌면서 밀려갔다가 밀려오며 각기 꿈꾸는 사람을 덮치겠다고 위협했다. 지상의 것 같지 않은 아름다움이, 움직이는 물과 잠재된 폭력, 지나치게 진짜 같은 폭발, 그리고 하늘이 들어선 거대한 경기장으로 스며들었다. 장면은 펼쳐질 때도 신화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늘 광포한 양가성을 느꼈다. 나는 다른 곳 어디에도 있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곳 어디든 있고 싶었다.


  일찌감치 이 세계에 빠진 작가는 세계에서 유명한 서핑 장소로 꼽히는 10곳을 선정한 시기에 벌써 아홉 곳에서 파도를 탔을 만큼 서핑에 중독되었다. 그에게 서핑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다. 어린 시절 하와이에서 하울리로서 이방인으로 낙인찍힌 순간부터 그는 서핑의 세계를 즐기며 자유에 대한 탐닉을 모험의 강렬함에 빠졌다. 서핑의 세계에만 빠져 오로지 세계를 돌아다니고 파도만 탔을 듯하지만 사랑도 우정도 일도 한다. 정치사회에 무관심하지 않고 학위를 땄고 저널리스트가 되어 있다.

  저자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었던 것 또한 서핑을 하면서 깨달아가는 삶과 죽음과 인생에 관한 생각 덕분이다. 저자의 인생의 스승은 서핑을 통해서 얻어지는 생생한 감각과 관조로 가능하다. 파도에 쓰러져 부상을 입기도 하고 겨우 살아남은 일도 수두룩하지만 강렬한 태양 아래 푸른 파도의 소리는 심장을 벌떡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 주는 모양이다. 서핑은 저자에게 마리화나와 약물보다 더 중독되어 그를 이끄는 것이었다. 종군 기자로 활동을 할 때에도 결혼하여 아이가 태어났어도 딸과 함께 파도를 타는 그가 노년에 이르러 점점 거친 파도를 타는 것에 힘들어 하게 되더라도 그에게 파도를 타는 일은 멈출 수 없는 심장이었다. 자기탐색의 과정이었다.


남태평양을 전전하는 동안, 내 안에 뭔가 다른 것이 일어났다. 브라이언의 관점으로 보면 수염보다도 더 곤란한 것이었다. 나는 자기 변혁에 관심이 생겼다. 나는 우리가 옮겨 가며 함께 살아온 섬사람들의 세계관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괌에 가기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폰페이에서 사람들이 사카우 잔을 둘러싸고 느긋하게 살아가며, 산호돌이 가득한 소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을 때부터였다. 나는 여기에 배우러 왔다고 생각했다. 그저 멀리 떨어진 장소와 사람들에 관한 몇몇 가지를 배우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존재의 새로운 방식을 배우고 싶었다. 바뀌고 싶었고, 존재적으로 덜 고립된 느낌을 받고 싶었으며, 뼛속까지, 사람들 말대로 이 세계에서 편안해지고 싶었다.


  서핑을 하는 동안 나이가 들어간다는 점도 있지만 서핑을 하기 위해 찾은 곳곳에서 매번 느끼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탐색 또한 저자를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많은 나라를 돌면서 파도에 몸을 맡기는 그의 서핑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실제 파도를 타고 있는 느낌이 들게 한다. 그래서 저자의 희열과 공포와 두려움을 내가 느끼는 듯한 착각이 들면서 파도가 환영처럼 느껴지게 된다. 서핑을 하는 그들에게 전해오는 두 개의 상반된 말이 있다.

 

“큰 파도는 높이가 아니라 공포의 정도로 재는 것이다.”

“큰 파도는 높이로 재는 것이 아니라 허풍의 정도로 재는 것이다.”


  이 역설의 말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파도타기를 나는 해보지는 못할 것이다. 강렬한 끌림을 느끼지만 실행력이 떨어지느니만큼 인생의 버킷리스트에 올려두어 단지 동경으로만 간직하고 말지 모른다. 대신 인생의 파도에서는 이 두 가지 역설을 재볼 수는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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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백수린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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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빌라에 갇혀

2018 제8회 문지문학상 수상작품집, 문학과지성사, 2018.


