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이 필요한 사람들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리베카 솔닛, 창비, 2015.


폭력은 타인을 침묵시키고, 타인의 목소리와 신뢰성을 부정하고, 내게 타인이 존재할 권리를 통제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한 방법이다. p18~19


  성차별과 인종에 대한 편견이 크게 문제로 부각된다. 충격적인 일들과 함께 접하기도 하지만 coincidence와 같이 황당한 상황과 함께 전해지면 이젠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들이 넘쳐난다.

  어두운 밤 외국 여성에게 다가가 coincidence의 발음을 어떻게 하는지 요청했다는 이 남학생에게 외국 여성은 밤9시에 인적이 드문 곳에서 낯선 이에게 그런 것을 물어보는 것은 이상한 일이라고 거절한다. 이에 남학생은 소리를 지르고 욕설을 한다. 물리적 위협까지 느낀 이 여성은 경비원을 부르고 큰길로 나갔다. 마침 지나던 여학생들이 달려와 괜찮냐며 두 사람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진정시킨다. 이 와중에도 남학생은 “영화를 보면 다 그렇다고, 외국인들은 다들 잡담을 한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 비상식적이고 이기적인 남학생의 행태만큼이나 나를 비탄에 빠지게 한 것은 두 여학생에 관한 것이다. 이 외국인 여성의 눈에는 남성이 마구잡이로 화를 내는 상황에서 두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거듭 사과를 하는 듯이 보였다는 것이다.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보였다고 했으니까. 이 상황에서 남학생이 자신을 ‘성추행범’ 혹은 그 이상으로 오해하는 듯해 격분했다라고 말을 했다면 차라리 이해가 더 쉬웠을 것이다. 저런 황당한 말을 하면서 잘못을 외국인 여성에게로 돌리며 제가 화를 계속 내고 있다는 사실에 기가 찰뿐이고, 그런 남학생에게 여학생들이 사과를 하는 맥락은 도대체 뭐인가? 이것은 너무나 익숙한, 자주 보아야만 했던 모습 아닌가.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 남자친구에게 빌고 있는 풍경. 아무런 안면없이도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


 남자는 욕망과 그 욕망이 퇴짜 맞을지도 모른다는 노여운 전망을 함께 품고서 여자에게 접근한다. 분노와 욕망은 늘 함께 존재하며, 두 가지가 마구 뒤엉켜 한덩어리가 된 상태에서는 언제든 에로스가 타나토스로, 사랑이 죽음으로 바뀔지 모르는 위험이 존재한다. 가끔은 정말 말 그대로 된다. p46 


 남자들이 자신의 감정적,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상황에 분노로 반응하는 것은 너무나 흔한 현상이다. 다른 여자들이 자신에게 했거나 하지 않은 일을 갚아주기 위해서 엉뚱한 여자를 강간하거나 처벌해도 된다는 생각도 마찬가지다. p193~194


  한국의 대학교에서 일어난 이 ‘coincidence’ 사건에서, 외국인 여성은 러시아 출신, 이 학교 외국인 교수였다. 남학생은 이 여성이 교수임을 알았으면 달리 행동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하라고 조언하였지만 이 교수는 학생에게 공개 서한을 보내기로 했다. 이 학생의 행동이 “왜 용납할 수 없는 것인지를 교육하는 것”은 교수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한다며.


 나는 학생의 행동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밤 9시에 외진 곳에서 영어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하면서 낯선 백인 남성에게 접근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이 성차별적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일은 대중 매체에 보도된 사건들을–한국에서, 그러나 한국 외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벌어지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로 남성의 불쾌한 접근을 여성이 거절했을 때, 그 여성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여성을 괴롭히거나, 여성을 폭행하는 사건들 말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강간 문화”라고 비판을 받아 왔습니다. 즉, 여성에 대한 남성의 권리 주장과 폭력을 제도화하는 사회 안에 배태된 여성혐오적인 문화인 것이죠. 

        -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페도렌코 올가 조교수의 공개서한 중(中)


   이 공개서한에 남학생이 어떤 행동을 보였는지는 아직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교수가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은 것은 매우 감탄스러운데 남학생 역시 그 감탄을 안다면, 제 잘못을 깊이 깨닫는다면, 다시는 이와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까. 의식 깊이 쟁여놓은 이 여성에 대한 편견과 정형과 폭력성을 완전히 소거시킬 수 있을까. 올가 교수가 지적한대로 외국인 남성이었으면 그런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아가 남학생이 올가가 ‘교수’인 것을 알았다면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올가 교수가 말하는 바대로 좀더 예의를 갖추어 질문을 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남학생의 의도는 정말 저 단어의 발음을 궁금해 했을까를 의심케 한다. 그의 이어진 반응이 그것을 보여주고 일단, 올가 교수가 이 학생의 접근에 불쾌함과 공포감을 함께 느꼈다는 점이다.

