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풍경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교양인, 2013-02-12.


더욱 중요한 시사점은 평화시 남성 중심적인 놀이 문화가 바로 전쟁시에 집단 강간이나 대략 학살과 같은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집단 강간, 고문 등 전시 폭력은 ‘광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상 문화의 연장선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남성들의 폭력적인 일상 문화를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납치살인사건 납치 목격자, 부부싸움하는 줄 알고 지나쳤다 

 ∙내연녀 말다툼 후 목졸라 살해, 시신 유기…지난 남자 만난 얘기에 홧김에

 ∙동거녀 목졸라 살해 교회 베란다 유기… “끝내겠다” 범행 암시

 ∙‘예전에’ 식당주인과 다퉜다고, 여친 창밖 던지려한 30대, 흉기도 휘둘렀으나…감형

 ∙하동 대안학교 40대男 교사 여중생 3명 강간·성추행, 현재 잠적. 교장, 교사 3명, 행정실장, 교직원 2명 같은 혐의로 입건


  지난 한주의 ‘흔한’ 기사다. 익숙한 사건에 놀람이 현저히 줄어든다. 다섯 개의 기사에서 세명의 여성이 ‘목졸라’ 살해됐고 버려졌다. 한명은 수없이 폭행당했고 죽을 뻔했다. 몇 명일지 모르는 중학생 아이들이 폭행당했고 어떤 아이들은 성폭행당했다. 한명이 아니라 몇 명일지 모르는 이들로부터 일 수 있다.

  내연녀가 “지난 남자를 만난 얘기를 해서” 홧김에 목을 졸랐다는 남편 있는 여자를 만나는 남자,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며 친구와 통화하고 실행한 남자, 관계를 끝내는 방법이 목졸라 화단에 버리는 것인가? 떡볶이를 먹는데 ‘전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격분해 여자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베란다로 끌고 가 창밖으로 던지려하고 흉기로 죽여버린다 위협하고 폭행했고, 이전에도 10여 차례 폭행하거나 상해를 가했으나 감형된 남자.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고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납치가 벌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직원….

  떡볶이를 먹다가 여자친구가 ‘옛날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고 “격분”하는 이도 있는데 이런 뉴스를 보면서 “격분”하지도 못하는 난 뭔가. 다음 주에도 이런 기사들은 또 나타날 거라는 걸 아는 이의 반응이다. 인터넷에 파주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인 ‘파주 내연녀’만 검색해도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듯 연도별로 파주에서 벌어진 내연녀 살인·폭행 사건 기사가 쏟아진다. 성폭행, 강간 사건 역시 넘쳐나는데 단순히 ‘폭력’만 행사한 사건은 수두룩하다.

  개인의 비윤리성이라 성토한다 하더라도 반복된 이 ‘구조’를 들여다보면 역시 지친다. 정말 이 모든 기사들 속 가해자들의 인성과 윤리의 부족이거나 정신병의 문제일까. 기사는 A, B, C, 혹은 김모씨, 이모씨로 나타나니 넘치는 기사들 속에서 어떤 사건이 ‘나’에 대한 기사인지 쉽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납치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이, 어쩌면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이다. 부부 싸움의 경우 큰 폭력으로 번지기도 하고 이때 대체로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생명이 오가는 상황일지라도 부부싸움을 말리기 위해 접근·관여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히 있다. 아무리 사회가 변했다 해도, 아니라고 해도 이런 기사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면 정말로 남성들에겐 폭력의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희진이 지적했듯이 말이다.


남성은 여성을 때릴 권리를 타고났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폭력 그 자체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당연하거나 폭력이 아니다. 따라서 쟁점은 폭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인가, 왜 언제인가 따위다. 그래서 여성들은 “당신 미쳤어? 너도 나한테 맞을래?”가 아니라 “왜 이러세요?(지금이 그 때인가요?)”라고 가해자에게 묻는 것이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간다. 세상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한 지난 겨울과 봄의 경험이 여전히 ‘대통령’만 바뀌고 다른 것은 바뀌지 않았다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남녀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 역시 바뀐 듯 보일 뿐, 바뀌지 않았다.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이야기 중에 몇 번이라도 ‘여성’이 들어가면 당장 페미니즘이니 메갈이니 하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격분’하는 목소리가 있는 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슬픔과 분노와 비통함 등등의 감정이 마구 휘몰아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 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최근 모임 뒤풀이에서 후배가 여자 선배에게 선배를 보는 순간 자신의 시누와 너무 닮아서 지금까지 아무 말을 건네지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여전히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걸 알았다며 오래도록 감정을 토로한 일이 없었는데, 시누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생애 ‘처음으로’ 털어 놓았다. 개인의 경험을 얘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들이 뒷담화로 시댁을 “까는” 그런 것과는 다른 형태의 진솔한 성찰이었다. 그런데…얘기를 듣던 남자 선배가 “공통의 주제로 얘기를 하자”했다. 다른 남자들이 불편해 하는 것이 보이지 않냐며.