  몇몇 작가는 다른 작품집에서 본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몇몇 처음 보는 작가가 있다. 문지문학상 작품집에서 본 소설은 다른 문학상 작품집에서 본 소설들의 흐름과 두드러지게 다른 파노라마를 그린다. 대체적으로 한두 편 정도인데 문지문학상은 절반 이상이다. 작가들의 인터뷰가 실려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돋운다.

  열한편의 단편이 이 계절의 소설로서 계절로 나뉘어 있는데 계절의 느낌을 담았나, 계절과의 연관성이 무언가 생각했더니 단지 매 계절마다 출판사에서 작품을 뽑는 이름이었다. 아무튼 계절이랑은 상관없었다. 사촌동생이 작품집 제목을 보더니 ‘여름의 빌라, 제목이 좋다’라고 했다. 평범한 제목이자, 일상의 말인데 어떤 면에서 좋다라고 느끼는지 궁금했다. 묻질 못해서 답을 못 들었지만, 그냥 막연하게 여름의 빌라라는 제목을 반복해 본다. 이 작품집에서 유난히 걸리던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한부분이 걸리자 좀체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해버린 감정이 여름의 빌라에 있었다.

  문지문학상은 수상작은 백수린 작가의 「여름의 빌라」. 서간체로 써내려간 소설은 주아가 스무살에 만난 독일인 노부부를 삼십대에 다시 만나 남편과 함께 캄보디아에서 여름휴가를 보냈던 시간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노부부와 주아의 오랜 우정이 한순간 깨어져버리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은 주아 자신의 눈일까. 남편 지호의 눈일까.


레오니를 제외한 우리 넷이 나란히 앉아 발마사지를 받던 밤. 나는 나의 피부색이 당신의 피부색보다 어둡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리고 나의 피부색은 내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던 젊은 안마사의 피부색보다는 밝았지요. 나는 그 사실에 대해서 그날밤 골똘히 생각합니다. 앳된 마사지사는 무릎을 꿇고 우리의 발을 박하와 레몬으로 정성껏 문질렀습니다. 한국에서였다면, 마사지를 해주는 사람이 한국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불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나자 나는 그 후로 승합차를 타고 가며 보는 풍경들, 허름한 집들이나 오토바이를 개조해 만든 툭툭 같은 것들을 보는 일이 괴로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소설에서 주아가 갑자기 인식하는 ‘인종’에 대한 의식과 그에 대한 지호의 적대적인 감정은 상당히 불편하다. 한스가 캄보디아 사람들의 낙천적인 삶과 천성을 경이롭다고 할 때 지호는 캄보디아의 가난을 이야기하며, 독일인의 자격을 따지며 격렬한 반응을 보인다. 지호는 평소 윤리와 실존을 떠들던 베레나가 보기엔 ‘반듯한 도덕관념’을 지닌 사람이다. 하지만 내겐 ‘삐딱한 도덕관념’으로 느껴지는 이 모든 행동과 말들은 단지 지호뿐만 아니라 주아에게서도 느껴진다. 지극히 관념적인 도식을 한국의 젊은 부부는 가지고 있다.

  캄보디아 마사지사로 인해 인식된 피부색의 차이로 거리감과 불편함을 느끼는 주아는 한국이었다면, 한국인이었다면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았을 것이라 말한다. 캄보디아 마사지사가 그들에게 마사지를 하는 일은 자본의 일이지 인종의 일이 아니다. 가난한 나라 캄보디아, 그곳에 사는 캄보디아인 모두는 가난하고 불행한 인종으로 분류하는 지호와 주아에겐 캄보디아 보다는 한국이 한국보다는 독일이 더 우위에 있는 나라이며 국민으로 인식되는 모양이다. 그러면서 독일인이라는 것, 전범 국가의 국민이기에 한스 부부를 현재의 가해자로 인식해버린다.


폭력에 대해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것은 폭력 이외의 수단을 갖지 못한 자들뿐이라고.


  폭력에 대한 지호의 말이 얼마나 허황되게 들리는가. 그렇게 지호와 주아라는 개인이 한스 부부에게 개인적으로 가하는 잔인한 폭력의 말은 폭력에 대한 관념적 인식에 골몰하는 지호의 의식에 환멸을 느끼게 한다. 한국에서 마사지를 받았다면 지호는 계급의식으로 인해 반듯한 도덕관념에 의해 힘들어 할까.


