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을 테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Four Ways To Forgiveness

어슐러 K. 르 귄 시공사, 2014.

 

   지난달 지구와 닮은 7개 행성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 책이 떠올랐다. 지구와 닮은 행성이란 의미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라는 말이다.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했다는 발표는 자주 접한 듯한데 후속보도가 없다. 지구인처럼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행성들을 찾는 지구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과학적 사실에 대한 발견, SF에서 보듯 지구인의 영토 확장? 지금의 심정이라면 지구가 아닌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프다. 어쩌면 혼란일수도 어쩌면 더 확고한 질서가 잡힐 수도 있을 그곳. 엉망이 된 터전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조금은 진정이 될지 모를 39일이다. 외국도 아닌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하는 일은 발생할까.

   알 수 없는 일인데, 왜 미래 세계에 대해 희망보다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걸까. SF 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어슐러 르 권의 연작 단편집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은 우주 공간의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곱 개 달을 가진 행성 웨렐과 웨렐의 식민지 행성 예이오웨이가 배경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과학 발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채 소설 속 행성은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유배지의 인상을 준다. 황량하고 문명이 파괴되어 버린 터전으로 보인다. 1995년에 발표한 연작 단편집으로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용서와 사랑에 관한 것이고 각 이야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결국 지구 밖 행성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배경이 그러할뿐 인간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민지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권력과 투쟁이 있는, 그리하여 용서와 화해가 필요로 한.

   작가는 SF와 추리소설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수상전력도 화려하다. 이 책 발표 당시 그 의미와 아름다움과 중요성에서 영원히 남을 작품” “미국의 가장 영예롭고 존경받는 작가라는 찬사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매료된 이 책의 이야기는 무얼까.

두 행성은 식민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주인과 노예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은 피부색으로 결정된다. 소유주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검고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이나 피부색이 옅은 사람들을 정복하며 자산으로 취급한다. 자산들이 불리는 이름은 먼지놈’ ‘분필’ ‘흰둥이등이다. 당연, 여성은 구분조차 없는 남자의 자산으로 취급되었고 소유주의 부인이어도 그저 열등한 특권 계급이었다.

 

여기서, 이 세계에서 여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들은 정부의 일부가 아니에요. 여자들이 해방을 이뤄냈어요.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해방을 위해 노력했고 죽었어요. 하지만 여자들은 장군이 아니었고, 대장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을에서 여자들은 하찮은 존재 그 이하이고, 일하는 짐승이고, 새끼 낳는 가축이에요. 여기선 조금 나아요. 하지만 좋진 않아요. 전 베소의 의료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전 의사예요. 간호사가 아니라. 보스들의 지휘 아래, 전 이 병원을 운영했어요. 이젠 남자가 병원을 운영해요. 이젠 우리의 남자들이 소유주예요. 그리고 우린 언제나와 같은 처지고요. 자산이죠. 이러자고 우리가 그 기나긴 전쟁을 싸워온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특사님? 우리는 새로운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우린 그 일을 끝내야 해요. - <사람들의 남자 , p226~227>

 

   이러한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가 만든 식민행성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 관례를 그대로 적용하며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그 방식이란 집단 내 경쟁과 권력 다툼을 통해서다. 기시감이 느껴지듯 그 방법 속엔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동원되고 그 어떤 외부 정도도 차단된다. 식민행성의 여성의 지위는 주행성보다도 열악하다. 심지어 남자노예일지라도 여자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한다.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심지어 살인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된다. 다른 점이라면 식민행성이므로 주행성에 대해 끊임없이 독립을 시도한다는 점이랄까. 식민행성의 여성들이 더욱 그 갈망이, 행동력이 강하다는 점이랄까.