   이 기사를 보고 이 책,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가 떠오른 것은 “가르침을 받아야 할 남자에게 가르치는” 상황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리베카 솔닛의 이 책은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지만 일상생활에서 겪는 이런 차별적인 상황을 먼저 이야기하며 흥미와 공감을 이끌어 낸다. 그리하여 이 유사한 상황들에 웃음까지 나온다. 전세계적으로 같은 이 상황들, 현상들을 어쩌랴.

  수없이 세상은 변했고 수많은 이들이 사고방식이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도대체 그 ‘수많은’은 어느 정도를 이야기하는가. 이 남학생처럼 자기만의 사고방식에 갇혀 제 행동의 정당성을 폭력적으로 주장하는 상황을 반복해 맞닥뜨리게 되니, 이 세상의 페미니즘은 아직도 멀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성차별의식이 높아졌다고 말하는 동시에 반작용인지 여성혐오는 확산되고 있지 않은가.

 페미니즘을 여전히 여성도서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도 변화를 더디게 하는 요인이 되는 것 같다. 페미니즘이 포함하고 있는 양성적인 개념을 외면하고 ‘여성’에 한정지어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고의 전환은 인식의 전환은 이런 책을 외면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마치 금기의 도서를 보는 듯이 하지만, 이 책은 상당히 재미있다. 그것이 리베카 솔닛의 장점이다. 유쾌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가면서 통찰력있게 상황을 간파한다. 수전 손택과 버지니아 울프, 그리고 신화 속 등장인물 카산드라의 이야기에서도 보다 생각할 거리들을 전개시킨다.

  그리고, 이 책은 짧다. 페미니즘의 개념 설명도 상당히 쉽다. 그녀가 주창하는 맨스플레인이라는 단어에서 보듯, 리베카는 설명을 아주 잘한다.


남성권리운동과 대중적으로 퍼진 숱한 오보들 때문에, 사람들은 요즘 성폭행 무고가 만연했다고 여기곤 한다. 집단으로서 여성은 신뢰할 만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된 강간 고발이 진짜 문제라는 암시는 개별 여성을 침묵시키고, 성폭행에 관한 토론을 회피하게 만들고, 남성을 주된 피해자로 부각하는 도구로 쓰인다. p169~170


   물론 이 모든 이야기들의 중심이 여성의 억압적인 상황과 여성성을 비하시키는 상황과 침묵의 세계에서 허덕이는 여성을 향한 정체성 정립이 주가 되고 있기에 흥미 유발이 안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페미니즘은 다 거기서 거기이니까, 생각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면 새로운 담론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왜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를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지, 그럼에도 수많은 이들이 하고 있는 만큼 아는데도 왜 여전히 현실은 이 모양인지 말해 줄 수 있지 않는가. 계속 들으면서도 무시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리베카가 이야기하는 이 여성혐오와 폭력의 구조들에 대한 전개에 반론이 있다면, 그 모든 것들을 ‘가르쳐주지’ 않겠는가. 충분히 들을 의향이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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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incidence


Synchronicity 리더란 무엇인가

- 싱크로니시티, 미래를 창조하는 리더십 내면의 길

조셉 자보르스키, 에이지21 , 2010.


 

 실검에 등장한 coincidence를 보면서 감정과는 별개로 떠올린 몇 가지 생각 중 하나는   Synchronicity였다. 의미의 차이가 있음에도 이 단어가 연상된 것은 한국번역본의 제목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coincidence의 발음을 빙자로 발생한 이 ‘우연한’ 사건을 보면서 단순한 우연의, 일회성이 아니라 사건 당사자의 내면에 깊이 잠재된 의식의 분출이라는 생각을 하며 홀로 경악하고 있는 중이었다. 당연, 기사와 댓글들은 놓치지 않고 여기에 이 학교를 거론한다. 왜냐면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곳에서 벌어진 일이고 우리나라에서 이 최고의 지성, 서울대가 차지하는 위상은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인간이 지성인이라며, 공부를 잘했네라며 사회에 나와서 어떤 꼴로 군림할까를 생각하다보니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지금 대한민국을 흔드는 이 난리의 중심을 잡고 줄줄줄 연달아 있는 사람들 대다수가 학력과 학벌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니까. 같은 꼴. 소위 엘리트라는 인간들의 저열함이 미래에까지 연장되는 것을 보았다고 하면 비약인가. 연장될까봐 걱정이다가 더 적합한가.

