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색하고 정책


지금 일어나 어디로 향할 것인가  : 문제는 정책이다


  일찍이 이 사회를 향해 “분노하라”고 외쳤던 스테판 에셀이 생각난다. 앞장서서 “분노”의 실천을 했고 그리고 “분노만으로는 안된다”며 대안을 제시했던 사상가의 목소리가 앞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언젠가부터 내 온 몸에 깃든 이 분노의 메시지를 나도 모르게 조금씩 흘리고 있을 때면 이내 핀잔을 듣곤 했다. 가끔은 그러한 반응에 더욱 당혹스러울 때가 있었지만 ‘정치’라는 게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취향의 문제를 떠나 ‘금기’가 되는 것을 수없이 겪었다. 취향의 문제이거나 혹은 성격의 문제로 취급당한 정치이야기는 한편으론 ‘시비거는’의 단어와도 동일했다. 어느 틈에 ‘정치’라는 이야기가 이런 다양한 단어를 함축하면서도 절대적으로 하나만을 뜻하는 단어가 되었을까. 정치이야기는 곧 박근혜 비판으로 인식되는 현장은 세대가 다를 때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젊은 세대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말로 취향의 공동체 속에 진입하지 않는 이상 어느 자리에서나 정치 이야기는 불편한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어쩌면 당연할 듯도 하다. 그 이야기의 정점은 대통령으로 이어지게 되어있으니까. 그렇다면 정치이야기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대통령으로 귀결되는 이야기가 불편한 것이었을까.

  정치는 한 인간에 대한 호불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안녕을 위한 이야기라고 누누이 변명, 해명, 증명, 반박해야 하는 일은 참 답답하고 짜증나는 일이었다. 정치는 정책이며 제대로 된 ‘정책’에 대한 나의 욕구가 분노조절장애자로 성격이상자로 낙인찍히는 상황에서 차라리 속시원히 “그래 나 성격 더럽다!”라고 외쳤어야 했는데. 생각해보니 다 내가 잘못했다. 더 열내지 못한 것도 지친 것도.


 우리가 세계화에 종속될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는 대다수는 무력감을 느끼고 체념하며 운명론자가 된다. 모든 희망을 잃고 정치에 무관심해지거나 울분을 터뜨리는 것이다. 세계와 유럽에 종속됨으로써 빚어지는 해악을 인식하는 혹자들은 그 종속에서 벗어나는 것, 즉 우리 프랑스를 탈세계화하고 탈유럽화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우리가 모면했다고 여기는 종속보다 고립과 폐쇄가 더 큰 해악임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p23


  무력감. 체념. 오래도록 뼈에 깊이 새겨진 단어다. 원하지 않았음에도. “떠들어봐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라며 자기계발에나 힘쓰라던 사람들 속에서 떠들기만 하는 자괴감을 느꼈던 것도 이제 와서 후회가. 더 실컷 떠들 것을.


  사회에서 인간은 “정책”에 영향받지 않을 수 없다. 담배값 인상 정책이 미치는 영향만 해도 정책이 우리의 삶을 지배한다. 그러니 정책은 정치와도 같다. 이것을 아는 이익집단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정책이 결정되도록 압력을 행사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지금 대한민국에선 특정한 이익집단이 주무르는 정책들이 횡행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맞닥뜨리고 있다.

  스테판 에셀은 사회에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분노하라 외쳤고 더 깊은 이해와 사람들 사이의 연대가 필요함을 주장했다. 또한 포기하지 말라고도 했다. 연대, 연대, 연대! 그의 외침에 동감한 많은 이들이 나서서 분노했고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분노하고 포기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역시 정책이다. 스테판 에셀은 이 책에서 정치를 사랑하기 위한 13가지 제안을 한다. 웰리빙정책, 불평등문제, 교육, 실업, 소비정책, 청소년정책, 문화예술 등등 필요한 개혁과 문제들을 규명하고 해야 할 이루어야 할 정책들에 대해 제시한다. 특히 웰리빙 정책은 “양과 타산과 소유의 헤게모니에 맞서 우리는 대규모의 삶의 질 정책”으로 물질적 측면이 좀더 부각되는 웰빙과는 다르다. 그의 제안들은 물론 유럽이라는 사회, 금융위기 이후의 상황이라는 시기적인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큰 틀에서는 같은 맥락이고 소소한 것들 모두 우리 현실과 유리되어 있지 않다. 궁극적으로 특정한 국가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전세계가 잘 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자본주의, 신자유주의가 이끌어낸 온갖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고 대응하기 위한 방안이다.