 

예이오웨이에서 사람들은 그 자산들을 자유계약인(freedpeople)이라 불렀다. 자유민(free people)이 아니라, 자유계약인이었다. 그때, 내가 읽던 역사책이 말했다. ‘왜 우리가 자유민이 아니지?’라고 그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 <한 여자의 해방 p. 310> -

 

   이러한 지배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위한 갈망은 30여년의 해방전쟁 상태를 만든다. 당연 혁명군도 반혁명군도 존재한다. 배신도 음모도 빠질 수 없다. <배신>의 이야기는 전직 혁명대장 압버캄의 이야기다. 그는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의 혁명을 이끌었지만 권력 남용으로 쫓겨났다. 압버캄이 누명을 썼다거나 혁명의 새 시도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상태로 노숙인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전직 혁명대장의 끊임없는 회의를 그려내고 있다. 그런 그가 좌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의 존재가 서로에게 필요로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한 여자의 해방>은 웨렐의 노예로 태어난 라캄이 여성 해방운동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식민행성과 노예라는 구조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들 모두는 주어진 체제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글을 읽는 것도 아는 것도 죄악시되는 사회에서 모순을, 불평등을 인식하는 계기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이 노예에게 지식을 배제시키는 이유일 것이고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강압하고 세뇌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혁명이 뭔지 전혀 몰랐다. 에로드가 말해줬을 때는, 예이오웨이라 불리는 곳에서 플랜테이션들의 자산들이 자신들의 소유주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고, 나는 어떻게 자산들이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세상에는 높은 존재와 낮은 존재, 주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 소유주와 피소유자가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나의 세상은 쇼메케 영지가 전부였고, 쇼메케 영지는 그 하나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누가 그걸 뒤엎고 싶겠는가?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 아래에 깔려 짜부라질 텐데. - <한 여자의 해방 p283>-

 

   한 인간의 변화는 인지를 통해서 또한 인지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많은 이들이 그저 그렇게 구축한 세상에 대해 변화에 대한 의미조차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 나은 세계를 인식한 순간 그들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느꼈고 그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이 소설 속에서 그 방법은 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다.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서 오해와 반목을 풀어가고 함께 혁명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해야 할 것,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혼자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가며 이해의 소길을 구가하려는 모습들은 사랑이라는 뻔한 결말로 나아가지만, 또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던 이들이 그 갈등을 해결하고 나아가는 모습은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은, 갈등은 결국 인간들의 편협한 사고때문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마침내 그들은 새로운 행성을 만들어 가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한번에, 단번에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점진적인 변화의 형태일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변혁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야 할 일이다. 바뀌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에도 헌법 수정안이 이루어졌다.

 

헌법 수정안은 예이오웨이 해방 18년에 투표에 부쳐졌고, 거의 비밀투표였다. 여기까지의 사건들, 그리고 그 뒤의 사건들은 대학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세권짜리 <예이오웨이의 역사>에서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말해달라고 부탁받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처럼, 나 역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두 세계의 역사, 우리 평생의 위대한 혁명들, 희망들, 우리 종족의 끝없는 잔학한 행위들 속에서, 한 남자의 그리고 한 여자의 사랑과 욕망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작은 것이다. 하지만 작은 열쇠가 문 옆에 있을 때는 그 문을 연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문은 절대 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의 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잃거나 자유롭기 시작하고, 바로 우리의 몸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예생활을 받아들이거나 끝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 이제껏 나와 함께 자유롭게 살아왔고 자유롭게 죽을, 내 친구를 위해. - <한 여자의 해방 p372>-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을 보았지만, 난 용서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용서와 사랑은 무조건 베풀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위치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용서가 필요치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책 속의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시대에 과거회귀가 웬 말인가. 우리 사회가 한편으로는 심각한 무지와 문맹의 나라라는 것을 절감하는 때이다. 글자를 안다고 문맹이 아니랄 수 없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문장의 의미를 아는 일이다. 여전히 지식이란 것을 학력을 통해 갖추었으나 무지와 문맹이 가득한 사람들의 쇼를 보며 생각한다. ,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고. 책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무지와 문맹을 바탕으로 한 탐욕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고.