  Synchronicity는 한국에서 「리더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되었다. 타인의 리더십을 생각하게 되는 때는 언제일까. 누구라도 리더십을 발휘해야 하는 때가 있다. 내 자신에게도 리더십을 발휘해서 내 삶을 이끌어가야 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책은 「미래를 창조하는 리더십 내면의 길」이란 부제가 붙었나보다. coincidence, Synchronicity, 리더란 무엇인가로 이어지는 연결고리는 사실 이렇듯 간단하다.

  해괴망측한 리더와 그 리더십에 따라 삶이 나락을 치는 상황에서 리더의 역할과 자질에 대한 요구가 특히나 부각되는 이때, coincidence로 인해 이 책의 내용이 되살아나는 이런 우연이 놀라운 건, 이 책의 출발이 워터게이트사건이라는 점이다.

  이 책은 리더십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여느 리더십 역량책과는 다른 특이점을 보인다. 리더십은 무엇인가, 리더의 자질이 어떠해야 하는가라며 첫째, 둘째, 셋째, 이런 도식화된 나열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외면’적 리더의 역량에 대한 것보다는 끊임없는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조건을 탐구해가는 여정이라고 보면 된다. 이런 내용을 전개하기 위해 저자는 두 명의 대표적인 학자를 생각나게 한다. 한명은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전개시킴 칼 융이며 또다른 사람은 신화학자 조셉 캠벨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내용적으로는 칼 융의 ‘동시성’을 형식적으로는 조셉 캠벨의 ‘영웅의 여정’에 따라 서술하는 것이다. 

  칼 융은 “둘 혹은 그 이상의 의미심장한 사건들이 동시에 발생하는 현상으로, 여기에는 우연한 가능성 이상의 뭔가가 작용하고 있다.”라고 동시성을 정의한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모든 상황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들, 예상치 못한 일들이 일어나 우리에게 확실한 길을 알려주는 그런 순간들”에 딱 어울리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이 동시성이 어떻게 리더십과 연결되는 것일까.

  저자는 변호사이다. 그는 한국의 박근혜 게이트보다는 덜 추악한 사건이라고 하는 미국 역사상 가장 추악한 워터게이트 사건을 겪으며 ‘리더’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지금 은밀한 닉슨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리처드 닉슨이라는 사람의 진모를 헌법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고, 터무니없이 권력을 남용하는 모습이 충격적일 뿐만 아니라 속이 다 메스꺼릴 정도였다. 충격과 혐오감이 솟구쳤다. 나라 전체가 걱정스러웠다. 인격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나라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에 국민들이 느낄 공포와 불안이. 도덕성과 윤리의식이 저렇게 형편없는 사람이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의 수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 걸까? 누구의 책임인가?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p54


  다행히 저자는 이런 ‘리더’가 잘못했다는 생각을 하는 상식적인 사람이었고 대통령의 거짓말에 경멸감과 환멸을 느낀다. 저자는 “권력을 남용하는 파렴치한 리더들과의 악순환 고리”가 문제라고 인식하며 촛불을 든 대한민국의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한다. 이런 상황을 바꾸지 못하리라는 무력감이 자신을 괴롭혔지만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며 '진정한 리더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여행에서 그는 철학자, 물리학자, 경영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리더의 자질”에 대한 진실한 접근과 결론에 이른다.

  이 여행을 하면서 그는 자신의 이 여행이 단순한 일이 아니라 ‘모험에의 부름’을 받은 것이라고 ‘소명’이라 생각한다. 조셉 캠벨은 영웅이 길을 떠나는데 그것은 영웅으로 하여금 그 길을 떠나도록 만드는 사건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하여 그 모험에 따라 영웅은 온갖 역경을 겪으면서도 마침내 목적과 꿈을 찾고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오는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이 영웅의 귀환의 패턴을 따라 길을 떠나고 역경을 겪고 결론을 찾고 되돌아오는 것이다.