 이제 우리 역시 “정책”에 대해 다시 환기해야 할 때다. 우리의 삶을 이끌 정책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그것은 무엇인지. 여기, 스테판 에셀이 제안하는 정책들과 그것에 대한 메시지가 방향을 일러 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한 날의 드로잉


  

 

  가을, 바람이 쌀쌀해져서인지 춥다는 생각과 함께 떠올린 것이 실비아 플라스다. 글쎄. 그것이 너무나도 추운 날, 무섭고 매섭게 추운 날 죽은 것과 연관이 있을까. 실비아 플라스의 글보다도 그녀의 생애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찌라시에 관심갖는 모양새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남편이라 불리는 사람과 남편의 연인의 죽은 방법까지가 더해진. 그렇지만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 뇌리에 각인되어 떠나지지가 않았다.

  죽음이란 언제나 누구의 일이든 안타까운 일이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이른 죽음에 대해선 더 아쉬워한다. 실비아 플라스 역시 그녀가 가진 재능이 너무 탁월했기에 그 재능을 더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쉽고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더구나 어쩌면 당연 피할 수도 있었을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그 마음이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일 게다. 어린 날부터의 자살시도와 고독, 남편과의 별거, 아이를 둔 상황에서의 극단적인 자살이란 방식이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잠시 내리고 강렬하게 보이게 하지만 그 놀라움에 적응이 되고 난 후엔 그녀가 가진 재능에 대한 놀라움에 빠진다.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은 그녀의 재능 중에 한가지 그림, 미술이 얹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줄곧 그녀는 시인이었으니까. 작가였으니까. 이 책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은 실비아 플라스가 그린 드로잉 46점과 편지글과 일기가 엮인 책이다. 얇은 분량의 이 책은 1956년도의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1956년은 그녀가 남편 테드 휴스와 결혼한 시기였고 그와 함께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한 때다. 그때 그린 그림들이다. 낯선 곳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만난 테드와 비밀리에 한 결혼이다. 결혼 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까 불안을 가지면서도 결혼했고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그녀가 그려낸 그림들은, 펜과 잉크로 그려낸 드로잉들.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녀는 그렇게 무언가를 그리고 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잘 그린 그림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를 때엔 사실적인 그림, 실물과 같은 그림을 보면 ‘오우, 잘 그렸다’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젠 사실적인 그림에 대해서만 잘 그렸다라고 하진 않는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좋다” “잘 그렸다”라는 말이 나오는 느낌이 드는 그림들이 있다. 그런 그림은 그러니까 감성을 건드리는 거라고 보면 될까.

  아주 뛰어난 화가라는 생각은 들진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림도 잘 그리네라는 생각을 하기엔 충분했고 그림을 그릴 때의 그녀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가 궁금했다.


테드와 이곳저곳 다녔는데 내가 펜과 잉크로 세밀화를 그리는 동안 테드는 옆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때로는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어. 내가 그림 그리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는 게 좋대. 내 그림도 좋아하고. 내가 펜을 움켜잡고 재빨리 스케치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좋아하는데. 베니돔에서 그린 그림, 보고 싶겠지만 엄마, 조금만 기다려. 내 생애 최고의 걸작들이야. p47


  정말로 그녀가 사랑해서 결혼했고 행복을 누린 시기가 있었을까 의구심을 가졌는데 그녀가 남긴 기록들을 보건대 마냥 의심하며 미심쩍어하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다. 1956년 이후야 어쨌든. 프랑스에서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림을 그릴 때의 정경이 보인다. 이 시기의 그림들과 몇 편 남긴 편지들로만 보면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림에 대해 만족하고 확신에 차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이제 막 결혼한 그녀에겐 가장 행복이 충만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시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드로잉집은 시와 다른 그녀의 감성을 볼 수 있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원천을 ‘그림’이라고 했다.