 

무지는 자신을 사납게 방어하고, 문맹은 나도 잘 알듯 날카로워질 수 있다. - <한 여자의 해방 p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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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 같은 시와 삶

 

실비아 플라스 시 전집

 

   3월의 꽃샘추위가 시작되었다. 눈이 내린 곳도 있다. 남쪽 지방에선 겨울에도 보지 못한 눈이 삼월에만 연달아 내리던 때도 있었다. 3월은 봄인데, 꽃샘추위라고 부르기엔 괴상한 날씨, 그것은 점점 이상기후라 불렸다.

    3월이 봄이란 걸 안다. 그만큼 3월 초엔 꽃샘추위가 있을 것을 안다. 추위는 매섭지만 꽃샘추위라는 귀여운 말에 가려, 곧 따쓰해질 것을 알아서인지 놀랍거나 불안하거나 하지도 않다. 봄이라는 따스한 기운은 그렇게 마음 속에 스며 새겨지는 모양이다. 3월만큼, 봄이라는 느낌은 2월에도 느껴진다. 2월이라는 달력을 보는 순간부터 벌써 봄을 느끼며 상승한 기온과 좀더 따뜻해진 햇살을 느낀다. 그런 2. 이제는 2월하면 한 작가가 떠오른다. 실비아 플라스. 안타깝게도 이 강렬한 이미지는 211일 생을 마감한 실비아 플라스의 생애에서 온다. 다른 어떤 말도 작가의 작품 구절도 아닌 작가의 생애에 대한 한 문장. “그날 영국은 100년 만에 가장 혹독한 추위였다.”

   이런 기분이었을 거라고. 봄에 느끼는 꽃샘추위의 느낌일 거라고 그날을 생각한다. 211일의 날씨가 실비아 플라스를 삼키고 추위보다 더한 고독와 배신과 우울이 작가에게서 떨어지지 않은 날.

    천재 시인이라 불리는 예술가의 비극적 마지막이 강렬하게 박혔지만 작가의 시 또한 강렬한 이미지로 사로잡는다. 실비아 플라스 시전집은 1956년 이후에 쓴 224편의 작품과 1956년 이전에 쓴 시 가운데 50편이 수록되었다. 이 책은 실비아에게 괴로움을 안겨준 남편이었던 테드 휴스가 엮은 것이다. 테드 휴스는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들은 지운 채 실비아의 작품을 정리했다고 한다.

   실비아는 문단에서 페미니스트 시인으로도 불리는데 그것은 실비아의 시가 여성에게 억압적이었던 시대, 여성에게 가해진 이 모순에 대한 저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비평가들이 실비아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시의 언어가 아닌 개인적인 경험(아버지의 죽음과 자살 시도, 남편과의 이혼 같은 것)과 연계하는데 비해 1980년대 페미니즘 문학비평가들은 플라스의 시에 나타난 분노의 목소리를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여성의 격렬한 저항으로 재평가하여, 여성 문학의 신화혹은 페미니즘의 아이콘으로 부각한다(p657).”

   실비아의 시를 읽어 내려가기는 쉽지 않지만 이미지만큼은 강렬하다. 전체적으로 음울한 잿빛 이미지를 심어준다. 시를 읽다보면 반복적으로 뇌리에 남는 단어들, 울분과 결의의 소리들에 명징한 자의식을 찾고자 하는 실비아의 모습을 그려본다. 어쨌든 몇 년을 같이 산 전남편이자 시인인 테드 휴스는 실비아의 시쓰기에 대해 말하길 내면의 상징과 이미지에 큰 뿌리를 두고 있다했다. 실비아의 내면 속에 가득찬 것은 고뇌일까. 어릴 적부터 시를 쓰던 아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내면을 찾아들어갔을까. 외적인 사건들이 실비아의 생애에, 시에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분명 아버지와 남편과의 관계들은 영향을 주었겠지만 오로지 그것에 갇혀 있지는 않을 실비아의 시는, 읽고 있다 보면 마음이 힘겨워진다.

 

내가 한 사람을 죽인다면, 나는 둘을 죽이는 셈이지.

자기가 아빠라고 말하며,

내 피를 일 년 동안 빨아 마신 흡혈귀,

사실을 말하자면, 칠 년 동안.

아빠, 이젠 돌아누워도 돼요.