  이 말에 격분까지 갈 뻔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공통의 주제라는 말도 그러했고 남자와 여자의 선을 긋는 태도에 불쾌함, 실망감, 섭섭함이 솟았다. 한 사람으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이입하여 이야기를 듣는구나 싶으면서도 개인의 무의식과 성찰을 주제로 한 이야기 끝의 그 말은, 배움이라는 것의 소용없음까지도 느껴졌다. 삐딱한 마음에 그 선배 앞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만 줄창 꺼내볼까 싶기도 했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이니 여성주의니 하는 용어에 많은 이들이, 특히 남성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여성의 경험과 인식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남성의 생각이 곧 인간의 생각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 가는 듯한데 여전히 하나의 목소리만이 힘을 뻗어가는 기분은 왜일까. 존중, 존중하면서도 뒤에서는 비난하며 ‘결정적인’ 상황에 수용되는 목소리가 따로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일상화된 폭력, 폭력을 견인하는 이 권력의 힘. 여전히 페미니즘은 도전받고 있고, 도전해야 하고 갈 길이 멀다. 그나마 정희진처럼 풍부하고 쉬운 언어로 페미니즘에 대해 일상의 성정치학에 대해 글을 쓰는 이가 있어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많이 배우게 되어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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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작은 친구들 세트 - 전2권
도나 타트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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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시시피의 아이들


작은 친구들, 도나 타트, 은행나무, 2017-02-28.


  사람들로 하여금 ‘천재’라는 평을 받는 작가의 기분은 어떨까. 왜인지 이 평의 당사자인 도나 타트는 전혀 괴이치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전진할 것 같다. 안타까운 것은 그 스타일이 소설을 ‘적게’ 쓴다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소설을 자주 발표하는 대신 한번에 ‘길게’ 쓰는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삼십년이 넘는 기간 동안 세 편의 장품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작은 친구들」이 「비밀의 계절」과 「황금방울새」에 이은 신간인줄 알았더니 그동안 국내 번역 출간이 되지 않은 2002년 출간작이다. 앞의 두 작품은 상당히 흥미있게 읽었다. 그렇기에 도다 타트의 작품을 기억하고 책을 선택함에 주저함이 없었는데 최근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조금 아쉬웠다. 10년에 한번 책을 내는 과작 작가라고 하는데 2013년도에 책을 출간했으니 그럼 2023년도에는 신간이 나오려나.

  세밀한 묘사와 서사가 작가의 특징이다. 이것이 작품의 양으로 연결되는 것도 같다. 세 작품 모두 국내 출간에 2권짜리였다. 그렇기에 어느 지점에 가면 약간의 지루함이 생길 때도 있다. 이전 출간된 두 작품에 비해선 조금 지루함이 있었다. 어쩌면 이것은 결말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가지는 느낌일지 모르겠다.

  결말이 해결되지 않았다는 말은 이상하다. 이 작품은 1960년대 미시시피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아홉 살 소년 로빈의 죽음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12년 후, 여전히 미제 사건으로 남아 있는 로빈의 죽음에 대해 로빈의 동생 해리엇이 그날의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렇기에 소설을 읽는 동안 누가, 로빈을 죽였는가에 대해 풀리기를 기대하고 있다. 그런데, 그런데…. 이 소설에서 이 궁금증을 풀어주던가? 추리와 미스터리 소설인가 생각하게끔 시작한 소설은 따지고 보면 로빈의 살인자를 찾는 방향으로 흐르긴 한다. 단지, 일반적으로 보아온 추리소설의 스타일을 뛰어넘어 조용히, 그리고 아이의 시선으로 사건의 실마리를 밟아가고 있다.