 그렇게 저자가 찾은 리더는 어떤 것인가. 저자는 리더십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리더십이란 사람들이 내부에서 계속 현실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고, 세상의 펼쳐짐에 참여할 능력을 키우는 그런 영역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리더십이란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일이다. p19~20 


  이와 같이 저자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미래를 변하게 하리라 생각하며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을 리더십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말한다. 변화를 주도하는 창조적인 리더십이 되기 위해서는 강한 헌신과 광대한 비전을 갖춘 리더십은 환경에 얽매인 리더십 조직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얘기한다. 특히 성공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행동이 아니라 존재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말한다. 타인에 대한 깊은 헌신, 애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용기를 북돋는다고 그리하여 실천으로 이끌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을 위한 헌신의 노력의 과정엔 당연 어려움들도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흔들리지 말고 내면의 부름에, 목소리에 따라 힘껏 나아가라고 말한다. 이러한 저자의 러더십에 대한 자질을 잘 들여다보면 그것은 끊임없는 내면탐구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전혀 별개의 일들이 진행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그것은 하나의 관계된 힘을 만드는 연결고리를 짓는다고 말한다. 얼핏 미래의 창조를 위해 열린 사고를 갖는 일은 더불어 순간순간의 일들에도 충실할 것을 주문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어느새 그것을 조직적으로 연결지어 미래를 창조하는 힘으로 이끌어가는 것이라면 말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 내적인 투쟁으로 채워진다. 이런 내적인 투쟁을 통해서 누적된 부담감을 극복해야만, 다시 펼쳐지는 생성적 질서의 흐름 안에서 움직이게 된다. 내적 투쟁에서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글자 그대로 그것을 ‘겪는’ 것이다. 말하자면 함정들을 만나고 겪으면서 거기서 새로운 교훈을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다. 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다. p234


  워터게이트로부터 충격받은 저자의 깊은 내면탐구와 미래 변화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간절한지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와 불투명하게 흩트려지는 융의 이론에서 드러나는 것 같다. 사고방식이나, 내적인 진실성에 더 깊이 의미를 부여하는 듯한 느낌, 내가 이해하는 명확성과는 별개로 약간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기대도 깃든 듯해서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잘못 이야기하면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주의 기운”으로 이해될까 염려스러운 바도 없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리더’의 자질엔 사명감도 포함하여 심리적인 ‘확신’, 그 역할에 대한 ‘확고한 믿음’ 또한 필요하리라는 것이다. 아니다. 최고로 간단한 말은 그냥 이럴 것 같다. “도덕적이어라, 끊임없이 배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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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균열의 근원


 나비잠, 최제훈 저, 문학과지성사, 2013.

  

  아이 시절을 지나 나비잠을 잔 날은 얼마나 될까. 형태적인 것을 넘어 정말 달콤하고 편안한 잠의 세계, 개운하게 일어나 아침을 맞는 일은 언제부턴가 요원해졌다. 짧고 불편한 잠과 흉흉한 꿈의 뒷자락으로 뒤숭숭한 하루 하루는 늘 불편하고 불안한 ‘현재’를 만든다.

   이렇게 살고 있는 요섭이다.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이 소설은 요섭의 꿈과 현실사이를 오간다. 꿈은 각본이 있는 것처럼 어릴 적 보던 만화영화나 동화의 내용들과 어우러져 등장한다. 꿈에서는 늘 쫓기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만 현실이라고 다를 리 없다. 이 소설이 잡지에 연재된 작품으로 당시 제목은 ‘몰락:전래되지 않은 동화'라는 점에서 이 소설 속 동화가 차지하는 역할은 크다고 할 수 있다. 4부로 나뉘어 소설이 전개되는데 하루, 균열, 몰락, 몰락이 소제목이다. 눈에 띄는 것은 소단락 제목의 반복이다. 바로, '몰락‘. 더할 나위 없는 몰락의 세계를 그리는 것일까. 이미 몰락 속에 있는데도 더 몰락할 거리가 남았다는.

  그럼 요섭의 몰락 세계는 어떻게 이뤄지는가. 요섭은 목사 아들로 고급아파트, 미모의 아내, 야구선수를 꿈꾸는 아들이 있는 로펌 변호사다. 잘나가는 로펌변호사로서 우리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익히 봐온 로펌변호사의 전형이다. 그러니까 변호인의 정의는 어디다 줘버린, 기업이나 구린 사람들의 변호가 일순위인 그런 조직 속에서 승승장구하는.

  어쨌든 어디든 잘나가면 그만일 수도 있겠다. 계속 그렇게 그 세계 속에서 잘먹고 잘살아가야 하는데 그러다 ‘정의’의 이름으로 쾅 뭉개지는 게 맞는 그림인데… 그렇지가 않다. 그는 꿈속에서 뭘 찾고 있는 것일까. 반복적인 꿈과 그 동화의 세계는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그를 이끌어 간다. 역시, 이야기는 잃어버린 기억과 연관이 되는 것이다.