1958년 3월 22일 외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머니는 열정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예술적 원천을 찾았어. 바로 그림이야. 앙리 루소나 고갱, 파울 클레, 데 키리코처럼 원초적 기운이 넘치는 작가들. (매주 청강하는 ‘현대미술사’ 시간에 교수님이 추천하는 대로) 미술 도서관에서 빌려온 아름다운 책들이 책상에 가득 쌓여 있어. 일 년 동안 간헐 온천수를 병에 꼭꼭 담아놓았던 것처럼 참신한 생각과 영감이 마구 샘솟고 있어.” p10


  소소한 것들에도 영감을 가지며 그림을 그리던 실비아 플라스. 그 행복한 때의 기억들과 예술적 열정을 기록했던 그녀의 생애의 한순간을 보면서 죽음 때문에 각인되었던 회색빛 이미지로만 그녀 전체를 덮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그녀는 행복을 느끼며 이처럼 더많은 예술적 영감과 함께 더 많은, 더 좋은 시들을 그림들을 소설들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 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통에 반대하며 - 타자를 향한 시선
프리모 레비 지음, 심하은.채세진 옮김 / 북인더갭 / 201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권태로워질 수 있다면


  그곳. 지옥보다 더한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그 경험을 전하는 것을 의무라 여기며 『이것이 인간인가』를 썼던 프리모 레비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지 40여 년이 지난 후였다. 그 악몽들이 잊혀지지 않고 몸에 마음에 새겨져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그 고통의 기억을 안고 살았을 시간들이 애틋하고 안쓰럽게 여겨진다.

  이 책은 그가 자살하기 두 해전 출간되었다. 1964년부터 20년 동안 이탈리아 일간지에 기고한 에세이들이다. 제목은 『고통에 반대하며』이지만 그리하여 또다시 그와 뗄 수 없는 아우슈비츠의 기억에 관한 글일 거라 예상했지만 수많은 관심을 가진 작가의 글을 만나게 된다. 그만큼 기존의 그에게 가장 많이 각인되었던 아우슈비치의 고통과 같은 음울함이 아니라 따스하고 호기심 깃든 이야기들, 냉철한 비판과 비평들이 나타나 또다시 애잔함을 더한다. 그에게,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마음과 역량이 있는데 그가 써내려가고 써내려가야 했던 글들이란, 그 기억들이란. 이렇게 그의 생애를 알기에 책 처음에 나오는 에세이부터가 눈길을 끈다. <우리집>. 특징없는 집을 곱씹으며 드러나는 집과 고향, 그 지난 때에 대한 그리움과 애착이 전해진다.

  그 외 이 에세이들을 보면 화학 전공자이자 화학자로 일한 저자의 경력 때문인지 ‘화학’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다. 또한 거미, 나비, 귀뚜라미, 벼룩, 딱정벌레, 다람쥐 등등 생물들에 대한 이야기, 자신이 읽은 책과 작가들에 대한 비평과 글쓰기에 대한 생각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타영역의 점유’, 다시 말해 타인의 직업에의 침입, 남의 사냥터에서 벌인 밀렵, 동물학·천문학·언어학 영토에서의 약탈에 다름 아닐 터인데, (체계적으로 연구한 적이 없으므로 결코 성과를 얻지 못할 것임에도) 지속적인 매력에 이끌려 영원한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는 모든 학문 영역, 즉 몰래 엿보고 싶고 꼬치꼬치 캐묻고픈 충동을 자극하는 영역의 점유라 할 것이다. p6


  굳이 말하건대 화학자라서인지 작품이나 작가에 대해 비평할 때면 자신의 싫고 좋음을 확실하게 표현한다는 느낌이다. 에둘러 표현한다거나 하는 것 없이. 이런 류의 글들을 쓰게 된 것에 대해 저자는 위와 같이 말한다. 더불어 많은 이들이 화학자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는지를 묻기에, 물론 호기심에 찬 어조이거나 거만한 태도이거나, ‘두 문화’가 양립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수많은 문제와 위험을 내보인다 하더라도 최소한 권태롭지는 않다는 것”을 독자에게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하기도 하며.

