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마시는 이유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창비, 2016-05-16.


  인생의 그 모든 비극의 끝자락에서 위로의 선봉장은 술밖에 없을 듯이 여겨진 때가있었다. 술기운만이 버텨낼 힘을 줄 것 같은 때. 술이 망각으로 이끌어 줄 것을 기대하지만 막상 망각해야 할 것은 뚜렷하고 자잘한 망각에 부딪칠 때, 술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술에게도 기만당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더 이상 술에 대한 환희와 찬가는 없어지는 때. 술은 희극의 기쁨의 정점에 맞이하는 동반자가 아니라 늘 비극과 함께 하고 비극속으로 이끄는 길잡이가 된다.

  그런 술의 경험을 모르지 않을 텐데,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등장인물들이라니. 술에 대한 찬가라고 하기엔 비애가 가득한 인사말, “안녕. 주정뱅이“. 실제의 사람들에게 건네기엔 욕설같기도 하고 비웃음 같기도 한 인사가 소설 제목으로 전달되면서 느낌이 다르다. 그들의 술은 어떤 맛일까.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그 나날들 마다의 술과의 만남은 행이었을까 불행이었을까.


그 만남이 행이었는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p176


  세 고교 동창의 십여년 후의 만남을 그린 「실내와 한 켤레」의 문장이다. 친구는 치명적인 가스에 가까운 분위기를 남긴다. 그런 친구들은 삶의 어느 곳곳에서 튀어나와 그 치명적인 가스에 질식하게 만든다. 그 모든 술과의 만남 이전에 치명적인 가스로 타인을 질식케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삶은 나 아닌 사람에 의해 파멸할 수 있을 여지를 늘 안고 있다. 그 사람은 가족이기도 배우자기이고 친구이기도 관계없는 타인이기도 하다. 「봄밤」의 영경은 제 남편이었던 이에 의해 제 아이를 빼앗겼고 수환은 아내에게 버림받고 신용불량자마저 되었다. 「이모」속 이모는 제 가족에게서 오랜 동안 피폐해질 정도로 착취당했다. 「카메라」의 관주는 연인의 말 한마디를 품고 그것을 지키려 하다 죽음을 맞이한다.

  생의 곳곳에서 마주하는 이토록 잔인한 운명들은 술을 불러오게 만든다. 그래서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술에 의지해 망각하려 하고 비애를 달래려 한다. 그러한들 쉬이 잊어질 리 없는 삶의 비애를 어떻게 떼어버릴 수 있을까. 견딘다는 말이 갖는 무게는, 비애를 꽉 끌어안고 놓아주지도 않으려 한다. 모든 불행을 부여잡고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하는「봄밤」의 영경처럼, 이 생애에서 행운의 몫은 아직 남아 있을까?


그게…… 내 탓은 아니잖아요? 그렇잖아요? p230


  치명적인 가스를 퍼붓는 누군가와의 만남이, 내게 닥친 불행이 「층」의 외침처럼 내 탓은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행은 받아들여야 하고 감당해야 하고 견디어야 할 뿐이다. 온 힘을 다해 불행 가운데 행운을 찾고 싶어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누구든 한발짝 물러나 이렇게 말하기 때문 아닐까?


내가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p242


  아니, 사실은 술보다도 바로 당신, 눈앞에 있는 당신의 도움이, 위로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도움되지 않으리라 뒷걸음치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한, 이 세상살이에 주정뱅이는 넘쳐날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