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가? 그럴 리가!



  제목에서 1920~30년대의 느낌을 받았다. 그즈음의 모던걸의 이미지가 그냥 생각났는데 연유는 모르겠다. 벽에 이마를 기대고 기울여 선 자세의 누군가를 그린 표지 속 소설은 그 시대가 아니라 지금 현실의 이야기라고, 더 나아가 청춘의 모습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제목과는 상관없이 소설을 읽고 난 후 상반된 감정이 생겼다. 당연, 그런가? 그럴 리가!

 의미의 차이인 듯하다.

  이 소설은 문학상 수상작이다. 심사위원들은 이 소설의 당선작 선정  이유를 “청춘”이라는 키워드로 말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이 지금 현실의 청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그래서 현실 속 청춘의 모습은 어떠한가. 소설 속 주인공은 스물셋. 그녀가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는 방법은 아르바이트다.

  

내가 학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르바이트였다. 날씨연구소 문을 열 때나 인형극이 끝나고 아이들과 배우들이 함께 사진을 찍도록 안내할 때, 평범한 스카프에 대해 구구절절 설명을 써서 올릴 때, 준비해 간 한류 스타 사진에 일본 아줌마들이 호들갑을 떠는 걸 볼 때 ‘아, 내가 대학생이구나’라고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마치 바리케이드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뚫린 길이라는 걸, 유령이 나를 바라보기 때문에 살아있다는 걸 인식하는 것처럼. 학생인 나와 캐스터인 나와 인형극 배우인 나와 한국어를 가르치는 나는 서로를 모른다. 알아도 절대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룰이다. p40


  스물셋의 대학생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 생활비와 학비로 쪼들리며 전전하다 휴학과 알바를 반복하는 것. 그래서 그녀가 지금 제 이름이 아니라 익명 또는 별명으로 일하는 곳은 ‘날씨연구소’다. 정말로 날씨를 연구하는 곳이 아니라 날씨를 연구하는 것만큼이나 손님의 마음상태를 잘 예측하고 들어주는 칵테일 주점이다. 이곳을 드나들며 주인공과 관계를 맺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주인공이 잘 예측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등장인물과 손님들은 하나같이 제 이름이 없다. 역시나 별명으로 불린다. 그런 그들이 이 ‘날씨연구소’를 벗어나면 그 별명 외에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며 서로를 마주할 수 있을까. 자신의 존재 자체도 각각의 일들을 하는 서로 다른, 서로를 통일시키고 싶어하지 않는, 온전히 자신으로 존재하는 걸 부정하고픈 주인공이 바라보는 사회도 역시 뿌연 안개가 가득한 익명일 것이다.


펼쳐진 페이지에는 얼굴을 알 수 없는 실루엣만 남은 여인이 담배를 들고 있었다. <담배를 든 루스>. 루스는 에이미이거나 로자여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루스는 담배를 꺼내 들었다. 피우고 싶다, 피우고 싶지 않다. 피워도 된다, 피우면 안 된다. 이것은 담배가 아니다. 루스는 사서다. 루스는 은행원이다. 루스는 제인이다. 제인은 나영이다. 이것은 그림이다. 이것은 그림이 아니다. 이것은 그림의 형태를 띤 색과 면과 점이다.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p164


  자신이 유일하게 애착을 갖는 베개가 사라져 밖으로 나온 주인공이 ‘날씨연구소’에서 일하며 겪게 되는 일들은 당연 주인공의 일상과 감정들에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나 그런 일들이 그저 흘러 가버릴 경험이 아니기에 스물셋의 ‘그녀’에겐 더욱 그렇다. 단골인 일본 손님이 갑자기 바에서 사망하는 일이나 친자매처럼 잘 지내던 언니에게 당하는 사기, 예술과 영화에 대해 얘기하며 사랑인 듯 행하던 유부남 영화감독 등. 이 영화감독의 언사들을 보면서 마침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한 영화감독이 생각났다. 잘 알지도 못하지만 왜인지 이 영화감독의 모습도 영화나 소설 등에 조금은 익숙하게 등장하는 유형으로 보이기도 했다. 

    

우리가 불행한 건 내 방의 벽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친구가 사는 세상 때문이라고 말했고, 나는 그 세계에서는 모두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진실도 허세가 되고, 허영도 현실처럼 보였다. p100 


  글쎄. 그것이 청춘이기 때문일까. 어느 순간 소설 속에서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학업과 경쟁에 시달리어 소위 일탈을 일삼는 생각하는 어른의 모습으로 묘사되고 이 세대 청년들은 취업경쟁에 밀리어 마냥 주체적 생각없이 한량거리는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 같다. 이것을 이 세대 청춘의 모습이라 부르며 너도 나도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다라는 걸 말하고자 하는 건가. 그래서 모두가 같이 겪는 무게가 가벼워지기라도 한다는 건가. 한편으로는 그렇게 이 현실이 청소년들과 청년들의 모습을 규정지어 새삼 충격을 받는 일이 없는 듯하다. 놀라움과 각성은 어디로 사라지고 규정화된 청춘의 모습과 일상만이 남아, 그렇다 한들 그것이 당연한 듯이. 그 어떤 일들을 경험해도 상관없다는 듯이.

  그럼에도 그 속에서 어떤 청춘들은 그 듣기 싫은 ‘청춘의 모습’을 뒤로 하고 오래 안고 있던 베개를 찾아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쩌다 보니 되어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큰 거짓말이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으므로 누구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네, 하며 훌훌 털고 일어서곤 하는 것이다. p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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