당신은 우리가 함께 타프롬 사원을 걸었던 날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지난 2016년 12월 이후 당신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폭력 앞에 소멸되는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했다고요. 하지만, 주아. 당신은 그렇게 덧붙였습니다. 긴 세월의 폭력 탓에 무너져 내린 사원의 잔해 위로 거대한 뿌리를 내린 채 수백 년 동안 자라고 있다는 나무. 그 나무를 보면서 나는 결국 세계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폭력과 증오가 아니라 삶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단다.


  한스부부가 캄보디아인의 삶을 여유와 낙천으로 보며 동경화한 건 테러 피해자로서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솔한 감정의 발로였다. 이 지극히 관념적인 도식 속에서 언뜻 비장하고 비판적이며 자신의 생각의 틀에 맞추어 사고하는 지호에게서 룸펜의 모습이 떠오른다.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그 끈끈한 지호의 지배적 사고에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 것, 그런 시각으로 지호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무심히도 상처를 주고 있는지를 ‘반듯한 도덕관념’의 소유자는 알까. 자기 세뇌에 빠진 채 머리로만 인식하다 보면 얼마나 많은 것을 잘못보고 판단할 수 있는지 느끼게 된다.

  노부부가 캄보디아 마을에서 느낀 그 감정이 어떻게 연유한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국가와 인종에 대한 일반적인 도식으로 에워싸면서 개인, 타인의 삶에 대해 얼마나 몰이해하고 있는지 자신의 기준에 맞추어 타인을 바라보는지를 생각하며 끝끝내 불편하게 자리한 지호가 주아가 걸려서 나가지 않는다. 내게 있는 그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여름의 빌라에 갇혀 최근 소설에서 보지 못한 다른 스타일의 소설들에는 덜 눈이 갔다. 한참을 지호에게 소모적인 감정을 발산하고 났으니 선을 지우고 다른 아이를 받아들인 레오니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빌라에 갇힌 이 마음을 풀어야 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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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을 나온 암탉 (양장)
황선미 지음, 김환영 그림 / 사계절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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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제된 죽음

마당을 나온 암탉, 황선미, 2000-12-20.


  작가가 방송에서 나오는 프로그램을 봤다. 이 책은 베스트셀러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소설과 영화 모두 세계 여러 나라에도 번역·상영되었다. 해외 번역과 상영의 뒷얘기에서 소설의 결말이 삭제되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마치 무슨 일이 벌어진 양 놀랐다.

  이 책 첫 출간이 2000년이니 18년된 작품이다. 청둥오리 수명이 30년이라 하니 어린 초록머리가 중년을 지나고 있을 시기다. 2000년의 아이들에 비해 2010년의 아이들은, 2018년의 아이들이 특별히 동화의 결말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진 않은데, 독일에선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동화의 고전, 인어공주의 결말도 우리는 잘 감당하며 커 왔는데…

  동화로서 이 책은 인어공주가 물거품 된 것만큼의 슬픔을 준다. 단지 결말만이 아니라 읽는 내내 단조의 느낌이다. 자연이란 것이 삶과 죽음을 당연한 것으로 정해놓았더라도 수없이 생각하고 겪게 되는 생과 사, 그러니만큼 삶과 죽음에 대한 인식을 아이들에게도 일찌감치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약하지 않기도 하다. 동화를 보며 아이들이 느끼는 자연스러운 슬픔이라는 감정, 죽음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왜 그랬을까.

  이 책의 부제가 ‘꿈과 자유를 향한 여정'인 줄 몰랐다. 해외 번역본 제목도 이에 맞추었다. 그래서 ’꿈과 자유‘를 주제로 했을 때 그 결말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까. 폐계가 꾸는 꿈, 갇힌 공장식 닭장을 벗어나 마당으로 나가는 것에서 꿈꾸기 시작한 잎싹의 삶에서 죽음이 꿈과 자유를 이루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없건만, 실패라 할 수 없건만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마침표 이후 보여주지 않는 익숙한 동화의 결말로 끝맺음하려 했던 것인가 싶어 의아하다. 아니, 그림형제의 나라 아니던가. 각종 설화와 민담을 채록하며 잔혹한 부분을 수정한 그림형제였으니 독일은 그림형제가 되어 결말을 삭제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결말이 그렇게 잔혹한 동화로 느껴졌을까.