 

당신의 살찐 검은 심장에 말뚝이 박혀 있지.

그리고 마을 사람들은 당신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았지.

그들은 춤추면서 당신을 짓밟지.

그들은 그것이 당신이라는 걸 언제나 알고 있었지.

아빠, 아빠, 이 개자식, 나는 다 끝났어.

- 아빠

 

   실비아 플라스의 대표작이며 수많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과 더불어 충격을 안겨준 아빠의 구절이다. 201640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김경욱의 아침의 문은 실비아 플라스의 이 시를 인용하고 있다. 이 시는 아버지와 딸의 관계를 나치와 유대인으로 설정하며 더 극렬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삶에 대한, 사물에 대한 시선. 내면의 갈등은 끝이 난 것인가. 오래도록 길들여지고 관념화되어 버린 믿음이 조각나는 것, 감정과 이성을 끝없이 되뇌며 마침내 분노와 울분으로 내뱉는 말. 신화화된 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신화를 쌓는 일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힘들고 어렵다. 삶의 고됨이 고통이 울분에 찬 말로써 해소될 수 있을까. 갈등, 공포, 고뇌, 울분들. 그 모든 것들을 내면속에 넘치도록 담고서 삶을 지탱한 실비아의 자의식은 시대와 실비아를 둘러싼 관계들과 그녀 자신의 관념의 산물이다. 실비아가 지향하는 삶은, 자아는 어디로 향하기를 원했을까.

하얀

고다이바처럼, 나는 벗어버린다.

과거의 유물과 과거의 핍박을.

 

그리고 이제 나는

바다의 광채 같은 밀밭을 휘젓는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벽에서 녹아내린다.

그러면 나는

화살이고,

 

새빨간 눈,

아침의 큰 솥 안으로

자살하듯 돌진해서 뛰어드는

 

이슬이다.

- 에어리얼

 

   실비아의 생이 유동치지 않고 평안하게 머물고 있을까. 마지막으로 인해 못내 울분을 토하고 있을 듯하다. 남겨지게 만들어버린 실비아의 아이들과 더 풀어내지 못한 울분들. 벗어버렸을 그 에어리얼의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아니, 절반만 드러낸 채 시인은 떠났다. 시인의 생애도 시인의 언어도 꽃샘추위처럼 서늘하고 매섭다. 또한 그 한기가 청아함을 비장미를 씁쓸함을 준다. 서린 말들이 한없이 이어지는 시어들 속에서 푸욱푹 눈발 속에 빠지듯 실비아 플라스의 시 속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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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상황을 바라는 몸짓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 Big Little Lies

 리안 모리아티, 마시멜로, 2015-10-12.


  커져버린 거짓말이라니. 처음부터 이 상황에선 ‘거짓말’ 이외에는 달리 대안이 없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든 누구라도 소설 속 상황에서 ‘거짓말’은 당연한 공식이 되고 있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은 후의 생각이란 “거짓말”에 초점을 둘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불러오는 상황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 폭력이란 거짓말을 일으키는 핵심이다.

  리안 모리아티의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은 세 가지 궁금증에 대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발시키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누가 죽었는가, 누가 죽였는가, 아마벨라를 괴롭힌 아이는 누구인가. 흥미롭고 유쾌한 잡담처럼 풀어놓는 대화와 삶의 이면을 바라보는 내면의 목소리가 잘 어우러져 살인사건이라는 전제가 붙어 있음에도 유쾌하게 읽어나가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스토리가 영화나 드라마화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드라마화가 진행 중인 소설이다. 니콜 키드먼과 리즈 워더스푼이 등장하는 미드로, 2월 19일 오늘자 방영이라고 나온다.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맺음은 예비학교에서 이루어진다. 호주의 피리위라는 아름다운 해변을 가진 도시의 학교 학생과 학부모들의 관계로 말이다. 이야기의 축을 이끌어가는 마흔살의 재혼녀 매들린, 싱글맘 제인, 미모와 재력 모두 갖춘 셀레스트의 각각의 이야기 또한 흥미있고 그들의 관계 역시도 몰입감을 준다. 성격도 나이도 다른 세 명의 여자가 친분과 유대를 쌓아가며 또다른 학부모 그룹과 가지는 갈등이 이 사건의 전면에 나온다. 아이를 둘러싼 파워게임, 아이도 어른도 외모와 재력과 권력의 힘을 자랑하고파 하고 그것을 부러워하고 힘을 가진 이에게 더 친분을 형성하고파 하는 익히 알고 있는 부모들의 모습이 전개된다. 그 과정의 이야기가 유머스럽게 펼쳐지는 가운데 우리나라라면 지극히 부자연스러운 상황, 이혼한 부부가 한 학교의 학부모로 만나 벌어지는 일이 얽혀져 있다.

