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풍경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교양인, 2013-02-12.


더욱 중요한 시사점은 평화시 남성 중심적인 놀이 문화가 바로 전쟁시에 집단 강간이나 대략 학살과 같은 폭력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집단 강간, 고문 등 전시 폭력은 ‘광기’ 때문에 급작스럽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일상 문화의 연장선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남성들의 폭력적인 일상 문화를 성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납치살인사건 납치 목격자, 부부싸움하는 줄 알고 지나쳤다 

 ∙내연녀 말다툼 후 목졸라 살해, 시신 유기…지난 남자 만난 얘기에 홧김에

 ∙동거녀 목졸라 살해 교회 베란다 유기… “끝내겠다” 범행 암시

 ∙‘예전에’ 식당주인과 다퉜다고, 여친 창밖 던지려한 30대, 흉기도 휘둘렀으나…감형

 ∙하동 대안학교 40대男 교사 여중생 3명 강간·성추행, 현재 잠적. 교장, 교사 3명, 행정실장, 교직원 2명 같은 혐의로 입건


  지난 한주의 ‘흔한’ 기사다. 익숙한 사건에 놀람이 현저히 줄어든다. 다섯 개의 기사에서 세명의 여성이 ‘목졸라’ 살해됐고 버려졌다. 한명은 수없이 폭행당했고 죽을 뻔했다. 몇 명일지 모르는 중학생 아이들이 폭행당했고 어떤 아이들은 성폭행당했다. 한명이 아니라 몇 명일지 모르는 이들로부터 일 수 있다.

  내연녀가 “지난 남자를 만난 얘기를 해서” 홧김에 목을 졸랐다는 남편 있는 여자를 만나는 남자, “여자친구와의 관계를 끝내겠다”며 친구와 통화하고 실행한 남자, 관계를 끝내는 방법이 목졸라 화단에 버리는 것인가? 떡볶이를 먹는데 ‘전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로 격분해 여자친구의 머리채를 잡고 베란다로 끌고 가 창밖으로 던지려하고 흉기로 죽여버린다 위협하고 폭행했고, 이전에도 10여 차례 폭행하거나 상해를 가했으나 감형된 남자. 부부싸움을 하는 줄 알고 관여를 하지 않았다는 납치가 벌어진 장소에서 일하는 직원….

  떡볶이를 먹다가 여자친구가 ‘옛날에’ 식당 주인과 말다툼을 했다고 “격분”하는 이도 있는데 이런 뉴스를 보면서 “격분”하지도 못하는 난 뭔가. 다음 주에도 이런 기사들은 또 나타날 거라는 걸 아는 이의 반응이다. 인터넷에 파주에서 벌어진 최근 사건인 ‘파주 내연녀’만 검색해도 이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던 듯 연도별로 파주에서 벌어진 내연녀 살인·폭행 사건 기사가 쏟아진다. 성폭행, 강간 사건 역시 넘쳐나는데 단순히 ‘폭력’만 행사한 사건은 수두룩하다.

  개인의 비윤리성이라 성토한다 하더라도 반복된 이 ‘구조’를 들여다보면 역시 지친다. 정말 이 모든 기사들 속 가해자들의 인성과 윤리의 부족이거나 정신병의 문제일까. 기사는 A, B, C, 혹은 김모씨, 이모씨로 나타나니 넘치는 기사들 속에서 어떤 사건이 ‘나’에 대한 기사인지 쉽게 파악하기 힘들 정도다. 납치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아는 이, 어쩌면 가까운 사람이 가해자이다. 부부 싸움의 경우 큰 폭력으로 번지기도 하고 이때 대체로 남성이 가해자인 경우가 더 많다. 그럼에도 생명이 오가는 상황일지라도 부부싸움을 말리기 위해 접근·관여하지 못하는 사회분위기가 여전히 있다. 아무리 사회가 변했다 해도, 아니라고 해도 이런 기사들을 반복적으로 접하다보면 정말로 남성들에겐 폭력의 ‘권리’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정희진이 지적했듯이 말이다.


남성은 여성을 때릴 권리를 타고났다고 간주되기 때문에, 폭력 그 자체는 논쟁거리가 되지 않는다. 폭력은 당연하거나 폭력이 아니다. 따라서 쟁점은 폭력이 아니라, 어느 정도인가, 왜 언제인가 따위다. 그래서 여성들은 “당신 미쳤어? 너도 나한테 맞을래?”가 아니라 “왜 이러세요?(지금이 그 때인가요?)”라고 가해자에게 묻는 것이다.


  벌써 한 해의 절반이 지나간다. 세상이 보다 민주적으로 변화되기를 갈망한 지난 겨울과 봄의 경험이 여전히 ‘대통령’만 바뀌고 다른 것은 바뀌지 않았다라는 현실에 직면해 있는 것처럼 남녀를 둘러싼 환경과 구조 역시 바뀐 듯 보일 뿐, 바뀌지 않았다. 인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이야기 중에 몇 번이라도 ‘여성’이 들어가면 당장 페미니즘이니 메갈이니 하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격분’하는 목소리가 있는 게 여러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게 한다. 슬픔과 분노와 비통함 등등의 감정이 마구 휘몰아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 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최근 모임 뒤풀이에서 후배가 여자 선배에게 선배를 보는 순간 자신의 시누와 너무 닮아서 지금까지 아무 말을 건네지 못했다라고 고백했다. 여전히 자신에게 트라우마로 남아있다는 걸 알았다며 오래도록 감정을 토로한 일이 없었는데, 시누와의 관계가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생애 ‘처음으로’ 털어 놓았다. 개인의 경험을 얘기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성들이 뒷담화로 시댁을 “까는” 그런 것과는 다른 형태의 진솔한 성찰이었다. 그런데…얘기를 듣던 남자 선배가 “공통의 주제로 얘기를 하자”했다. 다른 남자들이 불편해 하는 것이 보이지 않냐며.

  이 말에 격분까지 갈 뻔한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 공통의 주제라는 말도 그러했고 남자와 여자의 선을 긋는 태도에 불쾌함, 실망감, 섭섭함이 솟았다. 한 사람으로서, 선배로서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남편’에 이입하여 이야기를 듣는구나 싶으면서도 개인의 무의식과 성찰을 주제로 한 이야기 끝의 그 말은, 배움이라는 것의 소용없음까지도 느껴졌다. 삐딱한 마음에 그 선배 앞에서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만 줄창 꺼내볼까 싶기도 했다.

  정희진은 페미니즘이니 여성주의니 하는 용어에 많은 이들이, 특히 남성들이 거부감을 느끼고 있고 “여성의 경험과 인식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고, 남성의 생각이 곧 인간의 생각으로 간주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기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많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여성의 목소리도 높아 가는 듯한데 여전히 하나의 목소리만이 힘을 뻗어가는 기분은 왜일까. 존중, 존중하면서도 뒤에서는 비난하며 ‘결정적인’ 상황에 수용되는 목소리가 따로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한국 사회의 일상화된 폭력, 폭력을 견인하는 이 권력의 힘. 여전히 페미니즘은 도전받고 있고, 도전해야 하고 갈 길이 멀다. 그나마 정희진처럼 풍부하고 쉬운 언어로 페미니즘에 대해 일상의 성정치학에 대해 글을 쓰는 이가 있어 감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많이 배우게 되어 힘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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