  그렇다. 이 소설은 그냥 일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느낌이다. 범인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해리엇의 노력과는 별개로. 어쩌면 이 소설에서 해리엇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장식같기도 하다. 해리엇만이 뚜렷하게 양각으로 부각되고 다른 이들은 정적이다. 이 정적인 흐름에 홀로이 급류를 타고 있는 해리엇이 안쓰러워 보이는 것은 어린아이다운 호기심으로 그 어린아이의 마음을 잃지 않으며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가족들은 침체되어 있다. 그들은 로빈이 자신의 집 마당에서 사망한 이후로 마치 생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정적으로 변해 버렸다. 그들은 과거에 더 머물러 있었다.


가족 중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앨리슨이 설명하려 했어도 가족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 항상 추억에 포위되어 현재와 미래가 오로지 과거의 반복이라는 도식으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앨리슨처럼 세상을 보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기억―연약하고 흐릿하지만 찬란하고 기적 같은 기억―이란 삶의 불꽃 그 자체였고, 그들은 모든 말을 과거로 시작했다.


  해리엇의 엄마는 그날 이후 약에 취해 늘 잠들어 있었다. 해리엇의 언니 앨리슨도 잠들어 있는 시간이 많고 항상 약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수다스러운 클리브가의 자매들, 그러니까 해리엇의 할머니와 이모할머니들도 슬픔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다. 그 사건 이후로 해리엇의 아빠는 다른 지역에서 가족은 방관한 채 생을 즐기고 있다. 해리엇의 가족은 12년 전 그날 이후로 항상 음지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똑똑하고 오만해 보이기까지 하는 해리엇은 이런 음지같은 분위기를 형성하는 그날의 해결되지 않은 사건을 파헤치려는 결심을 한다. 이른바 탐문과 수사를 시작하며 첫 번째 용의자를 알아냈다. 이제 사건은 어린 날 로빈과 같은 나이였던,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문젯거리’인 래틀리프가의 형제들을 쫓는 것으로 나아간다.

  어린 아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호기심과 열정으로 해리엇은 자신을 추종하는 친구 할리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지만, 그것은 당연 험난하고 위험을 동반한다. 톰 소여, 허클베리 핀의 모험처럼 위험한 모험을 즐기는 개구쟁이들의 여정이 아니라 가족에게 드리운 그늘을 걷어내고픈 어린 아이의 조용하고 담백한 전진이 이 소설 전체에 흐르는 핵심으로 보인다. 긴, 호흡에서 1960~1970년대의 미국 미시시피의 분위기를 볼 수 있는데 흑인에 대한 차별과 빈부 격차의 상황을 주된 이야기의 흐름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또한 당시의 시대적 배경이 해리엇 가족들의 상황에 무관했다고도 말할 수 없기도 하다. 시간의 변화만큼 해리엇을 둘러싼 가족들과 일상의 변화도 일어난다. 이모 할머니 리비의 죽음이나, 해리엇이 엄마의 애정을 갈구하며 애착을 가졌던 가정부 흑인 아이다와의 헤어짐, 자신이 뒤쫓던 범인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 이 여정에서 해리엇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변해가는가는 주요한 부분이다.

  

해리엇은 <보물섬>에서 히스파니올라호 옆 피로 따뜻해진 바다에서 떠다니던 해적 이스라엘 핸스를 생각했다. 그 대단한 여울은 악몽 같으면서도 아주 멋졌다. 공포, 가짜 하늘, 엄청난 환각 배를 잃었다. 해리엇은 그 모든 것을 혼자서 되찾으려 노력했다. 해리엇은 거의 영웅이 될 뻔했다. 하지만 이제 해리엇은 자신이 영웅이 아닐까 봐, 전혀 다른 것일까 봐 두려웠다. 


해리엇이 원하는 게 처음부터 불가능했다고 해도, 해리엇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래도 나서서 노력했다는 사실에 쓸쓸한 위안이 있었다.