  아이의 세계나 어른의 세계에나 평행하게 전개되는 거짓말. 우린 타인의 말에 대해 자의적으로 의심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타인의 삶에 깊이 관여하려 하지 않는다. 타인의 삶이, 말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그것은 식탁 위에, 카페 테이블 위에 놓인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거짓말이 좋아서 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다. 거짓말은 늘 다른 것을 감추기 위해 하게 된다.

  폭력은 늘 거짓말을 끌어들인다. 학대받는 아동들이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 교사의 ‘폭력’을 알리지 못하는 것은 폭력을 경험한 공포 때문이다. 폭력을 당한 여성이 폭력의 가해자인 남편을 고소하지 못하는 것 역시 공포다. 또한, 오랫동안 이 사회는 가정폭력의 일상성을, 문제없음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또한 폭력 후에 일어나는 “잘 될거야”와 “참아야 하는 것”이라는 자기암시적 거짓말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그러니 친구의 폭력을 참고 그 가해자를 발설하지 못하는 아이나 폭력의 일상화된 모습을 목격하며 저도 모르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 자신이 폭력당하고 있음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셀레스트, 어릴 적부터 당한 학대와 폭력으로 인해, 또는 어쩌다 당한 한번의 폭력으로 인해 그 공포와 분노가 성인이 되어서도 내재화되어 떨치지 못하는 인물들 모두, 폭력의 피해자는 얼마나 같은 모습인가.

  아이를 둘러싼 엄마들의 갈등관계는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에서 오히려 풀어진다. 진실의 순간은 오해가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진실 앞에서 서로의 유대가 강화된다. 오해로 인해 반목했음에 대한 사과가 이뤄지고 피치 못하게 면면의 거짓말을 해야 했던 이에 대한 연민과 공감이 이루어진다. 엄청난 사건 앞에서야 또다른 엄청난 사건은 드러나는 아이러니. 폭력의 희생자 셀레스트는 말한다.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폭력을 말하는 것일까. 폭력을 감추는 거짓말에 관한 것일까. 그냥, 그런 거짓말에 관한 것일까. 헬리곱터 엄마들의 종횡무진 난리부르스를 다룰 것 같은 이야기의 시작에서  사회에 넘쳐나는 폭력의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이야기는 여러 면에서 아이와 어른의 동일한 행동을 나타낸다. 폭력을 행한 당사자로 지목되면서도 친구의 거짓말을 묵묵히 감내해내는 아이, 시끌벅적하고 복잡한 상황에서 살인자가 되어 버린 이를 감싸는 진실을 알고 있는 어른들. 사람들은 그것이 물리적이든 언어적이든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가슴에 맺히는 폭력을 행사하고 또한 그에 맞서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거짓말을 동원한다. 이 맞물려가는 일련의 일들은, 그 사소한 거짓말 속엔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위한 몸부림이 숨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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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마시는 이유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창비, 2016-05-16.


