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날의 드로잉


  

 

  가을, 바람이 쌀쌀해져서인지 춥다는 생각과 함께 떠올린 것이 실비아 플라스다. 글쎄. 그것이 너무나도 추운 날, 무섭고 매섭게 추운 날 죽은 것과 연관이 있을까. 실비아 플라스의 글보다도 그녀의 생애에 더 관심이 있다고 한다면 찌라시에 관심갖는 모양새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녀와 남편이라 불리는 사람과 남편의 연인의 죽은 방법까지가 더해진. 그렇지만 그녀의 죽음이 너무나 뇌리에 각인되어 떠나지지가 않았다.

  죽음이란 언제나 누구의 일이든 안타까운 일이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기에 이른 죽음에 대해선 더 아쉬워한다. 실비아 플라스 역시 그녀가 가진 재능이 너무 탁월했기에 그 재능을 더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아쉽고 안타까움이 가득하다. 더구나 어쩌면 당연 피할 수도 있었을 스스로 택한 죽음이라는 점에서 그 마음이 극에 달하게 되는 것일 게다. 어린 날부터의 자살시도와 고독, 남편과의 별거, 아이를 둔 상황에서의 극단적인 자살이란 방식이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잠시 내리고 강렬하게 보이게 하지만 그 놀라움에 적응이 되고 난 후엔 그녀가 가진 재능에 대한 놀라움에 빠진다.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집은 그녀의 재능 중에 한가지 그림, 미술이 얹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줄곧 그녀는 시인이었으니까. 작가였으니까. 이 책 <실비아 플라스 드로잉>은 실비아 플라스가 그린 드로잉 46점과 편지글과 일기가 엮인 책이다. 얇은 분량의 이 책은 1956년도의 실비아 플라스의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1956년은 그녀가 남편 테드 휴스와 결혼한 시기였고 그와 함께 프랑스와 스페인을 여행한 때다. 그때 그린 그림들이다. 낯선 곳에서 공부를 하던 중에 만난 테드와 비밀리에 한 결혼이다. 결혼 후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까 불안을 가지면서도 결혼했고 그렇게 떠난 여행에서 그녀가 그려낸 그림들은, 펜과 잉크로 그려낸 드로잉들. 어느 한 순간이라도 그녀는 그렇게 무언가를 그리고 쓰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잘 그린 그림인가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림에 대해 잘 모를 때엔 사실적인 그림, 실물과 같은 그림을 보면 ‘오우, 잘 그렸다’라고 생각했다. 여전히 그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이젠 사실적인 그림에 대해서만 잘 그렸다라고 하진 않는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좋다” “잘 그렸다”라는 말이 나오는 느낌이 드는 그림들이 있다. 그런 그림은 그러니까 감성을 건드리는 거라고 보면 될까.

  아주 뛰어난 화가라는 생각은 들진 않았다. 하지만 확실히 그림도 잘 그리네라는 생각을 하기엔 충분했고 그림을 그릴 때의 그녀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가 궁금했다.


테드와 이곳저곳 다녔는데 내가 펜과 잉크로 세밀화를 그리는 동안 테드는 옆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때로는 그저 생각에 잠겨 있었어. 내가 그림 그리는 동안에 나와 함께 있는 게 좋대. 내 그림도 좋아하고. 내가 펜을 움켜잡고 재빨리 스케치하는 모습은 또 얼마나 좋아하는데. 베니돔에서 그린 그림, 보고 싶겠지만 엄마, 조금만 기다려. 내 생애 최고의 걸작들이야. p47


  정말로 그녀가 사랑해서 결혼했고 행복을 누린 시기가 있었을까 의구심을 가졌는데 그녀가 남긴 기록들을 보건대 마냥 의심하며 미심쩍어하는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다. 1956년 이후야 어쨌든. 프랑스에서 엄마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림을 그릴 때의 정경이 보인다. 이 시기의 그림들과 몇 편 남긴 편지들로만 보면 행복해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림에 대해 만족하고 확신에 차 있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이제 막 결혼한 그녀에겐 가장 행복이 충만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시기 때문일까. 그래서인지 드로잉집은 시와 다른 그녀의 감성을 볼 수 있다.

   실비아 플라스는 그녀에게 예술적 영감을 주는 원천을 ‘그림’이라고 했다.


1958년 3월 22일 외할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머니는 열정적인 어조로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예술적 원천을 찾았어. 바로 그림이야. 앙리 루소나 고갱, 파울 클레, 데 키리코처럼 원초적 기운이 넘치는 작가들. (매주 청강하는 ‘현대미술사’ 시간에 교수님이 추천하는 대로) 미술 도서관에서 빌려온 아름다운 책들이 책상에 가득 쌓여 있어. 일 년 동안 간헐 온천수를 병에 꼭꼭 담아놓았던 것처럼 참신한 생각과 영감이 마구 샘솟고 있어.” p10


  소소한 것들에도 영감을 가지며 그림을 그리던 실비아 플라스. 그 행복한 때의 기억들과 예술적 열정을 기록했던 그녀의 생애의 한순간을 보면서 죽음 때문에 각인되었던 회색빛 이미지로만 그녀 전체를 덮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충분히 그녀는 행복을 느끼며 이처럼 더많은 예술적 영감과 함께 더 많은, 더 좋은 시들을 그림들을 소설들을 남길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마음이 더욱 커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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