 역시 미국이란 나라의 분위기인가 싶게 12살 해리엇이 총기를 다루는 장면은 놀랍게 다가왔다. 범인을 찾기 위한 그 여정들을 가족들 아무도 알지 못한다는 것이 마치 한여름 꿈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당사자인 해리엇에게도 마치 환각의 일처럼 여겨지는 이 여정은 해리엇 스스로에게 영웅의 길이었느냐 아니었느냐는 물음을 갖게 한다. 그것은 해리엇이 한가지 목표에만 취중하며 쉽게 생각하고 간과한 문제들을 다시 생각하게끔 하게 한다.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을, 이 여정 속의 모든 것들을 해리엇은 차곡차곡 되새겨 볼 것이다. 똑똑한 아이니까. 슬픔을 알고 그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한 아이니까. 아무리 조숙하다 한들 열두 살의 가족의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의 참 아픈 성장통. 아이를 둘러싼 환경, 관계들의 소중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물론 할머니는 나쁜 의도가 전혀 없었다. 검은 평생 죽어라 일만 하다가 망가진 불쌍한 노인일 뿐이었다. 평생 아무것도 갖지 못했고, 어떤 기회도 없었으며, 기회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게 왜 손자들에게도 기회가 없다는 뜻이 되는지 유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설 속에서 대립적으로 등장한 클리브가와 래틀리프가를 보다 눈에 띄는 점이 클리브가는 모두 여성들, 래틀리프가는 남자들의 세계였다. 물론 래틀리프가에는 할머니, 검의 존재가 있긴 하지만. 클리브가는 부유층의 특성과 시끌벅적함이 사그라진 상태로 래틀리프가는 가난한 백인층으로 약물에 빠져 시종일관 환각 상태인 형제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 가정의 로빈과 대니는 어린 시절 우정을 나누며 잘 지낸 친구인데, 세월은 ‘가정’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은연중에 보여준다. 음울의 분위기 속에서 해리엇은 스스로 영웅이 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고…. 변해갈 수밖에 없는 대니의 모습이나 래틀리프가 유진의 저 말이 참 안타깝게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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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이펙트
페터 회 지음, 김진아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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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그 불안정한 혼합물


수잔 이펙트, 페터 회, 현대문학, 2017-04-20.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긴 하지만 본질적인 것 아닌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사용하며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 재능없음에 좌절하기 바쁜데 능력을 갖추고 있음에도 그것을 누르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어쩐지 재앙같기도 하다. 어떤 재능인가가 더 중요한 것인가.

  수잔은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대가 진실을 말하게 하는 것, 자신도 모르게 솔직한 말을 거침없이 하게 만드는 이 능력. 그리하여 그것은 ‘수잔 이펙트’라 명명된다. 이 능력의 필요성이 인정되다가도 수잔 이펙트가 내게 적용되면 그땐 또 그렇게 좋은 기분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긴 한다. 이런 능력을 가진 수잔이 심리학자라거나 상담사였다면 혹은 범죄 조사자였다면 재능에 맞는 직업을 선택했구나 하겠지만, 수잔은 물리학자다. 하긴 원하지 않은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이 수잔을 붙들고 자기 속내를 마구 드러내고 있다면, 그 입장도 곤란하기는 할 것이다. 그러니 평범하지 않은 삶을 꿈꾸는 이에겐 이 수잔의 평범한 삶에 대한 욕구가 과연 진심의 욕구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너희가 이건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내가 인생을 살면서 꼭 이루고 싶은 게 뭐였는지 아니? 평범한 삶을 사는 거야. 내겐 그게 물리학의 세계에 입문하는 것보다, 이 효과를 이해하는 것보다 더 중요했어. 아니, 뭘 알고 싶다는 것 자체보다 훨씬 중요했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언제나 평범한 삶을 갈구했어. 가정과 직장, 남편, 아이들, 월급 통장,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삼시 세끼, 그리고 카오스와 엔트로피가 내 삶에서가 아니라 닫힌 시스템 안에서 유효하다는 확신. 그리고 난 그걸 얻었어.


  심리 추리 스릴러 소설의 특징이기도 하겠지만 상황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세밀하다. 그럼에도 속도감이 있어 책장이 술술 넘어간다. 무엇보다 독특하고 독보적인 수잔 캐릭터의 힘, 수잔만큼이나 개성있는 수잔의 가족들의 활약상, 끝날 줄 모르고 무한히 확장되는 이야기의 끝이 궁금하여, 수잔 이펙트의 실패 사례는 혹여 나오나 싶은 궁금증이 책장을 넘기는 힘이기도 하다. 물리학자인 수잔의 시선으로 사건이 전개되기에 여러 요소에 과학적인 해석이 등장한다. 그 또한 독특하고 재밌다. 안 그래도 수잔 이펙트가 인간의 솔직한 심정을 마구 노출하는 것인데 그렇게 마구 분출되는 인간의 감정을 과학적인 이야기로 살짝 정리시켜 주는 느낌도 든다.