  인생의 그 모든 비극의 끝자락에서 위로의 선봉장은 술밖에 없을 듯이 여겨진 때가있었다. 술기운만이 버텨낼 힘을 줄 것 같은 때. 술이 망각으로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하지만 막상 망각해야 할 것은 뚜렷하고 자잘한 망각에 부딪칠 때, 술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술에게도 기만당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더 이상 술에 대한 환희와 찬가는 없어지는 때. 술은 희극의 기쁨의 정점에 맞이하는 동반자가 아니라 늘 비극과 함께 하고 비극속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그런 술의 경험을 모르지 않을 텐데,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등장인물들이라니. 술에 대한 찬가라고 하기엔 비애가 가득한 인사말, “안녕. 주정뱅이“. 실제의 사람들에게 건네기엔 욕설같기도 하고 비웃음 같기도 한 인사가 소설 제목으로 전달되면서 느낌이 다르다. 그들의 술은 어떤 맛일까.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그 나날들 마다의 술과의 만남은 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 만남이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p176


  세 고교 동창의 십여년 후의 만남을 그린 「실내와 한 켤레」의 문장이다. 친구는 치명적인 가스에 가까운 분위기를 남긴다. 그런 친구들은 삶의 어느 곳곳에서 튀어나와 그 치명적인 가스에 질식하게 만든다. 그 모든 술과의 만남 이전에 치명적인 가스로 타인을 질식케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삶은 나 아닌 사람에 의해 파멸할 수 있을 여지를 늘 안고 있다. 그 사람은 가족이기도 배우자기이고 친구이기도 관계없는 타인이기도 하다. 「봄밤」의 영경은 제 남편이었던 이에 의해 제 아이를 빼앗겼고 수환은 아내에게 버림받고 신용불량자마저 되었다. 「이모」속 이모는 제 가족에게서 오랜 동안 피폐해질 정도로 착취당했다. 「카메라」의 관주는 연인의 말 한마디를 품고 그것을 지키려 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생의 곳곳에서 마주하는 이토록 잔인한 운명들은 술을 불러오게 만든다. 그래서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술에 의지해 망각하려 하고 비애를 달래려 한다. 그러한들 쉬이 잊어질 리 없는 삶의 비애를 어떻게 떼어버릴 수 있을까. 견딘다는 말이 갖는 무게는, 비애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도 않으려 한다. 모든 불행을 부여잡고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하는「봄밤」의 영경처럼, 이 생애에서 행운의 몫은 아직 남아 있을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p230


  치명적인 가스를 퍼붓는 누군가와의 만남이, 내게 닥친 불행이 「층」의 외침처럼 내 탓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행은 받아들여야 하고 감당해야 하고 견디어야 할 뿐이다. 온 힘을 다해 불행 가운데 행운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누구든 한발짝 물러나 이렇게 말하기 때문 아닐까?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p242


  아니, 사실은 술보다도 바로 당신, 눈앞에 있는 당신의 도움이,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도움되지 않으리라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한, 이 세상살이에 주정뱅이는 넘쳐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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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멋진 일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보흐밀 흐라발, 버티고, 2006-09-25.

 

  체코 현대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인데 번역작은 단 세 권이다. 작가 자신이 마흔 아홉 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 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은 작가인가 했더니 그렇지 않았다. 보후밀 흐라발의 책은 정말 많았다. 금서로 지정되어 출판이 금지당하는 상황에서도 체코를 떠나지 않고 체코어로 글을 쓴 작가라면 왜 우리나라에서 이 작가의 작품이 작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체코라는 나라라는 언어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이 작가의 사상 역시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극도로 혐오하는 이 나라에서 보후밀 흐라발의 작품을 좋아할 리 없다. 이제, 이 작가의 작품이 많이 번역되어 나올 수 있을까. 2016년 소설가들이 뽑은 소설로 보후밀 작가의 작품이 선정되었으니, 기대를 가져본다. 열정적으로 체코어를 배워 원서를 읽기에는 한계가 명확하기에 일찌감치 포기하고.

  이 소설은 1965년 출간된 작품이고 소설의 내용은 1945년의 체코를 배경으로 한다. 1945년은 잊혀지지 않는 해이다. 대한민국이 광복한 해이고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많은 나라들이 전쟁에서 벗어나며 독립한 해이다. ‘체코 소설의 슬픈 왕’이라 불리는 만큼 이 책 역시도 전쟁과 냉전의 분위기를 가득 담은 슬픈 이야기로 흐를 것이라 짐작하긴 했지만 등장인물들은 초반부터 우스꽝스러운 모습들을 보여준다. 지금에서야 그 때가 전쟁의 막바지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 살아가던 사람들에겐 전쟁의 종결이 다가오는지 알지 못할 1945년의 체코. 여전히 독일에 점령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 체코인들의 모습은 일상을 살고 있지만 그들을 둘러싼 ‘전쟁’이라는 분위기를 벗어날 수 없다.