  늘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고 어느 순간 ‘균열’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그가 지내오던 하루의 삶에서 비껴간 순간이다. 그런 로펌 변호사라면 그렇게 살았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억울함을 호소하는 대리기사를 무료 변론하면서 일은 생겨난다. 이 시대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은 당연하지만 진짜와 가짜로 나뉜다. 진짜의 경우에도 여러 가지로 나뉠 수 있지만 ‘있는 자’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상당수다. 이것을 몰랐던 것일까. 라이벌 변호사와는 ‘다르다’는 한순간의 ‘방심, 엉뚱함’이 일으킨 자기 삶의 균열을.

  이 사건을 승소하면서부터 아니 이 사건을 맞은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신을 보는 눈을 달리한다. 보는 눈만 달리하면 되는 것을 그의 삶까지도 달리 만든다. 그러한 세력들도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이 뒤바뀌게 만드는. 촌지 전달한 학부모, 바람피는 아내, 주식 투자 실패, 쫓기며 린치를 당하고 아들은 자살로 생명이 위중한 상황에 놓인 전직 로펌 변호사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세력들. 현실의 그는 그들을 향해 한방을 날리려 동분서주하면서도 꿈 속에서 일어나는, 기억나는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역시 동분서주한다.

  그의 몰락이 자신이 지켜오던 ‘적자생존’ ‘약육강식’의 원칙을 ‘깨고’, ‘선한 일’을 한 대가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이러니하다. ‘옳은’ ‘선의의’ ‘좋은’ 일을 하려는 이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여지없이 깨져버릴 때의 참담함. 비록 평소에는 그렇게 살지 않았던 요섭이라고 그런 일의 결과는 좋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선의의 결과가 기대한 바가 아니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선의가 선의를 낳을 수 없는 구조라면 선의가 피해를 발생시키고 삶을 무너뜨리는 이유가 된다면, 결과가 된다면 이 세상에서 선의를 바라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종국엔 선의의 실종이 되고 마는 사회가 된다. 이 한번의 선한 행동으로 일어난 요섭의 몰락은 ‘개과천선’의 당위성마저도 허물어버린다. 이 세상은 정말 악의만이 부귀영화를 보장받는 길인가.

  현실의 그를 어쩌면 지배하기도 하는 요섭의 꿈. 꿈속에 등장하는 온갖 동화들의 세상이 그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또 뭔가. 그의 이 ‘선한’ 행동은 꿈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의 꿈과 현실이 맞닿아 있는 지점에서 그는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잊어버렸던 기억을 찾아 떠난다. 반복된 꿈속의 무성과, 메달이 의미하는 것은 어린 그가 살았던 지명인 무성과 그림을 그려 수상한 메달이다. 기억은 자신이 메달의 주인이 아니고 그렇기에 메달의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가 메달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무언가. 그가 살아온 것처럼 누구에게 빼앗은 것인가, 악의 결과물인가. 기억을 찾아 가면서 묻어 두었던 기억이 그를 괴롭게 한다면, 로펌 변호사였던 그는 정말 직업을 잘 선택한 것이지 않을까. 그러면서도 그가 이 기억을 잃어버린 이유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날이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린 건, 사소함 때문이 아니라 유해함 때문이었다. 진화는 윤리나 미학과 무관했다. 합리적이지도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오로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그때그때 하는 땜질일 뿐. 나를 경멸하게 만드는, 내가 해로운 존재라는 자각을 상기시크는 기억은 꼬리뼈처럼 퇴화되기 마련이었다. 살아남는 데 방해가 되니까. 그러다 어느 날 빙판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는 순간 척추를 관통하는 찌릿한 통증과 함께 떠올리는 것이다. 아, 내게도 꼬리뼈가 있었구나. p355 


  그러나…. 그의 기억은 잘못된 것이다. 보다 기원. 찾아다니며 기억하는 것과 여전히 기억하지 못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았을 때, 진짜 그의 꼬리뼈를 찾았을 때 그의 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가 연결이 되는가. 모르겠다. 이 끝없는 꿈의 세계. 그에게 몰락을 가져다주었던 ‘선의’. 그 기억 속에 어린 요섭이 있었다. 그것을 기원이라 한다면 그것을 근원이라 한다면 그가 주욱 잊고 잃고 살았던 것은 결국 ‘선의’가 되는 건가. 그의 몰락은 ‘선의’를 해서가 아니라 ‘선의를 져버리고 살았기에’가 되는 건가. 나비잠을 잘 수 없는 이 꿈의 세계는 그런 거였던가. 꿈은, 기억 속의 어린 그의 모습이 찾던 것은 그의 맘속에서 계속 찾고자 했던 것은 결국 선한 세계였던가.