  이야기는 수잔의 네 가족이 인도에서부터 사고 친 데서 시작한다. 인도에서 범죄자가 될 뻔한 네 명 모두가 덴마크 국가 기관의 도움으로 풀려나는 것이 아니라, 풀려나기 위해 국가 기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딱히 제안이 어려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1970년대 젊은 인재들의 ‘미래위원회’의 마지막 보고서를 찾는 일이다. 이것이 자신을 강간하려 한 배우를 때려눕혀 받은 25년형보다 인도 부족장의 딸과 도망쳐 마피아에게 쫓기는 남편보다, 골동품 밀수혐의로 고소당한 아들보다, 백만 명의 신도를 거느린 승려와 도주 중인 딸의 안전보다 결코 중요한 일은 아니라는 점에서, 간단히 끝이 날 거란 생각에서, 덴마크로 돌아가고 싶기에 수락한다. 그러나 예상 가능하듯 이 일은 보다 복잡하고 거대한 음모가 가득했다. 당연, 끝없는 목숨의 위협이 있고 연이어 관련된 자들의 죽음이 발생한다.

  국가 기관이 개입한 비밀스런 일은 너무 당연하겠지만 좋은 쪽과 나쁜 쪽이다. 국가라는 권력을 이용한 온갖 악행의 비리를 숨기려고 하거나 국가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으려는 형태가 대부분이라 미래위원회 보고서를 찾는 것은 핵심적인 사항으로 여겨지진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거들 뿐, 이 이야기가 이끌어가는 방향은 처음부터 짠하고 자신들만의 독특성을 알린 이 네 가족의 여정과 관계였다. 이제 헤어질 가족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으면서도, '태생부터 독불장군에 극도의 개인주의자‘인 네 명은 이 일을 해결하는데 함께 한다. 각자의 의견과 의지를 결코 굽히지 않은 채로 이들이 문제를 풀어가는 방식은 각자의 길로 나뉘는 결말로 향해 갈지, 그렇지 않은 길을 택할 지 그 역동성과 내밀한 관계의 변화가 미래위원회를 둘러싼 거대한 음모의 이야기보다 작가가 전하고 싶었던 바가 아닐까 생각한다.

  아이들에겐 엄마라고 불리기보다 ‘수잔’이라 불리기 원하고 엄마들이 누구의 엄마로 명명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수잔이다. 하지만 수잔 역시 아이를 구하기 위해 눈, 머리카락, 연금, 모든 걸 내놓는 안데르센의 어머니 이야기의 어머니와 같이 행동한다. 어쨌든 자신이 ‘아이의 엄마’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을 반쪽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수잔은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면서도 방황하는데 이것은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기억에서 연유한다. 또한 춤추는 것을 더 중요시하며 자신을 제대로 돌보아주지 않은 어머니와의 관계가 수잔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수잔 이펙트를 떠나서도 매력과 능력을 가졌음에도 오랜 시간 스스로를 옭아매는 이 기억이 수잔과 수잔의 남편과의 관계도 소원하게 만들었다. 또한, 수잔의 남편 역시도 수잔과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또한 어린 시절 가족에게서 부모에게서 받은 외로움이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고난을 함께 하고 문제를 함께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이 독불장군의 이기적인 네 명은 서로의 깊은 곳을 들여다보고 서로를 이해해 간다.


“그 이야기를 해줄 때 엄마는 우리에게 방을 만들어주려고 한 것 같았어요. 전 그걸 느낌으로 알았어요. 아주 환한 방을, 완벽한 방을 만들어주려고 하는구나. 엄마가 말했잖아요, 물리학은 항상 완벽한 공간을 만들어내려 한다고. 빛이 완전히 차단된 공간, 완벽한 진공상태의 공간, 무중력의 공간, 무균상태의 공간. 엄마 아빠는 우리에게 그런 공간을 만들어주려고 했어요. 엄마가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전 그걸 가장 분명하게 느꼈어요. 그리고 엄마는 그렇게 해줬고요. 거의 그렇게 했다고 해야겠죠. 그런데 전 그 방에 들어가기가 싫었어요. 만약 그 방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 문제는 바로 그거예요. 정말 아픔이 없는 그런 공간을 만들 수 있다면 그건…… 위험하잖아요. 왜냐면 그냥 거기 있고 싶어질 테니까.”

“엄마, 내 생각에 엄마는 물리 숙제를 고치듯 세상을 수정하려고 했어요.”