  그래서였나 보다. 이 책 속에 ‘글쓰기’에 관한 내용이 많았던 것은. 그래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서나 타인의 글쓰기에 대해서나 명확한 관점을 세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더불어서, 그 자신도 글쓰기에 대한 많은 조심과 염려를 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글을 쓴다는 것은 단지 말을 하는 것과 그저 다른 표현 수단이라고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고의 힘을 보여주며 더불어 파괴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세상을 더 좋게 발전시키는 방법을 '아는' 누구에게든 어떤 불신감을 갖고 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사람은 자기 체계를 너무 선호하는 나머지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지나치게 강한 의지를 소유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히틀러가 <나의 투쟁>을 쓴 뒤에 행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많은 다른 이상주의자들이 충분한 에너지를 갖게 되면 전쟁과 학살을 촉발하리라고 종종 생각했다. p61


  조용조용하게 다가오며 일상의 것들에 대한 과학자식 사고가 더해진 글쓰기로 보였던 글들 속에 종종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작가의 고통과 두려움과 분노가 스며있는 것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막연히 그런 생각들을 하게 된다. 이 작가에게 글쓰기는 머릿속에 떠올려지는 그 고통의 파편들을 말끔히 지우고 싶은, 조금 더 권태로워지고 싶은 발버둥이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런가? 그럴 리가!



  제목에서 1920~30년대의 느낌을 받았다. 그즈음의 모던걸의 이미지가 그냥 생각났는데 연유는 모르겠다. 벽에 이마를 기대고 기울여 선 자세의 누군가를 그린 표지 속 소설은 그 시대가 아니라 지금 현실의 이야기라고, 더 나아가 청춘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목과는 상관없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상반된 감정이 생겼다. 당연, 그런가? 그럴 리가!

 의미의 차이인 듯하다.

  이 소설은 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의 당선작 선정  이유를 “청춘”이라는 키워드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지금 현실의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그래서 현실 속 청춘의 모습은 어떠한가. 소설 속 주인공은 스물셋. 그녀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방법은 아르바이트다.

  

내가 학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바이트였다. 날씨연구소 문을 열 때나 인형극이 끝나고 아이들과 배우들이 함께 사진을 찍도록 안내할 때, 평범한 스카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써서 올릴 때, 준비해 간 한류 스타 사진에 일본 아줌마들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볼 때 ‘아, 내가 대학생이구나’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마치 바리케이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뚫린 길이라는 걸, 유령이 나를 바라보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처럼. 학생인 나와 캐스터인 나와 인형극 배우인 나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나는 서로를 모른다. 알아도 절대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룰이다. p40


  스물셋의 대학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생활비와 학비로 쪼들리며 전전하다 휴학과 알바를 반복하는 것. 그래서 그녀가 지금 제 이름이 아니라 익명 또는 별명으로 일하는 곳은 ‘날씨연구소’다. 정말로 날씨를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 날씨를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손님의 마음상태를 잘 예측하고 들어주는 칵테일 주점이다. 이곳을 드나들며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주인공이 잘 예측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등장인물과 손님들은 하나같이 제 이름이 없다. 역시나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 그들이 이 ‘날씨연구소’를 벗어나면 그 별명 외에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며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 자체도 각각의 일들을 하는 서로 다른, 서로를 통일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는 걸 부정하고픈 주인공이 바라보는 사회도 역시 뿌연 안개가 가득한 익명일 것이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실루엣만 남은 여인이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를 든 루스>. 루스는 에이미이거나 로자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루스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피우고 싶다, 피우고 싶지 않다. 피워도 된다, 피우면 안 된다. 이것은 담배가 아니다. 루스는 사서다. 루스는 은행원이다. 루스는 제인이다. 제인은 나영이다. 이것은 그림이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그림의 형태를 띤 색과 면과 점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p164