  한편으론 그렇기에 극도로 우습게 보이는 행동들이 전쟁의 탓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수습 역무원인 주인공 밀로시 흐르마의 족보에서도 희화화되는 등장인물들이 비장미와 함께 등장한다. 밀로시는 가족의 이런 계보를 이어받는다. 


보통 스물두 살밖에 되지 않은 나 같은 젊은이는 무슨 고민으로 괴로워할까? 물론, 나는 마을 사람들이 마치 우리 루카시 증조부나 최면술사 빌렘 할아버지, 또 단지 25년 동안만 전차를 몰고 그 후로 지금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시는 내 아버지처럼, 나 역시 단순히 일하기 싫어서 내 몫의 일까지 다른 사람들한테 떠넘기려고 손목을 그은 거라고 생각하며,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 괴로웠다. p18


  전쟁 속 스물 두 살의 고민이 무언가, 시대적인 상황이 그를 자살로 몰고 간 것일까 잔뜩 궁금해하며 마음이 한창 아린 그때 밀로시는 말한다. 여자 친구와의 첫경험에서 실패했다고, 그것이 이유였다고. 지금 그토록 엄중한 시기에 그런 것을 이유로 자살하기엔 너무하지 않냐는 말이 튀어나올 듯하다. 아, 타인에게 말하는 것은 쉽다. 전쟁은 전쟁이고 개인에게 와닿는 일상의 고통은 그 종류와 강도가 다를 텐데도 ‘전쟁’을 들먹이며 밀로시를 비난하게 된다. 충분히 욕먹어도 되는 듯이 바라보게 된다. 밀로시도 그것을 느낀다. 누군가 자신을 계속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벽돌공의 도움으로 살아난 소심한 성격의 밀로시는 3개월 만에 기차역으로 복귀한다. 그곳은 늘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가 드나드는 곳이고 신호를 잘못 보냈다고 총살당할 뻔하며, 화물 차량에 빼곡하게 실려있는 죽기 직전의 가축들을 보아야 한다. 비둘기를 돌보며 승진에 목말라하는 역장에 기이한 행동만을 일삼는 후비치카로 인해 감독관이 파견되기도 하는 등, 사건이 끊이지 않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한 기차역이다. 이러한 기차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여자친구와의 첫 경험의 실패로 자살시도를 한 밀로시와는 달리 후비치카는 전신기사 아가씨와 쉽게 밀회를 즐기며 심지어 옷벗기기 게임을 하다 역의 직인을전신기사의 엉덩이에 마구 찍어대기도 한다. 이 일로 조사를 받게 되는데 이에 대한 판결을 내리는 독일인의 관점은 너무나 자신들 위주로 사고하는 것이 명백해서,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 죄가 성립하는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국가 공용어인 독일어에 대한 명백한 모독 행위라 볼 수 있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먹으로 책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역에서 사용하는 도장의 반 정도가 독일어로 새겨져 있으니까! 이건 명백히 독일어에 대한 명예훼손이야!” p82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계속 달린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독일군이나 독일군에게 필요한 물품을 실은 기차를 가리킨다. 체코만이 아니라 점령지 곳곳에서 달리며 내키지 않으면 총을 쏘아대며 체코인들을, 점령지의 사람들을 공포로 몰고 갈 것이다. 여전히 이러한 기차가 칙칙폭폭 마구 내달리는 체코, 기차역에서 일하는 밀로시는 이러한 공포를 어떻게 견디며 살아가고 있을까. 총살당할 위기에서도 벗어난 밀로시가 전쟁이라는 공포에서 자살결심을 하지 않는 것은 놀랍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외친다.


