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 투어(鬪魚)


최선의 삶, 임솔아, 문학동네, 2015.


무서운 것에 익숙해지면 무서움은 사라질 줄 알았다. 익숙해질수록 더 진저리쳐지는 무서움도 있다는 걸 그 때는 몰랐다. p12


  열여섯 아이들의 이름은 강이. 아람. 소영이다. 이들이 각각의 이유로 집을 나와 거리의 상처를 경험하고는 돌아와, 다시 또 떠난다. 이 이야기의 표면은 폭력인가. 거칠게 서로를 헐뜯으며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의 모습들이 가보지 않은 정글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성장소설이라 불리며 늘 그 언저리의 이야기들을 그려낸다. 이제는 일방적인 폭력의 희생자가 그려지지 않고 학교에서 만난 이들이 가하는 폭력의 세계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맞물려 있다. 그저, 최종적으로 살아남은 자가 이긴 자가 된다. 그때, 이겼다고 말할 땐 그것은 가해자를 말함일까 피해자를 말함일까.

  강이의 세계는 명문고 입학률이 높은 학교로 위장전입한 순간이 될 것이다. 아이들에게 제가 사는 곳을 거짓말로 해야 하는 ‘읍내동’ 출신에 대한 부끄러움, 열등감. 읍내동에선 뭐든 잘하는 집도 잘사는 아이였지만 전민동 학교를 다니는 순간 이도저도 아닌 존재가 되어 선생님으로부터도 멸시를 받는 강이의 꿈은 머나먼 곳으로 떠나는 것이다. 도대체 선생님은 어떤 이유로 “얼굴 보는 게 싫다”는 말을 이제 중학생 아이에게 할 수 있는 것일까.

  아람은 집이 싫어서, 집에선 상처가 자라나서 집을 떠나지만 집보다 거리에서 더 상처를 받는다. 집에서의 상처가 어린아이의 것이었고 시시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었지만 거리는 아니었다. 그저 밖이 좋아 함께 집을 나간 강이와 아람과 집을 나가면 병신같이 살아야 하기에 어떡하든 집은 나가지 않으리라던 소영은 거리의 아이들이 되지만 어느 순간 집으로 돌아온다. 소영의 “집에 가자”는 말 한마디에 따라서.

  이렇게 거리의 상처를 함께 경험하던 이 세명의 소녀들이 학교에서 더 끈끈해지지 못했던 것은 무엇일까. 이것은 이들 셋 사이의 감정의 농도의 문제일까, 관계의 문제일까. 세 아이는 다른 성격과 처한 환경이 달랐다. 소영은 예뻤고, 키도 컸고, 성적도 최상위권이었다. 반면에 아람은 가진 것이 없는 환경에서 살고 있고 여린, 약한 아이다. 그렇다면 강이는 어떤가. 사람에게 충성을 다하는, 친구따라 집을 나가는 강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이 세 아이들이 되돌아와 서로를 끌어안지 못한 이유는 거리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위계가 떠나야 할 이유가 가득한 곳에 있었을 땐 드러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생들은 우리라는 덩어리를 싫어했지만, 그중 몇몇 선생은 소영이라는 개인을 아꼈다. 몇몇 친구는 소영을 부러워하거나 질투했고, 몇몇 친구는 소영을 무서워했다. 소영은 꼭 필요한 아이였다. 싸움이 났을 때 미지근하게 끝내는 법이 없었다. 아이들과의 싸움은 물론이고 어른들이나 선생과의 문제에도, 소영이 개입하면 최선의 결과를 낳았다. p88


  질투에서든 부러움에서든,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소영에 대한 미움을 아람이 표출하면서 그들 사이의 ‘거리의 끈끈함’은 사라졌다. 아람은 제 고치지 못하는 이빨 상태도 소영의 탓으로 돌린다. “이게 다 소영이 때문이야.”

  세상 사람들은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없이 편가르기에 열중한다. 제 편을 만들지 못하면 이 세상을 살아가기 힘들다는 듯이 편을 가른다. “아람이하고 소영이하고 싸우면 누구를 선택할 거야?” 그리고 “소영을 따돌리고 싶다기보다는 아람을 보호하고 싶다는 뜻”에서 아람의 편에 서기로 한다. 그런 이유로 아이들은 잘 뭉쳤고 소영은 왕따가 된다.