  자신이 유일하게 애착을 갖는 베개가 사라져 밖으로 나온 주인공이 ‘날씨연구소’에서 일하며 겪게 되는 일들은 당연 주인공의 일상과 감정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나 그런 일들이 그저 흘러 가버릴 경험이 아니기에 스물셋의 ‘그녀’에겐 더욱 그렇다. 단골인 일본 손님이 갑자기 바에서 사망하는 일이나 친자매처럼 잘 지내던 언니에게 당하는 사기, 예술과 영화에 대해 얘기하며 사랑인 듯 행하던 유부남 영화감독 등. 이 영화감독의 언사들을 보면서 마침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한 영화감독이 생각났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왜인지 이 영화감독의 모습도 영화나 소설 등에 조금은 익숙하게 등장하는 유형으로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불행한 건 내 방의 벽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친구가 사는 세상 때문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세계에서는 모두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진실도 허세가 되고, 허영도 현실처럼 보였다. p100 


  글쎄. 그것이 청춘이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소설 속에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학업과 경쟁에 시달리어 소위 일탈을 일삼는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이 세대 청년들은 취업경쟁에 밀리어 마냥 주체적 생각없이 한량거리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 같다. 이것을 이 세대 청춘의 모습이라 부르며 너도 나도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건가. 그래서 모두가 같이 겪는 무게가 가벼워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 현실이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모습을 규정지어 새삼 충격을 받는 일이 없는 듯하다. 놀라움과 각성은 어디로 사라지고 규정화된 청춘의 모습과 일상만이 남아, 그렇다 한들 그것이 당연한 듯이. 그 어떤 일들을 경험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그 속에서 어떤 청춘들은 그 듣기 싫은 ‘청춘의 모습’을 뒤로 하고 오래 안고 있던 베개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쩌다 보니 되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큰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누구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하며 훌훌 털고 일어서곤 하는 것이다. p29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커가 필요해


요슈타인 가아더, 수상한 빵집과 52장의 카드


    “운명을 꿰뚫어 보려는 자는 운명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철학을 이야기로 풀어 쓰는 작가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설이다. <소피의 세계>가 그의 대표작이듯 이 책은 철학을 주제로 한 소설이다. 최근작이 아니라 1990년대 <카드의 비밀>이란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소피의 세계>작가의 소설이라 하니 이야기가 흘러 철학의 문제로 가겠거니 생각하게끔 되지만 이 책이 <소피의 세계>보다 먼저 출간되었다. 명백히 선후관계를 따지면 이 책이 <소피의 세계>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거란다.

   이 소설의 큰 줄기는 열두 살 소년의 엄마 찾기 여정이다. 자아를 찾아 떠난 엄마를 한스는 아빠와 함께 노르웨이에서 아테네로 찾아 나선다. 이 머나먼 여정에서 한스가 만나게 되는 것은 무얼까. 열두 살 아이가 등장하는 것처럼 신나는 모험이 있다. 다만 여느 모험과는 다르다. 또한 이야기 속에 또다른 이야기가 흐르는, 판타지와 미스테리가 가득한 이야기다. 그래서 잠시 한눈을 팔면 옆길로 빠진다. 마냥 환상 속에 머물러 버릴 지도 모른다.

  아테네는 그리스 철학의 중심지다. 소크라테스를 비롯한 철학자들이 생각난다. 그래서인지 두 부자의 최종 목적지가 아테네라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엄마를 찾으러 가는 여행이 철학여행이 되는 것은 철학으로 이끄는 이가 있다는 얘기다. 이 여행에서 한스의 아빠는 이 역할을 맡는다. 동화나 청소년 소설에선 아이는 알지만 어른은 절대 알지 못하는, 마치 벌거벗은 임금님의 옷을 보는 상황이 자주 나타난다. 이것은 아이들이 보다 순수하고 정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어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이 소설 속 아빠는 비록 한스가 혼자서 맞닥뜨리는 빵집이나 난쟁이들의 모습에 대해 알지 못하고 역시나 보지 못하지만, 한스에게 계속 질문을 제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한스 역시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철학자라고 말한다.