모두 똑같아, 너희 독일 놈들도 바보들이라고. 아주 위험천만한 바보들이지. 나야 고작 자기 자신이나 조금 다치게 하는 바보일 뿐이지만, 너희 독일 놈들은 항상 남을 해치는 바보들이잖아. p48


  밀로시의 말대로다. 미칠 것 같은 상황에서 절대로 남을 해치지 않는 것. 그러나 끝까지 그렇게 될까. 밀로시는 선택한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에 폭탄을 던져넣는 것을. 그것은 결국 그의 죽음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어떻게 소심한 밀로시가 이러한 결심을 할 수 있었을까.


"천만에요. 이렇게 편안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아! 저도 이제 남잡니다. 후비치카 씨처럼 그런 남자가 됐다니까요. 너무 멋진 일이라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동안 제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모든 짐을 벗어 버린 느낌입니다.“ 나는 책상 위에서 긴 가위를 집어 들어, 날을 벌렸다 철컥! 소리나게 닫았다.

    “이렇게 제 과거를 싹둑 잘라 버렸습니다.” p117


  밀로시는 오래전 “독일군은 탱크를 돌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라는 최면을 걸면서, 꿋꿋하게 부대 전체를 향해 혼자서 대항한 할아버지를 생각한다. 할아버지는 그때 목숨을 잃었지만 할아버지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자신이 일찌감치 할아버지 생각을 했다면 폭탄을 던지는 일이 아니라 다른 일을 감행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의 가슴속엔 할아버지의 이 정신이 숨겨져 있던 것이다. 다만, 이 숨겨진 자의식, 자존감을 일깨워준 것은 그를 ‘남자로 태어나게 해 준’ 사건이다. 그렇다. 그는 역에 들린 누군가의 도움(?)으로 첫경험을 성공한 것이다. 그것이 밀로시로 하여금 전환을 이루게 했다. 두려움을 가지지 않고 폭탄을 던져 엄중히 감시받는 기차를 폭파시킬 행동력과 함께 그 행동력을 강화할 정신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첫경험의 실패 때에는 근방의 폭격이 있었고 첫경험의 성공 후에 그는 폭격을 하러 떠난다.

  눈 내리는 기차역. 눈이 아름답게 내리는 밤. 밀로시는 최선을 다해 폭탄을 던지지만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고 독일군 병사에게 발각되어 총에 맞기까지 한다. 서로 총을 겨누며 눈밭에 쓰러진 채, 서로에게 죽음만이 마중 나온 상황에서 밀로시는 독일 병사에게 애틋한 마음을 품는다. 그가 엄마, 엄마 외쳐서이기도 하고, 그도 자신도 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평범한 같은 인간인데도 서로 총을 쏘며 죽일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만났더라면 서로 좋아할 수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병사의 손을 잡고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 열차의 폭탄 터지는 소리만이 그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만들었다. 그에 힘입어 우편열차 열차장이 독일인에게 했던 말을 자신도 병사에게 말한다. 


    “집구석에 궁둥이나 붙이고 얌전히 앉아들 있을 일이지!”


  그들이 그랬다면 서로가 총을 겨눌 일도, 타지에서 죽을 일도 없었을 것이긴 하다. 눈 밭 위로 흘러내렸을 그들의 피가 얼마나 붉을 것인가.

  자존감과 자의식을 되찾은 밀로시는 그의 생에 마지막 순간, 독일군에게도 관대하다. 평범한 이들이, 소소하게 일상을 살아가며 첫경험에 실패한 것에 충격을 갖는 소심한 청년이 나라를 위해 제 의지를 가다듬는다. 기껏해야 권력을 쥔 이들의 더 큰 권력욕이 불사른 전쟁에 수많은 평범한 이들이 삶에서 수많은 첫경험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스러져갔다. 지금도 여전히 특정한 이들이 제 야욕과 엉터리 정의로 세상을 지배하려 난리를 친다. 그깟 경험이야 하지 않아도 될 소소한 시민들이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를 제지시킬 방법은 정말 폭탄뿐인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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