  수잔의 딸 티트의 말은 미래위원회가 벌인 일과도 연관되어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준다. 어쩌면 미래위원회가 한 일들도 넓게 보면, 게다가 긍정을 끌어들여와 좋게 표현하면, 수잔과 라반이 하랄과 티트 쌍둥이에게 공간을 만들어주려는 것과 같을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목적과 실행에서의 결정적인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미래위원회가 세기말의 상황에서 추진하려 했던 그들만의 공간이, 위험하다는, 권력자들 역시도 그들만의 권력과 욕망과 권위로 세상을 수정하기 위해 열심히라는, 그 방향이 어떤가를 좀더 생각지 않고 마구 달려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만을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수잔이 찾아낸 ‘수잔 이펙트’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더욱 또렷하게 느껴진다.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그리고 이 효과의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게 뭔지 아세요?

타인이에요. 사람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사는 건 바로 타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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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추리


분실물이 도착했습니다 - 다섯 개의 미스테리, 오오사키 코즈에, 생각의집, 2017-02-10.



  분실물이 도착했다.

  찾으려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이 아니라 우연처럼 제 스스로 도착했다. 전체 다섯의 단편이 있는데 부제가 다섯 개의 미스터리이다. 추리 소설인가 했는데, 다 읽고 나서야 왜 제목이 전혀 잃어버리지 않은 분실물일까에 대한 의문이 풀린다. 여기, 다섯 개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잃어버린, 제쳐두었던 기억들. 그 기억들이 결국 분실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어느 날, 우연히 알게 된 지난날의 기억은 그때 해결치 못한 이야기에 대한 이해를 가늠케 한다. 오래 전 잃어버린 물건들이 나도 모르는 새 집으로 도착해 내 손에 쥐어진 것처럼 여기 이야기들은 모두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러니까 미스테리하다. 분실물은 어떻게, 왜 지금 도착한 것일까.

  미스터리니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날의 일의 파장이 무엇인지, 또 범인은 무엇인지 등등에 대한 궁금증도 생기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이 소설들에 관통하는 느낌은 그러한 범인 추적이나 사건의 전말을 알아내는 것보다 분위기이 듯하다.


저는 ‘살아온 일대기’를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단 하루의, 아니 한 순간일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 「들장미 정원으로


  기존 미스터리물에서 볼 수 있는 팽팽한 긴장감이나 서늘한 느낌보다는 정제되고 깔끔한, 담백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공포와 잔인함이 가미된 미스터리가 아니라 아련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단편 속 대사처럼 오랜 시간 마음에 담아두었던 어떤 일들이 다른 계기로 인해 이야기되면서 그때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알 수 없었던 이야기의 전말을 가늠하게 되는 이야기들이다. 해결되지 못한 기억들은 그렇게 잔상으로 남아 있었던 것이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그 기억에 대한 마무리를 완결을 하고픈게 사람들 마음인 듯하다. 우연찮게 책을  들었는데 첫 번째 단편 「사라의 열매」의 인상이 괜찮아서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사라의 열매」는 부동산 중개업자 코히나타 히로시가 업무일로 방문한 집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만나 20년 전의 사건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시작된다. 결국 자신이 관계된 그날의 이야기, 그러니까 소풍날 히로시는 납치됐고 그 시간 사망한 남자가 있었던 사건. 자연적으로 가정폭력에 대해 나아가는 이 이야기에서, 상처와 죄책감의 흔적이 짙게 묻어난다. 그리고 친구….


원치 않게 사람을 상처 입히고 죄의식에 사로잡힌 주인공이 방황을 하던 중 들어가 산소에서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하얀 꽃을 보게 되었어. 그는 그 꽃에 완전히 매료되어 몇 번이나 산에 왕래했고, 그러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고 꽃은 열매를 맺게 되었다네. 그 열매를 가지고 돌아와 하얀 꽃의 모습에서 자비를 빌며 표식을 새기였지. 자기가 타인에게 입힌 상처. 자기가 자신에게 입힌 상처. 이렇게 가로로 두 줄의 상처를 내고, 그것을 봉인하기 위해 세로로 상처를 내었어. 그리고 일생 동안 그 누구에게도 밝히지 않고, 숨기겠다고 맹세하지. 그런 이야기였어. -「사라의 열매」


  히로시가 들고 다니는 두 줄의 흠집이 새겨진 노각나무 휴대폰 고리. 사건을 이리저리 들여다보며 꿰맞춰보던 선생님의 숙제처럼 남은 죄책감. 힘들 때 의지할 어른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이 오래도록 남아 아동학대에 관심을 기울였던 선생님은 히로시에게도 그 죄책감을 덜어버리라고 말한다. 과거의 열매를 버림으로써. 그것은 히로시가 범인임을 단정하고 하는 말인가.