  작가는 “길들여진 오리는 자기 알을 품지 않는다.”라는 만화에서 본 문구에서 영감을 얻어 개인적인 경험을 덧대 이 작품을 썼다고 했다. 잎싹은 길들여진 자가 자기 알을 품는 것을 보여준다. 아니, 길들여진 자가 품는 꿈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길들여져 있었기에 꿈에 다가가는 여정은 더욱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하여 성취해가는 꿈이 얼마만한 희열을 가져다주는지를, 생을 더 아름답고 가치있게 느끼게 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한다.

  때로 우리는 너무나 ‘죽음’에 대해 금기를 씌운다. 자연스럽게 그에 대해 생각하고 느낄 수 있게끔 하지 않은 채 피하고 보는. 죽음에 대해 우리는 길들여진 생각만을 갖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많은 아이들이 이 책을 읽고 잎싹의 죽음에 슬퍼하며 울었다고 했다. 자연스럽게 죽음을 인식할 수 있음에도 삭제된 죽음이 그것을 방해하는 것 같아서, 길들이는 것 같아서 책의 마지막을 오래도록 다시 읽어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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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사회학 - 당신은 대한민국 몇 %입니까?
정태석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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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행복의 지분

행복의 사회학-당신은 대한민국 몇 %입니까?, 정태석, 2014.


  지난달 한창 뉴스를 달군 건 통계청장 교체에 관해서다. 삶의 지표를 가늠하는 통계, 그 중 가계동향조사 표본 선정에 관한 논쟁에서 촉발되어 통계의 신뢰성 문제로 정치권은 대립했다. 이 책에서는 권력이 숨기고자 하는 숫자와 불평등, 자본이 반복해서 말하는 프레임이 삶의 행복을 어떻게 방해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책의 출간이 2014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행복은 얼마나 멀어져 있었을지 가늠하게 된다.    

  『안나 카레니나』속 유명한 첫 문장처럼 행복한 가정이 모두 비슷한 모습이라면 행복한 사회도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쩌면 행복에 대해 세상은 어느 정도 규격화시켜놓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유엔은 매해 국가별 행복지수를 발표한다. 2018년도에는 행복지수의 지표는 국내총생산(GDP), 기대수명, 사회적 지원, 선택의 자유, 부패에 대한 인식, 사회의 너그러움 등을 기준으로 했다고 한다.


타인 지향형 사회에서 인간은 특정한 가치관을 갖지 않고 타인이나 세상의 흐름에 자기를 맞추며 살아간다.


  대한민국은 얼마나 타인 지향형 사회인가. 타인을 위한 배려가 넘치는 사회가 아니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사는 삶. 언제던가 나라별 중산층 기준에 관한 비교에서 영국, 프랑스, 미국은 다를 줄 악기가 있는지,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는지,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지는지,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가였는데 대한민국은 은행잔고와 월급여가 얼마 이상 되는가, 자동차와 아파트를 일정급 이상을 보유하였는가였다. 지금이라도 달라졌을까, 대한민국에서 행복하게 산다는 건 이런 ‘급’에 선을 맞추어야 행복할까 말까한 삶이다.

  그렇지만 이런 기준이 아니라 서양의 기준이나 유엔의 기준을 들이댄대도 행복할까 말까하다. 이 나라의 부패는 생각했던 것보다 끈끈해서 도통 깔끔하게 떨어질 줄 모른다. 부정과 불법을 자행하고 그것을 지켜가려는 소위 노블레스의 노력은 2014년을 보내고 2016년을 보내고 행복을 기다리던 수많은 국민들을 위협하고 여전히 분노케 한다. 기대했던 새로운 나날들을 만들어가는 건 그런 이들에 의해 이토록 버겁다.  

  그들이 외치는 경제 민주화의 다른 이름은 재벌가의 지속적인 성장이며 이를 위해 당연 지속적인 착취구조를 공고히 하려고 한다. 이를 위한 무수한 노력들을 위해 그들은 서로 뭉치고 결속하며 단결하고 있다. 한 목소리로 외친다. 복지는 안돼! 분배는 안돼!

  

부유층일수록 자신들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더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금을 낮추고 복지 지출을 줄이고 또 부유층에 대한 증세에 반대하는 보수 정당에 대해 확고한 지지를 보여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만, 보수정당이라 할 때 ‘보수’가 표방하는 것이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냐가 핵심이 될 것이다. 그 정당이 주장하고 지향하는 바가 많은 국민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인지를 말이다. 상식적이고 논리적이고 사실에 근거한 ‘말’만을 들어도 행복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러므로 아직도 나는 행복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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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지음, 박다솜 옮김 / 윌북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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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만드는 일

매일, 단어를 만들고 있습니다, 코리 스탬퍼, 2018.


