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하지 않을 테다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 Four Ways To Forgiveness
어슐러 K. 르 귄, 시공사, 2014.
지난달 지구와 닮은 7개 행성이 발견됐다는 소식을 들으며 이 책이 떠올랐다. 지구와 닮은 행성이란 의미는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라는 말이다.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행성을 발견했다는 발표는 자주 접한 듯한데 후속보도가 없다. 지구인처럼 살아가는 생명체는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러한 행성들을 찾는 지구인들의 목적은 무엇일까. 과학적 사실에 대한 발견, SF에서 보듯 지구인의 영토 확장? 지금의 심정이라면 지구가 아닌 새로운 행성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프다. 어쩌면 혼란일수도 어쩌면 더 확고한 질서가 잡힐 수도 있을 그곳. 엉망이 된 터전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조금은 진정이 될지 모를 3월 9일이다. 외국도 아닌 다른 행성을 찾아야 하는 일은 발생할까.
알 수 없는 일인데, 왜 미래 세계에 대해 희망보다 쓸쓸함을 느끼게 되는 걸까. SF 소설의 대가로 알려진 어슐러 르 권의 연작 단편집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은 우주 공간의 다른 행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곱 개 달을 가진 행성 웨렐과 웨렐의 식민지 행성 예이오웨이가 배경이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기대와 과학 발달을 충족시켜주지 못한 채 소설 속 행성은 고도로 발달된 과학기술이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 유배지의 인상을 준다. 황량하고 문명이 파괴되어 버린 터전으로 보인다. 1995년에 발표한 연작 단편집으로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용서와 사랑에 관한 것이고 각 이야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연결되어 있다. 결국 지구 밖 행성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배경이 그러할뿐 인간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식민지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이 권력과 투쟁이 있는, 그리하여 용서와 화해가 필요로 한.
작가는 SF와 추리소설에서 역량을 발휘하고 수상전력도 화려하다. 이 책 발표 당시 “그 의미와 아름다움과 중요성에서 영원히 남을 작품” “미국의 가장 영예롭고 존경받는 작가”라는 찬사를 안겨주었다고 한다. 그들이 매료된 이 책의 이야기는 무얼까.
두 행성은 식민 행성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듯 주인과 노예 계급이 존재하는 곳이다. 그것은 피부색으로 결정된다. 소유주라 불리는 이들은 피부색이 검고 인구의 10퍼센트 정도이나 피부색이 옅은 사람들을 정복하며 자산으로 취급한다. 자산들이 불리는 이름은 ‘먼지놈’ ‘분필’ ‘흰둥이’ 등이다. 당연, 여성은 구분조차 없는 남자의 자산으로 취급되었고 소유주의 부인이어도 그저 ‘열등한 특권 계급’이었다.
여기서, 이 세계에서 여자들이 어떤 존재인지 아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여자들은 정부의 일부가 아니에요. 여자들이 해방을 이뤄냈어요. 여자들은 남자들과 똑같이 해방을 위해 노력했고 죽었어요. 하지만 여자들은 장군이 아니었고, 대장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마을에서 여자들은 하찮은 존재 그 이하이고, 일하는 짐승이고, 새끼 낳는 가축이에요. 여기선 조금 나아요. 하지만 좋진 않아요. 전 베소의 의료 학교에서 훈련을 받았어요. 전 의사예요. 간호사가 아니라. 보스들의 지휘 아래, 전 이 병원을 운영했어요. 이젠 남자가 병원을 운영해요. 이젠 우리의 남자들이 소유주예요. 그리고 우린 언제나와 같은 처지고요. 자산이죠. 이러자고 우리가 그 기나긴 전쟁을 싸워온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당신 생각은 어떤가요. 특사님? 우리는 새로운 해방을 이뤄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우린 그 일을 끝내야 해요. - <사람들의 남자 中, p226~227>
이러한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가 만든 식민행성이라고 다를 리 없다. 그 관례를 그대로 적용하며 그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지배체제를 구축한다. 그 방식이란 집단 내 경쟁과 권력 다툼을 통해서다. 기시감이 느껴지듯 그 방법 속엔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동원되고 그 어떤 외부 정도도 차단된다. 식민행성의 여성의 지위는 주행성보다도 열악하다. 심지어 남자노예일지라도 여자노예를 성적으로 착취한다.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심지어 살인도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수용된다. 다른 점이라면 식민행성이므로 주행성에 대해 끊임없이 독립을 시도한다는 점이랄까. 식민행성의 여성들이 더욱 그 갈망이, 행동력이 강하다는 점이랄까.