사라쌍수의 꽃이라고 알아? 헤이케모노가타리의 앞부분에 ‘기원정사의 종의 소리, 제행무상의 울림이 있고, 사라쌍수 꽃의 색, 성자필쇠의 이치를 나타낸다’라는 문장이 있잖아. 그 사라쌍수의 꽃 색깔이 하얀 색인데, 이게 그 열매야. 정말이래. 특별한 열매야. 상처가 없으면 꽃이 피지만 말이야. 심지 말고 가지고 있었으면 좋겠어. 너에게 맡길게. 그냥 부적 같은 거야.  - 「사라의 열매」

      

  히로시는 더 이상 무겁고 괴로운 짐이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노각나무 열매를 건네지도 않았다. 그 자신도 맡아 놓고 있는 것이었으니. 차 속에서 오래도록 흐느껴 우는 성인의 모습이 참으로 애잔하게 기억되는 사라의 열매다. 사라의 나무는 석가모니가 세상을 떠날 때 근처에 있었다는 나무고 노각나무는 사라의 나무라 불린다고 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각나무 단편의 이야기가 맞물려 이야기의 풍성함을 더한다. 


벚꽃 이야기를 했어. 전화를 든 채로 커다란 벚꽃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하얀 것이 떨어지길래, 꽃잎 인가 하고 봤더니 눈이었다. 정말 예뻐서,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거미줄」


  유달리 다섯 이야기에는 꽃이 많이 등장한다. 그것이 아련한 느낌을 더욱 배가시켜 주고 있는 듯하다. 「거미줄」속의 벚꽃도 이야기의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헤어지는 연인들의 대화 속에 지나간 어느 날의 사소한 일 하나가 어떤 이에겐 중요한 기점이 되는 일로 작용하는 이야기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어떤 이의 생에 대한, 나의 생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인생에 대한 비애를 공감하면서 그러나 헤어짐은 변함없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의 날.


그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이 마음 깊이 남았어. 뭐라고 할까? 땀 투성이가 되도록 동네를 뛰다가 숨이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릴 때에 문득 하늘을 바라본 느낌? ‘이제 됐어’ 그렇게 중얼거리면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지고, 숨쉬기도 편해지지. 아슬아슬하게 지탱하고 있던 버팀목이 뚝하고 부러진 걸지도 몰라‘.’이제 됐다‘는 그 말이 나에게 들려주는 말처럼 느껴졌어. 분명 지쳐있던 걸 거야. 나도, 선배도 너무 많은 일을 무리하게 했어. -「거미줄」


  이제 됐다. 왜 이 느낌을 알 것 같은가 모르겠다. 내 기억 속에도 어깨를 짓누르던 무언가가, 숨쉬기 힘들었던 기억들이, 아슬아슬하게 삶을 지탱하던 버팀목을 붙들고 있던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이 대화가 나오기까지의 두 연인들의 희극적인 상황도 블랙코미디같이 여겨졌다. 삶은 참 여러모로, 아니러니다. 참 서정적으로 다가온 미스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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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거리를 뒀다


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책읽는고양이, 2016-10-20.


  기차를 타며 읽으려고 선택한 몇 권의 얇은 책이 모조리 일본 작가들의 책이었다. 「약간의 거리를 두다」의 제목이 좋아 책을 꺼내드니 표지가 익숙했다. 제목과 표지의 연관성이 뭔가 생각할 겨를 없이, 많은 이들이 공감했기에 표지가 익숙할 만큼 알라딘에서 많이 본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이 책과 역시 제목만 들은 ‘뭐라고’ 시리즈의 작가 사노 요코 작가의 에세이를 들고 기차를 탔는데….

  너무 거리를 뒀나. 몇 문장의 짧은 단락으로 이루어진 「약간의 거리를 두다」는 제목이 주는 느낌만큼 다가오지 못했다. 덜컹이는 기차때문이라고 생각해보려 해도 오히려 덜컹이는 기차였기에 그 감상이 배가되는 경우도 있다는 다른 기억을 끄집어냈다. 결과적으로 「약간의 거리를 두다」와 사노 요코의 책을 기차여행에 선택한 나의 선택에 “문제가 있습니다.”