  거리를 나가기 전에, 거리에서 소영과 강이가 서로에게 어떤 애정을 가졌든 지금, 강이는 아람의 편에 서 있다. 보호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소영에게 느낀 두려움도 한몫했을 것이다. 강이는, 소영과 가까워지고 있다는데 두려움을 느꼈으니까. 그러나, 소영은 강한 아이였다. 이 모든 상황을 뒤집을 만큼 충분히 폭력적이었다. 곧 상황은 역전한다. 강이는, 가장 최선을 다해 소영에게 복종하는 아이가 되었다.


싸움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순간들이 있을 뿐이었다. 소영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보호는 치열한 공격이 될 때가 많았다. 치열한 보호가 비열해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p92


  이렇게만 되었다면 소설은 씌어지지 않았을까. 작가는 10년이 넘는 동안의 악몽에서 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써야만 했다고. 문득 이 악몽은 작가적 의미일까, 아니면 기억의 하나일까 궁금해졌다. 이 책이 대학소설상을 받은 만큼 작가의 나이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대학생의 나이일꺼라 여겼는데 당시 스물아홉이었다. 소설 속의 아이들처럼 가출을 했고 나중에서야 대학을 갔다고 말한다. 언뜻 생생하기도 가출기는 작가의 경험이 녹여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문득 묻고 싶어졌다. 작가는 강이일까, 아람일까, 소영일까.

 강이는 또다시 가출을 한다. 아이들의 폭력의 세계는 어른들의 개입이 있어도 쉽사리 끝이나지 않는다. 아니, 폭력의 세계가, 편가르기의 세계가 끝나지 않는다. 마치 아이들은 놀이기구를 타고 있는 것처럼 우르르 한쪽으로 쏠렸다가 또 우르르 다른 쪽으로 쏠린다. 놀이기구는 멈추는 일없이 계속 빙글빙글 돈다.

  어쨌든 고등학교는 가야지?라는 아이들을 달래는 선생님들의 말. 아, 이 아이들이 아직 중학생이였지 생각하며 이 소설을 보면 이들에게서 벌어진 일들이 거듭된 충격을 준다. 강이는 고등학생 시절을 건너뛰고 길에서 홀로 보낸 4년의 시간을 보낸다. 물론 처음엔 혼자가 아니었지만…. 강이는 집에서 강아지 강이를 키웠던 것처럼 물고기 강이를 키운다. 강이는 애완동물들마다 제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강이가 투어가 되어 있기 때문일까.

  

강이가 들어 있는 어항에 다른 물고기를 넣는 상상을 했다. 강이는 운명처럼 싸우고야 말 것이다. 강이가 죽거나, 다른 물고기가 죽거나, 둘 중 하나는 없어져야 할 것이다. 강이에게 거울을 보여주지 않는 상상도 했다.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 때문에 강이는 곪아갈 것이다. 곪아가고 곪아가다가 어느 날 물위로 떠오를 것이다. 강이가 원하는 것이 그것일지도 몰랐다. 어항 속에서 혼자 살도록, 평생 거울과 함께 살도록,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정해진 것은 아니다. 투어로 태어난 강이는 원래 어디에서 어떻게 살아야 했던 걸까. p150


  병신이 되지 않는 것이 꿈이었던 강이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자기뿐만 아니라 모두가 다. “망가뜨리거나 망가지거나. 더 나아지기 위해서 우리는 기꺼이 더 나빠졌다”고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결말은 예상한 것처럼 흘러갔지만 그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싶은 이유들이 제 의지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일 때마다 마냥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또 어른의 나는 무슨 말을 할까. 뭐라 할 말이 없다. 어른의 세계나 아이의 세계나 폭력은 있고 왕따는 있고 가난은 있다. 꿈은 있나. 살아가는데 여전히 어려운 것은 사람과의 관계이고  상처를 받을 때나 상처를 받지 않을 때나 서로에게 위로가 될 때나 아닐 때나 서로가 숨겨둔 칼을 겨눈 상태이다. 지금 우리를 채운 이 어항은 우리 모두를 투어(鬪魚)로 만들고 있다. 최선을 다해도 최악으로 치닫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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