  알 수 없다. 그저, 한 사내가 몰락한 세계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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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 투어(鬪魚)


최선의 삶, 임솔아, 문학동네, 2015.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 때는 몰랐다. p12


  열여섯 아이들의 이름은 강이. 아람. 소영이다. 이들이 각각의 이유로 집을 나와 거리의 상처를 경험하고는 돌아와, 다시 또 떠난다. 이 이야기의 표면은 폭력인가. 거칠게 서로를 헐뜯으며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의 모습들이 가보지 않은 정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성장소설이라 불리며 늘 그 언저리의 이야기들을 그려낸다. 이제는 일방적인 폭력의 희생자가 그려지지 않고 학교에서 만난 이들이 가하는 폭력의 세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맞물려 있다. 그저,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자가 이긴 자가 된다. 그때, 이겼다고 말할 땐 그것은 가해자를 말함일까 피해자를 말함일까.

  강이의 세계는 명문고 입학률이 높은 학교로 위장전입한 순간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제가 사는 곳을 거짓말로 해야 하는 ‘읍내동’ 출신에 대한 부끄러움, 열등감. 읍내동에선 뭐든 잘하는 집도 잘사는 아이였지만 전민동 학교를 다니는 순간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 선생님으로부터도 멸시를 받는 강이의 꿈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도대체 선생님은 어떤 이유로 “얼굴 보는 게 싫다”는 말을 이제 중학생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람은 집이 싫어서, 집에선 상처가 자라나서 집을 떠나지만 집보다 거리에서 더 상처를 받는다. 집에서의 상처가 어린아이의 것이었고 시시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었지만 거리는 아니었다. 그저 밖이 좋아 함께 집을 나간 강이와 아람과 집을 나가면 병신같이 살아야 하기에 어떡하든 집은 나가지 않으리라던 소영은 거리의 아이들이 되지만 어느 순간 집으로 돌아온다. 소영의 “집에 가자”는 말 한마디에 따라서.

  이렇게 거리의 상처를 함께 경험하던 이 세명의 소녀들이 학교에서 더 끈끈해지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이들 셋 사이의 감정의 농도의 문제일까, 관계의 문제일까. 세 아이는 다른 성격과 처한 환경이 달랐다. 소영은 예뻤고, 키도 컸고, 성적도 최상위권이었다. 반면에 아람은 가진 것이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고 여린, 약한 아이다. 그렇다면 강이는 어떤가.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친구따라 집을 나가는 강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 세 아이들이 되돌아와 서로를 끌어안지 못한 이유는 거리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위계가 떠나야 할 이유가 가득한 곳에 있었을 땐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생들은 우리라는 덩어리를 싫어했지만, 그중 몇몇 선생은 소영이라는 개인을 아꼈다. 몇몇 친구는 소영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했고, 몇몇 친구는 소영을 무서워했다. 소영은 꼭 필요한 아이였다. 싸움이 났을 때 미지근하게 끝내는 법이 없었다. 아이들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어른들이나 선생과의 문제에도, 소영이 개입하면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p88


  질투에서든 부러움에서든,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소영에 대한 미움을 아람이 표출하면서 그들 사이의 ‘거리의 끈끈함’은 사라졌다. 아람은 제 고치지 못하는 이빨 상태도 소영의 탓으로 돌린다. “이게 다 소영이 때문이야.”

  세상 사람들은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없이 편가르기에 열중한다. 제 편을 만들지 못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듯이 편을 가른다. “아람이하고 소영이하고 싸우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그리고 “소영을 따돌리고 싶다기보다는 아람을 보호하고 싶다는 뜻”에서 아람의 편에 서기로 한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은 잘 뭉쳤고 소영은 왕따가 된다.

  거리를 나가기 전에, 거리에서 소영과 강이가 서로에게 어떤 애정을 가졌든 지금, 강이는 아람의 편에 서 있다.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소영에게 느낀 두려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강이는, 소영과 가까워지고 있다는데 두려움을 느꼈으니까. 그러나, 소영은 강한 아이였다.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만큼 충분히 폭력적이었다. 곧 상황은 역전한다. 강이는, 가장 최선을 다해 소영에게 복종하는 아이가 되었다.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보호는 치열한 공격이 될 때가 많았다. 치열한 보호가 비열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p92


  이렇게만 되었다면 소설은 씌어지지 않았을까. 작가는 10년이 넘는 동안의 악몽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써야만 했다고. 문득 이 악몽은 작가적 의미일까, 아니면 기억의 하나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이 대학소설상을 받은 만큼 작가의 나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학생의 나이일꺼라 여겼는데 당시 스물아홉이었다. 소설 속의 아이들처럼 가출을 했고 나중에서야 대학을 갔다고 말한다. 언뜻 생생하기도 가출기는 작가의 경험이 녹여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득 묻고 싶어졌다. 작가는 강이일까, 아람일까, 소영일까.