  에세이에 대해 생각했다. 일본 에세이가 번역되어 우리나라 출판시장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라면 이것은 일본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것이거나 작가의 유명에 달린 것이라고. 물론, 우리나라 출판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두 작가 모두 소설가라 하는데 작품이며 작가며 전혀 알지 못했고 에세이의 문장에 감흥하지 못하는 것을 여전한 ‘일본풍’이라는 취향으로 돌리기에도 함께 선택한 일본 소설은 그 일본풍에도 기억에 남는다는 점에서 탁월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이 책들의 무엇이 여행길의 내게 ‘감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이성’만을 작동하게 했을까.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거리를 두었어도 점점 가까이, 그리고 계속 머물게 만드는 책이 있다. 그러니, ‘약간의’ 거리를 둔 것이 ‘문제가 있을’ 리는 없다.

  산문집은 타인의 경험과 생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에서 이끌어내는 작가의 통찰을 접하며 나는 왜 내 삶에서 이러한 것을 간과했나 생각하게 되고 그 시선을 돌아보기도 한다. 때론 너무나 공감하는 문장들을 만나 하염없이 빠지고 때론 전혀 생각지 못한 문장들을 만나 또 풍덩인다. 그런 면에서 두 책은 익숙한 경험의 나열이었다. 하긴, 어떤 에세이들은 너무나 익숙한 감정을, 타당한 논리를 얘기하기에 신선하지 않을 때도 있다. 신선하지, 않다가 이 책들에게서 얻은 느낌이다. 소노 아야코는 차분한 가운데 어두운 느낌으로 사노 요코는 수다스럽고 경쾌한 느낌이긴 했지만.

  소노 아야코는 나답게를 위해 타인과의 거리두기를 제시한다. 타인과의 거리두기에 관한한 일본인들이 월등히 잘하고 있는 점이라 생각했는데, 그래서 일본인들에게 호응을 얻었나 했지만 일본의 원제는 「인간의 분수」. 원제였다면 이 책을 손가락으로 짚어보는 일이라도 있었을까 싶다. 나답게 사는법에 관한 한 어느 나라에서도 다르지 않은 것 같긴 하다. 타인의 기준에 매달리지 말고 나만의 법을 찾으라는 이 조언은 굳이 일본 번역 에세이가 아니더라도 수없이 반복적으로 말해오고 들어온 이야기다. 알지만 늘, 실천에 능력발휘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이런 에세이를 통해서 또다시 마음의 여유를 가지려 하다 또 실패하고, 또 노력하다 실패하는 일들이 반복되는 것 아닐까 싶다.

  소노 아야코의 「인간의 분수」 우리나라 번역본 「약간의 거리두기」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이 방법에서 자주 눈에 띄는 건 익숙하게 들어온 방법이나 감정적 서가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 역시도 반복적으로 들어온 수사이긴 하다. 그래서 번역본의 제목보다 오히려 원제가 가지는 「인간의 분수」가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걸맞은 제목이란 생각이 들었다. 끊임없이 운명과 종교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는 저자의 메시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작가가 제시하는 이 나답게 살기 위해 타인과의 거리를 두는 법에서 전하고자 하는 방법은 내게는 절대로 해당사항이 되지 않겠구나, 생각했다.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일방적인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 신도 좋고, 세상도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반면에 세상은 좋아도 신은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낫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사회가 옳지 못하기에 신을 찾는 사람도 있다. 세상의 이런 모습은 악이라고 규탄했지만 의외로 신은 ‘상관없다’라고 응답해주는 경우도 있다. 세상과 신은 언뜻 봐서는 공존이 불가능한 적대관계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오해받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통해 인간은 사물을 좀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비종교인이 아니라 ‘특정’종교가 없기에 이 반복된 메시지에 감흥이 적었음은 분명하다. 힘겨운 삶의 고민들을 종교를 통해 좀더 가볍게 바라볼 수 있다면 그것이 잘못된 일이거나 나쁜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삶의 무게를 덜어내는 방법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찾아가고, 또 제 경험을 타인에게 제시한다. 그 지점에서 소노 아야코의 방법이 내게 와닿지 않았을 뿐.

  “신앙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가치판단을 억제시키는 역할을 한다“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신앙이 인간을 더욱 이기적이게 한다“라고도 주장한다. 전쟁과 테러의 공포를 이어가는 종교와 어제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가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도 이 생각에 한몫 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이기적이다라고 할 때 불행히도 ‘종교인’은 그래서는 안된다라고 하면 너무 억울할 것도 같지만, 종교를 갖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서 ‘종교’가 제 힘들을 제대로 못써먹고 있는가, 잘 써먹고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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