예이오웨이에서 사람들은 그 자산들을 자유계약인(freedpeople)이라 불렀다. 자유민(free people)이 아니라, 자유계약인이었다. 그때, 내가 읽던 역사책이 말했다. ‘왜 우리가 자유민이 아니지?’라고 그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 <한 여자의 해방 中p. 310> -
이러한 지배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위한 갈망은 30여년의 해방전쟁 상태를 만든다. 당연 혁명군도 반혁명군도 존재한다. 배신도 음모도 빠질 수 없다. <배신>의 이야기는 전직 혁명대장 압버캄의 이야기다. 그는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의 혁명을 이끌었지만 권력 남용으로 쫓겨났다. 압버캄이 누명을 썼다거나 혁명의 새 시도를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불명예스러운 상태로 노숙인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는 전직 혁명대장의 끊임없는 회의를 그려내고 있다. 그런 그가 좌절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요소의 존재가 서로에게 필요로 되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한 여자의 해방>은 웨렐의 노예로 태어난 라캄이 여성 해방운동을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식민행성과 노예라는 구조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그들 모두는 주어진 체제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하기에 글을 읽는 것도 아는 것도 죄악시되는 사회에서 모순을, 불평등을 인식하는 계기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그것이 노예에게 ‘앎’을 ‘지식’을 배제시키는 이유일 것이고 종교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사람들의 인식을 강압하고 세뇌시키는 이유일 것이다.
나는 혁명이 뭔지 전혀 몰랐다. 에로드가 말해줬을 때는, 예이오웨이라 불리는 곳에서 플랜테이션들의 자산들이 자신들의 소유주들과 싸우고 있다는 의미였고, 나는 어떻게 자산들이 그럴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세상에는 높은 존재와 낮은 존재, 주님과 인간, 남자와 여자, 소유주와 피소유자가 있도록 정해져 있었다. 나의 세상은 쇼메케 영지가 전부였고, 쇼메케 영지는 그 하나의 토대 위에 서 있었다. 누가 그걸 뒤엎고 싶겠는가? 그러면 모든 사람이 그 아래에 깔려 짜부라질 텐데. - <한 여자의 해방 中 p283>-
한 인간의 변화는 ‘인지’를 통해서 또한 ‘인지한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많은 이들이 그저 그렇게 구축한 세상에 대해 변화에 대한 의미조차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더 나은 세계를 인식한 순간 그들은 변화에 대한 갈망을 느꼈고 그 주체가 자신이 될 수 있음을 안다. 이 소설 속에서 그 방법은 ‘책’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그리고 다른 이들을 통해서다. 타인과의 소통을 통해서 오해와 반목을 풀어가고 함께 혁명에 대한 의견을 나눈다. 해야 할 것,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은 혼자서 이루어가는 것이 아님을 알아가며 이해의 소길을 구가하려는 모습들은 ‘사랑’이라는 뻔한 결말로 나아가지만, 또한 그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란 이들이 서로 다른 의견을 주장하던 이들이 그 갈등을 해결하고 나아가는 모습은 인간사회의 모든 모순은, 갈등은 결국 인간들의 편협한 사고때문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마침내 그들은 새로운 행성을 만들어 가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한번에, 단번에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을지라도 점진적인 변화의 형태일지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변혁’을 원한다면 그것은 이루어야 할 일이다. 바뀌어야 할 일이다. 그리하여 식민행성 예이오웨이에도 헌법 수정안이 이루어졌다.
헌법 수정안은 예이오웨이 해방 18년에 투표에 부쳐졌고, 거의 비밀투표였다. 여기까지의 사건들, 그리고 그 뒤의 사건들은 대학 출판사에서 새로 나온 세권짜리 <예이오웨이의 역사>에서 읽을 수 있다. 지금까지 나는 말해달라고 부탁받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들처럼, 나 역시 두 사람의 결합으로 이야기를 맺었다. 두 세계의 역사, 우리 평생의 위대한 혁명들, 희망들, 우리 종족의 끝없는 잔학한 행위들 속에서, 한 남자의 그리고 한 여자의 사랑과 욕망은 과연 무엇인가? 아주 작은 것이다. 하지만 작은 열쇠가 문 옆에 있을 때는 그 문을 연다. 열쇠를 잃어버리면, 문은 절대 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로 우리의 몸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잃거나 자유롭기 시작하고, 바로 우리의 몸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노예생활을 받아들이거나 끝낸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썼다. 이제껏 나와 함께 자유롭게 살아왔고 자유롭게 죽을, 내 친구를 위해. - <한 여자의 해방 中 p372>-
용서로 가는 네 가지 길을 보았지만, 난 용서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용서와 사랑은 무조건 베풀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용서할 수 있을 때 용서하는 것이다, 용서할 위치인가를 생각해보기도 하지만 그런 용서가 필요치 않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책 속의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지금 이 시대에 과거회귀가 웬 말인가. 우리 사회가 한편으로는 심각한 무지와 문맹의 나라라는 것을 절감하는 때이다. 글자를 안다고 ‘문맹’이 아니랄 수 없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문장의 ‘의미’를 아는 일이다. 여전히 지식이란 것을 학력을 통해 갖추었으나 무지와 문맹이 가득한 사람들의 쇼를 보며 생각한다. 아, 정말 공부 열심히 해야겠다고. 책 열심히 읽어야겠다고. 무지와 문맹을 바탕으로 한 탐욕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고.
무지는 자신을 사납게 방어하고, 문맹은 나도 잘 알듯 날카로워질 수 있다. - <한 여자의 해방 中 p3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