“나는 우리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얘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우주에는 생명력이 넘치고 있어. 다만 우리는 우리뿐인지 그렇지 않은지 결코 알 수가 없는 거야. 은하는 마치 외로이 떨어진 섬들과 같거든.”

아버지에 대해 할 얘기가 많지만, 나는 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걸 한 번도 지루해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항해사로서의 인생에 만족해서는 안 되었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철학자로서 나라에서 봉급을 받았어야 했다. 아버지도 언젠가 비슷한 얘기를 했다. “우리나라에는 별의별 장관이 다 있지. 그렇지만 철학 장관은 없어. 큰 나라들마저도 그런 건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지.” p27 


  한스가 낯선 환상의 세계로 들어서는 것은 마치 처음부터 정해진 일인 것처럼 이루어진다. 그가 만나는 난쟁이와 그의 안내, 빵집의 제빵사. 그로부터 건네받은 꼬마책. 지금의 열두 살이라면 이런 책보다는 그저 핸드폰을 들고서 여행을 했겠지만 한스는 수상한 빵집 제빵사 루트비히에게 받은 꼬마책을 읽는데 푹 빠진다. 루트비히가 건넨 롤빵에 있던 돋보기로 봐야만 읽을 수 있는 아주 작은 책, 꼬마책. 거기엔 1790년의 이야기, 카리브해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온 선원 프로데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다. 52장의 카드, 이것은 프로데의 친구들이다. 환상의 섬인 만큼 이 신비로운 일이 가능했고 여기에 조커가 등장하여 흥미진진하게 한다.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중에 불쑥 불쑥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고 있나’와 같은 질문들이 튀어나와 머릿속을 비현실적이게 만들었다가도 현실적으로 돌려놓기도 한다.


사랑하는 아가야, 널 이렇게 불러도 되겠지. 나는 여기 앉아서 내 인생 이야기를 적고 있고, 네가 언젠가 도르프에 올 것이라는 것을 안다. 어쩌면 너는 발데마르길의 빵 가게를 느릿느릿 지나가다가 금붕어가 든 유리 어항 앞에 멈춰 서겠지. 너는 네가 왜 왔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네가 무지갯빛 레모네이드와 마법의 섬 이야기를 계속 이끌어가기 위해 도르프에 올 것임을 알고 있다.

    지금은 1946년 2월이고 나는 아직 젊다. p48 .


  아이가 그 먼 여정을 가는 바람은 4살 때 헤어진 엄마를 만나는 것이었으니만큼 엄마를 만나게 될까. 엄마는 자아실현을 위한 모델일을 잘 하고 지속적으로 하려 할까. 아빠는 여전한 철학적 질문을 쏟아낼까. 그리고, 오래전에 이야기로만 전해져 오는 한스의 할아버지는 어디에, 살아는 계실까. 수상한 빵집과 더불어 또한 불쑥 튀어나오는 난쟁이를 만나게 되는 한스의 여행은 꼬마책 속에 등장하는 환상의 섬과 오버랩되며 그 명확한 경계를 흐리지만 이야기의 연결고리는 명확하다.


 우리는 놀라운 동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이 세상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천사나 화성인처럼 비정상적인 존재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유는 단지 그들에게 세상이 수수께끼로 보이지 않는 다른 데 있을 뿐이다. 나는 아주 다르게 느끼고 있다. 나는 세상이 놀라운 꿈으로 가득 찼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난 이 꿈이 서로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에 대한 설명을 찾고 있었다. p191


  이 환상의 세계가 52장의 카드가, 조커가 흐릿하게 다가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는 선에서 이야기를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갇힌, 익숙한 선에서만 생각하려고 하기 때문에. 물론 그것을 질서라고 얘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너머를, 본질을 본다면 더 깊은 깨달음과 더불어 더 넓은 상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