 강이는 또다시 가출을 한다. 아이들의 폭력의 세계는 어른들의 개입이 있어도 쉽사리 끝이나지 않는다. 아니, 폭력의 세계가, 편가르기의 세계가 끝나지 않는다. 마치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처럼 우르르 한쪽으로 쏠렸다가 또 우르르 다른 쪽으로 쏠린다. 놀이기구는 멈추는 일없이 계속 빙글빙글 돈다.

  어쨌든 고등학교는 가야지?라는 아이들을 달래는 선생님들의 말. 아, 이 아이들이 아직 중학생이였지 생각하며 이 소설을 보면 이들에게서 벌어진 일들이 거듭된 충격을 준다. 강이는 고등학생 시절을 건너뛰고 길에서 홀로 보낸 4년의 시간을 보낸다. 물론 처음엔 혼자가 아니었지만…. 강이는 집에서 강아지 강이를 키웠던 것처럼 물고기 강이를 키운다. 강이는 애완동물들마다 제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강이가 투어가 되어 있기 때문일까.

  

강이가 들어 있는 어항에 다른 물고기를 넣는 상상을 했다. 강이는 운명처럼 싸우고야 말 것이다. 강이가 죽거나, 다른 물고기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강이에게 거울을 보여주지 않는 상상도 했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강이는 곪아갈 것이다. 곪아가고 곪아가다가 어느 날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강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몰랐다. 어항 속에서 혼자 살도록, 평생 거울과 함께 살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다. 투어로 태어난 강이는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p150


  병신이 되지 않는 것이 꿈이었던 강이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자기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고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결말은 예상한 것처럼 흘러갔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싶은 이유들이 제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일 때마다 마냥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또 어른의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뭐라 할 말이 없다. 어른의 세계나 아이의 세계나 폭력은 있고 왕따는 있고 가난은 있다. 꿈은 있나. 살아가는데 여전히 어려운 것은 사람과의 관계이고  상처를 받을 때나 상처를 받지 않을 때나 서로에게 위로가 될 때나 아닐 때나 서로가 숨겨둔 칼을 겨눈 상태이다. 지금 우리를 채운 이 어항은 우리 모두를 투어(鬪魚)로 만들고 있다. 최선을 다해도 최악으로 치닫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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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틀린 순간에는 무엇이 없는가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 최진영 저, 실천문학사, 2013.


 단번에 이해되는 진실이 아니라면 그건 가짜야. p102


  단번에 이해되지 않는 세계를 그리고 있으니 이건 가짜인가. 최진영은 스토리보다 독특한 구성방식으로 이야기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기억을 전개한다. 그리고 잽을 던지듯 짧게 끊어치는 문장과 문단. 한가득 글보다 여백이 더 많은 페이지.

  이렇게 ‘기억’을 붙들고 있는 것은 책 속의 주인공이 ‘죽지 않은 이유’를 찾는 과정인가. 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 과정인가. 달리 생각하면,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는 죽어야 할 이유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죽어야 할 이유와 마찬가지로. 그렇기에 죽어야 할 이유와 죽지 않아야 할 이유가 공존한다면 어느 것에 더 무게가 지워진 채로 이야기가 전개될까가 궁금하다.


왜 사는가.

이것은 원도의 질문이 아니다.

왜 죽지 않았는가.

이것이다. p16


  주인공 원도. 자신이 살아온 하루하루를 모조리 기억해야 죽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 그의 기억 속에서 원도는 어떤 사람인가.


비록 파산하여 빈털터리가 되었고, 도망자 신세에, 간경화로 매일 피를 쏟아내고 있으며 가족에게도 버림받았지만, 아니, 가족에게 가장 먼저 버려졌지만, 때문에 당장 내일 죽더라도 이상할 것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 전부가 죽음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다. 원도의 머릿속에는 버튼 하나로 원도를 박살 내버릴 시소가 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과 나는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이 같은 무게로 시소의 양 끝에 앉아있으며, 원도는 어느 쪽으로 몸을 기울일지 선택하지 못한 채 시소의 중간에 위태롭게 서 있다. 죽어야겠다는 생각은 최근 것이고 왜 죽지 않았는가라는 생각은 오래전 것이지만, 최근 것이라고 해서 더 가볍지도, 오래된 것이라고 더 묵직하지도 않다. p41


  이것은 기억이 아니다. 이것은 사실이다. 기억 속엔 모든 열패의 순간이, 찌질한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차마 기억하지 않은 척하다가 ‘죽음’을 가까이 둔 상황에서야 처절히 드러나는 삶의 기록엔 생각보다 ‘구멍’이 많다. 그 구멍을 메우지 못했기에 현재의 나가 만들어졌고 죽지 않은 나가 만들어진 것인가. 타인이 보기에 왜 죽지 않는지 마냥 의아스러울 뿐인 원도의 현재에는 횡령, 사기, 탈세, 살인 혐의가 전전하며 여관마다 죽음의 징조를 드리우는 원도를 불편해하는 주인들에 의해 감시받거나 쫓기는 상태의.