  “세상에, 그렇게 재미없는 일도 있군요.”

   책 속 10대인 딸 친구가 말했듯이 매일 단어를 만드는 일이란 재미없는 일이고 기대를 크게 가져서인지 단어를 만드는 일은, 아니 단어를 만드는 일에 관한 코리 스탬퍼의 이야기는 재미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는 이 일이 매우 재미있고 이 일에 자부심도 가지고 있다. 무려 20년을 웹스터 사전 편집자로 살아온 코리 스탬퍼가 차근히 보여주는 사전 편집자로서의 일상은 아, 막연하게 상상하는 이미지는 사라져버리고 그냥 직장인의 모습으로 남았다. 직업적인 면보다 단어에 관해 더 알고자 했으니 말이다. 사전 편집자의 일을 기술하고 있으니 그 세계에 관해 잘 알 수 있다. 저자에 의하면 그 일은 고체로 분류될 만큼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고 새뮤얼 존슨에 의하면 “무해한 노역자”다.

   그렇다. 단어를 찾는 일도 역시 재미있지 않다. 나이듦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이 강하고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긴 하지만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를 찾는 일이 재미없는 건, 그렇게 사용된 단어의 의미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요즘은 대체로 차이를 두기 위해, 그리고 차별하기 위해, 혐오하기 위해 생산된 말이 많아지니까 더욱 단어를 찾는 일은 재미없는 일이 되어버린 듯하다. 

  어떤 단어는 사전에 올라가지만 어떤 단어는 찾을 수 없다. 인터넷 세상이 되어 종이 사전을 쓸 때보다 사전을 검색하는 일은 훨씬 쉽고 빠르게 되었다. 물론 그때보다 사전을 찾을 일도 무진장 많아졌지만 찾지 못하는 단어가 훨씬 더 많아졌다. 새롭게 등장하는 단어들을 감으로 맞추기도 쉽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 어쩌면 그 이유를 사전편집자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단어는 빠르게 변하고 무수히 생성되지만 사전 속으로 들어가는 건 쉽지 않다. 한달, 심지어는 아홉달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한 단어의 의미만을 담는 것이 아니라 문법과 쓰임들에 관해서도 꼼꼼히 기록해야 한다. 어원에 관해서도 기록한다. 어원을 안다는 것은 단어가 만들어지던 시기와 문화에 대해서도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단어’를 만드는 일은 단지 세상에 생성된 말을 사전이라 불리는 곳에 옮겨다 놓는, 모아 놓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이 무해한 노역자들은 칸막이 책상에 하루종일 틀어박혀 가장 적확한 단어와 쓰임을 찾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매일 이 일을 반복하고 있다.


사전의 목표는 사람들에게 단어가 뜻하는 바와 단어가 사용되는 방식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냉정하고, 기계적인 방식으로 알려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스릴과 로맨스를 기대하며 사전을 펼치지 않는다.


  그러나 사전편집자들은 단어와 사전과 사랑에 빠지고 인해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끼며 일한다. 심지어 천국의 직업이라 느끼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어떤 면에선 이 일에 관해서만큼은 전류가 통하는 이들만이 할 수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단지 직업적으로만 회사원으로서 사전편집자로서의 역할을 진행할 수 있을까.

 

사랑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는지에 관한 귀하의 질문은 저희가 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사전 편찬자들이 할 줄 아는 일은 단어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깊은 인간적 감정의 속성과 영구성에 관한 질문은 저희가 다루는 범위를 약간 벗어납니다. 더 큰 도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독자의 편지에 답에서 사전편집자들에게 단어를 정의할 뿐 단어가 지닌 ‘깊은 인간적 감정의 속성’에 관해서는 멀리 있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이미 인간적 감정을 담은 단어들이 수없이 생성되고 있고 그 단어의 의미를 기재하기 위해 의미를 찾고 어원을 찾고 쓰임을 찾고 있지 않나. 사전에 등재되는 단어는 모든 단어가 아니라 깊은 고뇌와 논의 끝에 편집자들에 의해 걸러지고 합의된 단어라는 점, 그 행위에 감정적 속성이 개입되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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