  기억을 거슬러 죽어야 할 순간을 회상하지만 왜인지 다 ‘아니다, 아니다’가 되어버린다. 그의 기억에 한계가 있기 때문일까. 그의 기억을 되살리다 보면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 죽은 아버지와 산 아버지. 어머니는 이유없이 울면서 마냥 봉사활동을 다니고 자신은 어렸을 적부터 도둑질에 익숙했고 은행이란 간판을 달고 대부업을 하는 곳에서 횡령을 하면서 열심히 일지만 투기는 실패하고 횡령건이 적발되며 아내와는 서류상 남남이 된 채 한순간에 도망자가 되어 버린 원도.

  기억을 더듬은 곳에 죽은 아버지는 ‘만족스럽다’는 글자와 ‘나를 믿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물을 마시고 죽었다. 그러나 그 사이의 구멍 속엔 죽은 아버지는 물컵을 원도에게도 내밀었으니, 왜, 원도는 죽지 않았는가가 삶의 끊임없는 질문이 되어가는 것인가. 산 아버지는 ‘모든 걸 이해하라’고 하지만 원도는 모든 걸 뒤집어 대책없이 산다. 그를 그렇게 만든 것은 무엇인가. 마침내 그가 기억하는 것은 하나다. 장민석. 그가 사는 게 아니라 죽지 않은 이유.

  기억 속의 열등감. 엄마에게 사랑받고 싶은 아이, 엄마에게 사랑받는 아이, 장민석에 얽힌 기억이 원도의 이유다. 원도의 기억을 따라가다 원도가 죽지 않은 이유를 이해하게 될까.


축복은 드물다. 흔해 빠진 인간에 불과한 원도는, 기억도 학습도 젬병인 원도는, 자기를 뚫어버린 그것을 기억하기보다, 몸에 난 구멍을 기억했다. 뭔가가 나를 뚫고 지나갔어. 그게 뭔지는 모르겠는데 확 지나가버렸는데 여기 구멍이 있어. 여기로 자꾸 아픈 바람이 불어와 엄마, 여기 있어야 할 게 없어 엄마. 내 몸에 이게, 이게 대체 뭐야 엄마, 원도가 운다. 무서워서 운다. 공부를, 싸움을, 축구를, 말을, 그 무엇이든 장민석보다는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따라했다. p64


  여기엔 원도처럼 많은 구멍이 있다. 왜 죽은 아버지는 죽었는가. 금기시되는 그것은 자살인가. 원도와 함께 죽으려고 한 것인가. 원도만 죽이려 한 것인가. 엄마는 왜 울기만 하는가. 산 아버지는 친아버지인가. 모든 의문이 원도에게 들이닥치지만 속시원히 말해주는 이는 없는 채 원도는 어린 날,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죽을 수도 있었다는 공포감과 자신을 외면하는 어머니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장민석’이란 아이에 대한 열등감 속에 허우적이며 살았다. 원도가 원하는 그녀 역시 장민석이니까. 장민석이 원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이 되고 마는 삶을 살아온 원도는 사는 것이었을까. 원도에겐 자신이 왜 죽지 않았는가보다 더한 질문들이 많이 있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해 주지 않는다.

  제 삶의 주인공은 결국 제 자신이라고 말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임을 생각할 때 원도는 어린 시절부터 제 의지와 함께 사람들로부터 내쳐지는 삶을 살았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에서부터 새아버지가 나타나는 것, 누군지도 모르는 아이가 제 삶에 나타나 어머니의 사랑을 차지하며 살아가는 것까지. 왜 그토록 어머니는 아들에게 사랑을 주지 않고 제 아이를 그렇게 외면해 버렸는지, 끝까지 엄마는 원도를 안아주지 않는다.

  원도의 삶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삶이 어긋난 순간. 분명 그것은 원도 하나만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든 뒤틀려버린 순간에 무엇이 어그러졌는지는 알듯하다. 원도가 갈구하는 ‘사랑’이 없었다. 원도가 죽지 않은 것은 마지막 한순간이라도 사랑을 위로를 따뜻함을 느끼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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